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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말들 - 인생에 질문이 찾아온 순간, 그림이 들려준 이야기
태지원 지음 / 클랩북스 / 2022년 9월
평점 :
글 쓰는 일을 하면 우아한 일상이 이어질 거라 막연히 기대한 적이 있었다. 역시 그런 건 상상일 뿐이었다. TV 소음이나 아이의 게임기 소리를 견뎌가며 타자를 두드리는 게 일상이었다. 글을 쓰겠다고 도서관 자료실에 앉아 기세 좋게 책을 열 권쯤 꺼내와서는 책상에 엎드려 낮잠만 두 시간 자다 집에 온 날도 있다. 이쯤 되니 합리적 의심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화사하고 우아하게 삶을 누리는 비법을 나만 모르고 있는 건가? 인생의 밝은 볕이 드는 장소를 나만 제대로 못 찾고 있는 거 아닌가? p.54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으로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았던 태지원 작가의 두 번째 명화 인문 에세이가 나왔다. ‘유랑선생’이라는 필명으로 매주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고 있는 작가가 지난 2년간 연재한 글을 엮어 만든 이 책은 '어른이 되는 길목에서 그림이 건네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어릴 때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의연하고 겸허한 태도를 가지며, 흔들림 없이 살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경험해보니 어른이 되는 건 혼란 속에서 삶이 던지는 어려운 질문을 끊임없이 마주하고 흔들리는 과정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쉽지 않은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그림을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답을 찾았었는데, 그 과정을 고스란히 글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재능이 없다면 꿈을 접어야 할까? 작가는 재능에 대한 의구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마다 알폰스 무하의 그림을 바라본다. 화가로서의 재능이 충분치 않다는 냉정한 선고에도 불구하고, 쉽게 굴하지 않았기에 재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그녀의 삶과 예술 작품들을 보며 재능의 유무로 자신을 섣불리 재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존감의 중요성을 말하는 세상 속에서 온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건 대체 뭘 이야기하는 걸까 고민이었을 때는,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을 살펴본다. 그리고 삶의 고통을 그림과 유머로 승화시킬 줄 아는 예술가였던 그의 생과 작품들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자세를 배운다.
인생의 바닥을 헤집는 순간이 있다. 삶이 엉망으로 꼬여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시기, 어느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시기가 이따금 돌아온다. 무생물처럼 아무런 자극과 상처 없이 살아가는 게 소원이 되는 시기도 있다. 그 순간 경험하는 우리의 모든 시련과 고통, 허약한 마음은 무의미한 것일까. 어쩌면 시련과 고통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조차 일종의 깨달음 아닐까. p.296~297
연차가 쌓이고 직장 생활을 오래 할수록 처음에 다짐했던 마음들이 무너져가고, 어느 날 돌아보니 독선적이던 옛 동료의 모습에 가까워진 나를 발견하고는 클로드 모네를 떠올린다. 영원히 지속되는 건 없음을 그림으로 선언한 화가인 모네는 모든 순간의 인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하물며 풍경과 사물의 인상도 그러한데, 자신의 논리가 유일한 답이라 밀어붙이는 꼰대가 되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모네의 그림을 보면서 자연스레 드는 것이다. 한 가지 색깔을 영원히 고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넓히려는 시도도 필요해진다. 그림을 통해 다양한 세계의 맥락을 이해하고, 내 안의 좁은 세계를 벗어날 기회가 생긴다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삶의 수많은 고민들을 그림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말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칼 라르손, 폴 세잔, 오귀스트 르누아르, 호아킨 소로야, 마르셀 뒤샹, 디에고 리베라 등등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삶은 의외로 우리의 일상적인 고민들과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의 삶과 그림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고민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현실이 버거울 때는 앞날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오늘의 경험과 감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을 건네고, 타인의 인정과 평가에 연연하며 순간 스쳐가는 숫자에 휘둘리고 주눅이 들 때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나만의 승리를 쌓아가며 오래 버틸 수 있는 힘을 만들도록 기운을 북돋워 준다.
사는 게 놀이터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삶의 매 순간마다 각자의 고민을 하게 마련이고, 해결이 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또 매일을 견디고, 버티며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살아간다는 것이 이따금 뿌연 안개 속을 헤매는 일처럼 느껴질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막막해지는 순간, 이 책을 만나 보자. 화가들의 삶과 그림 속 인물들이 건네는 말들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가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