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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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뇨, 이것만큼은 꼭 받아 주십시오. 이건 저의.......뭐랄까. 오기 같은 것입니다."

"오기?"

". 뭐랄까, 이런 불합리한 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없애고도 태연한 사람들, 그런 세상이랄까, 사법제도랄까. 그런 것에 대한 제 오기입니다."

"가와이 씨는.........진짜 변호사야. 정말 감동적이군."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와타나베 토건의 사장 와타나베 쓰네조의 외동딸이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몸값으로 1억 엔을 내놓으면 미카를 보내주겠다는 유괴범의 말에 아내인 미키코가 지시대로 돈을 준비해서 약속 장소로 나간다. 하지만 애초에 경찰은 범인 검거 전에 몸값을 줄 생각이 없었고, 그들의 판단으로 돈은 유괴범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이후 범인에게선 연락이 딱 끊기고, 결국 미카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만다. 그런데 만약 경찰의 잘못된 판단으로 몸값을 주지 못해서 딸이 그렇게 된 거라면? 와타나베 쓰네조는 그럴 경우 지시를 한 모리타 본부장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른다. 모리타 역시 그와 뇌물 수수 등으로 연결된 사이였기에, 그가 사실 관계를 폭로하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는 범인이 강에 1억 엔을 떨어뜨리라고 지시한 시점에 이미 미카를 살해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만 한다. 시체 검시와 감정에 따라 밝혀질 미카의 사망 시각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살인 사건에서 '누가 범인인가' 보다 '언제 죽었나'가 더 중요해진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야기는 실제 범인이 누구인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가와 상관없이 진행되어 간다. 게다가 작가는 초반부터 체포된 남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시작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전과 3범인데다 현장에서 지문까지 나왔고, 자백까지 한 용의자가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 자백을 강요당한 거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백퍼센트 믿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사건의 발생부터 시작하여 용의자를 체포, 취조하고, 검찰에 송치, 1심 재판에 이은 항소심 재판까지의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그려놓은 이 작품은 픽션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치밀하다. 일본 사법 체계의 부조리는 비단 그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의 그것 또한 다를 바가 없기에 더욱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인생은 화와 복, 즉 재앙도 행복도 서로 뒤섞여 꼬인 새끼줄 같다는 의미인데, 내가 원죄사건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는 이유는 원죄라는 건 결코 한두 사람의 악인이 품은 악의나 누군가 한 사람의 실수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수십 가닥의 짚이 꼬여서 굵은 밧줄이 되는 것처럼, 수십 명의 인간이 한 일, 즉 악의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다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다양한 인간 활동이 섞이고 얽히고설켜, 그것이 어떨 땐 원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일세. 그걸 항상 통감해."

평소 자주 다니던 숲길을 지나다가 가방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열어 봤더니 소지품과 지갑이 있었다. 지갑에는 지폐가 몇 장 있었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도 몰래 돈을 꺼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더 걸어가려는데, 낙엽 위에서 누군가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무심코 다가가 몸을 만졌는데, 너무도 차가웠다. 자는 게 아니라 시체였던 거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 그 순간을 모면하려 도망쳤을 수도, 혹은 경찰에 신고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은 당연히 최초 발견자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취조를 하게 되고, 겁 많고 당황한 나의 반응에 용의자로 의심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결백한 사람이 그럴듯한 상황 증거만으로 기소되어, 끝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는 일이 과연 말도 안 되는 일일까? 극중 고바야시가 처한 상황은 너무도 리얼해서 읽는 내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느껴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자백할 리가 없지 않나 싶다가도, 혹독한 취조와 강압에 의해 정신 못 차리는 그의 처지에 어느 순간 말도 안 되는 판단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실에서도 무고한 사람이 판결을 받고, 수감되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무죄로 판결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평범한 일반인들에게는 법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돈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배경이 없을 경우에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이런 불합리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에 막막한 기분마저 든다. 작가인 사쿠 다쓰키는 현직 변호사라는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해서 수많은 형사사건을 다루면서 겪어 왔던 과정을 매우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일선형사의 성실한 직무 집행이 오히려 누군가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된다는 사실 또한 서글픈 아이러니를 보여주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악의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다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얽히고설켜 원죄사건이 만들어진다는 극중 대사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쉽사리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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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한 달을 살다 낯선 곳에서 살아보기
전혜인 글.사진 / 알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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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여행객이 아니라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건, 나의 오랜 염원이자 꿈이었다.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환상같은 것이 어릴 적부터 있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다 결국 못가게 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명 관광지만 둘러보는 여행이 아닌, 일상을 겪으면서 그 나라를 느끼는 여행을 꼭 해보고 싶었던 터라, 이 책은 그런 저의 로망을 실형시켜 줄 것 같아서 기대가 되었다.

