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트러몰로지스트 1 - 괴물학자와 제자
릭 얀시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발음하기도 어려운 '몬스트러몰로지'는 인간에게 대체로 적대적이며 과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특히 신화나 전설의 산물로 여겨지는 생물을 연구하는 학문 혹은 그런 존재를 사냥하는 행위라고 한다. 그러니 제목인 '몬스트러몰로지스트'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괴물학자와 그의 조수, 즉 안트로포파기라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종족을 연구하고 사냥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흥미로운 것은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문서와 작품에서 실제로 어깨 밑에 머리가 자라는 종족 안트로포파기가 등장해왔다는 점이다.

안트로포파기가 우리들 바로 옆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굶주려 있었다. 나는 엘리자 번튼의 머리카락이 놈들의 우물거리는 턱 아래로 흘러내리던 모습을 뇌리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에서 뛰쳐나온 듯한 괴물들이 저 밖을 배회하고 있는데, 어째서 저런 낡은 책이나 뒤지고 지도나 보고 거리나 재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 주민들을 모아 놈들을 잡으러 가거나, 아니면 적어도 놈들이 습격해 올 경우를 대비해 방어벽이라도 세워야 하는 게 아닌가. 안트로포파기가 어떻게 뉴예루살렘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수수께끼를 풀 시간은 놈들을 없앤 뒤에도 충분할 텐데. 무엇보다 지금은 우리의 목숨을 구하는 게 시급하지 않은가. 나는 의아했다.

 

이야기는 액자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극중 작가인 릭 얀시가 자신이 서기 1876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일기를 입수하게 된다. 취재를 위해 요양원 원장과 알게 되었고, 최근에 사망한 입주자였던 노인의 소지품에서 두툼한 공책 열세 권을 발견했는데, 그에게 친척도 없고 신분증도 없었던 탓에 그것이 가족 친지를 찾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냥 미친 노인이 끄적인 소설인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백서른 한 살이었던 그가 과거에 겪었던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는 그의 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12세 고아 소년 윌 헨리와 그의 괴팍한 스승인 괴물학자 펠리노어 워스롭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도굴꾼이 박사를 찾아와 시체 한 구를 넘겨주는데, 그것은 머리가 없는 식인 괴물인 안트로포파기의 습격을 받은 소녀였다. 박사는 보통 서른 마리 정도가 무리를 짓는 안트로포파기의 습성을 알고 있기에, 원래 미국에 서식하지 않는 그것들이 어떻게 나타나게 된 것인지 추적하기 시작한다.

인간을 잡아먹는 사람과의 직립보행 동물인 안트로포파기는 머리가 어깨 밑에 자라는 종족이라는 설명으로 셰익스피어에도 등장하는 괴물이다. 키는 2미터에 팔은 길고 다리는 굵고 튼튼하며 몸의 색깔은 시체처럼 희멀겋다. 머리가 없는데, 가슴에 뻥 뚤린 구멍이 있으며, 단단한 근육질의 가슴 아래 위치한 입, 눈은 어깨에 붙어 있는데 눈꺼풀은 없고 눈동자 전체가 새까맣다. 안트로포파기는 인간의 가장 고결한 장기인 뇌를 선호한다. 그리고 안트로포파기의 가장 놀라운 특성 중 하나는 새끼들을 거의 맹목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인데, 그들이 결코 제 새끼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 그들 종족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난폭하고 무자비한 공격을 일삼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리고 연약한 새끼에 대한 보호본능이야말로 인간이 그들과 전쟁을 치를 때 공략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 고독하고 별난 인물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세상에서 제일 난해하고 비밀스러운 학문에 평생을 바쳤건만 세상천치 알아주는 사람 하나, 기억해 주는 사람 하나 없고 그럼에도 이 세상 모두가 너무나도 큰 빚을 지고 있는 천재 과학자. 인간미나 다정함이라고는 단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고, 타인의 마음은커녕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열두 살 소년의 심정도 헤아릴 줄 모르는 작자였다! ...........그는 얼버무리지 않았다. 상투적인 위로나 진부한 사탕발림도 늘어놓지 않았다. 그가 나를 구한 것은 내 목숨이 그에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내 목숨을 구했다. 앞으로도 자신의 야심을 마음껏 펼치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심지어 자비를 베풀 때에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사람이었다.

