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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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더스틴 밀러가 정말로 성폭행을 했다고 해도, 매슈가 그를 죽이고 트로피를 기념품으로 가져왔다는 뜻은 아니잖아.”
“그냥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굉장한 우연의 일치로군.”
“뭐가 굉장한 우연의 일치야? 더스틴 밀러는 정말로 살해됐어.”
“그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는 피해자와 같은 길에 살다가 이번에는 범인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는 거 말이야.”    p.81

 

헨과 로이드는 동네 주민들을 위한 파티에서 옆집의 매슈와 미라 돌라모어 부부를 만난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이가 없는 부부라는 공통점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그들 부부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게 된다. 매슈는 사립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었고, 미라는 교육용 소프트웨어 영업 사원이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을 구경하게 되는데, 전체적인 인테리어와는 동떨어진 매슈의 서재에서 헨은 기절할 듯한 충격을 받는다. 서재 벽난로 위에 놓인 펜싱 트로피가 오래 전 더스틴 밀러 살인 사건을 생각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다시 한번 제대로 트로피를 보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고 옆집에 간 헨은 매슈가 트로피를 치워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의심이 커져간다. 매슈는 서식스 홀의 교사였고, 더스틴 밀러 역시 그 학교를 다녔기에 터무니없는 망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헨의 과거에 있었다. 그녀는 대학생때 조증으로 과도한 자신감과 심각한 불안감 사이를 미친 듯이 오갔던 적이 있었고, 당시에 한 여학생에게 집착해 경찰이 출동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이후에 로이드와 결혼 후 조금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다가 3년 전, 새로운 정신 약리학자의 추천으로 다른 약을 먹었다 조울증이 왔고, 당시에 같은 동네 주민이었던 더스틴 밀러 살인 사건에 집착했던 이력이 있다. 그래서 매슈가 더스틴 밀러 살인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의심을 남편도, 경찰들도 믿지 못한다. 하지만 헨은 남몰래 매슈의 뒤를 밟으며 그를 지켜보았고, 의심음 점점 확인이 되어 간다. 그러다 그의 주변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날 매슈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증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이 이상한 여자. 그런데, 과연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헨은 계속 매슈를 생각했다. 이제 그녀를 믿어주는 사람은 매슈뿐이었다. 기괴하면서도 웃기는 일이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녀와 매슈뿐이라니. 매슈는 다른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테니까. 헨 역시 다른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믿지 않고, 다들 그녀의 정신병이 도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p.247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소설로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었던 피터 스완슨의 신작이다. 벌써 국내에 소개되는 그의 작품이 네 번째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 매혹적인 작품 <죽여 마땅한 사람들>, 사랑의 다른 면을 통해 인간 내면의 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아낌없이 뺏는 사랑>, 낯선 공간이 주는 무서움과 불편함을 극대화시켜 색다른 공포를 자아냈던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까지 모두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 신작 역시 궁금했었다. 'Her Every Fear'라는 제목을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라고 원제와 전혀 상관없는 제목을 붙였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Before She Knew Him'이라는 원제를 완전히 의역해서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고 번역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왜 번역본 제목을 이렇게 했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문장 그 자체로도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 읽고 나면 이해가 되는 타이틀이라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굉장히 센스 있는 의역이 아닐까 싶다.

 

