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임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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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단언한건대, 엘리네에게 내 마음을 고백한 적이 없었으니까, 결코, 절대로, 나는 지금껏 어떤 여자에게도 감히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엘리네가 거기 서 있었다, 이 아름다운 한여름 밤 내게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이건 현실이라 할 수 없었다, 이건 꿈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환영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유령일지도 몰랐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둣가에 서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엘리네일 리는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p.49~50


크리스마스 직전의 오후, 누군가 쓰러져가는 낡은 집의 문을 두드린다.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책들은 사방에 널려 있으며, 온통 어질러져 있는 지저분한 집에 살고 있는 엘리아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그의 집을 찾아오던 친구 야트게이르는 여자가 생기고 나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그것이 벌써 수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유령일까, 혹은 자신의 착각일까 생각하며 점차 겁이 나기 시작한 그에게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에는 진짜 야트게이르가 나타난다. 하지만 오랜 친구인 그는 그냥 잠깐 인사만 하려고 들렀다며, 금방 돌아간다. 그리고 엘리아스는 상점가에 나갔다가 야트게이르가 바다 위에 떠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과 얘기를 나눈 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몇 시간 전에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총 3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야트게이르의 시점으로 짝사랑하던 엘리네와 재회하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1장, 그의 친구인 엘리아스의 독백으로 채워진 2장, 그리고 엘리네의 남편 프랑크의 관점으로 서술되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부인 야트게이트는 자신의 배에 '엘리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그 배를 타고 바임에서 대도시인 비에르그빈으로 간다. 헐거워진 단추를 다시 달기 위한 바늘 한 개와 검은 실 한 타래를 사기 위해서였는데, 힘들게 구했지만 가격이 무려 250크로네라는 걸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두 번이나 상인들에게 그렇게 사기를 당해 지긋지긋해진 마음으로 돌아가려는데, 우연찮게 오래 전부터 짝사랑했던 엘리네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하다고,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다시 고향인 바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야트게이르는 그녀와 함께 바임으로 향한다. 




지금 나는 사트로트의 순에 있는 내 거실, 내 고향집 거실에 앉아, 부두에 정박해 있는 나의 너무나 아름다운 배 엘리네를 내다보면서 생각한다, 내 나이 일흔다섯이 될 동안, 나는 엘리네와 나에 대해 그토록 자주 곱씹어보았지만 결국 다다른 생각은 모든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내 묘비에는 이렇게 적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모든 것이 이상했다─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니 그저 단순한 십자가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다 내 묘비에는 십자가 하나만 있으면 된다,                 p.192


1장에서 벌어진 야트게이르의 이야기는 2장에서 그의 친구인 엘리아스의 독백으로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야트게이르가 멀리 다른 곳에서 결혼한 여자를 데려왔다고 '유부녀 납치 사건'이라고 그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 여자의 남편이 언제든 바임으로 와서 아내를 데려갈 거고, 야트게이르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들 했다. 하지만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고, 유일한 친구였던 야트게이르와 엘리아스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진다. 3장에서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또다시 갑작스럽게 떠나간 엘리네에 대해 추억하는 그녀의 남편 프랑크의 이야기가 보여진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운명처럼 이끌려 살았던 그의 수수께끼 같았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중심 서사이다.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들어왔다가 역시나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서 떠나버린 엘리너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지만, 작품은 그렇게 세 남자의 시점으로 한 여성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욘 포세는 <아침 그리고 저녁>, <멜랑콜리아> 등에서 보여줬던 것과 같이 이 작품에서도 마침표 없이 쉼표로만 이루어진 텍스트로 압축과 반복으로 특유의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등장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며, 커다란 사건이나 갈등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는 흡입력을 발휘하고 있다. 욘 포세는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 이미 희곡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입센 다음으로 가장 많은 작품이 상연된 노르웨이 극작가’로서 현대 연극의 최전선을 이끌고 있으며, 언어가 아닌 언어 사이, 그 침묵과 공백의 공간을 파고드는 실험적 형식으로 ‘21세기 베케트’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마치 연극의 독백처럼 천천히 읽히며, 누군가의 생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과장되지 않게 담백하게 쓰여 있어 쉼표와 쉼표 사이 여백이 깊이있게 느껴지곤 했다. 특유의 리듬이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어 어느 순간 그 나직하고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면 물 흘러가듯 페이지가 넘어가곤 한다. 이 작품은 <바임 호텔>, <바임 위클리>로 이어질 '바임 3부작'의 첫 권이다. 2025년부터 2027년까지 3년간 매년 한 권씩 이어질 작품이라 다음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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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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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정의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세요?"

