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말들 - 인생에 질문이 찾아온 순간, 그림이 들려준 이야기
태지원 지음 / 클랩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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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일을 하면 우아한 일상이 이어질 거라 막연히 기대한 적이 있었다. 역시 그런 건 상상일 뿐이었다. TV 소음이나 아이의 게임기 소리를 견뎌가며 타자를 두드리는 게 일상이었다. 글을 쓰겠다고 도서관 자료실에 앉아 기세 좋게 책을 열 권쯤 꺼내와서는 책상에 엎드려 낮잠만 두 시간 자다 집에 온 날도 있다. 이쯤 되니 합리적 의심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화사하고 우아하게 삶을 누리는 비법을 나만 모르고 있는 건가? 인생의 밝은 볕이 드는 장소를 나만 제대로 못 찾고 있는 거 아닌가?            p.54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으로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았던 태지원 작가의 두 번째 명화 인문 에세이가 나왔다.  ‘유랑선생’이라는 필명으로 매주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고 있는 작가가 지난 2년간 연재한 글을 엮어 만든 이 책은 '어른이 되는 길목에서 그림이 건네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어릴 때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의연하고 겸허한 태도를 가지며, 흔들림 없이 살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경험해보니 어른이 되는 건 혼란 속에서 삶이 던지는 어려운 질문을 끊임없이 마주하고 흔들리는 과정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쉽지 않은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그림을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답을 찾았었는데, 그 과정을 고스란히 글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재능이 없다면 꿈을 접어야 할까? 작가는 재능에 대한 의구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마다 알폰스 무하의 그림을 바라본다. 화가로서의 재능이 충분치 않다는 냉정한 선고에도 불구하고, 쉽게 굴하지 않았기에 재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그녀의 삶과 예술 작품들을 보며 재능의 유무로 자신을 섣불리 재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존감의 중요성을 말하는 세상 속에서 온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건 대체 뭘 이야기하는 걸까 고민이었을 때는,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을 살펴본다. 그리고 삶의 고통을 그림과 유머로 승화시킬 줄 아는 예술가였던 그의 생과 작품들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자세를 배운다.

 

 

인생의 바닥을 헤집는 순간이 있다. 삶이 엉망으로 꼬여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시기, 어느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시기가 이따금 돌아온다. 무생물처럼 아무런 자극과 상처 없이 살아가는 게 소원이 되는 시기도 있다. 그 순간 경험하는 우리의 모든 시련과 고통, 허약한 마음은 무의미한 것일까. 어쩌면 시련과 고통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조차 일종의 깨달음 아닐까.       p.296~297

 

연차가 쌓이고 직장 생활을 오래 할수록 처음에 다짐했던 마음들이 무너져가고, 어느 날 돌아보니 독선적이던 옛 동료의 모습에 가까워진 나를 발견하고는 클로드 모네를 떠올린다. 영원히 지속되는 건 없음을 그림으로 선언한 화가인 모네는 모든 순간의 인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하물며 풍경과 사물의 인상도 그러한데, 자신의 논리가 유일한 답이라 밀어붙이는 꼰대가 되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모네의 그림을 보면서 자연스레 드는 것이다. 한 가지 색깔을 영원히 고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넓히려는 시도도 필요해진다. 그림을 통해 다양한 세계의 맥락을 이해하고, 내 안의 좁은 세계를 벗어날 기회가 생긴다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삶의 수많은 고민들을 그림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말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칼 라르손, 폴 세잔, 오귀스트 르누아르, 호아킨 소로야, 마르셀 뒤샹, 디에고 리베라 등등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삶은 의외로 우리의 일상적인 고민들과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의 삶과 그림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고민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현실이 버거울 때는 앞날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오늘의 경험과 감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을 건네고, 타인의 인정과 평가에 연연하며 순간 스쳐가는 숫자에 휘둘리고 주눅이 들 때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나만의 승리를 쌓아가며 오래 버틸 수 있는 힘을 만들도록 기운을 북돋워 준다.