방송작가 일을 하고 있는 서른 넘은 유부녀인 저자에게, '파리에서 한 달 살기'라는 건 마냥 쉬운 도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야심 찬 파리 한달 프로젝트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지만, 그 너머엔 수많은 현실적인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르고 닳도록 일만 하는 반복되는 일상에 큰마음 먹고 변화구를 던져 보기로 한다. 만약 자신이 파리에 감으로써 어떤 문이 닫힌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이 닫힐 때 예상치 못했던 다른 문이 열릴 거라는 '무모한' 확신으로 그렇게 그녀는 파리로 가는 항공권을 예약하기로 한다. 그렇게 파리행 티켓은 반복되는 일상에 내미는 소심한 사표였다. 아, 멋지다. 그녀의 용감한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뭔가에 홀린 듯 파리에서 한 달을 살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만 현실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직장인 유부녀'라 함은,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 있고 결혼 생활을 함께하는 남편도 있다는 얘기다.........막상 파리에 도착하고 보니, 이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하루걸러 하루마다 여행을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그토록 싸워야 했나 조금은 허탈한 마음마저 들었다. 인생이 곧잘 여행에 비유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번은 스튜디오 키친에 아침을 먹으러 갔다가 한 마리의 라따뚜이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조그맣고 마른 체구를 가진 쥐를 보고는 흠칫 놀라 비명을 지르고는 스튜디오 호스트에게 다급하게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그 날 저녁, 호스트 할아버지는 앞으론 관리를 더욱 철저하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흥미로운 질문을 한다. 쥐가 크기가 작았냐고. 아마 새끼 쥐 일 것 같다고 대답하자, 할아버지는 갑자기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향긋한 장미향을 맡으며 입을 오물거리니 생각지도 못한 상큼한 맛이 점 하나로 혀에 닿으며 콕 박힌다. 마치 고양이가 솜방망이 펀치를 한 대 때리고 부드러운 털로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맛이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이 혼미해진 나머지 근처 벤치를 찾아 털썩 주저 않았다........그동안 마카롱의 맛을 잘 몰랐던 건, 제대로 된 마카롱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만든 마카롱은 실로 위대한 디저트임이 틀림없다.

파리산 마카롱에는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두 시간쯤 잊을 힘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부러움이 백만배 생기는 듯한 기분이다.

저자는 그렇게 프랑스의 각종 빵과 디저트를 먹고, 간단하게라도 코스로 나오는 프랑스식 만찬을 즐기고, 센 강 변에 앉아 책을 읽고, 노상 카페에서 와인을 마시고, 작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파티에 초대되어 현지인들과 즐겁게 지내고, 작은 재즈바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파리의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말한다. 파리만큼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여행하기에 좋은 도시를 보지 못했다고. 홀로 존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곳이 파리라고 하니, 파리에 대한 나의 로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러겠지만, 시간이 여유가 있을 때는 돈이 없고, 돈이 충분할 때는 또 시간이 없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그것도 긴 비행 시간을 자랑하면 유럽이나 미주쪽 여행이라면 더욱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나도 힘겹게 쪼개어 낸 시간을 가까운 아시아 쪽 나라를 여행 다녀오는 걸로 잠시 일상을 벗어나곤 했었다. 물론 그 여행들도 너무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들을 가득 남겨 주었지만, 언젠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던 그곳 파리에 가보고 싶다. 저자처럼 '혼자 여행'을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직 해외 여행을 혼자 떠나보지 못한 나에게 그건 말처럼 쉽지 만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책에서 헤밍웨이는 자신의 파리에 대한 사랑을 유감없이 그려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도 파리에 다녀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 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가 파리에 체류하던 5년, 그때 그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으니 문학의 거장이 아니라 풋내기 작가 지망생이었다. 책 속에서 그는 셰익스피어앤컴퍼니 서점에서 외상으로 책을 빌려 읽고 오늘 하루 먹을 음식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가난한 문학청년이었다. 그 가난한 젊은이가 훗날 노벨문학상, 퓰리처상을 받는 대작가라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아마 본인도 몰랐을 거다.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파리는 머무는 자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곳이다. 나도 언젠가는 일상에 소심한 사표를 던지고, 파리에서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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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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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갔던 곳이 오사카와 교토였다. 꽤 오래 전이어서 세세한 부분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오사카하면 북적거리는 맛집들, 교토하면 정적인 시골 풍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오사카에선 지하철을 이용해 편리하게 이동하다가, 교토로 향하면서 낯선 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정류장 안내 방송이 일본어로만 진행되었고, 하차 정류장 표시도 모두 한자여서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구글 맵을 켜서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는데, 어렵사리 도착한 그곳의 정취가 그 모든 어수선함을 한 번에 씻겨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사카의 번화한 거리에서 벗어나 도착한 교토는 너무도 한적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도시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 후로도 일본의 여러 곳을 다녀왔지만, 교토에서만큼 진짜 일본을 만난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교토야말로 가장 일본스러운, 그들의 역사와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임경선 작가가 교토에서 한 계절을 겪으면서,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정서와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도시의 기억을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일부러 멋을 부리지 않는 도시, 돈보다는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한 도시, 전통을 지키면서 미래의 모습을 모색하는 도시, 교토는 그렇게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지켜나가는 매혹적인 곳이다.