 

12세 소년 윌 헨리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 박사의 괴팍하고 이상한 부분이 고스란히 독자들에게도 전달이 된다. 소년은 자신의 스승처럼 귀신이나 유령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았지만, 박사의 곁에서 안트로포파기의 실체를 직접 경험하고는 겁에 질린다. 오로지 아버지가 박사의 조수였다는 이유로, 어린 나이에 갈 곳 없는 그를 데리고 있는 박사는 자상하지도, 너그럽지도 않지만, 소년은 그를 거의 맹목적으로 믿고 따른다. 어떤 잔인한 상황 속에서도, 무슨 끔찍한 일을 벌이더라도 항상 조수가 곁에 있어야 하는 박사이기 때문에 소년은 어린 나이에 말도 안 되게 무서운 모험들을 겪게 된다. 시리즈가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윌 헨리의 모험과 성장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와 스티븐 킹의 절묘한 조합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작품은 <5침공>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 릭 얀시의 대표 시리즈이다. 19세기 말엽 미국을 배경으로 괴물학자라는 색다른 직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으로 4부작이다. 미지의 것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기괴하고 유머스럽지만 오싹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라, 요즘 같은 날씨에 더위를 한 방에 날려 줄 수 있을 것 같다. 밤에 읽으면 오싹함이 배가 되니, 꼭 캄캄한 밤에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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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시간, 그 너머 - 원자가 되어 떠나는 우주 여행기
크리스토프 갈파르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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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해본 적이 있는가? 고층건물 꼭대기 층의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고? 그랬다면 이미 죽었을 테니까. 나 역시 그런 짓을 했다면 죽었을 것이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걸까?

답은 간단하면서도 신비하고 심오하다. 인류가 지구와 하늘의 작은 일부를 지배할 수 있게 된 이유가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 별을 보고 온 이유도 그 안에 들어 있다. 또한 자연의 법칙이 그 답과 관련되어 있다.

달랑 우리 몸 하나로 저 먼 우주를 여행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한, 시공을 이런 식으로 여행하는 것은 머릿속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정보를 운반할 수 있는 그 무엇도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가능하다. 크리스토프 갈파르는 인간의 정신이 그려낸 우주를 여행하는 화자가 되어 우리에게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억 개나 되는 새로운 은하들을 지나치며, 별들이 폭발해서 초신성이 되는 모습도 보고, 광대한 우주 공간에서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광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핵의 온도가 섭씨 1600만이나 되는 태양의 안쪽으로 들어가보기도 하고, 지구에서 100억 광년이 넘는 거리에서 최초의 별들조차 태어나지 않았던 우주 암흑시대를 여행하기도 한다.

스티븐 호킹의 직속제자이자 차세대 천체물리학자 크리스토프 갈파르는 과학에 전혀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도 쉽게 이야기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마치 소설과 같은 방식으로 이 책을 풀어내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그저 소설을 읽는 것처럼 가볍고, 편안한 방식으로 접근해도 오늘날 과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알아낸 우주를 여행하게 되는 것이다.

인류가 현대 물리학으로 현실을 파악하게 된 과정이라고 하면 뭔가 딱딱한 수식이 가득할 것만 같지만,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식이라고는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방정식 단 하나에 불과하다. 전 세계가 극찬한 천체 물리학 입문서이자, 대중 과학서의 걸작이라는 평가가 괜한 것이 아니라는 걸, 단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빅뱅, 블랙홀, 암흑 물질에서 상대성이론까지... 차세대 천체물리학자가 알려주는 우주의 신비는 매우 놀랍고도, 황홀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아인슈타인도 생각실험을 많이 이용했다. 그는 빛의 속도가 고정된 한계속도라면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해보았다. 자신이 광자 위에 앉아 있다고 가정하고, 그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상상을 하던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들어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 책에서 내가 타고 여행했던 비행기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비행기가 400년 뒤의 미래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도 역시 ''으로 증명되었다.