"미안합니다. 뭐가 존재한다고요?" 그 멍청한 질문, 혹은 사람을 멍청이로 여기는 질문은 제대로 들렸다.

"정의요."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되풀이했다.

멍청한 질문이라는 의견은 철회한다. 나는 여자의 속셈을 모를 뿐이었다.

"존재하지 않겠죠."

"어머, 거짓말을 하는군요."                  p.146


신주쿠에 위치한 허름한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운영 중인 탐정 사와자키. 그가 사백여일 동안 도쿄를 떠나 있다 오랜만에 돌아오면서 맡게 되는 사건은 십 일년 전 승부 조작 사건에 얽혔던 전직 고교 야구 선수가 의뢰한 누나의 자살문제이다. 당시에 의뢰인인 우오즈미 선수의 가방에서 다섯 개의 돈뭉치가 나와 승부조작 혐의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일주일 뒤 그의 혐의는 무죄로 풀려난다. 하지만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지도, 동생과 통화를 하지도 못한 그의 누나가, 풀려나기 전날 아파트 6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려 십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나는 그런 일로 자살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며, 누나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명백한 자살이고, 사고나 타협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대체 왜 그는 '누나가 그런 문제로 자살할 리가 없다'는 말을 십일 년 동안 계속하고 있는 걸까. 


사와자키는 증거도 없고, 물증도 없는 십일 년 전의 사고를 향해 차근차근 다가선다. 비정한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 각자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고독한 중년 탐정 사와자키는 자신의 원칙대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빠른 전개와 깜짝 쇼처럼 놀라게 하는 반전에 익숙해왔다면, 하라 료의 하드보일드 미스터리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작품에서 사와자키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기까지 할애되는 페이지가 무려 100페이지이다. 이러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의뢰인이 안 나오는 거 아니야? 하는 조바심이 들 정도가 되어야, 사와자키는 의뢰인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야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니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늘어지거나, 지루한 부분이 없다는 것도 하라 료의 작품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이번에 아주 오랜 만에 다시 읽었음에도, 여전히 이 두툼한 분량의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처음 이 작품을 만났던 것이 십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미있게, 푹 빠져서 다시 읽을 수 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었다. 



"...... 사실이 밝혀졌을 때 저는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게 새로운 수수께끼를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요?"