 

천 년 역사의 도시 교토에서는 창업한 지 100년이 넘은 가게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인걸요' 라며 겸손해한다.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에 창업한 가게도 '최근에 창업한' 범주에 들어간다. 10, 20년 된 가게는 아예 명함도 못 내민다. 최소한 3대에 걸쳐 지켜온 가게라야 교토에선 '노포' (일본어로는 '시니세'라고 한다)라는 영예로운 호칭이 주어진다.

 

'세월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란 아무리 현대적이고, 세련되고, 화려한 외관을 구축하더라도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반짝거리는 새것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낡고 약간 녹슨 듯한 세월의 흔적, 그리고 거기서 비롯하는 향수 어린 감성'이 가득한 도시 교토에는 노포들이 많다. 그들은 대대손손 가업을 이어가고, 오랜 경영으로 얻은 고객의 신용 등 무형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가게만의 독창적이거나 개성적인 제품을 가지고 있고, 생산과 판매를 겸한 장인이자 상인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교토의 노포에서는 무조건 손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을 대등하게 여긴다는 건 그만큼 자기가 만들고 파는 제품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새건이 좋다거나 오래된 것이 좋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겁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항상 더 좋아질 여지가 있습니다."

번거롭게 수고를 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인기 제품보다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수제품을 더 가치 있게 여겨 선택하는 것이 바로 교토 사람들이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오랜 시간들을 도시에 품고 살 수 잇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교토의 곳곳에서는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전통 거리의 은은하고 서정적인 풍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업의 간판 색깔은 얼마든지 바꾸겠다는 암묵적인 다짐. 들쑥날쑥 제멋대로 지어진 잿빛 빌딩들이 경관을 훼손하게 둘 수는 없다는 결심. 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화류가에서는 아름답지 못한 전봇대를 땅 밑으로 집어넣어 전선 없는 거리로 만들어놓고야 마는 의지.

 

교토에는 경관 조례법이 있어 지나치게 화려한 간판 색깔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우리 나라의 인사동 스타벅스가 전통 거리의 정체성에 맞춰 영문이 아닌 한글로 간판을 달고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교토의 맥도날드 로고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새빨간색 바탕에 진노랑색 로고가 아니라, 갈색 바탕에 채도가 낮은 노란색 로고로 되어 있고, 편의점 로손의 간판도, 의류점 유니클로의 간판도 마찬가지이다. 교토라는 도시의 아름다움을 위해 주민들과 기업들이 기꺼이 협조하는 풍경,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각자가 조금씩 양보하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 이 도시의 풍경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임경선 작가가 경험한 교토에서는, 동네 서점은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기네 서점을 찾지 못하면 매장으로 전화해 문의해달라고 당부하고, 카페는 아이들과 시간을 좀 더 보내기 위해 일주일에 나흘만 영업하고, 잡화 가게는 미리 알고 찾은 손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오가는 사람들이 불쑥 찾지 않게 하기 위해 간판을 달지 않는다. 2017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신기한 태도와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빠르게 변화하고, 눈코뜰새없이 바쁘게만 생활하는 서울의 일상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교토의 가게들이 부러워진다. 그곳에서는 그저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쉼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교토 사람에게 뭔가를 제안했을 때 “고맙습니다. 그것 참 좋군요”라는 답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5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퇴짜맞은 거라고 보면 된다. 만약 “생각 좀 해볼게요”라고 하면 그것은 100퍼센트 거절을 뜻하니 그것을 오해하고 ‘그럼 희망이 있다는 거잖아’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놓고 싫다고 거절하면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니까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일화들이 흥미로웠지만, 특히 교토식 소통법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오사카 사람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고 대놓고 들이대는 스타일이라면 교토 사람은 말을 모호하게 하고 알아듣기 어렵게 우회적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신경 쓰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어떻게든 전달하려는 것, 이것이 교토식 소통 방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뭔가를 부탁할 때도 해달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해주시진 않으시겠지요. 식으로 자신을 낮추고 말꼬리를 흘리듯이 말한다고.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도 마치 이해한다는 듯이 부드러운 추임새를 넣는 식이다.