직관은 지금까지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준 상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지만, 100여 년 전부터 수많은 새로운 발견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처럼, 상상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에 나타나는 우주가 '지금'의 우주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굉장히 매혹적이면서도 설레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밤하늘의 우주는 과거의 한 조각이며, 그 과거는 지구에 있는 우리 때문에 지구를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말도 된다. 크리스토프 갈파르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물건들도 모두 자기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자기 우주의 중심에 있고, 우리는 우리에게 닿는 빛을 통해 그 우주를 탐사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부분들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우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저 지금 있는 곳에서 빅뱅과 그 너머까지 바라볼 수 있고, 눈 깜짝할 사이에 700만 년 전의 과거에 도달하고, 또 한 번 눈을 깜박이며 6500만 년 전에 가 있고, 또 한 번 눈을 깜박하며 40억 년도 더 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20억 년 정도를 더 거슬러 올라가 출발할 때 보았던 우주의 절반 크기도 안 되는 우주가 보이는 지점에서, 지구가 태어나기 50억 년 전으로, 그리고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역시 암흑시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천체물리학자인 크리스토프 갈파르의 인생 목표가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대중들에게도 최첨단의 과학 지식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이 책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 목표는 달성한 게 아닌가 싶다. 인류의 역사를 빛낸 위대한 과학자들의 실험 방법으로 우리를 우주와 시간의 세계로 인도하는 그의 솜씨는 놀라울 정도로 쉽고, 친근하고, 재미있다.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과 양자물리학, 그리고 중력이라는 개념이 이렇게 쉬울 수도 있구나 놀라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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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체온증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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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신작 '저체온증'이 출간되었다. 형사 에를렌뒤르 시리즈로 국내에 출간된 순으로는 네 번째 작품이다. 그 동안 국내에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 <목소리>가 출간되었었고, 이 책들은 모두 절판 상태이다. 그리고 무려 8년 만에 만나게 되는 새로운 에를렌두르 시리즈라니.. 감격스럽다!!! 에를렌두르 시리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늘하고 슬픈, 북유럽 미스터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게다가 경찰소설로는 독특하게도 사건 수사 자체보다 주인공의 내면 묘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시리즈들이기도 하다.

"아들 일과 관련해서 무슨 소식이 있소?" 노인이 커피를 반쯤 마시고 나서 물었다. "새로운 소식은?"

"아니요, 죄송하지만 새로운 소식이 없습니다." 에를렌뒤르는 지금껏 몇 번을 반복했을지 모를 대답을 재차 했다. 그는 노인의 방문을 자기에게 떨어진 시련으로 여기지 않았다. 에를렌뒤르 입장에서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다른 부분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일어난 일이 자기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지옥을 안겼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어떻게 아무 소식도 없을 수 있는지 되풀이해서 말하는 노인의 항변을 묵묵히 듣는 것 말고는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한 여성이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각별한 사이였던 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많이 힘들어했다는 주변의 증언과 정황들로 그녀의 죽음이 그저 평범한 자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는 마리아가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에를렌뒤르 형사에게 강력하게 주장하며,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마리아가 영매와 나눈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를 준다. 범인을 잡고 처벌하는 것보다, 남겨진 무고한 사람들에게 다시 진짜 삶을 돌려줄 답을 찾아내는 게 수사의 진짜 목적이라고 믿는 에를렌뒤르는 동료들 몰래 혼자 수사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그 스스로도 마리아가 살해됐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는 그저 그녀가 자살한 이유가 알고 싶었다.

