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녀들의 도시 - 독서 여행자 곽아람의 문학 기행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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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이야기 속 장소가 실재한다 믿는 사람, 이야기란 허구니 배경 또한 허구라 생각하는 사람. 나는 전자였고, 이야기 속 트로이가 실재한다 믿었던 슐리만처럼 언제나 소설 속 장소들을 갈망했으며 그중 어떤 곳에는 반드시 가보리라 결심하곤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는 내가 가장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온 곳이었다.             p.21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도시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된 장소가 실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극중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고, 걷고, 행동하고, 생각하며 그곳을 고스란히 체험한다. 그러니 이야기 속 장소를 찾아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척 감동적인 일이다. 책을 읽으며 간절히 마음속으로 그리던 이미지가 실제로 구현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안식년으로 주어진 1년간 심상으로만 존재하던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떠난 여행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바람과 함께, 스칼렛>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었고, 이번에 나온 것은 개정증보판이다. 다시 쓰다시피 책의 많은 부분을 고치고 다듬은 후 새로운 이야기들을 추가한 버전이라, 기존에 읽었더라도 다시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저자는 세상에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서두를 꺼낸다. 이야기 속 장소가 실재한다 믿는 사람, 이야기란 허구니 배경 또한 허구라 생각하는 사람. 자신은 전자였고, 언제나 소설 속 장소들을 갈망했으며 그중 어떤 곳에는 반드시 가보리라 결심하곤 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온 곳을 어른이 되어 직접 방문했을 때의 감회란 어떨지 상상이 되어 책을 읽는 내내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저자는 <빨강 머리 앤>의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애틀랜타, <작은 아씨들>이 쓰인 사추세츠주 콩코드, <위대한 개츠비>의 뉴헤이븐 등 사랑하는 문학작품의 배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땅을 직접 밟아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나는 30년 넘게 <빙점>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게 요코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재였는데, 마침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여행이 특히 의미 깊었다. 그리고 문학의 세계를 사랑하도록 나를 인도한 부모님 중 한 사람, 엄마와 함께할 수 있었다는 점이. 여기서 요코가, 여기서 나쓰에가, 여기서 무라이가, 여기서 게이조가...... 우리는 아사히카와 곳곳에서 소설 속 인물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들의 동선을 상상하고 '아, 그랬구나' 감탄하며 입 밖으로 내어 다시 이야기했다. 그렇게 아사히카와에서, <빙점>은 엄마와 나의 이야기로 다시 쓰였다.           p.355


모든 여행지들이 인상적이었지만, 특히나 흥미롭게 읽은 것은 <빙점>의 배경인 아사히카와로 갔던 여정이었다. 빙점은 미우라 아야코가 1964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저자는 30여 년 전 소설을 처음 읽은 이후로 언제나 <빙점>의 배경지인 아사히카와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삿포로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가면 홋카이도 제2의 도시 아사히카와에 도착한다고 한다. 저자는 문학을 좋아하는 엄마와 함께 직항 노선이 개설되었을 때 다녀왔다고 한다. 광복 이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일본 소설이 <빙점>이라고 하는데, 스토리만 보자면 막장 드라마라 해도 무방한 이 작품을 저자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읽었다고 한다. 나 역시 초등학교 고학년 때 가장 많은 소설을 읽었었는데, 어른이 되어 그 시절 너무 가고 싶었던 작품 속 배경을 직접 찾아간다면 얼마나 설레일까 생각하며 읽었다. 작품의 포문을 열었던 소나무숲에 엄마와 함께 도착했고, 미우라 아야코 기념문학관을 시작으로 소설에 묘사된 숲길과 제방 너머의 독일가문비나무숲을 고스란히 경험한다. 아아, 장소의 힘이란! 책 속 묘사와 저자가 직접 보고 느낀 풍경들이 어우러져 문학 속 장소가 실제로 구현된 순간의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빨강 머리 앤을 만나고, 작은 아씨들을 되짚고, 스칼렛의 발자취를 뒤쫓고, 개츠비의 그리움을 체화했던 문학 여행이 너무도 부러웠다. 이야기 속 장소를 찾아 선뜻 여행을 나서는 삶이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내가 사랑했던 그 도시를 가보리라 다짐해본다. 우선 요 네스뵈의 작품들을 만나러 노르웨이 오슬로부터 가보고 싶다.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건 문학이 단지 허구만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해서 든든한 위로가 되어 준다.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책벌레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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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암기 - 김학찬 유고 산문집 김학찬 유고집
김학찬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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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때까지 쓰지 못했던 명작을 지금 와서 쓸 수 있을 리는 없다. 갑자기 삶이 달라졌지만 갑자기 깨달은 것은 없다. 암과 함께 찾아온 일생일대의 작품이 있을 리 없다. 이런 등가교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갑자기 좋은 작품을 쓴다면 이건 행운일까 노력일까 불행일까... 건강할 때도 쓰지 못했던 명작을 투암을 하면서 쓰기는 어렵다. 몸도 마음도, 무엇보다 머리가 온전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쓰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행운과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더라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p.62~63