 

사는 게 놀이터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삶의 매 순간마다 각자의 고민을 하게 마련이고, 해결이 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또 매일을 견디고, 버티며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살아간다는 것이 이따금 뿌연 안개 속을 헤매는 일처럼 느껴질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막막해지는 순간, 이 책을 만나 보자. 화가들의 삶과 그림 속 인물들이 건네는 말들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가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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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의 좌표를 내리그은 최초의 이정표, 페미니즘 비평의 시대를 연 최초의 책, 문학 읽기의 새로운 길을 연 현대의고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미국 출간 43년 만에, 한국어판 출간 13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제인 오스틴에서 에밀리 디킨슨까지, 존 밀턴에서 월트 휘트먼까지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키워드로 재구성한 영미 여성 문학사! 너무너무 기대된다! ‘다락방의 미친 독자’ 라는 귀여운 이름의 서포터즈로 한 달 동안 이 책을 만나 보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여성 작가는 당황스러운 이중의 속박에 갇혀 있었다. 여성 문인은 자신이 '단지 여자'일 뿐임을 인정하거나 '남자만큼 훌륭하다'고 저항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같은 불안감을 조장하는 선택에 직면한 여자들이 문학작품을 창조하자 그들의 작품에는 제한된 선택에 대한 강박적 관심뿐 아니라 예외 없이 강박적 감금의 이미지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p.169

 

이 책의 출발점은 두 저자가 대학에서 함께 가르친 여성문학 수업이었다. 영문학과 교수로 그들은 제인 오스틴과 샬럿 브론테부터 에밀리 디킨슨, 버지니아 울프, 실비아 플라스에 이르는 여성들의 작품을 읽으며, 작품들이 지리적 역사적 심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주제와 이미지가 일관적이라는 데 놀랐다고 한다. 실제로 극단적으로 다른 장르에 속하는 여성 문학을 연구할 때도 여성문학의 고유한 전통이라 할 법한 것을 발견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19세기 여성문학을 정밀하게 연구했다. 저자들은 왜 19세기를 파고들게 되었을까? 19세기는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조지 엘리엇, 에밀리 디킨슨 등 거인 같은 작가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였으며, 여성이 작가가 된다는 것이 변칙적이거나 이례적이지 않은 최초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1주차에는 1부, 230페이지까지 읽었다. 1부에서는 글을 쓰고 읽고 생각하는 일이란 본래 남성의 활동이라고 생각해왔던 부권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아가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여성을 ‘천사’와 ‘괴물’이라는 극단적인 이미지 안에 가두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이러한 이미지가 여성의 현실적인 삶뿐만 아니라, 여성이 펜을 들게 된 것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메리 셸리는 브론테가 전복시키려고 애썼던 밀턴의 여성 혐오를 반복하고 있지만, 그녀 또한 추방당한 사람의 의지가 내포하는 위험한 잠재력을 이해하고 있었다. 메리 셸리의 잃어버린 이브는 괴물이 되었고, '그' 또한 사회 구조에 파괴적이었다. 19세기 후반에 다른 여성 작가들도 밀턴의 악령과 싸우면서, 이브의 억누를 수 없는 의지를 말살하겠다고 위협했던 가부장제와 그에 대한 여성들의 대응 수단이었던 마녀 같은 분노를 검토했다.         p.552

 

2주차에는 2부와 3부, 554페이지까지 읽었다. 2부에서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을 살펴보고, 3부에서는 밀턴의 악령에서 시작해 메리 셸리,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은 당대에 통속 소설로 마크 트웨인을 비롯한 남성 작가들로부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D.H. 로런스는 오스틴에 대해 '매우 불쾌하고 형편없고 인색하고 속물적이라는 의미에서 영국적'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제인 오스틴은 '자신이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에 대한 불편함, 특히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부여한 협소한 위치에 대한 불만, 성적 착취의 경제학'에 대해 끈질기게 보여주었다. 3부에 접어들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여자를 기껏해야 남에게 봉사하는 이차적 존재, 아이를 낳거나 아담의 사려 깊은 안내에 따라 나뭇가지를 다듬는 참회하는 이브로 여겼던 밀턴의 악령이 여성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주차에 만나게 될 4부에서는 샬럿 브론테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분석해 볼 예정이라, 서둘러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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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이웃 - 허지웅 산문집
허지웅 지음 / 김영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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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여유와 관용, 무엇보다 유머를 가지고 대응할 줄 아는 모습이 너무나 드물고 귀했습니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마음이 거창한 게 아닐 겁니다. 꼭 친구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같은 편이나 가족이되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이해받고 싶은만큼 남을 이해하는 태도, 그게 더불어 살아간다는 마음의 전모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p.128