동네에 살인자임이 분명한 남자가 있고, 그의 바로 옆집에 살게 된다면 어떨까. 의심스러운 정황이 계속 쌓이고, 몇 번이나 경찰에 그가 범인이라고 증언하지만 자신의 과거 이력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 말이다. 거기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안다는 것을 살인자인 그 남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괴물 같은 아버지와 그 괴물의 희생양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난 그 남자는 그녀에게서 아버지의 괴물 같은 면과 어머니의 나약함과 우아함,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동생의 모습도 본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특별한 관계'를 제시한다. 자신은 오직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들만 죽이기 때문에 당신은 절대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그저 당신과 애기를 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 작품은 살인마의 마음속 깊은 곳을 옆집에 사는 여성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다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과연 헨은 ‘죽어 마땅한 남자들’만 죽이는 이 살인자로부터 무사할 수 있을까? 과연 살인자와 증인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피터 스완슨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페이지 터너 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 때까지 결코 책을 놓을 수 없도록 만든다. 예상을 벗어나는 뜻밖의 전개가 만들어내는 서스펜스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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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아파트 고스트볼 더블X 6개의 예언 찾아라! 알파벳! 영어 사전 신비 호기심 쑥쑥 7
정주연 그림, 주선이 감수 / 서울문화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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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애니메이션인 <신비아파트> 친구들과 함께 영어 단어를 공부할 수 있는 영어 사전이다. 올해 7살이 된 아들도 한동안 신비아파트에 푹 빠져서 매주 목요일마다 방송 시간에 맞춰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파일럿과 극장판을 제외하고 세 번째 시즌인 '고스트볼 더블X 6개의 예언' 편이 최근까지 방송이 되었다. 지난 주 목요일에 해당 시리즈가 끝이 나서 당분간은 좀 조용할 것 같다.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관련 캐릭터 상품부터 시작해서 피규어와 각종 장난감을 비롯해서 관련 책들까지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사랑 받는 애니메이션이라 장점도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책처럼 해당 캐릭터들을 활용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리즈가 아닌가 싶다.

 

 

'신비 호기심 쑥쑥 그림 사전 시리즈'는 한자, 국기, 수수께끼, 속담, 틀린그림찾기, 미로찾기에 이어 일곱 번째로 영어 사전이 출간되었다. 신비아파트의 주인공들을 비롯해서 함께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총 출동해서 재미와 함께 친근함까지 주니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게다가 판형도 작고, 너무 두껍지도 않으며, 쫙쫙 펼쳐서 공부할 수 있는 가벼운 양장인데다 각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해서 아이들이 보기에 안전하고 튼튼한 점도 매우 마음에 든다.

 

이 책은 알파벳부터 동물, 과일, 채소, 음식, 가족, 계절, 사물 등 다양한 영어 단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페이지마다 깨알같이 신비아파트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시각적으로도 한 눈에 영어 단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귀여운 그림들로 각 단어들을 보여준다. 단어 아래에는 그 단어를 활용한 문장도 수록되어 있고, 각각의 챕터 앞에 있는 QR 코드를 통해 원어민의 발음으로 단어와 문장을 들을 수 있다. 귀여운 그림에 숨어 있는 알파벳 찾기와 알파벳을 응용한 다양한 놀이들이 페이지 곳곳에 숨겨져 있으니 놓치지 말고 확인해 보자.

 

 

아이가 이제 막 한글을 단계적으로 배워나가고 있는 단계라 영어까지 부담 주면서 공부를 시키고 싶진 않아서 가볍게 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할 수는 없어서 알파벳으로 시작해, 그림과 스토리가 재미있는 픽쳐북을 함께 읽으면서 들려주고 있는데, 아이가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해 고민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좋아하는 신비아파트 캐릭터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이 책을 선택했는데, 결과는 대만족이다. 우선 아이가 재미있어 하고, 아는 캐릭터들이 나오니 집중도 잘하고, 지루해하지 않아서 책을 보며 원어민 발음을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다.

 

아이의 영어 공부를 시작하긴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 책을 통해서 쉽고, 재미있게 해보면 어떨까. 알파벳부터 영어 단어, 그리고 문장까지 듣고, 쓰고, 찾으면서 따라 해 보자.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호기심을 자극해서 집중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그러니 지루하거나, 재미가 없다면 아이들은 절대 집중하지 못한다. 신비아파트 친구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장점도 있고, 귀여운 그림들로 시선을 사로잡고,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곳곳에 숨겨진 캐릭터들을 찾으면서 놀이처럼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아이들이 영어 공부를 친근하게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자, 신비아파트 친구들과 함께 공부도 놀이처럼 쉽고 부담 없이 영어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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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
짐 오타비아니 지음, 릴랜드 마이릭 그림, 최지원 옮김, 오정근 감수 / 더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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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그것의 탄생에 관해 논의를 거듭할수록, 나는 시간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됐다. 특히 시간의 모순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들은 시간 대칭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간을 앞당기거나 되돌려도 똑같이 작용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우주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엔트로피는 반드시 증가한다. 그 반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절대 없다. 그게 바로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이다.    p.173~174

 

