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미국사 - 트럼프를 탄생시킨 미국 역사 이야기
김봉중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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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견제와 균형'의 원칙은 미국 헌법의 뿌리 깊은 근간이다.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며, 단순한 법의 모음이 아니라 '건국의 아버지들'이 경험한 억압과 자유에 대한 열망의 산물이다. 그들은 영국 통치하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의 틀을 구축했다. 또한 당시 유럽에서 확산되고 있던 계몽주의 사상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상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잇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헌법은 '견제와 균형'의 틀 위에 세워졌다.              p.63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기존 정치 문법을 거부한 채 부동산 재벌로서 쌓은 막강한 재력과 대중적 인지도를 앞세워 정계에 뛰어들었다. 미국에서 거대 자본가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는 일 또한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과 대담한 언변, 그리고 '아웃사이더'라는 신선함으로 정면 돌파했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의 독선적인 행보와 정책들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민주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퇴보를 겪고 있다는 우려가 널리 퍼지고 있다. 오죽하면 그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트럼프가 미국과 세계를 회복 불가능한 혼돈으로 몰아넣을지, 아니면 뜻밖의 변화를 이끌어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전례 없는 혼돈과 불확실성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더욱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김봉중 교수는 국내 최고의 역사 스토리텔러이자 미국인에게 미국사를 가르쳤던 미국사 최고 권위자로 알려졌다.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해 미국사 강의를 할 때마다 크나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책 한권으로 미국사 명강의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자는 트럼프 시대를 미국 역사라는 큰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트럼프 시대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할지, 반대로 미국 역사의 전환점이 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트럼프라는 인물을 통해 미국의 역사와 문명을 냉철하게 바라본다. 




9.11 테러 직후 부시 대통령은 의회에서 "누구든 미국 편에 서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말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신호탄이었다. 전 세계 국가들에게 테러 지원을 멈추고 미국과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테러와의 전쟁은 실패로 귀결되었고 그 단순한 이분법은 미국 국내 정치에까지 번졌다. 보수와 진보, '우리'와 '그들'의 벽은 더욱 견고해졌다.            p.216~217


다양성, 문화유산, 불공정, 사회 정의, 격차, 암묵적인 편견, 양극화, 확증 편향, 페미니즘, 논바이너리, 성별 정체성, 젠더 이데올로기, 취약 계층, 마이너리티, 기후 위기.... 등등 이러한 표현들이 '트럼프 금지어'라는 사실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러한 금기어 리스트는 지금이 무슨 전체주의 국가 시절이라도 되나 싶게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1984>가 전체주의 국가가 사실을 왜곡하고 조장해 정부가 원하는 대로 여론과 역사를 통제하는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작품이듯이, 지금의 트럼프 금지어 정책 역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의 토대를 흔드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 책은 미국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훑으며 트럼프라는 ‘결과’가 탄생하게 된 미스터리를 해부한다. 