 

아이슬란드의 고독한 형사 에를렌뒤르.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과 고독과 자책감에 귀 기울이며, 넋두리 같은 원망을 듣는 일을 지겨운 시련으로 여기지 않는 형사. 기꺼이 사라진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수호천사가 되고자 하는 남자. 무려 삼십 년 전에 실종된 아들의 부모가 여전히 에를렌뒤르를 찾아온다. 아들 소식이 없나 해서 경찰서에 들른 것이다. 당시 경찰은 그들의 아들이 실종된 사건 관련하여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하지만 에를렌뒤르는 그 사건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에게는 그 어떤 사건도 과거의 그것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겨진 이들에게 그것은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자살한 여자의 남편과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앉아 대화를 주고받는 남자, 죽은 이들과 사라진 이들과 슬퍼하는 이들의 마음을 지극히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남자, 그렇게 자신이 담당하는 사건 모두가 그에게 개인적인 상처와 슬픔이 된다.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형사 생활이 위태로워지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손에 잡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이, 의심에 의심만 쌓인 사건입니다. 근거로 삼을 것이라곤 파편들뿐이죠. 제게는 단순한 연결 고리들이, 나중에 발생한 사건들을 잇는 일종의 배경이 필요합니다. 이야기 속 간극을 채워야 합니다. 그들의 재정적인 배경까지 포함해서 말이지요. 이런 부탁을 드리는 이유는..... 범죄행위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이런 부탁을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도 모르는 추악한 범죄를.... 요주의 인물이 저지르고..... 상황을 모면한 듯 보입니다. "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그렇게 시종일관, 아무런 단서도 없이 홀로 마리아의 삶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해 조사를 하는 에를렌뒤르 형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경찰이 수사가 아니라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조사하는 내용이 거의 책 내용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 죽게 되면 남겨진 이들은 자책한다. 내가 그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그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면 지금 뭐라도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에를렌뒤르가 수사를 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에 있다. 마리아의 친구와 주변인들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고통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그들에게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어 주기 위해서. 왜냐하면 이미 죽은 이는 그 어떤 대답도 들려줄 수 없으니까. 남겨진 이들은 답을 찾지 못하는 한, 영원히 그 죽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말이다.

사실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은 직업인으로서 경찰이 겪는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경찰 조직을 스쳐 지나가는 배경 정도로만 남겨두고, 곧장 주인공 에를렌뒤르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그렇게 경찰 수사의 디테일과 조직 내 구성원으로서의 고뇌 등을 덜어내는 과감한 선택을 통해, 주인공의 개인적 고통과 사적인 불행이 그의 직업과 어떤 식으로 연관을 맺는지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독특한 미스터리가 만들어진다. 살인과 죽음이 아니라, 사건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경찰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평생을 상실감과 고통을 안고 견뎌야 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정에 공감하는 경찰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래서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는 특별하다. 이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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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
루스 호건 지음, 김지원 옮김 / 레드박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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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두아의 경우 로라가 이 집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쟁반보 때문이었다. 앤서니는 면접을 보면서 그녀에게 차를 내줬다. 그는 정원이 보이는 방으로 쟁반을 가져왔다. 덮개를 씌운 찻주전자, 우유 주전자, 설탈 그릇과 집게, 컵과 받침, 은제 티스푼, 차 거름망과 받침. 쟁반보를 깐 쟁반 위에 그 모든 것이 놓여 있었다. 쟁반보는 새하얗고 가장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리넨이었다. 쟁반보가 방점을 찍었다. 파두아는 쟁반보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것들이 일상인 곳이었다. 그리고 퍼듀 선생은 정확히 로라가 꿈꿔왔던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앤서니는 사랑하는 연인이 세상을 떠난 지 사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잊지 않는다. 약혼녀가 세상을 떠난 날 그녀가 선물했던 작은 메달리온을 잃어버리고는, 이후로 사람들이 잃어버린 물건들을 주워 서재에 보관하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물건의 주인을 찾아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의 서재에는 선반과 서랍마다 그가 사십 년 동안 모아온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각각의 물건에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물건을 발견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상세히 적고 어떤 것인지 기록해 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던 로라는 유산과 함께 아이를 갖고자 하는 집착과 남편과의 불화로 수년을 불행하게 보냈고, 결국 남편이 바람을 피움으로써 결혼 생활을 정리한다. 불만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망감에 의사에게 우울증 약을 처방 받기 위해 병원에 들어갔다가 대기실에서 잡지 광고를 발견한다. 남성 작가의 가정부 겸 개인 비서를 구한다는 광고에 지원한 로라는 앤서니를 만나게 되고, 그의 집에서 비서로 일을 하며 그와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예감한 앤서니는 비서인 로라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집과 장미 정원, 전 재산을 물려준다. 단 그의 유언에는 조건이 있었으니, 자신이 그 동안 서재에 모아둔 수많은 분실물들을 잘 맡아서 주인을 찾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물건들은 별 가치가 없고 돌려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린 걸 되찾아줘서 행복하게 해주거나, 그의 부서진 심장이라도 고쳐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이다. 앤서니가 꽤 유명한 작가였던 탓에 로라는 동네에서 화제의 인물이 된다. 무뚝뚝한 가정부에게 앤서니가 모든 유산을 물려준 것이 수상했을 테니 말이다.