 

방송인, 영화평론가, 작가인 허지웅은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림프종으로 2년 간의 암 투병을 마치고 다시 돌아와 <살고 싶다는 농담>이라는 책을 썼었다. 죽음과의 사투 끝에 삶으로 돌아온 그가 힘겨운 현실에 시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단단한 조언과 오늘도 버티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년, 코로나19의 살풍경이 시작될 때부터 거리두기를 중단한 현재까지 보고 듣고 읽고 만난 세상을 담은 신간을 펴냈다. 전작이 생사를 오가는 시련을 겪어낸 자신의 일상에서 비롯되어 삶의 바닥에서도 괜찮다고 버티라는 조언을 건넸었다면, 이번 신작은 '지금 여기 공동체의 이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팬데믹으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 더 높아졌고 두꺼워졌다는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물론 '거리두기'가 시행되기 전에도, 이웃들 간의 불신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긴 하지만 말이다. 도시의 풍경은 점점 삭막해지고, 우리는 바로 옆 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채로 일상을 살고 있다. 이웃간의 왕래라는 말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 버린 '더불어 살아간다는 마음'이야말로 지금 같은 시기에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작가는 바로 그 더불어 살아간다는 마음이 거창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꼭 친구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같은 편이나 가족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고. 그저 내가 이해받고 싶은 만큼 남을 이해하는 태도만 있으면 된다고 말이다.

 

 

 

흑역사를 아예 없는 셈 치고 지워버리기보다, 우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극복하고 대화하며 미래를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토미노의 메시지는 밝은 과거와 어두운 과거를 구별하고 그걸 다시 진짜 과거와 가짜 과거로 나누고 싶어 하는 현실의 흔한 유혹 앞에서 유독 빛을 발합니다. 어제의 우리를 미워하거나 미화하기보다, 일어난 일을 일어난 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우선되어야 더 나은 내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흑역사란 수치와 침묵의 대상이 아닌 미래에 관한 중요한 지도이자 힌트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p.230

 

SNS에서 누군가 올린 글을 보고 마음이 답답해졌다. 지하철에서 한 장애인이 움직이기 위해서 옆에 있던 분에게 조금 비켜달라고 말을 했는데, 그걸 보고는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배려가 당연한 거냐고, 장애인이 유세냐면서 화를 냈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분리되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장애인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이지 않을까. 이 책에 수록된 러시즘에서 갑질 사건, 학교폭력, 의전 공화국 문제, 구급대원 폭행 문제, 비혼모 문제 등도 마찬가지이다. 원칙과 상식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소한의 염치'를 가지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이는 공동의 선을 위해 크고 작은 희생을 감수하여 공동체가 서로 노력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의지도, 노력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가장 꼴 보기 싫은 이웃에게 베푼 배려가 언젠가 나를 살리는 동아줄로 돌아오리라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결국 서로 돕고 기대어 살 때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팬데믹을 겪으며 '당연한 것들을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서로의 안녕을 빌며 살기 위해서 최소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레 연결이 된다. 사회적 불의에 대해 모른 척 하지 않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잊어 버리지 않고, 서로가 최소한 지켜야 할 기본과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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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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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핑핑 돌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현실과 이어주는 무언가가 끊어져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계속해서 손을 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따뜻한 화면을 쓸어내렸다.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녀는 화면 속에 몇 초간 더 머물렀다.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미안해." 나의 죽은 아내가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멀어져갔다.            p.55

 

