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멜론은 어쩌다
아밀 지음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멜론은 자신이 좋았다.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멜론에게 멜론이 아닌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여자라느니 남자라느니 나누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돈이 많고 적고나 사는 집이 넓고 좁고를 따지지 않았으며, 어른이 되면 거짓임을 알게 되는 가짜 지식을 가르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을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런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때리거나 혼내지도 않았다. 그 상태는 너무나 당연해서 멜론은 지상의 아이들이 그토록 불합리한 일들을 견딘다는 사실을 들을 때마다 놀랐다. - '노 어덜트 헤븐' 중에서, p.113
면허 없이, 또는 면허가 있으면서도 사악한 저주를 행하는 불법 흑마녀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흑마법 사용을 꺼리는 마녀가 있다. 마녀 학교에서 교육받고, 면허를 따고,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정식으로 장사하는 백마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하고 적법한 마법만 행하느라, 인형 눈알 붙이는 일로 근근이 먹고산다. 친구들은 그런 마녀에게 고지식하다고 핀잔하지만, 스스로는 남들보다 특별히 양심적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겁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그저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날도 인형에 눈알을 붙이고 있었다. 요즘 아이돌들은 VIP 팬클럽 특전이나 팬 사인회 특전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배포하곤 했다. 머리카락이나 눈물이 가장 흔하고, 가끔은 손톱이나 타액도 잇었다. 이 특별한 선물을 둘러싸고 엄청난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팬들은 거금을 주고 아이돌의 신체 부위를 양도받거나, 그 신체 부위를 마녀에게 맡겨서 아이돌에게 축복이나 저주를 걸곤 했다. 마녀가 지금 붙이는 인형의 눈알 또한 그런 종류였다. 인형에 진짜 아이돌의 영혼을 살짝 덧입히면서 팬들이 자신의 스타와 함께 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의뢰인이 들어온다. 데뷔한 지 이년 차인 솔로 남자 아이돌 인형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문제는 그 아이돌이 신체 부위를 배포하지 않았고, 의뢰인은 어디선가 그의 피를 구해온 것이다. 피는 머리카락이나 손톱 따위보다 훨씬 강력한 마력이 깃든 지료로, 이걸 이용하면 강력한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거나, 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차원이 다른 재료였던 것이다. 과연 마녀는 이 의뢰를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정말이지 모든 게 피곤해요. 너무 오래 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일찍 늙어버린 것만 같아요. 이래저래 헤프게 웃고는 다니는데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 못한 것 같아요. 밤이면 밤마다 뭔가가 머리를 꾹꾹 눌러대는 것같이 무거워요. 항상 아주 무거운 철로 만들어진 상자를 이고 사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싸워대는 것 같아요. 지겨워 죽겠어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가난하게 자란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걸 못 한 것도 아니고, 어디 크게 아픈 데도 없이, 잘 먹고 잘 자랐잖아요. 그건 나도 안다고요. 그런데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남들은 다 갖고 있는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요. - '야간 산책' 중에서, p.319
<로드킬>에 이은 아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김지현'이라는 본명으로 영미문학 번역가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 알베르토 망겔의 <끝내주는 괴물들>, 마리사 마이어의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 마이클 로보텀의 <산산이 부서진 남자>,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 등 많은 작품들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였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첫 산문집이었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라는 작품을 참 좋아했는데, 다정하고 따뜻한 글이었다. 그에 비해 '아밀'이라는 필명으로 쓰는 소설들은 굉장히 다른 분위기이다. 소설을 쓸 때 굳이 필명을 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은 것이, 번역가일 때와 소설가일 때 두 자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아밀은 ‘환상문학웹진 거울’, ‘공동창작프로젝트 ILN’, ‘브릿G’ 등 기성문단 바깥 플랫폼에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오며, 이제는 점점 더 자신만의 색채를 뚜렷하게 보여주면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작품 역시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으니 말이다.
이 소설집에는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인형 눈알 붙이기> 등 여덟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와 이성애자 여성의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쯤을 보여주는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여자를 좋아하지만 여자가 어려웠던 부치가 섹스 로봇을 집에 들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 선망의 대상이자 경멸과 타도의 대상인 유전자 편집으로 태어난 아이돌의 이야기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지만 손가락이 짧다는 신체적 한계에 부딪힌 소녀가 '차원의 마녀'라는 점쟁이와 하게 되는 아주 특별한 거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선하고 적법한 마법만 행하느라 인형 눈알 붙이는 일로 근근이 먹고 사는 마녀에게 들어온 거부할 수 없는 솔깃한 의뢰 <인형 눈알 붙이기> 등 유머러스하고 경쾌하지만, 예리한 시선으로 현실을 살짝 뛰어넘는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 아밀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서는 인간보다 인간을 더 이해하는 로봇이 있고, 이성애자가 성소수자로 차별당하는 일이 예사로우며, 뱀파이어와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간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마법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