"로라, 내 친애하는 사랑스럽고 유쾌하고 영리하고 완벽하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로라. 넌 대단히 크고 아름다운 집과 보물들과 섹시한 정원사까지 한꺼번에 물려받았어. 앤서니는 널 딸처럼 사랑했고 자신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너한테 줄 만큼 믿었어. 그런데 좋아서 춤을 추는 대신에 넌 여기 앉아 징징거리고 있지. 그는 널 믿었어. 나도 항상 너를 믿고. 네가 숨는 상대는 선샤인만이 아니야. 넌 모든 것으로부터 숨고 있어. 그리고 이제는 숨는 걸 그만두고 인생의 엉덩이를 걷어찰 때가 됐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지옥으로나 가라고 해."

이야기는 현재의 로라와 40년 전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유니스의 사연이 교차로 진행된다. 그리고 앤서니의 서재에 있는 분실물들 각각이 품고 있는 사연들이 액자 소설처럼 중간중간 등장한다. 로라는 어마어마한 분실물들을 다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히고 부답스럽기만 하다. 그런 그녀의 곁에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녀 선샤인과 잘생긴 정원사 프레디가 합세해 잃어버린 물건들을 위한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꼬리표가 달려 있는 분실물들을 주인에게 찾아주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처음 단 몇 페이지 만에 그냥 훅 빠져 버렸을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설레고 뭉클한 것들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읽는 내내 책 속에 등장하는 도넛과 밀크티가 먹고 싶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심플한 플롯이지만 그 사이사이를 채우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따뜻하고 유쾌해서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초반 설정부터 굉장히 동화스러운 인물들과 배경이 등장하는데, 이들 각각의 사연들이 굉장히 현실적이고 공감적인 부분이 많아서 단순하지 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언젠가 지하철 유실물 센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물건에 담긴 한 사람의 고유한 추억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루스 호건의 이 소설처럼 잃어버린 물건에 얽힌 사연들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이어주기도 하고,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고, 그 속에 깃든 추억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자신이 반평생 동안 서재에 모아둔 수많은 분실물들의 주인을 찾아 달라는 유언, 이라는 설정 자체부터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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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너를 잃었는가 미드나잇 스릴러
제니 블랙허스트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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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2주 된 아들을 죽인 엄마입니다."