외지인들로부터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속을 드러내지 않는 간접 화법을 채택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 어떻든 교토식 언어를 알게 되고 나니, 어쩐지 그들의 삶을 반 정도는 이해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돈이나 물질적인 것보다도 가치관이나 살아가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말이다. 이런 건 며칠 관광을 다녀오는 걸로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그들과 일상을 함께 보내고 나서야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이 책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 교토에 다녀왔거나, 교토를 가볼 예정이라면 이 책은 정말 특별한 여행 가이드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한다.

 

임경선 작가는 '도교가 감각의 도시라면 교토는 정서의 도시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토에서는 느릿느릿 걷다 보면 구석구석 빈틈으로 사유가 비집고 들어온다고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다. 장소가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니 이 얼마나 매혹적인 비유인가 말이다. 그녀는 살아가면서 생각의 중심을 놓칠 때,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낄 때,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마음을 비워낼 필요가 있을 때, 이곳 교토가 무척 그리워질 것 같다고 말한다. 여행이 뭔가를 채우기 위한 목적도 될 수 있겠지만, 교토에서처럼 뭔가를 비우기 위한 시간도 된다면 얼마나 멋질까.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는 우리들에게 여행이란 잠시 일상을 벗어나 쉴 수 있는 선물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유명 관광지를 찾아 다니고, 맛집을 투어하고, 기념품과 면세품을 잔뜩 사느라 에너지를 다 소비하지 말고, 정서의 도시 교토에서 비우고, 내려놓고, 여유를 가득 채워보는 건 어떨까. 여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리고, 여행 시즌도 다 지나버렸지만,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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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1. 보온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오리진 시리즈 1
윤태호 지음, 이정모 교양 글, 김진화 교양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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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내부자들>, <인천상륙작전>, <이끼> 등 철저하고 방대한 자료 조사로 정평이 난 윤태호 작가는 작품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 취재하고, 관련 책을 읽고 정리하면서도 늘 아쉬움이 남았다고 한다. 작품의 연재가 끝나면 사라지는 지식들로 인해 '제대로' 알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는 거다. 흔히 말하는 '교양'이라는 것에 대해 알기 쉽게 서사와 연결하고, 드라마의 힘을 결합한 정보로 기억에 강하게 남는 책을 기획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오리진' 시리즈이다.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탐구하겠다는 '오리진' 시리즈는 무려 전체 100권으로 기획된 작품이다. 그리고 그 시리즈 1권의 주제는 '보온'이다. 이어 에티켓, 돈, 상대성이론, 지도, 노화, 기원전후, 열쇠, 아름다움, 알파벳 등 인문, 철학, 예술, 과학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진행될 예정이다. '교양'이라고 하면 지루하고, 딱딱한 느낌부터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야기꾼 윤태호 작가라기에 기대감부터 들었다.

 

체온이 떨어진 이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온정이다. 미래에서 온 로봇 봉투가 체온이 떨어진 남자를 안아준다. 그 남자는 망한 과학자들에게 따뜻한 방을 제공한다. 보온은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이다.

 

이 로봇이 학습해야 하는 것은교양과 그기원이며 범위는모든 것과 그 모든 것의시작이다. 시간이 지나면 성장한다. 하지만 그냥 더 똑똑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처럼 성장한다. 배움이 없으면 배움 없이 성장한다.