스티븐 호킹은 마치 운명처럼, 1942년 1월, 갈릴레오 사후 300년이 되던 날 태어났다. 물론 태어난 날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중요하진 않겠지만, 이후 호킹이 일생 동안 이루어낸 업적을 떠올려 보자면, 이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물리학자가 바로 스티븐 호킹일 것이다. 호킹이 병마에 시달리며 몸이 비틀어진 상태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기도 했거니와,  그런 상태로도 우주론과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근위축성측색경화증, 즉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지만 앞으로 몇 년밖에 못 산다는 말을 듣고도, 50여 년을 병고에 시달리며 그 모든 일을 이루어냈으니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이 책은 스티븐 호킹의 삶을 연대순으로 그리고 있는 전기 형식의 그래픽 노블이다. 사실 과학자의 전기라고 해서 그의 일생을 다루는 내용이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삶보다는 그의 연구와 과학적 업적에 대한 부분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호킹이 태어났을 때부터 학창 시절, 대학 생활 그리고 학문적 연구의 과정과 아내를 만나 결혼하는 과정까지 그의 생을 따라가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매번 치열하게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고, 그의 일상 생활 보다는 물리학적 지식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어렵고 딱딱한 이론들이 난무하는 책은 아니다. 그래픽 노블의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물리학이 생소한 독자라도 쉽고, 재미있게 호킹의 대표적인 업적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의 장애가 일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됐나요?"
"글쎄요. 나는 다른 교수들처럼 일어서서 강의하지 않아도 되죠. 내가 유명해진 데는 장애인이라는 사실도 한몫한 게 사실이에요. 불구가 된 천재 이미지에 딱 들어맞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언론의 과대포장이에요. 난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가 아니에요."    p.236~237

 

이 책은 그래픽 노블이라는 형식 때문인지, 기존의 과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전기들과 다르게 쉽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어서 더 인상적이었다. 상대성이론의 간략한 역사, 빅뱅 이론의 역사, 호일, 나릴카의 중력 이론, 중력붕괴의 특이점과 우주론 등등 풍부한 과학적 지식들이 가득 채워져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 호킹의 일상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매우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특히나 그가 1988년에 대중을 위한 우주 이야기를 친근하게 풀어낸 <시간의 역사>를 저술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편집자로부터 너무 전문적이다, 어렵다는 식의 피드백을 받고 원고를 전면 수정하는 과정도 있었고, 책의 서문을 써주기로 한 칼 세이건이 이런 저런 내용들에 대한 지적을 메모로 전달해 그에 대한 토론을 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공항에서 마구 팔려나가는 책들처럼 대중적이고, 잘 팔리는 책이 되기를 바랐던 호킹의 바람대로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1천만 부 이상이 팔렸고, 그로 인해 그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다.

 

호킹은 그렇게 우주의 기원과 블랙홀을 탐구하며 현대 우주론의 기반을 다졌고,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물리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 책은 그가 불굴의 의지로 이뤄낸 과학적 성과 외에도 병세가 악화되어 목소리를 잃고 음성 합성기에 의존해야 했음에도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인간적인 모습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혼과 재혼 이야기까지 모두 담고 있어 천재 과학자이자 보통의 인간으로서의 모습까지 만날 수 있도록 한다. 2018년 3월 14일, 스티븐 호킹은 하늘의 별로 돌아갔다. 그날은 아인슈타인의 생일이기도 하다. 호킹이 우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난 지 2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존경 받고 있다. 우주의 탄생에 대한 물리학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배우고 싶다면, 한계를 넘어선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삶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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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 7년간 100여 명의 치매 환자를 떠나보내며 생의 끝에서 배운 것들
고재욱 지음, 박정은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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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까짓것 죽기밖에 더하겠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 말대로 라면 죽는 일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삶을 원하는 만큼 즐겁게 살다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며칠 앓다가 죽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사람들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런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아픈 노인들은 삶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죽음의 몇몇 징후가 보인 후에도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죽어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는 환자 자신은 물론이고 그 곁을 지키는 이에게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시간이 된다.    p.17

 