트럼프는 정치적 아웃사이더로서 기존의 정치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경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게다가 그는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사업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최초 사례이기도 하다. 기존 대통령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도 모두 제도적 틀 내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며 민주주의의 전통을 지켜냈던 것에 반해, 트럼프는 전통적 절차와 규범을 무시하거나 훼손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단순히 기존 정치권 밖의 인물인 데서 그치지 않고 헌법 정신과 민주적 전통을 한순간에 무시하고 흔든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이단아가 아닌 현대 미국 민주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인물이다. 현재 미국은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극단의 시대를 겪고 있으며, 무엇으로 이 분열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을지 진지한 고민이 절실하다.  오늘날 한국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 미국의 영향력은 지대했는데, 트럼프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오랜 시간 쌓아온 양국간 가치와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에 대해서도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25년 현재의 미국이 왜, 이러한 모습이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앞으로의 미국과 한국, 세계의 모습을 조망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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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해방 - 알츠하이머병 세계적 권위자가 30년 연구로 밝힌 뇌 건강 프로젝트
묵인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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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노화가 치매의 가장 큰 위험 요소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든다고 다 치매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노화 과정에서 60세부터 매년 0.5~1% 정도의 뇌 부피 감소가 일어난다. 특히 전두엽과 해마의 미세한 위축이 관찰되며, 기억력, 주의력, 실행기능 등이 점진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비교적 서서히 진행되며, 일상적인 인지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치매는 단순한 노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특정 신경세포가 병리적인 변화를 거쳐 급격하게 소실되는 과정이다.              p.46~47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지금, 치매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되었다. 나이든 부모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단연 '치매'일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건강하고 당당한 노년의 삶을 즐기면 좋겠지만, 그게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랑하던 사람의 눈빛이 사라지고, 말투가 바뀌며, 존재 자체가 낯설어지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면 남겨진 가족들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책이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이 책은 30년 넘게 알츠하이머병을 파헤쳐온 세계적 의과학자이자 서울대 치매융합연구센터장 묵인희 교수가 처음으로 대중을 상대로 해서 펴낸 것이다. 인류가 치매와 벌이고 있는 전쟁의 최전선에서 수십년간 고군분투한 연구자의 가장 최신 연구 결과를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치매를 그저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병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며 치매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 인상깊게 읽었다. 이 책은 치매의 발병 원인부터 조기진단의 중요성, 약물 치료부터 디지털 치료제, 비약물 치료 등 치매 치료의 최전선과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치매 예방 전략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인 내용들을 가득 담고 있다. 




치매와 단순 건망증의 가장 큰 차이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과 자신에 대한 인지 능력이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자신이 문제를 인지한다면 대부분 건망증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외부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고 자신이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치매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치매와 단순 건망증을 구분하는 간단한 방법 중 하나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과거의 일에 대해 언급하거나 힌트를 주었을 때 건망증인 경우에는 힌트를 통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치매의 경우에는 힌트를 주어도 기억해내지 못하고 "정말 그랬어?"라고 반문하는 경우가 많다.              p.258


