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지음, 새뮤얼 타이탄 엮음, 김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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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서사에서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마친 뒤 편히 쉬면서 귀를 기울이고 꿈을 꾸고 기억에 남긴다. 반면에 소설가는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의 일과로부터 동떨어져 홀로 있다. 소설의 산실은 고독한 개인, 곧 자기의 가장 큰 관심사를 본이 되는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하게 된 개인, 남에게 조언을 들은 적도 없고 그 무엇에 대해서도 조언할 수 없는 개인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묘사할 때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차원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는 뜻이다... 입말로 전수할 수 있는 것들, 곧 대서사가 자산으로 삼는 것들은 소설이 자산으로 삼는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p.48~49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아이가 아픔을 잊고, 약을 먹고 어서 잠에 들기를. 그래서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칭얼대며 잠을 자지 않는 아이를 재우는 데에도, 떼를 쓰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의 시선을 빼앗는 데에도 이야기는 꽤 효과가 크다. 어린 시절 잠들기 전에 조부모, 혹은 부모가 곁에서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준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꽤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안전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던 추억이 되거나, 이야기에 매료되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거나, 혹은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믿는 어른이 되도록 만들어 주니 말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세계 곳곳의 뉴스 기사를 접하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 일을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고대인들은 그러한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의 대가들이었다. 정보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을 수 있을 때는 그것이 아직 새로운 정보였던 짧은 한때뿐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무가치해지지 않는다. 이야기의 힘은 이야기 내부에 응축되어 있는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 기술은 왜 사라져가는 것일까? 벤야민은 여러 글을 통해 왜 이야기 기술이 사라져가고 있는지에 대해 사유한다. 그리고 권태로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야기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낸다. 우리의 삶에서 권태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기에, 권태와 은밀하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행위들 또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예견한 세계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야기를 들려줄 줄 안다는 것은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 기술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야기를 듣고 기억에 담아두는 사람들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이 기술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귀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손으로는 베를 짜거나 실을 잣는 사람들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청자가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수록 이야기는 청자의 기억에 더 깊이 새겨진다.              p.139~140


현대문학의 인문 에세이 시리즈 무우의 두 번째 책이다. 조르조 아감벤의 <횔덜린의 광기>에 이어, 이번에 나온 것은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에세이>이다. 그의 대표작 <이야기꾼>을 비롯해 <요한 페터 헤벨>, <소설의 위기>, <리스본 지진> 등 열세 편의 비평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의 글은 철학과 미학, 문학, 신학 등을 넘나드는 전방위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야기꾼>은 20세기의 문학 에세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무 유명한 에세이라는 점 때문에 배경지식 없이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소개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꾼>이 탄생하게 된 지적 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야기꾼 에세이>가 필요하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1926년부터 1936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그의 사유를 고스란히 따라가 볼 수 있다. 정보의 범람과 알고리즘의 확산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이야기를 잃어버렸다. 벤야민은 잃어버린 '이야기의 기술'을 통해 언어와 기억의 운명을 되묻는다.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벤야민이 남긴 질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책을 통해 이야기가 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지, 이야기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지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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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 상·청춘편 - 한 줄기 빛처럼 강렬한 가부키의 세계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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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노의 소매 움직임, 우수 어린 눈빛, 무엇보다 커다란 묶음 머리를 흔들며 춤추는 그 작은 어깨에 객석의 누구도 눈을 떼지 못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다미 바닥에 버려진 도자기 술병조차도 마치 몸을 일으켜 무대를 지켜보는 것만 같습니다.

한지로가 무심결에 중얼거렸습니다.

