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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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이군요?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단순히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위장에 강제로 집어넣는 행위라니. 음식을 먹는다는 건 배를 채우려는 목적도 있지만 요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미를 느끼는 시간이기도 한데, 혀가 안내하는 그 깊고 오묘한 세계를 광둥인들은 잠자리에서까지 찬양합니다."

"굶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린 한 식욕에 아름다움 따위가 끼어들 수 없다."

광둥 제일의 요리사였던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요리를 배운 천재 요리사 첸, 전쟁의 중심에 있지만 그것보다는 궁극의 맛에 집착하는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 전쟁 통에 일본군 위안부로 떠돌다 첸의 집에 숨어들어 목숨을 구한 조선인 여인 길순. 이들 세 명이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의 붉은 땅 만주를 배경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첸은 요리사이자 비밀 자경단원으로 자신의 주무기인 요리로 일본군들을 독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는 모리의 테스트를 목숨을 걸고 통과해 그를 위해 요리를 만들게 된다. 장교식당 취사병이 된 첸은 만주족 전통 축제인 반진제의 음식을 준비하면서 남몰래 독을 넣지만, 여러 음식들의 재료가 어우러져 해독 작용을 해서 아무도 죽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가족들을 취조하기 위해 데려오지만 노모는 도중 자살해버리고, 조선인 아내 길순은 끌려와 갖은 고문을 당한다. 모리는 첸을 죽이지 않고 혀를 일부 자른 뒤 장교식당 주방에 쇠사슬로 묶어두고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도록 한다.

애써 독을 쓰지 않아도 되는, 누구도 만들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맛, 그것이 녀석의 복수가 되어야 한다. 내가 녀석의 요리에 취하여 접시 아래 무릎을 꿇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혀를 전부 빼앗지 않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완전히 맛보지 않아도 맛을 가늠할 수 있는 능력, 녀석의 혀는 새롭게 진화할 것이다.

전시에 음식에 독을 넣는 것으로 누군가를 암살하려는 시도라는 플롯은 사실 시시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은, 그것을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라 시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첸의 계획은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꽃처럼 갑작스럽게 발각되고, 갑작스럽게 끝나 버린다. 그러니까, , .. 그리고 전이 되어야 하는데 그냥 거기서 멈춰 버리고는,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느낌으로. 첸은 독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마땅히 그의 목숨을 거두어야 할 사령관 모리는 그에게 다시 화덕을 맡기겠다고 말한다. 목숨을 걸고 만드는 그의 요리를 매일 기꺼이 먹어주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1부가 끝나고 시작되는 2부에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유사한 시기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숱한 여타의 작품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도발적이고도 새로운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쟁은 반복된다. 두려움은 간부나 사병이나 민간인이나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받기 싫은 선물처럼 진주해 있다. 그 속에서도 인간은 부지런히 먹고 마신다. 두려움 속에서도 매일 세끼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매일 아침저녁 장교식당을 찾는 머릿수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잘 먹어야 잘 싸울 수 있다고 자위한다. 사령부가 적들에 둘러싸일 때, 과연 저 머저리들 가운데 몇 명이나 착검을 하고 적을 향해 돌격할 수 있을까?

길순은 한달 가까이 고문을 받고 나서 관사로 옮겨지고는 한 사내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는 그는 바로 사령관 모리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그는 그녀의 몸을 끝없이 탐하고, 그와의 시간을 보내며 길순은 첸이 만들어 올리는 음식도 함께 먹는다. 흥미로운 것은 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야마다 오토조)가 실존 인물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실제 야마다 오토조가 백만 관동군을 지휘하지 못하고 소련군에게 모두 항복시켜 칠십만 관동군을 포로로 잡히게 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적을 앞에 두고 음식에 집착하는 사내라는 설정이 독특하다 생각했는데, 실존 인물의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탄생한 캐릭터라고 하니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썩어가는 것들일수록 더 깊은 맛을 풍기지. 인생도 그렇다. 너의 무엇이 너를 간절하게 하느냐? 그것이 없다면 요리는 겉치레일 뿐이다.