나이가 들면서 자꾸 깜빡깜빡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물론 건망증은 나이가 많지 않아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여타 다른 여러 이유로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망증은 일상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어서 생기는 건망증은 그게 치매로 연결될 까봐 걱정하게 만든다. 엄마가 일흔이 넘고 나니 카드키를 잃어 버린다거나, 외출할 때 물건을 두고 와서 다시 집에 돌아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소소한 건망증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치매 검사라는 게 있어서 받았는데 치매는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도 걱정이 되신다고 말이다. 이 책의 서두에 치매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알려 주면서 건망증과 치매가 어떻게 다른 건지 명확하게 구분해서 설명이 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건망증은 뇌기능의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 전체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고 일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치매는 잊어버리는 기억의 범위가 더 넓어지며 일상생활에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치매를 예방하는 방법에 대한 장도 매우 도움이 되었다. 뇌의 각 영역을 활성화시키고 뇌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인지기능 강화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단순 TV 시청은 수동적인 활동이므로 좋지 않고, 독서, 글쓰기, 퍼즐, 악기 연주, 외국어 학습 등 다양한 활동들이 우리 뇌를 발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또한 인지기능 강화 훈련 프로그램도 개발되어 있고, 인지 중재 치료와 인지 재활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과 AI를 융합한 새로운 형태의 인지훈련 및 진단 서비스도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개인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으로는 운동과 식단이 큰 도움이 되고, 정신적인 건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사회적 교류는 뇌기능을 활성화하고 우울증을 예방해 알츠하이머병 발병 위험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고 하니 그 중요성을 알 것 같았다. 또한 치매 예방을 위한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인지예비능'이라는 개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치매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조기진단과 적극적인 예방을 통해 충분히 대비하고 맞설 수 있는 질병이라는 것만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되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노년을 미리 준비하고 싶은 이들에게, 노년의 부모들이 있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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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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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6월이 좋아. 육월이라고 하지 않고 유월이라고 할 때의 동그랗게 내민 입술을 좋아하고 야무지게 몸피를 불려 가는 나뭇잎이 쏴아아아 바람과 만나는 소리도 좋고 땀 흘리고 돌아온 사람에게 내미는 얼음물의 차가움도 좋아. 6월이 와서 좋아. 기다리던 사람이 6월에 와줘서 좋아. 그 사람의 이름은 6월로 하자. 남자아이면 준, 여자아이면 주은이라고 부르자. 우리 영원히 6월과 함께 살자.             - 이주혜, '유월이니까' 중에서, p.107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언니가 치는 사고들을 수습해 왔다. 그러다 올해 초 언니가 자신이 입양한 개를 떠넘겨 버린 것이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온 열세 살의 영국코커스패니얼인 하지는 얼마 전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하지를 사랑하는 건 어쩐지 언니에게 지는 것처럼 느껴져서, 의도적으로 하지에게 정을 붙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그 늙고 커다란 개가 조금은 그리워졌다. 하지가 떠난 뒤는 한동안 밖에 나가 걸을 일이 없었다. 프리랜서가 된 이후로 외출할 일이 드물었고, 원체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지 한 달 만에 하지가 집에 돌아왔다. 희뿌연 유령 개가 되어서. 유령 개가 되어 돌아온 하지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느릿느릿 걷거나,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했다. 하지에게 뭘 해줘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나는 우선 산책부터 시도해 보기로 한다. 목줄을 채울 수도, 옷을 입히거나 신발을 신길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유령 개와 산책을 시작했고, 그렇게 느릿느릿 걷다가 때때로 멈춰 서며 목적지 없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하는 산책은 예상외로 무척 좋았지만, 문제는 하지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탓에 내가 수상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민망하지만 뭐 어때 싶은 마음으로 하지와의 산책을 여유롭게 즐긴다. 갑자기 공으로 변하더니 경사진 길을 빠르게 굴러 내려가는 하지가 너무 귀여웠고, 고양이 두 마리가 하지의 기척을 눈치채는 것도 신기했다. 반려견을 오래 키워봤다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였다. 나 역시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반려견이 떠난 뒤, 한 동안은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멀리서 짖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현관에 뛰어 나올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유령 개라니... 이토록 사랑스러운 발상이라니... 이야기를 읽는 내내 뭉클하고, 설레었다. '두 손으로 하지를 안아 올리자 갓 구운 빵을 품에 안은 듯 유령 개의 온기가 전해졌다'는 대목에서 그 따스함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는 왜 유령 개가 되어 나를 찾아온 것일까. 유령 개와 나의 산책은 계속 될 수 있을까. 




이따금씩 명길은 혼자 사는 그 집의 배치가 이전과는 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했다. 이 년쯤 교제하는 동안 옷장과 신발장, 욕실의 수납장마다 그의 물건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무언가를 견디거나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설거지한 그릇들은 한번씩 다시 들여다봐야 할 때가 많았다. 욕실의 젖은 슬리퍼 때문에 양말이 젖을 때도 자주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괜찮았다. 숨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명길이 숨길 수 있는 마음이었으니까.             - 임현, '느리게 흩어지기' 중에서, p.174~175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첫 번째 책이다. 동사 <하다>를 테마로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에 관한 책이 차례로 나올 예정이다. 그 첫 번째 책 <걷다> 에는 김유담, 성해나, 이주혜, 임선우, 임현 작가가 참여했다. <없는 셈 치고>에서 암을 앓게 된 고모는 보드라운 황토로 조성된 길을 맨발로 걷는다. <후보>에선 38년간 철물점을 운영한 남자가 관절에 무리가 덜 가는 방법으로 의사가 알려준 뒤로 걷기를 한다. <유월이니까>에서 아내가 갑자기 사라진 뒤 남자는 밤마다 공원의 트랙에서 걸으며 언제나 비슷한 시간에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여자를 만난다. <유령 개 산책하기>에선 열세 살 늙은 개 하지가 죽은 지 한 달 만에 유령 개가 되어 돌아와 다시 산책을 시작한다. <느리게 흩어지기>에서는 독신 중년 여성의 단조롭고 일정한 생활 속에 산책은 중요한 루틴이다. 