"이거, 정말 훌륭한 스미조메로구나. 나가사키에 이렇게 실력 좋은 게이샤가 있었던 건가."                p.25


타치바나 키쿠오는 누가 봐도 한 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타고났다. 열네 살의 키쿠오는 야쿠자 가문에서 매년 열리는 정월 신년회에서 가부키 무용극을 공연하고, 마침 그곳에 있던 유명 배우 한지로의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날 반대파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수장이었던 키쿠오의 아버지가 숨을 거두게 되고, 새해 첫날에 발생한 처참한 사건으로 인해 조직은 거의 와해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키쿠오는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세상은 어린 소년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국 복수에 실패하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어 간사이 지역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인 2대손 하나이 한지로에게 의탁하게 된다. 키쿠오는 한지로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인정받는 슌스케와 함께 본격적인 가부키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춤이 좋아서 배우가 되었지만 키쿠오가 맞이하는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가부키는 과거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였으나 현재는 영상 매체에 밀려 점차 소외되어 가는 ‘잊혀 가는 전통’일 뿐이 말이다. 이를 반영하듯 가부키 연극을 공연할 극장도 전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현저히 줄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키쿠오는 춤에 대한 열정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리고 자라온 환경도 타고난 재능도 다르지만 둘도 없는 라이벌이자 친형제 같은 사이로 지내는 키쿠오와 슌스케. 한쪽은 야쿠자의 아들이었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은 인기 가부키 배우의 후계자였지만 재능은 그에 조금 못 미쳤다. 전통을 중시하는 가부키는 대대로 세습되는 것이 문화였는데, 과연 두 사람은 운명은 어떻게 될까. 어느덧 가문의 후계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고심 끝에 내린 한지로의 결정은 키쿠오와 슌스케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꾸게 되는데, 두 사람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순간마다 가부키 배우라는 존재에는 그 가족도 포함된다는 걸 사치코는 절실히 느낍니다. 무대에 서는 것은 배우 한 명이지만, 예를 들자면 정글에서 살아가는 짐승 가족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총괄자인 미츠토모 같은 공연 기획 회사와 극장, 후원자에 관객과 매스컴 등, 적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는 상대로부터 온 가족이 서로를 지키고 싸우며 살아남아야만 하니까요.              p.256


이 작품은 일본에서 올해 6월에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보>의 원작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또한 100만 부 이상 판매될 만큼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오늘날 주류에서 한발 밀려난 ‘가부키’를 소재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가부키 배우의 삶을 통해 예술의 극치에 다다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해준다. 가부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이 작품을 즐기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흔히 가부키라하면 얼굴에 하얀색 분칠을 한 배우들의 모습부터 떠오른다. 가부키 공연의 모든 출연자는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 역할 또한 남성 배우가 맡아서 한다. 남성 배우가 여성으로 분장을 하고, 여성적 발성을 하는 것이다. 여성으로 가장한 남자 배우를 '온나가타'라고 한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3년간 가부키 분장실을 직접 드나들며 생생한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덕분에 온나가타의 세계를 더 리얼하고 환상적으로 작품 속에 재현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무려 3시간의 긴 분량이라고 하는데, 19일에 개봉할 예정이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매우 기대가 된다. 가부키의 세계를 스크린에 완벽하게 재현시켜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공연 실황처럼 느껴진다고 하니 말이다. 또 가부키 연습을 실제로 수개월간 소화했다고 하는 요시자와 료의 인생 연기도 매우 궁금하다. 소설을 읽으며 완벽한 연기와 춤, 무대를 만들어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두 라이벌의 구도가 마치 '유리가면'의 남자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것 같다. 상 청춘편에 이어 하편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어서 빨리 다음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다. 자,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도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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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스키 타자기 위픽
박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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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제는 지금까지 승혜가 살아온 이력일 터였다. 이번 생에서 누군가를 위해 제대로 뜨거워져본 경험도 없으면서 다음 생에서 맥반석으로 살고 싶다는 게 너무 뻔뻔한 욕망이었을까. 혹시 맥반석의 세계도 경력자 같은 신입을 원하는 걸까. 맥반석이 되고 싶으면 그 정도의 온도를 감당할 만한 내공을 쌓고 오라는 경고인 걸까. 참나, 돌이 되는 것도 쉽지 않구나 싶으니 지난 생에 대한 후회나 반성보다는 빈정이 먼저 상하고 말았다.              p.35~36


다음 생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자율적으로 선택이 가능한 '생애전환 시행령'이 국민 법안으로 채택된 세상이다. 사람들은 만 40세와 만 66세에 건강검진을 받으며 생을 전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인간 여자로 66년을 살아온 승혜에게도 두 번째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의 때가 온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승혜는 고민한다. 막연히 뭔가 좋은 게 되고 싶었던 승혜는 1지망으로 맥반석을 적어내지만 '전환불가' 통보를 받는다. 두 번째에는 아무 수식어 없는 자질구레한 돌을 선택하지만, 자연 상태의 무생물이 되려면 우선 갚아야 할 빚이 없어야 했다. 결국 돌고 돌아 승혜가 부여받은 새로운 생은 타자기였다. 


