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의 사랑들 - 흙과 틈 사이로 자라난 비밀과 상실 그리고 식물에 관한 이야기
쿄 매클리어 지음, 김서해 옮김 / 바람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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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엄마는 깊이, 아주 깊이 심었다. 파내고, 끙끙대고, 들어올리고, 다져 넣었다. 마치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반복해서 되씹듯, 흙을 자꾸 뒤집었다. 엄마는 도저히 치유되지 않는 것들을 무디게 하기 위해, 세상과의 싸움을 멈추기 위해 흙을 사용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땅을 일구었고, 먹기 위해 심었으며, 수확한 것들을 작은 종이봉투에 담아 나에게 건넸다. 엄마는 익숙한 규범을 뒤집고, 일반적으로 예쁘다고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면서 내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이한 아름다움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돌나물에도, 유포르비아에도,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서양향나무에도.           p.207


가끔 그런 책을 만난다. 자아와 텍스트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나와 책 사이에서 마법같은 화학적 반응이 느껴지는 그런 책 말이다. 한 권의 책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누군가에게 말하는 한 방식이라면, 이 책은 분명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그저 홀린 듯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 읽었던 수많은 책들 중에 단연코 손에 꼽을 만큼 좋았던 책이다.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란 저자는 DNA 검사를 통해 석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서로의 진정한 말벗이라고 생각해왔기에 그 결과는 큰 충격이었다. 이 책은 오래도록 숨겨져 있던 가족의 비밀, 과거와의 연결고리, 생물학적 기원과 뿌리를 찾으려는 긴 여정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집 앞 뜰을 정원으로 가꾸고, 보살피는 식물의 언어였다는 점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는 사람이었고, 오래 묵혀둔 가족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저자는 자신의 유전적 계보를 추적하며 어머니의 또다른 언어인 가드닝을 통해 천천히 부모의 삶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식물의 시간으로 상상한다는 건 우리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엄마를 따라서 나도 정원의 언어를 구사해보려고 애쓴다... 엄마는 나에게 겉껍질, 뼈대, 겨울의 줄기로 말하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단풍나무의 마지막 다섯 잎을 휩쓸어가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땅을 덮은 진흙의 칙칙함으로 말하고, 영양분 가득한 부패의 냄새로 말한다. 우리는 또한 공기로 말한다. 퇴비로 가득 찬 공기, 젖은 쇠와 피 냄새가 배어 있는 공기로, 우리는 언어로 채 담지 못하는 것들을 만진다. 나는 잠시 믿게 된다. 정원의 분해 과정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엄마의 쇠약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죽은 꽃들이 건네는 본질적인 조언을 듣는다. 그것이 아름다운 풍경이 꾸며낸 거짓이든, 눈송이가 얇게 쌓인 매혹적인 폐허의 기만이든 상관없다.              p.338


이 책은 일본의 24절기를 단락의 제목으로 하고 있다. 덕분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지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부터 겨울을 마무리하는 대한까지 일 년 열두 달을 24절기로 나눈다. 봄비가 내리고 새싹이 돋아나는 우수, 본격적인 논농사 준비를 하는 청명, 보리 베고 모 심는 망종, 여름 더위와 장마의 시작 소서, 더위가 그치고 가을이 다가오는 처서,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한로, 겨울 첫눈이 내리는 소설, 겨울 중 가장 추운 때인 소한 등등 절기는 1년 동안 하늘을 지나가는 해의 발걸음을 스물네 걸음으로 나눈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계절을 24개의 셋키(절기) 또는 계절의 마디들로 나누어 기록한다고 한다. 다이칸(대한), 슌분(춘분), 세메(청명)... 소코(상강), 릿토(입동), 토오지(동지)로 구분되어 있는 장들은 2019년 1월부터 시작해 2021년 9월까지의 시간들을 담고 있다. 


