소설 & 지도
앤드루 더그라프.대니얼 하먼 지음, 한유주 옮김 / 비채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다음 장의 지도는 베넷 부인의 세상을 보여준다. 물론 엘리자베스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지도를 그릴 수도 있겠지만, 관계와 결렬, 깊게 벌어진 틈과 균열은 변하지 않고 남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위치를 (그리고 상황을) 안다.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p.43

소설이란 작가가 만들어낸 특정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니 가상의 공간과 인물들이 움직이는 동선을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그려 보게 된다. 때로는 그걸로도 부족해 직접 인물 관계도를 그린다거나 이야기 속 배경이 되는 장소의 지도를 그리게 될 때도 있다. 이는 책이 두툼하고, 등장 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 수록 더욱 효과적인 읽기의 방법 중 하나이다. 사실 전체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이것 큼 빠르고 기억하고 쉬운 방법도 없다. 게다가 이렇게 한 눈에 이야기의 흐름을 그림을 보게 되면 작품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더 흥미진진해지게 마련이다.

 

이번에 만난 <소설 & 지도>라는 독특한 책은 바로 그러한 독자들의 바램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구현해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앤드루 더그라프와 편집자이자 에세인 작가인 대니얼 하먼이 함께한 이 책은 소설과 희곡, 19편의 무대를 지도로 그려낸 작품이다. 셰익스피어부터 마크 트웨인, 제인 오스틴, 프란츠 카프카, 어슐러 K. 르 귄까지. 19명의 작가, 19편의 이야기들이 정교하고도 환상적인 지도로 재탄생했다. 그래서 이 책은 이야기 속 허구의 장소를 마치 현실 속 그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놀라운 마법을 보여 준다.

이 마을에는 이름이 없다. 위치는 지도 위에 표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한 인물의 궤적은 최후의 비극과 연관 지어야만 이해할 수 잇다. 궤적은 모두 하나의 검은 점으로 모여든다. 마을에는 규칙이 있고, 규칙을 따르는 것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며 늘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본질이 그런 까닭에 검은 점을 축출한다면 공동체는 결합력을 잃고 사라지고 말리라.    - 셜리 잭슨 <제비뽑기> p.93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그린 지도는 정말로 존재해온 곳이기에 지리적 풍경은 거의 동일하지만, 현실적 요소와 상상이 뒤섞여 있어 더욱 흥미롭다. 올림포스 산과 트로이의 목마가 있는 장소와 더불어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와 마녀 세이런이 사는 섬 같은 가상의 공간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은 주인공들이 사는 엘시노어 성을 전체 5막인 이야기에 맞게 다섯 가지 지도로 표현하고 있다. 각각의 인물들의 행동에 따른 동선을 다른 색깔로 표현한 이 지도는 놀랍게도 햄릿의 광기가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성의 다른 인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로빈슨 크루소>의 섬, <모비딕>의 포경선과 고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쿠르지와 유령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는 여정이 보여지는 마을의 전경 등 색다르고, 아름다운 지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 의 육각형 전시실이 무한히 이어져 있는 엄청난 도서관 지도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도서관 형태의 우주를 꿈꾸었던 보르헤스의 상상력을 공간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이 책은 하나의 작품을 한 장의 그림으로 압축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작품 속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 파노라마 그림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픽션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환상으로.. 소설 속 세계를 지도로 재창조한 이 책은 '공감각적 소설 읽기'를 경험하게 만들어 준다.

이 책에 실린 지도에는 플롯의 구심점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언어가 이미지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의도대로 이 지도가 작품 속으로 안내하는 초대장의 역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소설을 만나는 조금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는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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