누구는 맥도날드 키오스크가 되고 누구는 AI 기능을 탑재한 청소기가 되었다고 했다. 쓰임이 많을수록 빨리 유보된 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승혜는 기계치에 가까웠다. 최종까지 승혜가 망설인 것들 중에는 고양이 요람과 리코더, 호루라기와 피크닉 바구니, 그리고 타자기가 있었다. 타자기는 적당히 낡은 데다 대단히 새로운 기술을 익히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의 생각의 의지 없이 타인이 쓰는 글을 그대로 받아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 마음에 들어 오래 고민한 끝에 선택하게 된 것이다. 타자기에도 수명이 있어 승혜는 자주 아프고 열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듣기와 기다림의 삶인 타자기의 생을 사랑하게 된다. 빈티지 숍의 아르바이트생 주희가 승혜를 처음 사용했는데, 찰스 부코스키의 <할리우드> 속 문장을 써서 부착한 이후 승혜는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로 불리게 된다. 




타자기의 생을 승혜는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살아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승혜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타자기에는 분명한 수명이 있었다. 잦은 비명과 드문 탄성을 반복해서 겪는 동안 승혜는 자주 열이 올랐고 자주 한기에 시달렸다. 타자기의 생에도 갱년기의 시간이 도래한 모양이었다. 한번은 지나치게 뜨거워져 사흘 내내 열을 식혀야 했고 한번은 지나치게 얼어붙어 타자의 절반이 제대로 눌리지 않았다. 승혜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p.57


만 40세까지 인간 종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적절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무생물로의 전환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는 문장을 보며 슬퍼졌다. 아프면 치료할 돈이 있고, 돌봐줄 가족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의 미래를 선택할 수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노후 자금이 준비되지 않은 하위 소득 계층의 중장년층일수록 일찌감치 사회적 돌봄 비용이 들지 않는 무생물로의 전환을 결정하고, 극중 승혜와 같은 방식으로 노인 1인에 드는 복지 비용을 당겨쓴다.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이렇게 나이 든다는 것, 말과 기억을 잃어가고 몸이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 여자 고승혜의 몸은 쉰 살 나이에 시작된 오십견부터 건망증에 이르기까지 점점 노화된 몸의 한계를 겪어 왔다. 타자기가 된 고승혜 역시 점점 몇몇 키는 이제 잘 눌리지 않게 되는 등 몸이 둔해지고 있었다. 승혜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이 작품은 <고독사 워크숍>,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등의 작품을 써낸 박지영 작가의 신작이다. 너는 늙어서 뭐가 될래?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해변의 타자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작가는 '고승혜 타자기'를 통해 자신이 상상했던 생의 마지막 장면을 그려 낸다. 극중 전환기에 무생물의 생을 선택하는 건 빈곤하고 연고 없는 노인들뿐이었는데, 인간으로서 순리대로 늙어갈 기본 권리와 사회적 효용 가치가 없어도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적 인권에 대해서, 노후 자금 없이 가난하게 홀로 병들고 아프게 늙어갈 일만 남은 노인들'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를 선보였던 위픽 시리즈 시즌 1이 마무리되고, 곧 시즌2가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강화길, 임선우, 단요, 정보라, 김보영, 이미상, 김화진, 정이현, 임솔아 작가 등 라인업만 봐도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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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오브 도어즈
개러스 브라운 지음, 심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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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끔찍하고 비정해. 난 정말......싫어. 하지만 책이야말로 내가 항상 갈 수 있는 곳이었어. 어렸을 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현실보다 책 속 세상이 좋아."

"무슨 마음인지 알겠어. 인생은 정말 짜증 나지."