2025년 2월에 세상을 떠난 김학찬 작가의 유고 산문집이다. 서른아홉에 폐암 4기라는 선고를 받게 된 작가가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이다. 의기소침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다보면 의기양양해질 때가 있기 때문에, 일기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생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암에 걸렸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꿋꿋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내겠다는 글은 쓸 생각이 없었다'고 그래서 이 글은 따뜻할 수 없는 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페이지 곳곳에 온기가 가득했다. 특유의 블랙 유머가 빛을 발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담백하게 흘러가는 그의 일상이 내면의 단단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임상 실험 대상자로 렉라자라는 약을 투약받으면서 스스로를 슈퍼히어로처럼 '렉라자맨'으로 지칭하는 작가는 대학에서 10년 동안의 강사 생활을 접고, 연구소 자리를 빼고, 집에 있는 책들의 절반 이상을 버리기 위해 애쓴다. 그런 와중에도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아껴가며 읽고, 책을 더 늘릴 수는 없으니 사두고 읽지 않았던 책을 찾아 읽는다.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병원에서 설문조사를 하며, 의연하게 삶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보낸다. 애초에 임상 실험 대상자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행히 대상자가 되었다며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행운보다는 불행이 더 빠른데, 불행 없이 행운은 또 알기 어려운 모양이다.' 라고. 왜냐하면 임상 연구 대상 선정의 조건이 "뇌 전이가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알면 알수록 희망을 갖기 어려운 상황, 그럼에도 일상은 여지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렉라자맨이 된 다음날 방송에서 폐암에 대해 다루는 것을 보고는 '생로병사의 비밀을 깨달았지만, 비밀과 무관하게 병사를 피할 순 없다'며 병사 바로 위에 놓여서 비관에 대한 궁리를 하고 있는 저자의 담담하고, 담백한 문장들을 읽으며 독자인 나는 아쉬웠다. 아 왜 이런 작가를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하고. 아니지,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건지도 모르겠다. 




아픈 와중에도 뭔가를 사게 된다.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어도 택배는 어쩔 수 없다. 지금 한국에 태어나면 톨스토이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택배"라고 대답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라면 <죄와 택배>를 쓰겠지. 불편하다는 핑계로 택배 주문이 늘었는데, 재활용품을 내놓을 때가 되면 잠깐 죄책감을 느낀다. 할 수 있는 것까지는, 장바구니를 사용하고 분리를 성의껏 하는 방식으로 지구에게 사죄하며 산다. 카드값은 다음달의 렉라자맨에게 맡기기로 하자. 지나간 걱정은 잊고 밝은 쇼핑의 세계에 몰두하자.            p.198