원제인 ‘Unearthing(파헤치다)’은 땅을 파헤치고, 식물을 심고 돌보는 행위와 작가 자신의 유전적 위치를 확인하는 일, 가족의 새로운 연대기를 구성하는 작업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백인 중심 사회에서 혼혈 여성으로 살아온 정체성, 부모 세대의 전쟁과 이주, 동화의 역사 등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종과 문화, 사랑의 경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유한다. 식물을 엉뚱한 자리에 심으면, 정원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사정없이 일러주며,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며 통제하려 드는 강박을 비웃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종이와 잉크로 좁아진 나의 길을 벗어나는 우회로였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어머니는 저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랑하는 딸, 또 하나의 이야기를 줄게.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로 만들어졌지만, 우리가 잊은 것들로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라고. 그러니 모든 점이 선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걸, 모든 것이 무늬처럼 자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저자는 칼데콧 아너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림책 작가다. 국내에도 저자의 꽤 많은 그림책들이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많은 에세이, 논픽션을 써 주기를 고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여름은 고작 계절>의 김서해 작가가 번역을 맡았는데, 쿄 매클리어의 아름답고 사색적인 문장을 너무도 섬세하게 고스란히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모든 페이지를 옮겨 적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문장들로 가득한 이 눈부신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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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쳐가고 있는 기후과학자입니다 - 기후 붕괴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케이트 마블 지음, 송섬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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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러나 여기, 작은 마법이 존재한다. 우리가 받은 저주가 곧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위험과 종말을 예측하고자 사용하는 모델은 놀라움, 아름다움, 기쁨 역시 보여준다. 눈앞에 펼쳐지는 미래를 보는 것, 세계를 우아한 방정식으로 걸러내 예언과 꼭 닮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지구의 미래를 이해하려면, 먼저 지구의 현재를 이해해야 한다. 뜨거운 열대와 차가운 극지대를, 축축한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는 습한 공기를, 더운 날 부드럽게 불어오는 서늘한 바닷바람을. 잠시 가만히 앉아 세계가 그 아름답고도 끔찍한 비밀들을 보여주길 기다려야 한다.               p.26~27


최근의 기후 변화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지구의 온도가 이 정도로 올라가는 것도, 이렇게 급작스레 변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적어도 인간이 존재해온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상실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대로 가면 온난화는 계속될 것이고, 해수면 상승은 이어질 것이며 극단적인 기상 현상들을 피할 길이 없어질 것이다. 과학자들은 수십 년간 이러한 현상들을 예측해 왔고, 그렇게 상상한 최악의 공포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위기감으로 미래를 예측해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NASA 출신 기후과학자인 저자는 기후 예측 모델을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지구의 재앙적 미래를 시뮬레이션해본다. 매일 세상의 끝을 마주하는 기분으로 기후 변화가 일으킨 복잡한 감정들을 겪어 낸다. 분노와 죄책감, 슬픔과 두려움, 놀라움, 그리고 희망과 사랑의 감정이다. 물론 이런 감정들은 과학자가 느끼기에 적절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노에서 사랑까지, 아홉 가지 감정의 스펙트럼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려주는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공감을 통해 우리 모두와 지구를 다시 강하게 연결시킨다. 아홉 가지 감정은 경이, 분노, 죄책감, 두려움, 애도, 놀라움, 자부심, 희망, 사랑으로 이 감정들이 각각 하나의 목차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학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비밀로서의 경이, 기후 변화의 진짜 원인은 우리라는 죄책감, 때 이르게 잃어가는 세계에 대한 애도,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자부심, 지금껏 아무도 한 적 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희망, 그리고 기후 모델이 말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느끼는 무한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절절한 감정과 과학적 통찰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해피엔딩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더 나은 결말은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한 대로, 우리를 구원하러 올 사람은 없다. 만약 결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그건 결점 많고 한계도 있지만 각자 최선을 다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해낸 공동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과거에 환경을 성공적으로 지켜낸 사례 중 지금 우리의 상황과 완벽히 들어맞는 건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p.313


'기후'는 장기간에 걸친 날씨의 평균치이자, 날씨가 일어나는 배경 조건이다. 기후의 변화는 지각 판이 움직이고, 지구가 궤도 속에서 흔들리고, 심해의 해류가 바뀌는 수백만 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일어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날씨가 인간이 짧은 생애 동안 경험하는 것이라면, 기후는 신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기후를 이해하려면 세계를 형성하는 모든 힘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대기뿐 아니라 해양도 포함된다. '기후과학자'들은 수많은 방정식을 바탕으로 작은 세계를 만들고, 견고한 기반 위에 복잡한 구조를 층층이 쌓아간다. 기후과학자들이 미래를 볼 수 있는 이유는 '물리학'이 있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근사한 이유로, 우주는 얼음 덩어리로 뒤덮인 산꼭대기에서도, 우주의 허공에서도, 대양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바닥에서도, 그 어떤 맥락에서도 참인 방정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방정식을 풀면 비가 왜 내리는지,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어째서 지구에 기온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기온은 왜 상승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기후 모델은 바로 이러한 마법으로 만들어 진다. 


