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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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갔던 곳이 오사카와 교토였다. 꽤 오래 전이어서 세세한 부분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오사카하면 북적거리는 맛집들, 교토하면 정적인 시골 풍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오사카에선 지하철을 이용해 편리하게 이동하다가, 교토로 향하면서 낯선 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정류장 안내 방송이 일본어로만 진행되었고, 하차 정류장 표시도 모두 한자여서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구글 맵을 켜서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는데, 어렵사리 도착한 그곳의 정취가 그 모든 어수선함을 한 번에 씻겨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사카의 번화한 거리에서 벗어나 도착한 교토는 너무도 한적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도시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 후로도 일본의 여러 곳을 다녀왔지만, 교토에서만큼 진짜 일본을 만난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교토야말로 가장 일본스러운, 그들의 역사와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임경선 작가가 교토에서 한 계절을 겪으면서,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정서와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도시의 기억을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일부러 멋을 부리지 않는 도시, 돈보다는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한 도시, 전통을 지키면서 미래의 모습을 모색하는 도시, 교토는 그렇게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지켜나가는 매혹적인 곳이다.

 

천 년 역사의 도시 교토에서는 창업한 지 100년이 넘은 가게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인걸요' 라며 겸손해한다.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에 창업한 가게도 '최근에 창업한' 범주에 들어간다. 10, 20년 된 가게는 아예 명함도 못 내민다. 최소한 3대에 걸쳐 지켜온 가게라야 교토에선 '노포' (일본어로는 '시니세'라고 한다)라는 영예로운 호칭이 주어진다.

 

'세월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란 아무리 현대적이고, 세련되고, 화려한 외관을 구축하더라도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반짝거리는 새것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낡고 약간 녹슨 듯한 세월의 흔적, 그리고 거기서 비롯하는 향수 어린 감성'이 가득한 도시 교토에는 노포들이 많다. 그들은 대대손손 가업을 이어가고, 오랜 경영으로 얻은 고객의 신용 등 무형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가게만의 독창적이거나 개성적인 제품을 가지고 있고, 생산과 판매를 겸한 장인이자 상인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교토의 노포에서는 무조건 손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을 대등하게 여긴다는 건 그만큼 자기가 만들고 파는 제품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새건이 좋다거나 오래된 것이 좋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겁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항상 더 좋아질 여지가 있습니다."

번거롭게 수고를 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인기 제품보다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수제품을 더 가치 있게 여겨 선택하는 것이 바로 교토 사람들이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오랜 시간들을 도시에 품고 살 수 잇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교토의 곳곳에서는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전통 거리의 은은하고 서정적인 풍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업의 간판 색깔은 얼마든지 바꾸겠다는 암묵적인 다짐. 들쑥날쑥 제멋대로 지어진 잿빛 빌딩들이 경관을 훼손하게 둘 수는 없다는 결심. 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화류가에서는 아름답지 못한 전봇대를 땅 밑으로 집어넣어 전선 없는 거리로 만들어놓고야 마는 의지.

 

교토에는 경관 조례법이 있어 지나치게 화려한 간판 색깔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우리 나라의 인사동 스타벅스가 전통 거리의 정체성에 맞춰 영문이 아닌 한글로 간판을 달고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교토의 맥도날드 로고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새빨간색 바탕에 진노랑색 로고가 아니라, 갈색 바탕에 채도가 낮은 노란색 로고로 되어 있고, 편의점 로손의 간판도, 의류점 유니클로의 간판도 마찬가지이다. 교토라는 도시의 아름다움을 위해 주민들과 기업들이 기꺼이 협조하는 풍경,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각자가 조금씩 양보하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 이 도시의 풍경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임경선 작가가 경험한 교토에서는, 동네 서점은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기네 서점을 찾지 못하면 매장으로 전화해 문의해달라고 당부하고, 카페는 아이들과 시간을 좀 더 보내기 위해 일주일에 나흘만 영업하고, 잡화 가게는 미리 알고 찾은 손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오가는 사람들이 불쑥 찾지 않게 하기 위해 간판을 달지 않는다. 2017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신기한 태도와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빠르게 변화하고, 눈코뜰새없이 바쁘게만 생활하는 서울의 일상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교토의 가게들이 부러워진다. 그곳에서는 그저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쉼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교토 사람에게 뭔가를 제안했을 때 “고맙습니다. 그것 참 좋군요”라는 답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5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퇴짜맞은 거라고 보면 된다. 만약 “생각 좀 해볼게요”라고 하면 그것은 100퍼센트 거절을 뜻하니 그것을 오해하고 ‘그럼 희망이 있다는 거잖아’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놓고 싫다고 거절하면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니까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일화들이 흥미로웠지만, 특히 교토식 소통법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오사카 사람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고 대놓고 들이대는 스타일이라면 교토 사람은 말을 모호하게 하고 알아듣기 어렵게 우회적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신경 쓰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어떻게든 전달하려는 것, 이것이 교토식 소통 방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뭔가를 부탁할 때도 해달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해주시진 않으시겠지요. 식으로 자신을 낮추고 말꼬리를 흘리듯이 말한다고.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도 마치 이해한다는 듯이 부드러운 추임새를 넣는 식이다.

외지인들로부터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속을 드러내지 않는 간접 화법을 채택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 어떻든 교토식 언어를 알게 되고 나니, 어쩐지 그들의 삶을 반 정도는 이해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돈이나 물질적인 것보다도 가치관이나 살아가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말이다. 이런 건 며칠 관광을 다녀오는 걸로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그들과 일상을 함께 보내고 나서야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이 책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 교토에 다녀왔거나, 교토를 가볼 예정이라면 이 책은 정말 특별한 여행 가이드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한다.

 

임경선 작가는 '도교가 감각의 도시라면 교토는 정서의 도시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토에서는 느릿느릿 걷다 보면 구석구석 빈틈으로 사유가 비집고 들어온다고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다. 장소가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니 이 얼마나 매혹적인 비유인가 말이다. 그녀는 살아가면서 생각의 중심을 놓칠 때,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낄 때,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마음을 비워낼 필요가 있을 때, 이곳 교토가 무척 그리워질 것 같다고 말한다. 여행이 뭔가를 채우기 위한 목적도 될 수 있겠지만, 교토에서처럼 뭔가를 비우기 위한 시간도 된다면 얼마나 멋질까.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는 우리들에게 여행이란 잠시 일상을 벗어나 쉴 수 있는 선물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유명 관광지를 찾아 다니고, 맛집을 투어하고, 기념품과 면세품을 잔뜩 사느라 에너지를 다 소비하지 말고, 정서의 도시 교토에서 비우고, 내려놓고, 여유를 가득 채워보는 건 어떨까. 여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리고, 여행 시즌도 다 지나버렸지만,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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