우오즈미 아키라는 가까운 곳에 있는 절실한 하나의 '왜'에 얽매어 십일 년을 살아왔고, 결국은 더 많은 '왜'를 떠맡아버린 모양이다. 젊은이들이 걷는 길은 늘 그렇다. 살아 숨쉬는 인간에게 생기는 수수께끼는 답이 하나뿐인 책상 위의 수수께끼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스물아홉 살 청년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내 기분은 바로 상대에게 전해졌다.                p.515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내가 죽인 소녀>를 잇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세번째 작품이다. 국내에는 2013년에 나왔었고, 이번에 전면 개정판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신주쿠 뒷골목의 중년탐정 사와자키의 활약상을 담고 있는 '탐정 사와자키'시리즈는 <안녕 긴 잠이여> 이후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지금부터의 내일>로 이어졌고 총 다섯 편의 작품과 <천사들의 탐정>이라는 단편집까지 모두 출간되어 있다. 하라 료의 새로운 작품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어 아쉽지만, 이렇게 시리즈와 결을 맞춘 새로운 재킷 디자인으로 번역을 다듬어 나와 컬렉션으로 모아 둘 수 있어 좋다. 하라 료는 자타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과작(寡作) 작가이다. 데뷔 이래 19년 동안 단 여섯 권만을 썼을 뿐이다. 사와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는 전작 이후 6년이 걸렸고, 네 번째 작품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는 9년이 걸렸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러한 집필 태도부터 하드보일드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하라 료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하드보일드’이다. 흔히들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이라 칭해지는 부류는 범죄나 폭력, 섹스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 없이 무미건조한 묘사를 하고, 비정하며, 냉혹한 사회의 모습을 불필요한 수식 없이 날 것 그대로 묘사하는 수법으로 지칭된다. 추리소설에서 ‘추리’와 ‘사건해결’ 그 자체보다는 탐정의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이라 하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드보일드는 스토리 그 자체로서의 매력보다는 문체와 스타일에서 묻어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광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테니, 이번 작품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이 챈들러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온 거라는 건 눈치 챘을 것이다.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래서 그가 툭툭 뱉어내는 말투, 그리고 행동에 대한 묘사에서 빚어지는 그 분위기를 좋아하는데, 의외의 장면에서 유머가 만들어지는 문장들이 이 작품 속에도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모든 시리즈는 개별 작품으로 읽어도 각각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직까지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를 만나본 적이 없다면, 이 작품으로 시작해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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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동주 창비교육 성장소설 15
정도상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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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규의 말에 동주는 잠시 고민했다. 같은 학교에 같은 반에다 한방에서 먹고 자는 사촌이자 동무였지만, 몽규는 자꾸만 위험한 길을 향해 가는 것 같았다. 그 위험한 길에 대해 몽규는 동주한테 절대 말하지 않았다. 동주 또한 어렴풋이 위험을 감지할 뿐이었다. 그 위험은 동주를 향한 위험이기도 했다. 주변 사람을 위험과 상처에 빠트리기 때문에 비밀은 위험했다. 비밀의 파편이 언제 심장을 향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p.46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누구나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는 시가 바로 '서시'일 것이다. 언젠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본 적이 있는데, 일본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와 송몽규 사촌형제가 일제 강점기 느껴야 했던 고민과 울분을 문학과 독립운동, 그리고 일본 경찰에 체포돼 억울하게 죽는 모습을 통해 그린 작품이었다. 식민지 청년들의 고민과 울분과 윤동주의 시 10여 편을 함께 만날 수 있어 더욱 인상깊은 영화였다. 대부분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서 윤동주의 시를 만나왔지만, 정작 그의 생애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 중에서도 청소년 시기라 할 수 있는 중등학교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서거 80주기를 맞아 그의 성장기를 그린 소설이다. 만주에서 나고 자라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좀처럼 소개되지 않았던 윤동주의 청소년 시절을 소설로 만날수 있어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작가는 윤동주의 중등학교 시절을 공부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확인해 이 소설을 썼다. 현대의 여고생 ‘새봄’이 꿈에서 윤동주 시인을 만나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소년 윤동주를 만날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독서 모임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하루에도 몇 편씩 팔이 뻐근해지도록 시를 옮겨 적으며 시에 대해 사색하고, 경쟁이라도 하듯 책을 읽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인의 길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과 송몽규, 문익환과의 우정과 시대적 고뇌 등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시절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 시인이 되는 건 중요하지 않아. 시는 그 자체로 내 생명과 같으니...... 칠흑의 밤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잇을 때, 별빛 하나가 길을 열어 주듯이, 나한테 시는 그래." 동주가 말했다. 아름답게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고 시대지만, 그래도 아름다워지려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은 시가 있기 때문이었다. 꽃이 필 때도 아름답지만, 꽃이 질 때도 아름답다. 지지 않는 꽃은 아름답지 않다.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꽃이 질 때,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른다.


이 작품은 한국사의 상처를 보듬는 작품을 발표해 온 소설가 정도상이 집필했다. 청소년들이 교과서로 접한 시인에게 느낄 법한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여고생이 시인을 만나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윤동주 시인 고유의 차분하고도 서글픈 정서를 산문으로 구현해 시로부터 받은 감상을 해치지 않은 채 그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이 작품은 문학과 신앙, 조국애, 그리고 시인의 길을 선택하기까지 품었던 고뇌 등 시인이 겪었던 일들과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문재린, 김약연 등 1930년대 북간도 조선인 사회를 이끌던 인물들을 비롯해 윤동주와 함께 ‘명동촌 삼총사’로 불리며 일생을 함께했던 송몽규, 문익환 등 윤동주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까지 촘촘히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 자신의 꿈을 조국 독립의 연장선에 두었던 그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까지 엿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윤동주 시인이 오늘날 우리 곁에 온다면, 어떤 모습일까?'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서시의 글귀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짧고 굵은 삶을 살다 간 민족 시인 윤동주의 삶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인 새봄 학생과 대화하는 짧은 장면들도 웃음을 유발시키는데, 정말 과거 속 인물이 현대어로 대화한다면 이러지 않을까 싶어 공감하며 읽었다. 이 작품을 우리 자신에게 한번쯤 되물어 보자. 우리는 스스로의 젊은 날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에게 부당했던 그 모든 것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자 했던 그의 시처럼, 우리도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말이다. 또한 청소년들이 이 책을 통해 교과서로만 접했던 시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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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만 년을 사랑하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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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갓타는 놀라운 마음에 무심코 감탄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린 사진은 루비 펜던트였다.