죽음은 누구에게나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그걸 막을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다.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 그는 병원에서 버킷리스트를 쓴다. 괜히 비장해지기도 하고,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었으니까. 퇴원하면 집에 있는 책을 정확하게 절반만 버리겠다고. 살아가게 된다면 읽지 않을 것이다. 죽으면 더 읽을 수 없다. 따라서 책은 버려야 한다. 하지만 책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책을 버리려고 할 때마다 마음이 약해져, 무조건 하루에 열 권씩 버리기로 하지만 정해진 할당량을 채우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렉자라맨이 되고 나서 약의 효과로 발열이 잡히고 기침도 줄어들어 '대화'를 할 수 있는 몸상태가 된다. 저녁 산책도 가고, 잠깐의 자유가 생기지만, 언제 기습적으로 구속당할지 모르는 것이 약의 내성이었다. '효과가 너무 좋은 약이라 다시 삶을 부여잡고 싶게 된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왜냐하면 렉라자는 짧은 시간이지만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게 해주는 대신, 병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잠시 유예의 시간을 벌어주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살지도 모르는데 시간이 생기자 다시 소설책부터 펴드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글을 읽으며 뭔가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고, 건강할 때도 쓰지 못했던 명작을 투암을 하면서 쓰기는 어렵다는 말에 마음이 또 아파왔고, 중고 서점에 책을 팔면 하루치 일용할 양식이 생긴다는 대목에서 나랑 비슷한 거 같다며 공감하고, 어쩐지 매사에 불만 가득한 투덜이 스머프가 된 것 같다는 문장에 스머프를 알다니 나랑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었구나 싶은 마음에 따스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투병기의 형식으로 쓰였으므로 내용이 슬프고 어둡지 않을 수 없겠지만, 김학찬 작가의 문장은 위트있고, 담백하고, 유머러스해서 전반적으로는 밝은 기운이 더 가득했던 그런 글이었다. 이 책을 통해 김학찬 작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 같아 그의 소설들을 찾아서 읽어 보려고 한다. 그의 새로운 작품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쉽지만, 그럼에도 글이라는 형태로 그의 영혼이 세상에 아직 남아 있으니까.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삶은 계속 흘러 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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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왜 도서관이 필요한가
양쑤추 지음, 홍상훈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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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자네는 틀림없이 이 책을 좋아할 걸세."

그 책을 다 읽고 나자 누군가가 내 등을 살짝 떠밀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개인이 낯선 분야에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이끌었고, 자기가 '읽을 수 없는' 책을 읽을 수 있고,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있다고 굳게 믿으라고 했다. 책을 덮고 나자, 나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졌다. 새해에는 '만들 수 없는' 도서 목록을 스스로 만들고,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기를 바랐다.             p.106~107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던 저자는 지방 행정기관 임시직으로 1년 동안 근무하며 우연히 도서관 설립을 담당하게 된다. 지금까지 도서관이 하나도 없었던 지역에서 제대로 된 부서도, 예산도, 인력도 없이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문제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도서관 사서를 꿈꿔봤겠지만, 도서 구매비 100만 위안으로 도서관 전체의 책을 선정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규모의 일이니 말이다. 그렇게 서가 하나하나를 채워줄 책들을 고르는 도서 목록 작성부터 시작해 내장공사, 시설 점검, 책상 및 의자 배치, 도서관 근무자 훈련 및 자리 배정 등 도서관을 짓고, 운영하는 일들이 하나씩 시작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집 책장에 있던 책, 도서관에 있는 책, 친구에게 빌린 책, 어딘가의 대기실에 있는 책들을 펼치며 자신만의 독서 편력을 시작해 왔다. 처음부터 제 돈으로 책을 구매해서 읽는 경우란 없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교실에 비치되어 있던 학급도서부터 책 대여점, 시립 도서관 등을 거치며 차근차근 책을 읽어 왔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도서관'에서 성장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독서 경험을 쌓아 가며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니 말이다.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도서관에 대한 에세이들은 많이 읽어 왔지만, 아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도서관 건립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이라 너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도서관 건립의 역사 이면에는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 온 마음을 쏟은 역정의 역사가 은연중에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책을 선정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문제이다. 한 사람에게는 보물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지푸라기일 수도 있다. 책을 선정하는 직위를 감당할 수 있는 이는 어떤 사람일까? ... 일단 책벌레로 학문적 소양이 풍부하여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그 책벌레는 절대 책만 알고 세상사에는 어둡거나 지나치게 책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되고, 자주 밖으로 나와 활동함으로써, 사회적 약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저학력자들의 수요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p.196