우리나라에는 70만 명의 치매 환자가 살고 있다고 한다. 65세 이상 노인 열 명 중 한 명이 치매를 앓고 있는 셈이니, 생각보다 꽤 많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국내 치매 환자 수의 절반가량 되는 34만 명의 요양보호사들이 있다. 이들은 치매 환자가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먹는 일, 자는 일, 씻는 일, 입는 일, 배설하는 일 등을 비롯해서 노인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정서적 지지자이자 친구가 되어 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때로 치매 노인들에게 이유도 없이 얻어맞기도 하고, 때로는 보호자들에게 자기 부모를 학대하는 사람으로 의심받기도 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요양보호사들에 대해 어느 정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요양원에서의 노인 학대에 대한 숱한 보도와 기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어서, 그들 중에 진심으로 노인들을 상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이 책은 강원도 원주의 한 요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저자가 지난 7년간 노인들의 일상을 돌보며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들을 글로 담았다.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을 돌봐야 하므로 극심한 육체노동인 동시에 극심한 감정노동을 하며, 업무 중 재해를 입는 경우도 다반사에 최저임금으로 일을 하고 있는 요양보호사들, 그들은 대체 이런 일을 왜 선택한 걸까. 치매 노인들의 암울해 보이는 현실에서 그가 찾아낸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할머니 앞에 슬그머니 새 앞치마를 둔다. 할 수 있는 한 소고기를 듬뿍 담고 텔레비전 채널을 7번으로 돌린다. 죽고 싶은 마음을 위로하는 일에는 대단한 행동이 필요하지 않다. 노인들은 오늘 아침에는 죽고 싶었지만, 앞치마에, 소고기에, 막장 드라마에 웃으며 또 하루를 보낸다. 내일 아침이 되면 그들은 또 죽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하지만 너무 염려 마시라. 나에게는 아직도 열두 개가 넘는 앞치마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끝장 드라마가 있으니까. 나는 과거에 죽고 싶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데, 현재는 살아 있으면서 죽고 싶은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다.    p.248

 

늦은 밤에 누군가 요양원 문을 두드려서 보니, 짙은 술 냄새가 풍기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요양원에서 가장 오래 지내고 있는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늙은 아들은 말없이 할머니 앞에 서 있다가 흐느낀다. "엄마.... 왜.... 안 죽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을까. 병든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서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누가 이 아들을 탓할 수 있을까. 매달 백여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8년 동안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직접 당사자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를 직접 돌보지 않고 요양원에 입소시킨다고 해서 그들이 책임감이 없다거나 불효자인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아픈 사람도, 아픈 사람의 보호자도, 그들을 지켜보는 이도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겪어야만 하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 몸도, 마음도 늙고 병들게 마련이고 죽음이란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니 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은 잔잔하고, 담백하게 뭉클한 감동을 전해준다. 가족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아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며 온종일 문 앞을 서성이고, 자식에게 부담주기 싫어 일부러 요양원에 들어오고, 돌아가신 엄마를 찾아 복도를 헤매는 노인들의 사연은 과장되지도, 신파적이지도 않게 그저 소소한 일상처럼 펼쳐진다. 그렇게 마냥 어둡고, 무겁기만 하지 않아서 더 따뜻하고, 더 와 닿는 이야기들이었다.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후회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맛있는 것 먹고, 멋진 구경도 다녀보고, 하고 싶은 것 죄다 하면서, 그렇게 한번 살아볼걸 그랬어."라는 한 할머니의 말이 심장에 콕 박히는 순간이 오면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른다. 앞만 보지 말고, 옆에도 보고 뒤에도 보고, 그렇게 살걸 그랬다고 후회하지 말고, 오늘을 충분히 즐기고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이 세상의 첫날인 것처럼,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아낌없이 말이다. 그러면 언젠가 삶의 마지막이 찾아왔을 때 조금은 기쁘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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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 특별 합본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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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참모습을 두고 그것을 '삶의 진실'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 '내가 그리는 삶의 참모습'은 바로 '내 삶의 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아름답다는데, 삶의 진실은 어떤가? 아름다운가? 그것은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진실은 우리 손가락을 씀벅 베어버리는 칼날 같다. 진실이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육안으로는 진실을 보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고대 신화는 꾸준하게 우리를 가르친다.    p.349

 