2003년 8월, 프랑스의 여름에 기후 변화로 발생한 최초의 대량 사망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43도가 넘는 전례 없는 폭염이 예상된다는 우려스러운 보도 자료를 발표했지만, 여름은 원래 더운 거라고 다들 코웃음을 치며 매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긴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돌아온 그들을 맞이한 건 끔찍한 사태였다. 푹푹 찌는 아파트에 갇혀 떠날 수도, 휴가를 보내는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던 독거노인들이 해가 진 뒤까지도 이어지는 유례 없는 폭염을 마주한 것이다. 무려 1만 5,000명의 노인들이 고독사했고, 이들의 시신은 누군가 찾아가기를 기다리며 냉장 트럭 속에 쌓여 있었다. 기후 변화로 인해 2003년의 끔찍한 사건이 또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두 배 더 높아졌다. 북극의 기온은 지구상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50년 만에 찾아오던 폭염이 이제는 10년에 한번 꼴로 찾아온다. 게다가 더 길고, 더 뜨겁다. 우리는 사랑하는 세계를 때 이르게 빼앗기는 중이다.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미래는 여전히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의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기후 위기를 다루는 책들을 꽤 읽어 왔지만, 분노와 죄책감과 같은 인간 보편의 감정을 통해 지구온난화 문제를 들여다보는 책은 처음이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과학자의 문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해 매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느라 바빴던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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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김나현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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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 두 사람은 내가 쓴 이야기를 실제 자기들 인생으로 살아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상식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왜 이런 시나리오 따위를 살아내는 건가? 자신의 멀쩡한 삶을 놔두고? 윤 감독은 거장 소리를 듣는 만큼이나 영화에 미쳐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예술가로서는 천재적이지만 평범한 생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이한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이지 않을까. 자신의 이야기에 갇혀버린? 그 순간, 윤 감독이 놓친 부분이 머릿속에 번쩍였다.             p.118~119


스물셋 나을은 7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 합격한 신입 배우였다. 제작만 하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국제 영화제에도 자주 노미네이트되는 거장 감독의 신작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후 나을은 줄곧 지상에서 한 발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온라인 게시판에 학교폭력 고발 글을 올렸고, 신작의 제작 발표와 공개를 앞두고 민감한 시기였기에 수습을 해야 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쓴 건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던 나을은 십년 전 앵두 머리끈을 하고 자신을 괴롭히던 한 아이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 괴롭힘을 막아주었던 친구 시우를 떠올린다. 


그렇게 이야기는 나을이 열세살이던 시절로 간다. 아빠가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와 바람이 나서 엄마와 이혼을 한 뒤, 추잡한 소문이 동네에 퍼져 이사를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6학년 새 학기가 되고, 나을의 아빠가 의사라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괴롭힘이 시작된다. 소문에 의하면 앵두라는 아이의 아빠가 의료 사고 피해자라고 하는데, 그 후 주변에서 부모가 의사인 아이만 마주치면 맹목적으로 괴롭혀왔다고 한다. 그리고 시우라는 전학생이 오고, 곧 앵두의 표적이 나을에게서 시우로 옮겨 간다. 하지만 시우는 나을과는 달리 당당하게 맞서는 아이였다. 엄마가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에 나을을 돌봐줄 선생님으로 한주 선생님이 집에 오는데, 시우와 함께 였다. 한주 선생님이 시우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우와 나을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간다. 어느 날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로 갑작스럽게 멀어지기 전까지는. 




그 어린 시절의 순수한 호의가 여태껏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우정이 모두 거짓에 토대를 둔 유령 같은 것이었는데도 나을은 그런 우정이라도 영원히 추억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으면 충분히 좋은 것이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 따뜻한 말을 수없이 돌이켜보면서 그런 말들이 정말로 내가 들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바란 것을 그저 마음으로 그려낸 것인가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먹을 꼭 쥐고서 그것을, 나에게 온 행운을, 내 곁에 남아 있을 운명으로 빋어보고 싶었다.             p.228~229