이 책에는 도서관 건립에 필요한 수많은 회의와 고민 등 실무적인 부분이 많이 담겨 있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도서 목록 선정이다. 100만 위안의 경비로 총 3만 권을 구매하기로 결정하고, 동일한 책을 3권씩 갖춘다면 총 1만 종이 된다. 저자는 서적상들에게 각기 1만 종의 도서 목록을 받았는데, 그들의 리스트는 저자를 실망시킨다. 어쩌다 문학 거장의 작품이 있더라도 정작 대표작은 없었고, 어쩌다 대표작이 있더라도 하필 좋은 출판사를 피해갔으며, 아동서적에는 국제적인 상을 받았거나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그림책은 전혀 없었다. 상인들은 헐값에 책을 한꺼번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일을 해왔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도서관의 영혼은 도서목록'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계속 일을 해 나간다. 이후 목록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궁금한 책을 발견하고 '도서관에 책이 도착하면 내가 제일 먼저 대출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도서관 건립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설레는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도서관 때문에 노심초사하느라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얼굴이 누렇게 뜨고, 머리카락은 축 처져 있었을 정도인데, 자신의 모습이 그 모양인 줄도 몰랐다고 하니 말이다. 학자이자 대학교수인 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공무원 사회란 온갖 부조리한 일들과 권력 싸움으로 가득했고, 자신의 도서 목록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고군분투해야 했다. 책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세상에 도서관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만들어 준 시간이었다. 예전에 사내 도서관을 몇 년간 운영했던 적이 있는데, 매달 책을 선정해서 구매하고, 그걸 직원들에게 읽히기 위해 고심을 했던 시간이 있어서인지 저자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 더 공감하며 읽었다. 책더미 사이에 들어가 책을 고르는 일, 가격을 따지지 않고 공금으로 책을 구매하는 사치를 부리는 일에 대한 저자의 즐거움을 나도 느껴본 적이 있으니 말이다. 공공 도서관의 설계에서 서가의 구성, 선정 도서 하나하나에 얽힌 고민과 에피소드까지, 애서가들이 궁금해 할만한 요소로 가득한 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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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은 어쩌다
아밀 지음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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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멜론은 자신이 좋았다.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멜론에게 멜론이 아닌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여자라느니 남자라느니 나누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돈이 많고 적고나 사는 집이 넓고 좁고를 따지지 않았으며, 어른이 되면 거짓임을 알게 되는 가짜 지식을 가르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을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런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때리거나 혼내지도 않았다. 그 상태는 너무나 당연해서 멜론은 지상의 아이들이 그토록 불합리한 일들을 견딘다는 사실을 들을 때마다 놀랐다.               - '노 어덜트 헤븐' 중에서, p.113


면허 없이, 또는 면허가 있으면서도 사악한 저주를 행하는 불법 흑마녀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흑마법 사용을 꺼리는 마녀가 있다. 마녀 학교에서 교육받고, 면허를 따고,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정식으로 장사하는 백마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하고 적법한 마법만 행하느라, 인형 눈알 붙이는 일로 근근이 먹고산다. 친구들은 그런 마녀에게 고지식하다고 핀잔하지만, 스스로는 남들보다 특별히 양심적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겁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그저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날도 인형에 눈알을 붙이고 있었다. 요즘 아이돌들은 VIP 팬클럽 특전이나 팬 사인회 특전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배포하곤 했다. 머리카락이나 눈물이 가장 흔하고, 가끔은 손톱이나 타액도 잇었다. 이 특별한 선물을 둘러싸고 엄청난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팬들은 거금을 주고 아이돌의 신체 부위를 양도받거나, 그 신체 부위를 마녀에게 맡겨서 아이돌에게 축복이나 저주를 걸곤 했다. 마녀가 지금 붙이는 인형의 눈알 또한 그런 종류였다. 인형에 진짜 아이돌의 영혼을 살짝 덧입히면서 팬들이 자신의 스타와 함께 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의뢰인이 들어온다. 데뷔한 지 이년 차인 솔로 남자 아이돌 인형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문제는 그 아이돌이 신체 부위를 배포하지 않았고, 의뢰인은 어디선가 그의 피를 구해온 것이다. 피는 머리카락이나 손톱 따위보다 훨씬 강력한 마력이 깃든 지료로, 이걸 이용하면 강력한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거나, 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차원이 다른 재료였던 것이다. 과연 마녀는 이 의뢰를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정말이지 모든 게 피곤해요. 너무 오래 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일찍 늙어버린 것만 같아요. 이래저래 헤프게 웃고는 다니는데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 못한 것 같아요. 밤이면 밤마다 뭔가가 머리를 꾹꾹 눌러대는 것같이 무거워요. 항상 아주 무거운 철로 만들어진 상자를 이고 사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싸워대는 것 같아요. 지겨워 죽겠어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가난하게 자란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걸 못 한 것도 아니고, 어디 크게 아픈 데도 없이, 잘 먹고 잘 자랐잖아요. 그건 나도 안다고요. 그런데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남들은 다 갖고 있는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요.              - '야간 산책' 중에서, p.319