각자 배경도, 나이도, 상황도 다른 인물들이 기를 쓰고 걷는다. 살기 위해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르내리고, 앞으로 걷다 뒤로 걷고, 맨발로 걷고, 느릿느릿 걷다가 멈춰 서기도 하면서 말이다. 다섯 편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르는 사람과 함께 걷기도 하고, 유령 개와 걷기도 하며, 혼자 걷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임선우 작가의 <유령 개 산책하기>가 너무 사랑스럽고, 뭉클하고, 좋았다. 이 시리즈는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옷을 입은 표지도 예쁘고,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가 함께 되어 있어 실물로 보면 정말 근사하다. 시리즈에 참여하는 25명의 소설가에 대한 라인업이 미리 나와 있어, 나올 때마다 챙겨봐야겠다 싶었다. 다음 편인 <묻다>는 어떤 이야기와 디자인으로 찾아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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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날들이 단단한 인생을 만들지
임희재 지음 / 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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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단칼에 거절하거나 모른 척한 프랑스 이웃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나같이 자기 일처럼, 친구 일처럼 발 벗고 나서주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마주해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이웃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으니까. 내가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도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 그러니 이웃들에게 미리 호감 포인트를 적립해놓으면 어떨까? 갑자기 옆집 초인종을 눌러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p.19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어떤 힘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모두가 사는게 바빠서 팍팍해진 요즘, 일상 속에서 느끼는 작은 온기가 하루를 기분좋게 만들고, 내일을 좀더 화사하게 맞이할 수 있게 해준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곳이고, 아무리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우리지만, 타인의 작은 친절과 소소한 다정함이 결국 우리를 구원해주는 힘인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14년 동안 유럽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만난 친절한 이웃들과 다정한 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낯선 도시에서 혼자였지만, 미소지으며 인사하던 사람들과 마음을 다해 도와주던 이웃들 덕분에 혼자가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 언제 어디서나 주고받는 다정한 말 한마디, 손을 내밀면 언제든 잡아주던 따뜻한 사람들 덕분에 혼자서도 단단히 설 수 있는 '지금의 나'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프랑스에는 그만큼 다양한 정이 있었고, 독일 남자친구의 부모님은 독일인은 다 무뚝뚝하다는 편견이 깨질 만큼 한결같이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다정함이 남았다.'는 문장이 너무 좋았다. 친절은 또다른 친절을 만들고, 다정함은 또다른 마음을 다정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에서 위로가 되어 주었다. 사실 요즘은 한 집에 오래 살아도 이웃과 교류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사를 할 수는 있어도, 예전처럼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음식일 나눠 먹거나, 일상을 공유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린 시절에 살던 아파트에서는 옆집 아래집 할 것 없이 전부 교류하며 살았었는데, 내가 어른이 되고 나니 이제는 낯선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래서 더욱 저자가 외국에서 혼자 오랜 기간 살면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도와주었던 이웃들의 이야기가 부러워졌다. 우리나라도 예전엔 그랬었는데 하면서 말이다. 




프랑스 여성들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특히 파리 지하철역 계단에서 누군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낑낑대고 있으면, 누군가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있으면 여자들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언제 어디서나 시민의 위험을 감지하고 그들을 돕는 영화 속 히어로처럼. 조금이라도 난처해 보이는 사람에게 여자들은 성큼 다가갔다. 젊은 프랑스 여성부터 흑인 이민자 아주머니까지, 나이와 인종에 상관없이 여자들이 여자를 도왔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자신의 할 일이 끝나면 쿨하게 갈 길을 갔다.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다정함이 남았다.                p.209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적자생존'의 통념에 반기를 들어 진화의 승자는 최적자가 아니라 다정한 자라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책이 사랑받으면서 근래에 '다정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들이 많이 나왔었다. 나 역시 관련 책들을 꽤 많이 일었었는데, 진화 인류학의 시점으로 다정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도 있었고, 뇌과학의 시점으로 인간의 협력과 이타주의에 대해 말하는 책도 있었다. 지하철 선로에 추락한 청년을 구하려고 뛰어든 행인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모르는 척하는 이웃도 있다. 한쪽에선 임신부인 아내가 상어의 공격으로부터 남편을 구해내는데, 다른 한쪽에선 길에서 누군가 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더라도 방관하거나 모른척 한다. 인간이 아주 무모할 정도로 타인을 구하려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면, 어째서 세상 곳곳에 타인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반대로 왜 누군가는 자기 일도 아닌데 나서서 함께 나루려고 하는 것일까.