나을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난 윤감독은 직접 그를 찾으러 가자는 제안을 한다. "나을 씨, 그 시우란 친구 말이에요. 혹시 내가 만나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확인할 게 있다는 감독의 수수께끼 같은 말은 그가 오래 전에 썼던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었다. 시우와 한주가 윤감독이 무명 시절 썼다가 도둑맞은 시나리오 속 인물의 서사를 그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주, 이시우라는 이름부터 모든 것이 나을이 어린 시절 알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누군가 쓴 이야기를 실제 자기들 인생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왜 멀쩡한 자신의 삶을 두고 허구의 이야기를 살아내야 하는 걸까. 대체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이야기는 나을의 스물셋 현재에서 시작해 나을의 열세살로 갔다가 서른셋의 하영, 마흔셋의 시우를 거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펼쳐진다.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반전을 거듭하며 이야기는 각각의 인물이 살아낸 수많은 세계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미래의 내가 살았을지도 모를 세계가 무수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살면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삶에 대해 가끔 상상해 보곤 한다. 그때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이 삶은 없었을 것이다. 대신 다른 삶을 살았을 테고, 나는 얼마쯤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물론 정해진 운명같은 게 있다면 어떤 시간을 거치든 도달하는 곳은 비슷할 것이다. 그쪽의 나도, 지금의 나도, 어찌되었든 나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가끔은 궁금해진다. 내가 다른 역할을 맡아서 살아가는 모습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의 경험이,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결말이.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책을 읽는다. 이야기의 우주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이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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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다 하다 앤솔러지 2
김솔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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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가 저한테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요?」

옥경 씨가 유나를 빤히 쳐다봤다. 유나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정서를 불러 줬으면 했다. 하지만 옥경 씨는 정서가 누구냐고 되묻지 않았다. 

「답으로 사는 게 아니야. 물음이 있어서 사는 거지.」

욕경 씨의 시선이 재봉틀로 돌아갔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구멍 나고 헤진 드래곤의 날개를 기웠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계속 살아.」               - 김홍, '드래곤 세탁소' 중에서, p.8


유나는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 정서와 오랜만에 만날 약속을 한다. 중학교때부터 평생을 알아온 정서는 매일같이 연락하고, 걱정하다, 미워하고, 그러다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던 친구였다.  정서는 유나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고, 그들은 예전에 늘 만나던 카페에서 보기로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카페는 세탁소로 바뀌어 있었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유나는 그 앞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다. 정서는 오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정서의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았다고 했다. 정서는 약속 장소로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결국 유나는 정서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유나는 정서를 걱정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유나는 불면에 지쳐 밤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한다. 겨울의 막바지였고, 하루하루 날이 풀려 가더니 어느새 봄이 온다. 그날도 유나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뿌리치고 계속 걷다가, 정서와의 마지막 약속 장소에 가보기로 한다. 늦게 도착한 정서가 그곳에서 여전히 유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정서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드래곤 세탁소 앞에 도착한다. 세탁소는 비어 있었고,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빼곡히 걸려 있는 옷들을 비추고 있었다. 유나의 목덜미에 찬바람이 쌩 불었고, 죽음을 이불처럼 두른 기분으로 세탁소 문을 연다. 그렇게 다림질을 하던 주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얻어 마신다. 유나는 다음날도 세탁소를 찾아가고,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그녀에게 주인 아줌마는 세탁소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여전히 죽은 친구가 자신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던 유나는 세탁소의 주인 아줌마와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조금씩 달라지는 새소리를 들으며 질문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른다.

용서하거나 이해할 수 있나?

그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맞는다.

살릴 수 없었나?

그는 살아 있는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살았다.

묻는다.                   - 윤해서, '조건' 중에서, p.199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두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라는 동사를 테마로 진행되고 있다. 그 두 번째 책 <묻다>에는 김솔, 김홍, 박지영, 오한기, 윤해서 작가가 참여했다.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다섯 작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새롭게 해석한 <고도를 묻다>라는 작품은 희곡 형식으로 쓰여 있어 아무래도 가독성은 떨어졌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작가가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이나 연출가 고 임영웅 선생님의 연극에 깊이 감명받아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고도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고도가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어떻게 끊임없이 묻고 답할 것이냐,에 중점을 두고 풀어 나가는 이야기라 인상적이었다. 딸아이의 방과 후 교실 과제인 공포 동화 쓰기를 하는 소설가 아빠의 이야기를 그린 <방과 후 교실>은 아주 유쾌하게 읽었다. 실제로 오한기 작가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딸이 자신의 작품을 읽고 질문을 하면서였다고 하는데,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편의 이야기 중에 김홍 작가의 <드래곤 세탁소>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원래 지으려던 이름이 <세탁소 더 드래곤>이라는 것부터 어딘가 귀엽고도 수상한 세탁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간되고, 따뜻한 이야기였다. 세탁소의 이름에 관해서는 김홍 작가가 '뭔가 어긋난 듯한,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가게 이름을 상상'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설정이라고 한다. 김홍 작가의 작품은 이번에 만난 것이 처음인데,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리즈는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옷을 입은 표지가 너무 예쁘고,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가 함께 되어 있어 책의 물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서 시리즈별로 한 권씩 모으기 딱 좋다. 하다 앤솔러지 세 번째 작품 <보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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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들 30 - 중년 이후, 10년 더 건강하게 사는 확실한 방법
최석재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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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탈까, 계단을 이용할까?', '오늘 저녁은 치킨에 맥주 한잔할까, 건강한 식사를 할까?', '이번 주말에는 운동할까, 아니면 그냥 쉴까?' 이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생활 습관을 형성하고, 결국 나의 심장과 혈관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p.23