정교한 백금 세공으로 장식된 커다란 루비 펜던트.

그 빛깔은 마치 핏물이 밴 것처럼 짙었다.

아름답다기보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지는 보석이었다.           p.18~19


사립 탐정 도갓타 란페이는 우메다마루 백화점 창업자의 손자로부터 특별한 보석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최근 들어 그의 할아버지인 소고가 밤마다 있지도 않은 보석을 찾아 헤매는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 년을 사랑하다'라는 이름이 붙은 정체불명의 보석을 찾기 위해 도갓타는 군도에 있는 노라시마섬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할아버지의 88세 생신 축하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인이 소유한 프라이빗 아일랜드에 가족들과 손님들이 모여든다. 


45년 실종 사건으로 인해 인연을 맺게 된 전직 형사 사카마키와 손자가 데려온 사립 탐정까지 함께 모이고 보니... 뭔가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무대였다. 실제로 소고는 전직 경위와 탐정이 초대손님으로 왔으니, 살인 사건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지 않냐고 농담을 하며 아주 기분이 좋았다. 물론 살인 사건이 일어날 기미는 털끝만큼도 없었고, 애초에 탐정이 받은 의뢰도 보석을 찾는 일이지 살인 사건 같은 끔찍한 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마침 고립된 섬에는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고, 다음 날 할아버지가 섬에서 돌연 사라진다. 베개 밑에서 발견된 것은 '유언장'이라고 적힌 봉투였고, 거기에는 "내 유언장은 어젯밤의 내가 가지고 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와중에 전직 경찰과 의뢰를 받은 탐정, 섬의 고용인들과 가족들이 함께 할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쫓아 수수께끼를 풀어 나간다. '만 년을 사랑하다'라는 보석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과거 속 비밀을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억측일지 모르지만 분명 지금 우리가 느낀 감정은 같을 겁니다."

...... 만약 그 세편의 영화와 이번 우메다 어르신의 실종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메다 어르신이 우리에게 하려는 고백은 한 가지뿐이죠.

45년 전 실제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어르신은 우리에게 그 얘기를 전하고 싶은 겁니다.             p.178


'내 유언장은 어젯밤의 내가 가지고 있다'에 이어 발견된 편지지에는 '만 년을 사랑하다'는 내 과거에 있다, 는 문구였다. 그렇다면 아마도 '만 년을 사랑하다'라는 보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다들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들은 이러한 소고의 행동이 평소 할아버지의 모습과 같지 않다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사카마키는 가족이 아닌 자신이 축하 파티에 초청을 받은 데는 과거의 사건과 뭔가 연관이 있찌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한 사십대 주부가 근처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사카마키가 담당 형사였고,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소고가 용의자가 되었다. 사라진 여성과 그가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었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당시 소고는 젊은 백화점 사장이라는 주목받는 위치에 있어 화제가 되었는데, 결국 사건 당일에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별다른 동기도 보이지 않아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그 사건이 현재 소고가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요시다 슈이치는 일반적인 미스터리 서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인간을 쓰고 싶다'고 말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묵직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일본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의 문제를 현실감있게 그려낸다.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되는 서사의 매력과 반전에서 비롯되는 먹먹한 감정까지 요시다 슈이치다운 휴먼 미스터리가 만들어졌다. 살인죄에 반대되는 죄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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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생존 - 지구상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피어난 생명의 경이로움
알렉스 라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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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함(그리고 인간 중심적 사고) 때문에 우리는 어떤 장소를 감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라 불렀지만, 결국 우리 눈앞에 지구상에서 가장 밀도 높은 생태계가 펼쳐지곤 했다. 우리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온도에 한계를 정해왔지만, 결국 그 한계가 깨지는 걸 목격했다. 우리는 모든 동물은 산소로 호흡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과학자들이 지중해 바닥에서 산소 없이도 잘 살아가는 동물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생명체가 태양에 의존한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황화수소를 필요로 하지 않듯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생태계가 발견됐다.             p.20