 

로봇의 연령은 21세기 기준으로 5~6세 정도로 시간이 지나면 성장하지만, 그냥 더 독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시켜야 한다. 이 로봇은 답반을 구하는 로봇이 아닌 학습을 해야하는 로봇으로, 그 과정과 결과가 미래 인류에게 삶의 의지를 일깨워줄 거라는 거였다. 그러다 날린 투자금 때문에 불철주야 회사 근처에서 서식하던 인물 봉황이 나타나고, 그는 돈이 될만한 뭐라도 가져오라는 아내의 성화에 로봇이라도 데려가야겠다고 큰소리 친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마음 약한 그는 갈 곳 없는 과학자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비어 있는 방에 하숙을 하도록 권유를 하고, 그렇게 미래에서 온 로봇 봉투와 봉황의 가족, 그리고 과학들의 동거가 시작된다.

같은 따스함이면 너와 같아질 수 있을까.

봉원의 동생이라고 봉투라는 이름이 붙게 된 로봇은 그들의 집에서 아이가 감기때문에 고열에 시달리자, 엄마가 아이의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안고 있는 걸 보게 된다. 평균 체온인 자신의 몸을 찬물 샤워로 시원하게 한 다음 열이 오른 아이를 안고 있으면 열이 부모에게로 옮겨져 온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봉투는 열의 의미와 보온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활성화된 하나의 '생각' 중에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어지는 2부 오리진 교양에서는 서울시립과학단장의 글과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보온'이라는 것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이루어진다. 사람은 36.5도에서 1~2도만 높아지거나 낮아져도 생명이 위험해지는 존재이다. 그러니 외부 환경의 변화에 관계 없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니, 열을 지키는 보온은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2부에서는 그 열과 생명의 탄생된 기원부터 생명의 핵심 과제인 '보온'의 의미, 그리고 보온의 인류사와 지구의 보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이야기를 매우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짚어 내어 알기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을 만큼, 쉽게 설명되어 있고 도식화된 이미지들이 눈에 잘 들어온 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꼭 아이들을 위한 만화로 된 과학, 역사 동화 종류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는데, 거기에 더해 어른들도 함께 교양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조금 더 포괄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고 할까. 윤태호 작가 특유의 따뜻함을 전해주는 만화도 재미있었지만, 각 분야 전문가가 쓴 논픽션 또한 매우 흥미로워서, 다음 시리즈가 벌써 부터 기대가 된다.

 

교양 만화 <오리진> 시리즈는 지난 5월 오픈한 웹툰·웹소설 전문 플랫폼 저스툰에 단독으로 연재되고 있다. 1권 '보온'은 플랫폼 오픈과 함께 두 달 동안 연재된 분량을 묶은 것으로, <저스툰>의 연재 웹툰 중에서 최초로 출간된 책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어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책으로 출간되기 전에 먼저 저스툰에서 만나볼 수도 있다는 거다.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온 AI 로봇 ‘봉투’가 21세기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하는 과정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도 매우 기대가 되고, 함께 이어질 각 분야의 교양 정보들도 궁금해진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느라 일반 교과 과정에 대한 공부를 충분히 하지 못했고, 대학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한 학력 콤플렉스도 있었다고 윤태호 작가는 말한다. 그런 그가 지식과 정보의 나열이 이 시리즈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지식과 정보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수많은 정보와 지식으로 목표한 백 권에 다다랐을 때 그려내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는 결국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세상 가장 무식한 사람이 가장 성실한 편집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시리즈에 스스로의 기대가 더욱 크다고 말하는 윤태호 작가의 말이 굉장한 믿음으로 다가온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가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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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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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말이로군요.” 다하라가 말했다.

“정의의 편?” 가모가 중얼거렸다.

…………..

“그 학생들도 사회를 혼란하게 만든 악인이에요. 지역의 안전을 위협하니까요. 그런 놈들이야말로 위험인물이죠. 사실은 그런 놈들에게 벌을 내려야만 한다고요.”

“평화경찰은 진짜 나쁜 놈들은 체포하지 않잖아.”

