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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 7년간 100여 명의 치매 환자를 떠나보내며 생의 끝에서 배운 것들
고재욱 지음, 박정은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6월
평점 :
사람들이 "까짓것 죽기밖에 더하겠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 말대로 라면 죽는 일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삶을 원하는 만큼 즐겁게 살다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며칠 앓다가 죽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사람들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런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아픈 노인들은 삶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죽음의 몇몇 징후가 보인 후에도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죽어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는 환자 자신은 물론이고 그 곁을 지키는 이에게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시간이 된다. p.17
우리나라에는 70만 명의 치매 환자가 살고 있다고 한다. 65세 이상 노인 열 명 중 한 명이 치매를 앓고 있는 셈이니, 생각보다 꽤 많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국내 치매 환자 수의 절반가량 되는 34만 명의 요양보호사들이 있다. 이들은 치매 환자가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먹는 일, 자는 일, 씻는 일, 입는 일, 배설하는 일 등을 비롯해서 노인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정서적 지지자이자 친구가 되어 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때로 치매 노인들에게 이유도 없이 얻어맞기도 하고, 때로는 보호자들에게 자기 부모를 학대하는 사람으로 의심받기도 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요양보호사들에 대해 어느 정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요양원에서의 노인 학대에 대한 숱한 보도와 기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어서, 그들 중에 진심으로 노인들을 상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이 책은 강원도 원주의 한 요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저자가 지난 7년간 노인들의 일상을 돌보며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들을 글로 담았다.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을 돌봐야 하므로 극심한 육체노동인 동시에 극심한 감정노동을 하며, 업무 중 재해를 입는 경우도 다반사에 최저임금으로 일을 하고 있는 요양보호사들, 그들은 대체 이런 일을 왜 선택한 걸까. 치매 노인들의 암울해 보이는 현실에서 그가 찾아낸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할머니 앞에 슬그머니 새 앞치마를 둔다. 할 수 있는 한 소고기를 듬뿍 담고 텔레비전 채널을 7번으로 돌린다. 죽고 싶은 마음을 위로하는 일에는 대단한 행동이 필요하지 않다. 노인들은 오늘 아침에는 죽고 싶었지만, 앞치마에, 소고기에, 막장 드라마에 웃으며 또 하루를 보낸다. 내일 아침이 되면 그들은 또 죽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하지만 너무 염려 마시라. 나에게는 아직도 열두 개가 넘는 앞치마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끝장 드라마가 있으니까. 나는 과거에 죽고 싶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데, 현재는 살아 있으면서 죽고 싶은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다. p.248
늦은 밤에 누군가 요양원 문을 두드려서 보니, 짙은 술 냄새가 풍기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요양원에서 가장 오래 지내고 있는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늙은 아들은 말없이 할머니 앞에 서 있다가 흐느낀다. "엄마.... 왜.... 안 죽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을까. 병든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서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누가 이 아들을 탓할 수 있을까. 매달 백여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8년 동안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직접 당사자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를 직접 돌보지 않고 요양원에 입소시킨다고 해서 그들이 책임감이 없다거나 불효자인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아픈 사람도, 아픈 사람의 보호자도, 그들을 지켜보는 이도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겪어야만 하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 몸도, 마음도 늙고 병들게 마련이고 죽음이란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니 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은 잔잔하고, 담백하게 뭉클한 감동을 전해준다. 가족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아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며 온종일 문 앞을 서성이고, 자식에게 부담주기 싫어 일부러 요양원에 들어오고, 돌아가신 엄마를 찾아 복도를 헤매는 노인들의 사연은 과장되지도, 신파적이지도 않게 그저 소소한 일상처럼 펼쳐진다. 그렇게 마냥 어둡고, 무겁기만 하지 않아서 더 따뜻하고, 더 와 닿는 이야기들이었다.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후회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맛있는 것 먹고, 멋진 구경도 다녀보고, 하고 싶은 것 죄다 하면서, 그렇게 한번 살아볼걸 그랬어."라는 한 할머니의 말이 심장에 콕 박히는 순간이 오면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른다. 앞만 보지 말고, 옆에도 보고 뒤에도 보고, 그렇게 살걸 그랬다고 후회하지 말고, 오늘을 충분히 즐기고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이 세상의 첫날인 것처럼,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아낌없이 말이다. 그러면 언젠가 삶의 마지막이 찾아왔을 때 조금은 기쁘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