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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들의 도시 - 독서 여행자 곽아람의 문학 기행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이야기 속 장소가 실재한다 믿는 사람, 이야기란 허구니 배경 또한 허구라 생각하는 사람. 나는 전자였고, 이야기 속 트로이가 실재한다 믿었던 슐리만처럼 언제나 소설 속 장소들을 갈망했으며 그중 어떤 곳에는 반드시 가보리라 결심하곤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는 내가 가장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온 곳이었다. p.21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도시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된 장소가 실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극중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고, 걷고, 행동하고, 생각하며 그곳을 고스란히 체험한다. 그러니 이야기 속 장소를 찾아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척 감동적인 일이다. 책을 읽으며 간절히 마음속으로 그리던 이미지가 실제로 구현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안식년으로 주어진 1년간 심상으로만 존재하던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떠난 여행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바람과 함께, 스칼렛>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었고, 이번에 나온 것은 개정증보판이다. 다시 쓰다시피 책의 많은 부분을 고치고 다듬은 후 새로운 이야기들을 추가한 버전이라, 기존에 읽었더라도 다시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저자는 세상에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서두를 꺼낸다. 이야기 속 장소가 실재한다 믿는 사람, 이야기란 허구니 배경 또한 허구라 생각하는 사람. 자신은 전자였고, 언제나 소설 속 장소들을 갈망했으며 그중 어떤 곳에는 반드시 가보리라 결심하곤 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온 곳을 어른이 되어 직접 방문했을 때의 감회란 어떨지 상상이 되어 책을 읽는 내내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저자는 <빨강 머리 앤>의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애틀랜타, <작은 아씨들>이 쓰인 사추세츠주 콩코드, <위대한 개츠비>의 뉴헤이븐 등 사랑하는 문학작품의 배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땅을 직접 밟아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나는 30년 넘게 <빙점>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게 요코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재였는데, 마침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여행이 특히 의미 깊었다. 그리고 문학의 세계를 사랑하도록 나를 인도한 부모님 중 한 사람, 엄마와 함께할 수 있었다는 점이. 여기서 요코가, 여기서 나쓰에가, 여기서 무라이가, 여기서 게이조가...... 우리는 아사히카와 곳곳에서 소설 속 인물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들의 동선을 상상하고 '아, 그랬구나' 감탄하며 입 밖으로 내어 다시 이야기했다. 그렇게 아사히카와에서, <빙점>은 엄마와 나의 이야기로 다시 쓰였다. p.355
모든 여행지들이 인상적이었지만, 특히나 흥미롭게 읽은 것은 <빙점>의 배경인 아사히카와로 갔던 여정이었다. 빙점은 미우라 아야코가 1964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저자는 30여 년 전 소설을 처음 읽은 이후로 언제나 <빙점>의 배경지인 아사히카와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삿포로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가면 홋카이도 제2의 도시 아사히카와에 도착한다고 한다. 저자는 문학을 좋아하는 엄마와 함께 직항 노선이 개설되었을 때 다녀왔다고 한다. 광복 이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일본 소설이 <빙점>이라고 하는데, 스토리만 보자면 막장 드라마라 해도 무방한 이 작품을 저자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읽었다고 한다. 나 역시 초등학교 고학년 때 가장 많은 소설을 읽었었는데, 어른이 되어 그 시절 너무 가고 싶었던 작품 속 배경을 직접 찾아간다면 얼마나 설레일까 생각하며 읽었다. 작품의 포문을 열었던 소나무숲에 엄마와 함께 도착했고, 미우라 아야코 기념문학관을 시작으로 소설에 묘사된 숲길과 제방 너머의 독일가문비나무숲을 고스란히 경험한다. 아아, 장소의 힘이란! 책 속 묘사와 저자가 직접 보고 느낀 풍경들이 어우러져 문학 속 장소가 실제로 구현된 순간의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빨강 머리 앤을 만나고, 작은 아씨들을 되짚고, 스칼렛의 발자취를 뒤쫓고, 개츠비의 그리움을 체화했던 문학 여행이 너무도 부러웠다. 이야기 속 장소를 찾아 선뜻 여행을 나서는 삶이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내가 사랑했던 그 도시를 가보리라 다짐해본다. 우선 요 네스뵈의 작품들을 만나러 노르웨이 오슬로부터 가보고 싶다.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건 문학이 단지 허구만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해서 든든한 위로가 되어 준다.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책벌레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