<로드킬>에 이은 아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김지현'이라는 본명으로 영미문학 번역가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 알베르토 망겔의 <끝내주는 괴물들>, 마리사 마이어의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 마이클 로보텀의 <산산이 부서진 남자>,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 등 많은 작품들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였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첫 산문집이었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라는 작품을 참 좋아했는데, 다정하고 따뜻한 글이었다. 그에 비해 '아밀'이라는 필명으로 쓰는 소설들은 굉장히 다른 분위기이다. 소설을 쓸 때 굳이 필명을 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은 것이, 번역가일 때와 소설가일 때 두 자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아밀은 ‘환상문학웹진 거울’, ‘공동창작프로젝트 ILN’, ‘브릿G’ 등 기성문단 바깥 플랫폼에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오며, 이제는 점점 더 자신만의 색채를 뚜렷하게 보여주면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작품 역시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으니 말이다. 


이 소설집에는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인형 눈알 붙이기> 등 여덟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와 이성애자 여성의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쯤을 보여주는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여자를 좋아하지만 여자가 어려웠던 부치가 섹스 로봇을 집에 들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 선망의 대상이자 경멸과 타도의 대상인 유전자 편집으로 태어난 아이돌의 이야기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지만 손가락이 짧다는 신체적 한계에 부딪힌 소녀가 '차원의 마녀'라는 점쟁이와 하게 되는 아주 특별한 거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선하고 적법한 마법만 행하느라 인형 눈알 붙이는 일로 근근이 먹고 사는 마녀에게 들어온 거부할 수 없는 솔깃한 의뢰 <인형 눈알 붙이기> 등 유머러스하고 경쾌하지만, 예리한 시선으로 현실을 살짝 뛰어넘는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 아밀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서는 인간보다 인간을 더 이해하는 로봇이 있고, 이성애자가 성소수자로 차별당하는 일이 예사로우며, 뱀파이어와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간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마법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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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디츠 - 나치 포로수용소를 뒤흔든 집요한 탈출과 생존의 기록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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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크리스마스는 기묘하게 평화로웠다. 외부 세계와 차단된 포로들은 전쟁 상황을 조금도 몰랐다. 고향에서 오는 편지도 없고, 최고 사령부의 지시도 없고, 미래에 대한 감도 없었다. 중세의 성벽 안에 갇힌 그들은 시간의 흐름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은 내일 끝날 수도 있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전투의 흥분, 포로가 된 충격, 다른 수용소에서 이곳으로 이송되며 느낀 불안감을 겪고 나서 만난 콜디츠는 동떨어진 장소, 거의 비현실적인 장소처럼 보였다. <도시 위에 높이 떠 있는 동화 속의 성.>                 p.40~41


1943년 9월의 어느 따뜻한 밤 자정 직전에 구스타프 로텐베르거 원사가 소총을 둘러멘 병사 두 명과 테라스에 나타났다. 포로들은 두 시간 전 이미 숙소에 들어갔고, 숙소 출입문도 잠겼다. 콜디츠는 조용했다. 로텐베르거는 첫 번째 경비병에게 다가가 서쪽에 탈출 시도가 있으니 즉시 경비실에 보고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두 번째 경비병과 세 번째 경비병에게 다가가 근무가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근무 시간은 아직 두 시간 더 남아 있었다. 오늘 근무는 일찍 끝내라는 로텐베르거가 유난히 성마르게 구는 것 같았다. 사실 로텐베르거는 가짜였다. 그의 정체는 스물다섯 살의 영국군 중위 마이클 싱클레어였다. 이미 콜디츠에서 두 번 탈출했다가 다시 붙잡혀 온 경험이 있는 그는 재능 있는 아마추어 배우이자 망상가였다. 