정부는 평화 경찰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각 지역을 순회하며 사회에 위험이 될 만한 인물을 미리 색출해 공개처형을 한다. 매년 안전 지구를 선정해 평화경찰이 부임해오는데, 올해는 센다이 지역이다. 그들은 테러를 막기 위한 위험인물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해 잔인하게 고문한다. 마치 현대판 마녀사냥처럼 벌어지는 이 행위들에 대해 사람들은 그저 그들이 위험인물이어서 적발된 거라고, 보통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없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형이 되는 사람들부터, 전혀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고발 받은 사람들, 별 의미 없이 연행되어 고문에 의해 자백을 하고 처형당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평화 경찰이라는 자들이 자신의 공권력을 행사해 참혹한 고문을 즐기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자, 몇몇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던 정의감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로, 불의의 공권력에 대항해 그들과 맞서 싸우는 히어로가 등장한다.

위아래가 연결된 검은색 라이더 슈트를 입고 검은색 모자에, 수중안경과 비슷한 큼지막한 고글을 쓰는 남자. 골프공처럼 생긴 동그란 비밀 무기와 목검을 가지고,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나타난 남자. 우리의 블랙 히어로되시겠다. 경찰은 경찰 이외의 사람이 힘을 지니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그 힘이 언제 경찰이나 국가로 향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평화경찰이 공권력을 휘두르는 곳마다 '정의의 편'이 나타나 그들을 방해하고, 그러다 평화경찰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까지 발생하자 정부는 그를 잡기 위해 특별 수사관까지 파견하기에 이른다. 과연 '정의의 편'이라 불리는 수수께끼의 히어로는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을 돕는 걸까. 정말 정부의 불합리한 독재 정책에 맞서 정의를 지키기 위한 의도인 걸까. 흥미로운 것은 이사카 고타로의 히어로는 일반적인 히어로물, 그러니까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마음과 투철한 의식으로 무장한 영웅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반 이후까지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히어로에 대해서 밝혀지는 후반부로 접어 들어야 실체를 접할 수 있는 우리의 영웅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그 어디서도 만나보지 못했던, 상상하지 못했던 히어로의 모습 일테니 말이다.

 

“다하라 씨가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리 불만이 많든, 지금의 이 사회를 살아가야만 해. 룰을 지키며 올바르게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나라를 떠나면 돼. 다만 어느 나라에 가든 이 사회의 연장선상에 있지. 일본보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도 있어. 약도 없고 에어컨도 없지. 말라리아 때문에 고민하는 나라도 있어. 이 나라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예 화성에 가서 살 생각이야?”

‘화성’이라는 단어가 너무 유치하게 들려, 다하라 히코이치의 마음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화성에라도 가서 살 것인가. 희망이 없는 선택지이다.

우리는 인터넷과 IT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개인의 사생활까지 속속들이 추적당하는 이른바 '감시사회'를 살고 있다. 범죄 예방이라는 대의와 명분 하에 어느 곳이든지 CCTV가 설치되고, 개인의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에게 낱낱이 공개될 수 있다. 이는 국가라고 하는 권력이 마음만 먹는다면 개인의 모든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리고 또한 모든 시민을 위험 요소나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사생활과 인권을 내려놓고, 감시사회를 별다른 의심 없이 용인하면서 살고 있다. 감시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를 악용해 국가가 권력의 횡포를 부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걱정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래서 전부터 감시 사회를 소재로 한 책과 영화들은 기존에도 많이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많이 떠올리겠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조금 색채를 달리한다. 극단적이지 않으면서도 조금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고 할까. 독재 정치라는 시대를 겪어 왔던 국민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리얼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여기저기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지금,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어느 순간 우리는 오싹해진다. 무겁거나 진지하지 않은 방식으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가상 현실 속의 공포가 현실의 그것과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진짜 무서워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게 바로 이사카 고타로의 매력이기도 하다.

극중 국가의 정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의 말에, 아무리 불만이 많더라도 우리는 지금의 이 사회를 살아가야만 하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나라를 떠나면 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뭐 사실 맞는 말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곳을 떠나야 하는 게 용기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상황에서 왜 떠나는 것이 최선이냐는 것이다. 하다 못해 목검이라도 들고 변화를 위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 진정한 용기가 아니냔 말이다. 파란 망토를 두르고 하늘에서 나타나 악인을 차례로 통쾌하게 쓰러뜨리는 그런 멋진 히어로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블랙 라이더 슈트에 스쿠터를 타고 나타나 이상한 무기밖에 휘두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당신은 뭐라도 바꿀 수 있다. 무기력하게 가만히 앉아 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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