이들 모두칼과 혀와 밀착된 삶을 살고 있다. 음식을 먹는 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낭비는 허락되지 않으며, 음식이 곧 목숨이었던 나라와 음식을 먹는다는 건 배를 채우려는 목적도 있지만, 요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미를 혀로 느끼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라니. 애초에 너무도 완벽하게 다르지 않은가. 굶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린 상황에서 식욕에 아름다움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 와중에 먹는다는 걸로 잠시나마 전쟁과 자신의 직위를 잊곤 하는 일본군 사령관도 있다. 모리가 음식을 먹으면서 그에 대해 생각하고, 품평하는 대목들은 단순히 음식에 대한 찬양을 넘어서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세상에 없는 요리'를 맛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첸과 길순은 물론 허구의 인물이지만, 어쩌면 당시 민족 간 싸우는 광경 속에서 거리 어디서나 실제 했을 법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첸과 모리, 길순은 한중일 각 나라를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해, 증오의 역사를 보여줌과 동시에 한중일 민중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혼불문학상 7년 만의 심사위원 만장일치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 만큼 신선하고, 독창적이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묘사와 흡입력 있는 드라마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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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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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 라르손은 원고만 출판사에 넘긴 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의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 밀레니엄 시리즈는 2005년부터 3년에 걸쳐 스웨덴에서 출간된 후, 전 세계에서 출간되어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국내에 출간된 것은 2011년이었으니, 내가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은 지도 어느 덧 6년이나 되었다. 애초에 우리가 이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 작가의 사후였으니, 밀레니엄 시리즈를 처음 읽을 때부터 이 작품은 내게 시리즈 3부작이 완결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니...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아마도 시리즈로 된 작품을 사랑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나는 항상 그 다음이 궁금했다. 특히나 리스베트 같은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를 만나고 나니, 당연하게도 그녀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나는 리스베트라는 캐릭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녀와 함께 나이 들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던, 그녀의 팬이었으니 말이다.

 

"이거 완전히 미친년이잖아?"

"그래, 어쩌면." 그녀가 차갑게 대답했다. "난 남들한테 공감능력도 없고, 폭력 충동이 한번 일면 걷잡을 수 없으니까."

이렇게 말하며 리스베트는 아르비드의 손을 꽉 잡았다. 엄청난 아귀 힘에 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새로운 시리즈를 만나기 위해 나는 지난 시리즈 세 편을 모두 복습했다. 분권으로 출간되었다 이번에 통합되어 출간이 되었는데,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688,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784, <벌집을 발로 찬 소녀> 856쪽 되겠다. 이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어 읽었을까. 나는 그게 밀레니엄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독자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 번 다시 읽게 만드는, 되풀이해 거듭 읽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을 사랑한다. 물론 한 편으로는 그런 작품들 때문에 또 다른 새로운 작품들을 만날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은 짜증스럽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부지런히 책을 읽어도,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 아래 최대한 읽을 수 있는 한계치란 뻔하니까 말이다. 이 책, 밀레니엄 시리즈는 그 중에서도 아마 상위권에 놓아두고 싶은 작품이다. 매번 읽을 때마다 매혹적인 미스터리로 애태우고, 몰입하게 만들고는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휴가와 추석연휴가 뒤섞여 오히려 정신 없이 바빴던 그 와중에, 나는 무려 2,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밀레니엄 전작을 다시 읽었다.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또 오랜 만에 읽은 것이지만 이 시리즈는 여전히 최고의 만족감을 주는 멋진 작품들이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 작품은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당연히 '픽션'이다. 그리고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을 보살피는 최고의 복지 시스템이 갖춰진 곳이라는 것은 '팩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종종 픽션과 팩트 간의 그 경계를 알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야말로 여성 차별, 약자에 대한 폭력, 기득권 세력들의 탐욕에 대해 고발하고 응징하는 사회파 추리 소설로서의 최고 정점에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엄청난 시리즈의 바톤을 이어 받은 작가는 바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이다. 국내에는 <나는 즐라탄이다> <앨런 튜링 최후의 방정식>이라는 작품으로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도 스티그 라르손처럼 스웨덴의 언론인으로 범죄 사건 전문 기자로 활약했던 이력이 있다. 유족과 출판사에서 공식 작가로 지정했으니 그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할 테고, 나는 그가 리스베트라는 매우 이상하면서도, 흥미롭고, 전에 없이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는 캐릭터를 어떻게 재탄생시킬지가 매우 궁금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리스베트 살란데르에 대해서 잠깐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신장 154, 몸무게 42키로, 거식증 환자처럼 삐쩍 마른 몸매로 코와 눈썹에 피어싱을 하고, 용문신을 한데다 짧게 커트한 머리는 새카맣게 염색하고 다닌다.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어떤 종류의 고등 교육도 받은 적이 없지만, 사진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컴퓨터에 관한 천재적이며, 전설적인 해커로 통한다. 오토바이와 컴퓨터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한번 받은 모욕은 절대 잊지 않는다. 불쾌한 짓거리를 당하고 있느니,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싸우는 인물이며, 천성적으로 절대 누군가를 용서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반드시 복수를 한다. 그 작은 체구로 오토바이 갱단 두 명을 맞상대해서 해치우는 무서운 폭력성도 가지고 있으며, 머리에 총알 세례를 받고도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를 가만히 놔두는 사람이나 점잖게 구는 사람에게는 절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사람들의 오해처럼 미친년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만약 누군가 그녀를 도발하거나 위협하면 극도의 폭력으로 응수하는 무서운 여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녀린 체격과 외모 안에 감춰진 무시무시한 폭력성이라는 상반된 성격을 과연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는 어떻게 그려낼까.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도 만만치 않은 캐릭터이다. 그는 오는 여자 막지 않는 자유 연애주의자로 여자들을 대할 때의 능글맞음과 인간의 기본 윤리에 어긋나는 것을 못 참는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일에 몰입할 때의 집요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물이니 말이다. 그는 권력의 압박에 굴복한 적도, 이상을 포기하고 타협한 적도 없는 기자였다. 과연 그의 고집스러움은 계속 밀어붙일 수 상황이 될까.