대한민국 대표 의료진이 펼치는 흥미로운 지식 체험, ‘인생백세’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전국 대학 각 분야 최고 교수진의 명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이 '인생명강' 시리즈라면, '인생백세' 시리즈는 시리즈는 의학 지식들을 엄선해 백세시대를 위한 가장 실용적인 건강교양 콘텐츠를 제공한다.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쓴 다이어트 노하우,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알려주는 암을 예방하는 건강 습관, 한방재활의학과 전문의가 쓴 자세교정 스트레칭과 운동법, 신경외과 전문의가 알려주는 자율신경 회복 솔루션에 이어 이번에는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들려주는 30가지 응급의학 설명서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음식과 생활습관 중에는 우리 몸에 해를 끼치는 것들이 많다. 저자는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잘못된 식습관과 생활 방식이 지속되어 생긴 질환으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을 매일 만나고 있다고 말한다. 편의점에서 사 먹는 빵과 커피, 급하게 해치우는 패스트푸드, 회식 자리에서의 과도한 고기와 술... 모두 응급실로 향하는 티켓과도 같다. 이 책은 심혈관 질환, 뇌혈관 질환, 만성 대사 질환, 그리고 암까지 점차 늘어 나고 있는 주요 질환들에 대한 원인과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렇게 심각한 질병들의 대부분이 우리의 식습관과 생활습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고칠 수 있는 방법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몸의 악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지, 이미 병이 시작된 몸이라 해도 어떻게 정상으로 되돌일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과 습관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긴급한 상황이 발생해서 응급실에 오는 환자 중 상당수가 "평소에 건강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됐어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년, 때로는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건강이 나빠지고 몸 곳곳이 변화하고 있었죠. 우리 몸이 조용히 그 변화를 견뎌내고 있었을 뿐입니다.            p.184~185


모든 죽음이 그러하겠지만 가장 허망한 것은 돌연사가 아닐까. 어떤 병의 징조도 없었고, 지병이 있었거나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돌연사의 주요 원인은 바로 심혈관 질환이다. 그런데 돌연사가 더 이상 노인들만의 이야기라는 사실,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혈관 건강을 악화시키는 환경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일의 사소한 작은 선택들이 심장 질환을 키우고, 혈관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심혈관 질환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뇌혈관 질환이다. 뇌혈관에 문제가 생기면 크게 두 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혈관이 막히는 뇌경색과 혈관이 터지는 뇌출혈이다. 어느 쪽이든 골든타임을 놓치면 영구적인 장애가 남거나, 최악의 경우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질환의 전조증상과 위험한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과, 증상이 생겼을 때의 골든타임에 대해 알려 준다. 


심혈관 질환보다 무려 2.6배나 높은 수치로 사망하는 것이 바로 암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심혈관 질환이 사망 원인 1위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암이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저자는 암의 주요 원인에 대해서 짚어보고, 암을 부르는 습관과 그 증상에 관해, 그리고 사람들이 암에 관해 오해하는 것들에 대한 진실을 알려 준다. 만성 대사 질환이야말로 생활습관에서 비롯되는 질병이다. 특히나 대사 질환은 초기에 증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과 같은 대사 질환은 초기에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다. 그러니 만성 대사 질환은 우리 몸이 보내는 마지막 경고 신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나쁜 생활습관을 유지한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질환들을 내 몸에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피곤하다는 신호, 소화가 안 된다는 신호, 잠이 오지 않는다는 신호... 모두 우리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면, 지금보다 10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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