끓는 물 속에서도 30분간 살아남고 섭씨 영하 200도의 차디찬 액체 헬륨 안에서도 7개월간 살아남으며 1,000기압의 압력과 강한 방사선은 물론 다양한 유독 가스에도 살아남는 동물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심지어 이 생명체는 우주여행을 하고도 살아남았다. 이 생명체는 완보동물로 '미시 세계의 스타'라 불린다.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아주 작고 귀여운 동물인데, 둥근 엉덩이, 납작한 얼굴, 너무 하찮아서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움직임 등 테디베어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완보동물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오래 알려져 왔다. 이 동물의 생존력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2007년 9월에 두툼한 금속 캡슐 안에 담겨 우주로 보내졌고, 우주의 진공 상태, 그러니까 극도의 저기압과 혹한 그리고 여과되지 않은 자외선에 노출되었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렇듯 인간이라면 단 몇 초에서 몇 분 만에 죽고 말 상상 불가능한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체들이 있다. 절대 영도(섭씨 영하 273.15도)에 가까운 혹한이나 펄펄 끓는 열기,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방사선, 진공 상태의 우주에서도 살아남는 슈퍼 히어로 같은 능력을 가진 생명체는 대체 어떻게 극한의 환경에서 버티는 것일까. 이 책은 물, 산소, 음식, 추위, 압력, 열, 어둠, 방사선 등 생명에 꼭 필요한 요소가 전혀 없거나 지나치게 많은 극한 환경을 극복해온 세계 극한 생명체의 실존을 탐구한 것이다. 상상도 못 할 만큼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생명체들을 찾아본 일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시기를 헤쳐 나오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들의 전략과 적응 과정은 지구의 여섯 번째 대멸종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에게도 커다란 통찰을 건넨다. 




이제 지표면으로 되돌아가 보자. 당신의 상상력을 지구 맨틀 깊은 곳에 놓인 지층에서, 그러니까 수백만 년에 걸친 지질 역사 속에 쌓인 암석층에서 위로 끌어올려 보라. 만일 당신의 생각이 아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광산 안에, 즉 머리에 매단 플래시 빛밖에 없는 좁은 터널 안에 머물러 있다면, 천천히 지상으로 올라오라. 다시 탁트인 공기 속으로 나오면, 햇빛이 당신의 망막을 간지럽히고, 몇 시간 동안 햇빛을 못 본 뒤라 삶이 더 풍요롭게 느껴질 것이다. 식물들은 더 푸르고, 새소리는 더 달콤하다. 간질이고 장난치는 느낌까지 주며 산들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간다.            p.285~286


이 책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생존의 당연한 조건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들이 없는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의 신비한 세계를 보여준다. 물, 산소, 먹이 없이 생존하기, 극저온, 극고압과 극저압, 극고온이라는 극한 환경에서 진화하는 생물들, 그리고 빛이 없거나 방사선이라는 독이 가득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생명체들의 사례를 각기 구분해 정리했다. 흥미로운 것은 생존과 지속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만의 고유한 '다름'이라는 점이다. 고유한 생존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극한 환경을 향한 끝없는 진화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으니 말이다. 태곳적 바다 깊은 데서 진화한 최초의 미생물부터 시작해, 생명체는 태양의 힘을 사용해 육지로 올라왔고,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깊은 해구 속으로 들어갔다. 그 어떤 포식자도 따라올 수 없고, 그 어떤 경쟁자도 겨룰 수 없는 장소들을 찾아 모든 빈 공간과 틈새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산소 없이 생존하는 멋쟁이거북, 먹이 없이 생존하는 셰다오 살무사, 극저압 고도를 견디는 큰뒷부리도요, 극저온 북극에 사는 북극곰, 극고온 사막에서도 전력질주가 가능한 사하라은개미, 겨울에 몸을 얼렸다가 부활하는 송장개구리, 체르노빌 출입금지 구역에서 방사선을 먹고 사는 미생물 등 지구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너무나 놀라웠다. 불가능해 보이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생명체들의 이야기는 웬만한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정말 잘 읽히는, 쉽고 재미있는 과학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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