사실 밀레니엄 시리즈는 3부작으로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미스터리 측면은 거의 모두 다루었고,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재벌총수 문제부터 거대 자본 세력에 대한 비판과 비밀 경찰 조직을 통한 국가의 비리와 거대 신문사에 대한 비판까지 말이다. 남은 것은 여전히 미스터리한 리스베트라는 인물의 과거와 주변 인물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모든 악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버지인 살라첸코와, 이복오빠인 로날드 니더만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녀의 쌍둥이 여동생 카밀라에 대한 부분은 스티그 라르손이 아직 많이 언급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시리즈 네 번째 작품에서 서로를 증오하는 쌍둥이 자매, 카밀라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거라고 해서 매우 기대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더 강해졌다고 생각해요. 지옥에서 부활해 더 커졌죠. 이제 그녀는 치명적으로 강력한 존재가 됐어요. 그리고 분명 자기가 당한 일을 하나도 잊지 않았을 거예요. 모든 게 그녀 안에 새겨졌을 거라고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녀의 어린 시절을 휩쓴 광기가 지금 이 모든 엿 같은 일들의 근원이 됐고요."

, 이제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밀레니엄 시리즈를 만나볼 차례이다. 인공지능 연구에서 전설적인 존재인 컴퓨터 공학자 프란스 발데르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을 도둑맞고 보안 문제에 관해 편집광처럼 변해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그와 함께 개발 과정에 참여했던 조수가 그런 상황을 걱정해 미카엘을 찾아 온다. 그를 둘러싼 해커 조직과 대기업과의 관계에서 뭔가 있는 것 같다고 프란스를 만나 보기를 권하지만, 미카엘은 자신이 IT분야 기자가 아니라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 프란스가 만났다는 여자 해커가 등장하고, 그녀가 리스베트가 아닐까 생각한 미카엘은 프란스를 만나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새벽, 프란스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현장에는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만 남아 있다. 살인범이 아들을 살려준 이유는 아우구스트가 자폐아라서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트는 서번트로 수학과 그림에 천재성을 지닌 아이였다. , 아이가 살인이 일어나던 그 상황과 범인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이런 이야기가 펼쳐질 당시,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상황은 어땠는지 살펴보자. 이 작품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의 시대는 끝났다'는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시작했다. <밀레니엄>은 살라첸코 사건 이후로 특종이 거의 없었고, 재정적 위기도 겪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기업에게 지분을 30퍼센트나 매각한다. 세르네르 기업은 점차 편집에 관여하며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미카엘을 런던 특파원으로 내보내겠다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그가 <밀레니엄>에 남아 자신의 뜻대로 기사를 쓸려면, 다시 한번 스웨덴 언론을 뒤흔들 뭔가를 찾아야 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리스베트는 자신의 아버지, 살라첸코가 모종의 방식으로 계속 살아남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단순히 살라첸코가 리스베트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녀의 어린 시절을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한 사회적 악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범죄조직을 이끌었고, 마약과 무기를 팔았으며, 여자들을 착취하고 능욕하며 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리스베트는 살라첸코가 남긴 유산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개인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살라의 젊은 부하였던 시그프리드가 속한 조직이 프란스의 인공지능 기술을 훔쳐 다국적 회사에 팔았다는 루머를 접했고, 결국 프란스를 찾아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스웨덴 최고의 과학자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그들이 나눈 베일 속의 대화에 대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미카엘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또 한번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프란스의 아들 아우구스트를 보호하기 위해 미카엘과 에리카, 그리고 리스베트가 동분서주하고, 그 과정에서 부블란스키를 필두로 한 경찰청과 스웨덴 국가안보기관 세포, 미 국가 안보국 NSA, 그리고 해커 조직 스파이더 소사이어티까지 연결되어 이야기는 복잡하면서도 탄탄하게 흘러 간다. 사실 리스베트에 대한 갈망이 컸기에, 그녀가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 백 여페이지 정도는 사실 조금 지루했다. 하지만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로서는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비롯한 밀레니엄의 주연들 외에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등장하게 되는 인물들에 대한 상황 설계가 필요했을 것이므로, 그 부분은 감안할 만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게 된 리스베트의 등장! 이상한 건 행동은 기존 시리즈에서와 유사했지만 어딘지 그녀가 조금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통제불능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이미지가 조금 수그러들고, 조금 참고 계획적으로 분노를 폭발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나는 그녀가 시리즈 첫 편에 등장했을 때가 스물넷이었고, 시리즈 세 번째 작품에서 스물일곱이었으니 그 엄청난 사건을 겪으면서 삼 년이나 흘렀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 작품은 거기서 다시 일년 뒤에 시작하는 이야기이니, 리스베트가 어떤 면에서든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라는 작가의 놀라운 면모를 발견하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새로운 밀레니엄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놀랍게도 같은 인물들을 전혀 다르게 구축한 세계에 데려다 놓으면서, 시간이 흐른 만큼 그들을 성장시켰다. 물론 굉장히 기대했던 그녀의 쌍둥이 동생 카밀라 살란데르는 너무 잠깐 등장해서 그 존재감을 보여주기엔 조금 미비했지만, 이어지는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래본다. 뭐 사실 나는 리스베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해서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쳤을 정도이니, 다시 돌아온 리스베트와 미카엘을 향해 축배를 건네고 싶다.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총6권까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스티그 라르손이 기획했던 대로 10부작이 완성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지만, 우선 지금은 다음 이야기인 밀레니엄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을 손꼽아 기다려야겠다.

혹시 당신이 아직까지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지 않았다면,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말아야 할만한 그런 작품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나는 이렇게 뛰어나고 완성도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스릴 넘치고, 도전적이고,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다. 잘만 쓰인다면 범죄소설이 사회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리스베트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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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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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 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