2000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첫 권이 출간되고 나서 그야말로 그리스 로마 신화 열풍이 불었다. 먼 나라의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던 그리스 로마 신화가 국민 필수 교양으로 자리잡고, 만화와 공연, 전시로 확장되기까지 신화 열풍의 중심에 이 책이 있었으니, '국민 신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 첫 출간 20주년을 기념하고 이윤기 선생의 타계 10주기를 기리기 위해, 다섯 권 시리즈를 한 권으로 묶은 특별 합본판이 출간되었다. 이번 특별판은 시리즈 다섯 권의 텍스트를 가감 없이 담고, 기존 책에서 선별하고 새롭게 추가한 도판 자료 220여 점을 수록한, 1200쪽의 두툼한 양장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생해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신화인 그리스 로마 신화는 고대인의 상상 세계가 만들어 낸 이야기지만 수천 년이 지난 현대에도 ‘살아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철학자와 역사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미술과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과학기술 분야의 용어가 될 정도로 서양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문학, 역사학, 인류학, 심리학 등 인문학 전반을 포괄하는 인류 문화의 원형이라는 점 때문에 이를 다루고 있는 책들도 정말 너무 많다. 신화의 세계를 처음 만나게 되는 경우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로 말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가장 우리의 정서와 잘 맞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 쓴 버전이라 누구나 친근하게, 쉽고, 재미있게 신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가 직접 신화의 무대였던 그리스를 비롯해 유럽 곳곳의 유적지와 박물관을 누비며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찍어온 사진이 거의 2만 장에 달했을 정도이니,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신화를 믿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믿는다고 대답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고는 한다. 나는 신화를 믿는다. 신화를 믿는다고 해서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여자를 갂아놓고 내 색시가 되게 해달라고 아프로디테에게 비는 식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신화의 진실이다. 퓌그말리온의 진실과 그가 기울이는 정성이다. '퓌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은, 스스로를 돌아보되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을 경우에 나타나는 효과를 뜻하는 말로 지금도 줄기차게 쓰이고 있다.   p.514

 

특별 합본판은 그 압도적인 분량에서 읽기도 전부터 기가 죽게 마련인데, 사실 다섯 권의 분량을 하나씩 읽기 시작하면 그리 어려운 일만도 아니다. 게다가 탁월한 이야기꾼의 입담에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어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하면 멈출 새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1권은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라는 타이틀로 신화 이해와 해석에 필요한 열두 개의 키워드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저자는 신화 이야기들을 현대적인 맥락에서 해석, 국내 정서에 맞춰 서술해 가장 이해하기 쉽고도, 흥미진진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2권은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로 잔혹하고 무자비한 신화 시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풀어낸다. 신화에 등장하는 성과 사랑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파렴치하고, 비열하고, 금기를 훌쩍 뛰어 넘고, 엽기적이라고 할 만큼 놀랍다. 근친상간, 트랜스젠더, 자기애, 매춘 등 어떠한 도덕적 관념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 꼬장꼬장한 도덕군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바로 그 '조금도 윤리적이지 않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음란한' 신화 속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3권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에서는  '신의 마음을 여는 방법'을 주제로 '신들이 좋아한 인간'과 '신들이 싫어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호모 테오필로스(신들이 좋아하는 인간)’과 ‘호모 테오미세토스(신들이 싫어하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화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인간이 없으면 신화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3권이 흥미로운 것은 '신화가 가지는 서사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서인데, 정말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어지는 느낌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4권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영웅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영웅이다. 헤라클레스 이야기에는 그리스 신화와 서구 문화의 수수께끼를 여는 황금 열쇠가 숨어 있는데, 그만큼 헤라클레스 신화는 방대한 그리스 신화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5권은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으로 이올코스의 왕좌를 되찾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 이아손과 아르고 원정대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인터넷 서점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검색하면, 무려 구백 권이 넘는 책들이 나온다. 그 중에서 판매량이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이윤기의 책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명백하다. 압도적으로 매혹적이고, 무엇보다 소설처럼 재미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 이해의 열쇠가 신화라면 신화 이해의 열쇠는 바로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영웅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로 미궁 진입과 미궁 탈출에 성공했듯이, 우리는 신화라는 미궁 속에서 그 상징적인 의미들을 알아내기 위해 나만의 아리아드네를 만나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상상력의 빗장을 풀고, 그 문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가이드이기도 하다. 이번 기회에 너무도 아름다운 양장본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시작해보자. 신화 이야기들을 현대적인 맥락에서 해석, 국내 정서에 맞춰 서술해 가장 이해하기 쉽고도, 흥미진진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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