혐오와 폭력을 비롯해서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는 요즘,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정함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책을 만나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일상 속의 작은 온기를 통해 별것 아닌 말이 하루를 기분좋게 만들어 준다는 것, 사소한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 책을 읽으며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당연한 세상,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세상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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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 - 유전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케빈 J. 미첼 지음, 이현숙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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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컨대 개인의 두뇌 배선 방식은 유전적 구성뿐 아니라 발달 프로그램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가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특정 형질의 변이가 오직 일부만 유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해서 나머지 변이가 반드시 환경적 요인이나 양육으로 결정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상당 부분은 발달 과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개인 간 행동 경향 및 능력 차이는 단순히 유전의 영향이 단독으로 작용함을 넘어 훨씬 선천적일 가능성이 있다.            p.34


재능이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일까. 아니면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정신 질환은 유전적인 이유로 태어나는 것일까, 사회적인 영향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인간의 본성과 양육의 논쟁은 수백 년을 이어왔다. 지능은 타고나는 것인지, 시대와 환경이 바꾸는 것인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유전인지, 환경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우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 현대 과학은 마침내 그 해답을 보여준다.


이 책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인간 본성의 비밀에 대해서 속시원히 밝히고 있다. 우리 뇌의 성장과 발달에 오랜 논쟁을 유발해 온 본성과 양육의 영역 가운데 무엇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기 때문에 매우 흥미진진했다.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유전자는 과연 우리를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는지, 유전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최근 몇 년 동안 유전학과 신경 과학 분야에서는 우리가 타고난 생물학적 요인에 우리 성격을 결정짓는 부분이 일정량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해왔다. 아이들이 있거나, 형제, 자매가 있는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같은 부모 아래서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부모의 양육 방식과 별개로 날 때부터 서로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선천적 특성은 보통 유전자의 영향으로 간주한다. 이는 우리의 심리적 특성 중 다수가 단순히 우리의 성장 환경으로만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이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로,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을 고민해 온 주제이다. 두 사람이 주관적으로 같은 지각 경험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쩌면 원칙적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빨간 사과를 볼 때, 내가 느끼는 경험의 질이 당신과 같을까?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 지각의 본질은 주관적이고 사적인 과정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우리 경험의 질감은 과학의 잣대로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과연 내가 느끼는 빨강이 당신과 같은 색감일까?           p.203


한 생물종의 고유한 본성이 그 종의 유전체에 기록되어 있더라도, 프로그램에서의 유전적 변이에 따라 개체 간 본성에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형제자매처럼 관계가 매우 밀접한 사람의 경우 유사한 성장 환경을 공유하기에, 심리적으로 타인에 비해 더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유사성의 원인이 타고난 본성인가, 양육 환경때문인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는 유전학의 다양한 연구 결과와 사례들을 통해 유전적 요인의 변이에 대해서 살펴보고, 유전적 차이가 행동 형질의 차이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본성과 유전 연구의 기본 방법론, 뇌의 구조 및 기능 발달에 관한 신경과학적 기초와 환경 및 경험과 뇌 가소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격 특성과 지각, 지능, 성별과 신경 발달 질환이라는 구체적인 영역을 살펴보기 때문에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과학 용어 대신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도 설명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따라가면 이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감각과 주관을 다루는 장이 매우 흥미로웠다. 지각의 본질이 주관적이고 사적인 과정을 근간으로 하기에, 우리 경험의 질감은 과학의 잣대로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더라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느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특정한 물체를 동시에 바라볼 때조차, 우리는 서로 다른 지각 경험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저자의 과학적인 해석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성격 차이가 만들어지는 근원, 지능의 유전력, 정신 질환의 유전성, 남녀 경향의 선천적 차이 등 현대 유전학의 최전선에서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르게 태어나며, 각자의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그 차이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러니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인간 본성의 다양성에 대해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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