장강명 작가가 <댓글부대>로 수상했던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이번에는 <아몬드>의 손원평 작가가 수상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만년 인턴'을 하고 있는 1988년생, 서른 살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8090세대 젋은이들의 아픈 현실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2 <82년생 김지영>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감사하게도 가제본으로 미리 만나볼 수 있었는데, 표지가 얼마나 예쁜지 요즘은 가제본도 퀄리티가 굉장한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988년생, 서른 살 여성으로 당시 88올림픽을 즈음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혜이다. 학창시절 언제나 주변에 지혜가 산적해 있었기에, 큰 지혜, 작은 지혜, 하얀 지혜 등등으로 구분되어 불린 시절을 거쳐, 현재는 수많은 입사시험에 떨어지고 대기업 계열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자랑할 것이 많지 않은 자신의 삶에는, 무수한 익명 속에 숨을 수 있는 그 평범한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그녀가 일하는 곳은 문화센터와는 달리 '수준 높은 교양'을 차별점으로 두고 있는 아카데미이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각종 복사와 강의실 의자 정리, 강사들의 잡다한 심부름 등등 정직원이 아닌 인턴이기에, 거의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들뿐이다. 반지하 방에 월세로 살면서 아카데미에 인턴으로 온 지도 아홉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자신의 인생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위해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없는 사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없는 사람이다. 늘 소리치고 있는데도 없는 사람이다. 수면 위에 올라있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다. 반지하방에 살면 없는 사람이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고, 인생과의 게임에서 지면 없는 사람이다.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 동안 대체 무얼 한 걸까. 이들과 어울리는 내내 나는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만 발버둥쳤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아카데미의 새로운 인턴으로 들어온 규옥의 등장부터였다. 그는 아카데미의 인기 강사였던 교수에게 대학원을 다니던 당시 책을 다 써주고 나서 원고만 뺐기고 알바비도 못 받았던 남자였다. 그가 커피숍에서 그 교수에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면 언젠가 인생 전체가 창피해질 날이 온다'고 사람들 앞에 그를 창피 주던 순간, 하필 같은 장소에 있던 지혜가 그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던 과거가 있다. 지혜는 규옥과 함께 아카데미 직원에게 제공되는 공짜 강의로 우쿨렐레 강좌를 함께 듣게 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고,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에 남은 사람들과 뜻밖에 모임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지만 공모전에서 대기업에 의해 작품만 뺏긴 문화 백수에, 식당 일을 하다 모종의 억울한 이유로 인해 문을 닫아야 했던 아저씨 등등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규옥은 말한다.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전복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경범죄로 보기엔 약하고 명예훼손이라 칭하기엔 너무 짧고 애매한 장난스러운 반격들을 시작한다.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경직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서. 지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세상을 바꿀 용기도 꿈도 없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통쾌했고,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그들과 한 부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동질감과 위로를 느끼지만,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과는 달리 위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고학력 백수, 편의점 알바생, 한국이 너무 싫은 회사원까지. 이 시대 청춘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은 그 동안에도 있어 왔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이들이 세상을 향해 '반격'을 시도한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상 전체를 바꾸거나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만한 반격은 아닐지라도, 통쾌하고 짜릿했다. 아마도 살면서 억울하고 화나도 참고 삼켜야만 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이 들 것이다. 이들의 반격이 비장하거나 영웅적이거나, 거창하고 원론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마치 가벼운 놀이처럼, 마치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싱그럽고 유쾌하게 이들이 벌이는 반격의 한방들이 너무도 시원했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그들의 고민도 너무 공감이 되었고, 그들이 벌이는 저항의 몸짓들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으니 말이다. 우리, 약자일지언정 세상에 '없는 사람'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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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가까운 프랑스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