머릿속에 온통 탈출 생각뿐이었던 그의 계획은 단순했다. 경비병을 다른 곳으로 보낸 뒤, 먼저 스무 명이 침대보를 찢어 만든 끈을 이용해 건물 바깥쪽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그렇게 인근의 숲으로 들어가면, 남은 일행이 그들의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 당시 콜디츠에 갇힌 포로들 중에는 거의 3년이나 된 사람이 많았고,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탈출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감시받는 자와 감시하는 자 사이의 전쟁이 수용소에서 점점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콜디츠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탈주가 될 터였다. 과연 그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몹시 굶주린 포로들이 더 많이 도착하자, 에거스는 각자에게 빵 한 조각과 잼을 나눠 주면서 그들이 서로의 빈약한 음식을 훔치지 못하게 권총을 겨누었다. 공습 사이렌이 밤낮으로 울렸다. <모두가 밀치고, 소란스럽고, 사과하고, 냄새가 난다.> 플랫은 이렇게 투덜거렸다. 마침내 연료마저 떨어지자, 독일군은 소수의 포로들을 밖으로 보내 티어가르텐에서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오게 했다. 그렇게 나간 사람 중 한 명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마당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는데, 감옥 냄새가 우리를 강타했다.> 콜디츠는 얼어붙을 듯이 찹고, 악취 나고, 굶주리는 연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p.294


독일의 물데강에서 45미터 높이로 솟은 산꼭ㄷ기에 위치한 콜디츠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포로수용소로 사용되었다. 독일은 1043년경 지어진 이후 1천 년 동안 강대한 왕조들이 권력과 명성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 동안 증축과 개조,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던 고딕 양식의 성을 개조해 콜디츠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성의 목적은 처음부터 한결 같았다. 신민들에게 짓눌릴 듯한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 통치자의 힘을 보여 주는 것, 적에게 겁을 주고 포로를 감금하는 것. 그곳은 구제불능의 포로들을 모아 놓은 수용소였고, 수많은 탈출 시도가 있었다. 포로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탈출을 감행하고, 간수들은 강력한 통제와 긴장 속에서 이를 감시했다. 콜디츠성은 무시무시한 감옥이었으나 부조리할 때가 많았고, 고통의 장소였으나 고급스러운 희극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책은 철조망에 둘러싸여 세상과 단절된 채 엄중한 감시를 받는 이 새장에 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콜디츠는 높이 27m의 담장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외부로 이어지는 2개의 통로를 제외하면 주변이 가파른 낭떠러지 혹은 해자로 되어 있었다. 곳곳에 기관총 감시초소가 설치돼 삼엄한 경비 태세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책에는 생생한 사진들도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콜디츠성은 겉에서 보기에는 단단하고 틈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숨겨진 방, 버려진 다락방, 중세식 잠금장치로 단단히 잠긴 문, 오래전에 기억에서 사라진 틈새 등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래서 탈출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콜디츠에는 전쟁 전의 사회가 축소판으로 구현되어 있었는데, 다만 실제 사회보다 더 기괴할 뿐이었다. 저자는 기밀 해제된 공문서, 생존자 인터뷰 기록, 포로 및 독일군의 저서 등을 토대로 콜디츠에서의 일상과 인물들을 재구성했다. 이 책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의 포로수용소 역사를 정밀하게 복원한 놀라운 논픽션이다. <나치에 맞선 저항>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공간으로 회자되어 온 콜디츠의 진실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웬만한 영화보다 더 극적인 탈출과 생존의 기록이 궁금하다면, 극한에 처한 인간의 면면을 통해 그 어떤 전쟁 서사보다 드라마틱하고 강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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