..."그런데 이제 이게 생긴 거야. 이 책을 왜 나한테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겼다고. 그리고 웨버 씨는 좋은 분이었어.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었지. 그래서 난 이 책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p.133


캐시는 뉴욕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서점인 켈너북스에서 일을 한다. 6년 전 뉴욕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껏 일해온 그곳을 캐시는 사랑했다. 책이 가득 꽂힌 서가와 탁자,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과 높다란 천장에 달린 조명의 밝고 아늑한 분위기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친숙함이 훅 느껴지는 편안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밤거리엔 희뿌연 빛 사이로 먼지 같은 눈송이가 흩날리다 점점 커지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라 남아 있는 손님은 서점의 단골인 웨버 씨뿐이었다. 웨버 시는 부드러운 말씨에 늘 값비싸 보이는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신사로 늘 즐겨 앉는 중앙 탁자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는 했다. 




갑작스럽게 웨버 씨가 서점에서 돌아가신 뒤, 캐시는 그가 자신에게 남긴 책을 한 권 받게 된다. 갈색 가죽 표지가 달린 자그마한 책이었는데,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된 글이 진한 잉크로 온통 쓰여 있었다. 책의 첫 장을 열자 '이건 문의 책이다. 손에 들고 있으면 어느 문이든 모든 문이 된다.'는 문구가 보였다. 그리고 웨버 씨의 필체로 친절하게 대해준 보답으로 캐시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겠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선물에 놀라고 감동한 캐시는 책을 집으로 가져가고, 함께 살던 친구 이지와 함께 책을 살펴보다 책이 가진 특별한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 책은 어떤 문이든 가고 싶은 곳의 입구로 바꿔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든 채로 가고 싶은 장소를 떠올리며 문을 열면 그곳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지와 함께 과거에 여행했던 베네치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을 열었는데, 빗물에 반짝이는 베네치아의 거리가 나타난 것이다. 분명 뉴욕의 집에 있었는데, 문 너머로 베네치아가 펼쳐지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 모든 것들을 달리 어디에 보관할 수 있을까? 책 말고 다른 곳이 있을까? 삶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책 말고는 대체 이 모든 감정을 어디에 가둘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캐시는 이 책들을, 이 특별한 책들을 만들었다. 아무 데도 아니면서 또 모든 곳이기도 한 이곳에서 책이 탄생하였다. 책 하나하나마다 캐시의 기억과 감정으로, 현실의 파편으로 만들어졌다. 그녀는 이 책들을 세상으로 던져서 현실과 시간 속에 흩어놓았다.             p.451


한 권의 책을 통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몸은 방구석에 앉아 있지만, 책 속 이야기를 마음만은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비유로서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책을 통해 원하는 시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어떨까. 책이 문이 되어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정말 환상적인 모험이 되지 않을까. 개러스 브라운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책을 통해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게 되면서 벌어지는 스릴 넘치는 모험 이야기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책을 차지하려는 책 사냥꾼의 추적을 피해서 평범한 서점 직원이었던 캐시는 무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는 캐시가 가지고 있는 '문의 책' 외에도 다양한 마법 책들이 등장한다. 몸을 숨긴 채로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그림자의 책',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자신을 잊게 해주는 '기억의 책', 운이 좋게 해주는 '행운의 책', 그리고 속도의 책, 안개의 책, 파괴의 책, 절망의 책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이 특별한 책들을 이용해 뭔가를 파괴하고, 나쁘게 만들었고, 또 누군가는 그들로부터 도망을 다녔다. 분명한 것은 캐시가 '문의 책'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위험에 내몰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캐시 앞에 비밀 도서관 사서 드러먼드 폭스가 나타나고, 그녀를 돕기 위해 친구와 동료들이 모여든다. 


자신이 원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살인을 저지르는 위험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쫓기며, 캐시는 여러 사건들을 겪는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등장과 마법의 힘을 지닌 책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더욱 속도감있게 전개된다. 이야기는 '문의 책'이 장소 뿐만 아니라 시간도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점 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후반부의 엄청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거의 육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순식간에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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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오브 도어즈
개러스 브라운 지음, 심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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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통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현실화시켜 보여주는 판타지 스릴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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