박단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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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에게 왜 열심히 일하느냐고 질문하면, 바캉스를 떠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바캉스는 프랑스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문화입니다. '일 중독'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였으면 하는 문화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어릴 때 레오 카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 <나쁜 피>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일 것이다. 그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프랑스는 여행지에 대한 로망이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자금이 여유가 있을 때는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여유가 있을 때는 돈이 부족하지 않나. 유럽은 이삼일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다 좌절되고, 꿈만 꾸기를 반복하며 결국 현재까지 프랑스로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프랑스는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꿈의 여행지로 남아 있다. 그래서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그곳에 대한 이미지란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등의 아름다운 관광지와 와인, 마카롱 등의 근사한 음식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끔 뉴스를 통해 만나게 되는 테러 사건과 정치에 관련된 이슈들은 내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 전혀 다른 그것이었으니, 언젠가 그곳에 갈 거라면 제대로 알고 가고 싶었다.

 

창비의  이만큼 가까운시리즈는 각국을 오랫동안 연구한 저명한 학자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다채로운 면모를 생생하게 소개하는 교양서이다.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프랑스는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사회, 역사, 지리, 정치·경제, 문화, 한불 관계 등 여섯 개의 주제를 통해 프랑스라는 나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나처럼 여행지로서의 프랑스가 궁금한 이들에게도, 혼란스러운 프랑스 사회 자체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만한 책인 셈이다.

프랑스인에게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 한 편의 연극을 연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미각을 통해 몸과 마음을 새롭게 충전할 뿐 아니라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풀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유대감을 만드는 과정이니까요. 프랑스인에게 식사란 오감을 충족하는 활동입니다.

 

프랑스는 나라 안에 다양한 소수 세력의 공존을 지향하는 다문화주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화주의 아래에 하나의 나라를 지향하는 사회적 공화국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적 문제로 파업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모습이 매우 일상적이며, 적극적인 사회 보장 제도를 지지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또한 프랑스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근대 페미니즘의 출발점이라고도 이야기되는 프랑스 혁명을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그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최근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 총기 난사와 자살 폭탄 공격 등의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가장 최근인 올해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순찰 중인 경찰관을 총으로 살해해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의 테러는 대부분 자국민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데, 외부인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테러에 적극 개입하는 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과 68혁명 등 빛나는 성취는 물론, 현재 벌어지고 있는 테러와 선거와 정당 등 지금 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이렇게 묵직한 주제들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인들의 특별한 바캉스 문화와 축구 사랑, 축제와 공연 이야기와 종교 문제와 박물관에 관한 정보까지 담고 있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음식 문화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한국사람들은 절대 하지 못하는 '느리게 먹기' '대화하면서 먹기'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 오죽하면 그들은 길에서 아무렇게나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우는 것을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프랑스의 거의 모든 식당에서는 저녁 시간 내내 한 테이블당 손님을 한 팀만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식당이 문을 여는 저녁 7시경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계속 대화를 나누며 문을 닫는 시간까지 있어도 전혀 눈치를 주지 않는 다는 거다. 음식을 먹는 것을 하루 일과 중에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나아가 인생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기는 그들의 가치관이 부럽기도 했다.