결혼 7개월 차에 접어든 스물다섯 동갑내기 커플 벡과 엘리자베스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모처럼 드라이브에 나섰다. 그들의 목적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시간을 보내온 인전이 드문 깊은 숲속의 호수였다. 매년 첫 키스 기념일에 그들은 이곳을 찾아 나무에 한 줄씩 줄을 그어 새겨넣었다. 열세 번째 줄을 나무에 새겨넣은 그날, 엘리자베스는 벤의 눈 앞에서 살해당한다. 그리고 8년 후, 뉴욕 빈민가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벡은 이상한 이메일 한 통을 받는다. 벡과 엘리자베스의 이니셜과 함께 나무에 줄이 그어진 횟수만큼 표시된 제목의 그 이메일은 그들의 기념일 '키스 타임'에 링크를 클릭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들만의 기념일과 의식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체 누가 이런 이메일을 보낸 것일까.

 

며칠 후, 벡은 한 대도시 거리의 실시간 스트리트 탬 영상을 전송받고, 영상 속에서 죽은 아내와 마주한다. 화면 속 엘리자베스는 분명 나이 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작은아버지가 신원확인을 했었다. 하지만 영상 속에서 벡이 본 것은 자신의 아내가 틀림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살아 있는 것일까. 벡과 엘리자베스만 아는 암호로 적인 메세지가 이어졌고, 그 속에는 '그들이 보고 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한편, 엘리자베스가 살해당했던 호숫가에서 백골 사체 두 구가 발견되고, FBI는 벡을 피의자로 지목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대체 벡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만약 엘리자베스가 살아 있었다면 지난 8년간 어디에서 숨어 지낸 것일까? 왜 하필 FBI가 벡을 살인범으로 지목하기 시작했을 때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엘리자베스는 진짜로 살아 있는 것일까?

 

 

 

 

누구도 말하지 않는 비극에 대한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비극을 겪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사실 나는 아내의 죽음 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됐다. 모든 불행에는 한 가닥의 희망이 숨어 있다. 물론 내게 허락된 희망은 실로 하찮은 것이었다. 그것이 그럴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평한 거래도 아니지만, 나는 과거와 비교해 확실히 나은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무엇이 중요한지 제대로 따질 수 있게 됐다. 남의 고통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됐고.               p.128

 

<밀약>이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국내에 두 권으로 소개되었던 할런 코벤의 초기작이다. 세련된 표지로 옷을 갈아 입고, 새로운 번역과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단 한 번의 시선》에서 공포심을 자극하는 북한 출신 살인병기 에릭 우, 《용서할 수 없는》 《홀드타이트》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변호사 헤스터 크림스타인 등 지금까지 출간된 작품에서 등장했던 캐릭터들의 과거 행적이 그려져 재미를 더해준다.

 

초점 없는 눈으로 지루한 인생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던 소아과 의사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은 자의 이메일을 받고, 유령을 보게 된 뒤, 두 건의 살인사건에 대한 유력한 용의자로 전락해 버린다. 게다가 경찰의 추격을 받고 도망 다니며 경관을 폭행하고, 악명 높은 마약상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하면서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당연히 그 모든 과정은 긴박하고 숨가쁘게 흘러간다. 독자 입장에서는 대체 이 모든 일이 다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주인공의 처절한 사투를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할런 코벤의 작품들은 항상 평범한 일상의 균열이 깨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들고,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고, 거짓말이 본색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들은 책을 읽는 내내 다음 장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지도록 끊임없이 호기심을 유발하는 페이지 터너의 정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롤러 코스터처럼 달려가는 이야기는 인물들 각자의 크고 작은 비밀이 쌓이고, 욕망이 얽혀 엄청난 진실에 이르게 된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우리의 삶을 어디로 데려갈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파국에 이르든, 그렇지 않든, 선택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자신이 치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삶의 대부분의 문제는 선택의 도마 위에 놓이게 마련이다. 매 순간 우리가 마주하는 선택의 아이러니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는 작가가 할런 코벤이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들은 재미 면에서 독자들에게 절대 실망을 시키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특히나 이 작품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기 때문에, 할런 코벤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고 챙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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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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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은 어째서 아직 살아 있는 것입니까?"
그 의문은 간베에의 가슴을 줄곧 답답하게 짓눌렀던 게 틀림없다.
구로다 간베에는 오다의 사자로 아리오카성에 왔다. 무라시게는 간베에를 쫓아낼 수도 있었고, 참수할 수도 있었다. 심기를 거스르는 사자는 코나 귀를 베어 돌려보내는 일도 세상에는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무라시게는 그 어느 방법도 선택하지 않고 간베에를 붙잡아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p.121