생후 12주 된 아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치료감호소에서 3년을 보낸 한 여자.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들도, 아들 죽인 기억도 없다. 다만 엄마로서 헌신적이었을 뿐. 사람들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수전 웹스터는 이제 죽은 사람이었다. 분명하다. 4주 전에 내가 죽였으니까.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몰라야 했다. 그래서 법적 절차에 따라 이름까지 바꾸었다. 가석방 감찰관조차 나를 엠마라고 불렀다. 아직도 가끔은 이 이름에 대답하는 것을 잊는다. 내 새로운 이름은 엠마 카트라이트다. 물론 사람들은 이 이름을 모른다. 4년 전만 해도 나는 수접 웹스터였다. 이 사실을 알고 어떤 사람들은 콧등을 찡그릴지도 모르겠다... 북부에 사는 사람이라면 '맞아, 아들을 죽인 여자 아니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중얼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북부가 아닌 곳에 사는 더 많은 사람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생후 12주 된 아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치료 감호소에서 3년을 보낸 뒤 거주지와 이름까지 바꾸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는 한 여인에게 편지가 도착한다. 봉투 앞면에 쓰인 글자를 보자마자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지우고자 했던 과거의 이름 수전 웹스터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봉투 속에는 어린 남자아이의 사진이 있었고, 뒷면에는 그녀의 죽은 아들 딜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딜런은 생후 3개월 만에 죽었는데, 사진 속 아이는 두어 살쯤 되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누군가의 못된 장난일까. 혹은 그녀의 본명을 알고 있다는 경고이자 협박인 걸까. 그녀는 신경이 쓰여 도서관에서 딜런 사건에 대한 기사들을 검색해보고, 그 와중에 자신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섰던 매튜 라일리 박사가 최근에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기자가 그녀를 찾아온다. 당연히 그녀는 관심 없다며 기자를 내보내지만, 최근에 실종된 라일리 박사에 대한 글을 쓴 것이 그라는 걸 알게 되고 나자, 의문의 사진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그를 만나보기로 한다. 그렇게 수감 중에 만난 그녀의 유일한 친구 캐시와 기자인 닉과 함께 잊고 살고 싶었던 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사진은, 자신이 아들을 죽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아들이 행복하게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밝혀낼 기회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 남들이 했다고 하는 그 행동에 대해 전혀 기억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아들을 죽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매일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여태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물론 누군가 그녀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거나, 겁을 주려고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사소한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고 싶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미친 소리 같겠지만 아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조금의 기대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아기를, 내 아들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끔찍하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바로 내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신은 그토록 인정하기 힘든 사실을 우스운 방식으로 직면하도록 했다.

나는 두려움과 좌절로 한숨을 쉬었다. "캐시, 이건 가능성이 가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사건의 유일한 원인이야. 내가 저지른 일을 빨리 받아들일수록 내 상태가 나아질 가망이 커질 거야."

하지만 나는 자신을 믿지 못했다. 내 상태가 다시 좋아지리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수전의 서술과 과거 어린 소년들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영아 살인 사건의 실체에 대해 추적하는 현재의 이야기와 소년들의 이야기는 전혀 접점이 없는 것처럼 별개로 진행되지만, 그 두 이야기가 교차되는 지점에 이르면서 현재의 미스터리에 숨겨진 비밀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실제로 산후 우울증을 겪던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살해했다는 비극적인 뉴스를 종종 접했었기에, 이 작품 역시 그 비극에 숨겨진 배경이나 여성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가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의 플롯과 구성은 그런 예상을 완전히 비켜가면서 진행된다. 과거의 한 지점에서 멈춰버린 거대한 구멍, 자신의 삶에 생긴 그것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사건을 추적하는 인물,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숨기고 있던 진실은 경악스러울 만큼 끔찍한 과거를 드러낸다.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나 경찰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스릴러로서 페이지 터너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이 작품이 제니 블랙허스트의 데뷔작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어린 시절부터 범죄 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작가는 아끼는 소설로 가득했던 책장이 아이가 생기고 인형과 아기 용품으로 채워지고, 하루의 대부분을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생활로 보내게 되면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경험에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개인이 어떤 사건에 얽혀 소중하게 지켜왔던 평범한 것이 산산조각 날 때의 감정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사실에 가깝게 그려내는 솜씨 또한 대단해, 그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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