‘이만큼 가까운시리즈를 통해서 프랑스가 어떤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는지 이야기를 알게 되니, 오히려 멀리 있어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가벼운 가이드나 관광지 위주의 정보만 있는 여행서들 과는 달리, 이 책은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 진지하고도 흥미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늘의 프랑스가 궁금한 모든 이들을 만족시켜 줄만한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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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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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평양 한가운데 고아가 되어 홀로 떠 있었다. 몸은 노에 매달려 있고, 앞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있고, 밑에는 상어가 다니고, 폭풍우가 몸 위로 쏟아졌다. 이성적으로 이런 상황을 보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기 전에 물에 빠져 죽기를 바라리라. 하지만 노를 방수포에 끼우고 안전하다는 생각이 밀려든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동이 트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힘껏 노에 매달렸다. 그냥 매달렸다. 왜 그랬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시겠지.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던 건 십 년도 훨씬 전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오 년 전에 리안 감독에 의해 영화로 개봉하면서 스크린으로도 만나보고, 원작도 한번 더 읽었던 기억이 난다. 리안 감독의 영화도 원작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렇게 이 작품은 여러 차례 시간을 두고 읽고, 만나왔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매번 감동을 주었던 멋진 작품이다. 소년과 벵골 호랑이가 단 둘이 구명보트를 타고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 있다는 설정만으로 작품의 전체 줄거리 요약이 가능한 이 특별한 작품을 이번에는 일러스트 버전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일러스트 버전은 기존에 양장본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이번 특별판은 양장본의 가격 부담을 덜고, 콤팩트한 판형으로 재단장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에 실린 일러스트는일러스트레이트 파이 이야기국제 공모전에서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수상을 한 화가의 작품으로, 올컬러로 40여점이 수록되어 있다.

 

 

얀 마텔은강렬한 색채와 뛰어난 화면 구성, 소용돌이치는 듯한 그림, 그리고 모든 것을 파이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은 완전한 일인칭 시점이고, 나는 소설에서 한 번도 파이에 대해 묘사한 적이 없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는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2차 창작물 같은 느낌마저 드는 책이다. 글을 통해 빚어내는 묘사가 아무리 세밀하고 뛰어나더라도, 직접적으로 강렬하고 리얼하게 다가오는 시각언어의 힘이란 전혀 다른 차원의 파워를 발휘하는 것이니 말이다.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리라는 희망을 너무 많이 갖는 것도 그만둬야 했다. 외부의 도움에 의존할 수 없었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 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열여섯 살 인도 소년 파이는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함께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도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해지자 아버지는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들이 탄 배는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가라앉아버리고, 구명보트에 오른 생존자는 파이와 동물들,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골 호랑이였다.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인 하이에나를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잡아먹자, 이제 남은 것은 소년과 호랑이뿐이었다. 리처드 파커는 몸무게가 250킬로그램이나 되는 사나운 맹수였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바다와 하늘만 보이는 망망대해였다. 다른 구명보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어디에서도 가족은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시간이 흘러 배가 고파지면 호랑이가 소년을 잡아 먹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바다 위에서 무려 227일을 버텨낸다. 무시무시한 뱅골 호랑이와 단 둘이서 말이다.

 

과연 그 오랜 시간 동안 파이는 어떻게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지 않고, 또 어떻게 물과 식량을 준비해서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과연 그들은 무사히 누군가에게 구조될 수 있을까

이미 여러 차례 읽어온 작품이기에 내용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전히 읽는 내내 집중력을 갖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들어 주었다. 이 작품은 한 소년의 성장 소설이기도 하고,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험 소설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신념과 희망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대의 작가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지만, 마치 고전처럼 느껴지는 특별한 작품이기도 하다. 혹시 아직도 <파이이야기>를 읽어 보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기왕이면 일러스트 버전으로 만나보시길. 마치 얀 마텔이 직접 그림에 참여하기라도 한 것처럼 작품과 일체화된 원색의 강렬한 색감들이 당신을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 있는 구명보트 위로 안내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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