 

2021년, 일본 문학계를 뜨겁게 달궜던 화제의 작품, 요네자와 호노부의 <흑뢰성>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기나긴 수상 이력으로도 화제였는데,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으며, 제166회 나오키상과 제2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등을 수상하며, 모두 합쳐 9관왕을 했다. 아마도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나오키상과 주요 5개 미스터리 부문을 석권한 작품은 역사상 <흑뢰성>이 유일하다고 하니 말이다. 이 작품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첫 장편 역사소설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시대 패권을 눈앞에 둔 1578년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는 그해 10월 느닷없이 반역을 일으키고, 근거지인 아리오카성에서 저항을 시작했다. 사실 잘 나가던 다이묘였던 그가 왜 모반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유가 없어 여러 설이 분분하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전해지는 것은 무라시게가 노부나가에게 갑자기 반기를 들었다는 것, 이 뜬금없는 반란에 경악해 간베에를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무라시게는 그를 1년 이나 토굴에 가두어 버렸다는 것이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바로 이 1년 간의 시간에 대해 소설적 상상을 시작했고, 이 작품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지하 감옥으로 향할 때 무라시게는 언제나 혼자였다. 아리오카성에 문제가 생길 때 무라시게가 지하로 내려가는 것을 아는 이는 무라시게와 간수와 지하에 갇혀 있는 구로다 간베에뿐이다. 벌써 몇 번이나 이렇게 계단을 내려갔을까? 성의 함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기가 몇 차례나 있었다. 그중 몇 가지는 무라시게가 장수들에게 지시해서 해결했고, 또 몇 가지는 간베에의 지혜로 피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이 가을이다.           p.434

 

역사에 기록된 사건을 입체적으로 잘 재현하는 것도 흥미롭겠지만, 진짜 재미는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 그 행간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무라시게가 왜 오다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그리고 간베에는 왜 죽이지 않고 가뒀는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시간들은 여전히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기괴한 사건과 불가능한 범죄를 통해 역사의 틈을 재구성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잘게 쪼개진 수많은 각 세력들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던 어지러운 시대였다. 난세가 늘 그렇듯 하루가 멀다하고 지역의 지배자가 바뀌었으며, 잘나가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기도 하고, 별볼일 없던 세력이 순식간에 급부상하기도 했다.


 

 

사람을 베고 태워 죽이는 일이 흔했던, 그야말로 일상이 전쟁인 시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살벌한 세계였다. 그 와중에 아리오카성안에서는 이상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겨울에는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인질 소년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누군가에게 살해되고, 봄에는 야습 후 뜻하지 않게 적장을 해치웠는데 수훈을 밝히기 위한 과정에서 가져온 머리가 바뀌는 일이 생긴다. 여름에는 밀사였던 고승이 누군가에게 살해되면서 그에게 맡겼던 보물이 사라지고, 다시 가을이 된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라시게는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나고 성의 함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기를 겪을 때마다 성의 지하 감옥에 내려가 간베에를 만나 지혜를 구했다. 물론 이들의 관계는 적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뢰인과 안락의자 탐정이라는 구도로만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무라시게는 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한다. 성이 견고한 것은 해자가 깊고 성루가 높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버티고 있는 장졸들이 성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사람이 곧 성이기에, 장졸이 대장의 기량을 의심하는 성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무라시게는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대장이 되기 위해서 불가사의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미스터리물보다는 역사소설에 가깝다. 트릭이나 반전 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해답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전진하면 극락, 후퇴하면 지옥이라는 명목 하에 싸우다 죽는 사람들이 한 무더기인데, 또 다른 한쪽에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거짓말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난세의 한 복판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선과 악, 죄와 벌, 사회 속의 개인과 조직 내에서의 윤리에 대해서 시대를 뛰어 넘어 현재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묵직한 서사의 힘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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