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부당합니다 - Z세대 공정의 기준에 대한 탐구
임홍택 지음 / 와이즈베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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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에 대한 외침'을 '정당함에 대한 요구'로 바꿔서 보면, 지금까지 공정성 이슈를 제기한 젊은 세대의 주장이 단순하고 명쾌해진다. 그들은 특별한 대우나 철학적인 깨달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살면서 DNA 안에 축적해온 '정당한 것을 요구하라'는 감정 반응을 자연스럽게 드러냈을 뿐이다. 그저 '반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언론들은 부당함을 거부하는 현세대의 요구를 '삐딱한 공정성을 요구하는 세대'로 포장해 여론을 이끌고 있다.         p.40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 가치로 부상한 것이 바로 '공정'이다. 하지만 공정이라는 단어는 21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신조어가 아니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어느 사회에서나 기본 상식이자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정이 2020년대의 시대정신으로 급부상한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공정 이슈가 젊은 세대라는 키워드와 결합해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정치사회적으로 공정성 논란이 불거지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기성세대와 MZ세대, 이대남과 이대녀 등의 프레임을 씌우고, 젊은 세대들이 문제라는 식으로 세대 갈등이 있어 왔다.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대론'이라는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던 임홍택 저자는 이 책에서 공정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기존의 공정 논의에서 '지금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정의 기준이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공정이라는 단어 자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요구하는 것이 진실된 공정이냐 거짓된 공정이냐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공정이란 단어를 꺼내게 된 이유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정하지 않다'는 표면적 외침의 이면에는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정당하지 않다'라는 의미를 가진 '부당'에 대한 담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세대의 변화가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시대 변화에 방점을 찍고, 특정 세대가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부당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줄 서기는 모두에게 공평할 뿐만 아니라 방식 또한 정의롭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관계없이 감히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흔히 줄 서기를 가장 기본적인 사회 공정의 축소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줄 서기를 하면서 공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냥 줄을 서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처럼 당연한 줄 서기의 원칙이 훼손되면 어떻게 될까.         p.249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에서 '권모술수 권민우'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인물이 '공정'에 대한 대사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우영우 변호사가 매번 우리를 앞서나가는 상황에서, 정작 우리가 우영우 변호사를 공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오히려 (약자인 우리가) 자폐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배려하고 도와야 한다"면서 "이 게임은 공정하지가 않다"고 주장했다. 물론 권민우라는 캐릭터가 공정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캐릭터인 것은 분명하지만, 권민우에 대한 비판이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권민우라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장애인이 취업 문제로 차별을 받는 것은 사회적 문제이지만, 극중 우영우가 특혜를 받은 것은 개인의 문제이니 말이다. 이 책에는 드라마 속 에피소드 외에도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마주하게 되는 부당함의 사례들이 수록되어 있다. 현세대에게 공무원의 인기가 떨어진 이유는 공직 생활에서 겪는 부당성에서 비롯되었고, 출산율 저하의 근본적인 원인 역시 부당함 때문이다.

 

줄 서기와 같이 가장 공정에 가까운 방식을 어떻게 시스템에 접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고, 스포츠 경기에 적용되는 기본적 수준의 ‘공정’을 우리 사회에 접목시키려 노력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 그간 우리가 찝찝해하면서도 그러려니 지나쳐왔던 수많은 반칙들을 되짚어보고, 특정 세대가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부당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젊은 세대들이 외치는 '공정하지 않다'는 '이것은 옳지 않고, 부당하다'와 같은 의미라는 것을 잊지 말고, '부당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하나의 언어로 공정성을 정의하긴 어렵지만, 세상을 조금 더 공정하게 만드는 일은 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모두 함께 세상의 부당함에 저항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그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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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충돌 -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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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적 관점과 경제학적 관점을 넘어, 국가 간 경쟁과 기업 조직 간의 경쟁 혹은 초국적 연결을 세계질서와 갈등의 형성에 있어 상호작용하는 두 개의 자율적 영역으로 보는 더 섬세한 국제정치 이론들이 있다. 이러한 이론들의 통찰에 기반해 이 책에서 나는 국가 간 지정학적 경쟁과 기업 사이의 자본 간 관계를 연결시켜 1990년대와 2000년대 미국과 중국의 공생관계 및 2010년대 그 공생관계가 경쟁으로 변화한 원인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지구정치경제의 거시적인 구조 변화를 배경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기업 및 국가 간의 중간 수준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p.16

 

미국과 중국은 세계 1위와 2위 경제 대국으로 둘을 합칠 때 GDP에서는 세계 전체의 거의 40퍼센트, 국방비에서는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미중 관계의 변화는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이며, 21세기 미래의 세계질서 혹은 혼돈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국 정치경제 분야의 선도적 전문가인 훙호펑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이 책에서 모든 부분에서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관계의 역학을 분석한다.

 

냉전이 종식된 후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미국과 중국의 공생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된 중국이 미국에 도전하는 공세적 외교를 시작했고, 미국도 중국을 강력히 견제하기 시작해 이들은 갑자기 경쟁관계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한중 경제관계 역시 보완관계에서 경쟁관계로 변해버렸다. 애초에 한국은 한반도문제에서 중국의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했지만 중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고, 한국을 미국에서 떼어내려 하는 중국의 기대 역시 이루어질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멀어졌으니, 급변하고 있는 미중관계 역시 우리가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냉전이 끝난 후, 일각에서는 세계가 기존 서구 강대국들과 중화권 및 이슬람권의 경제가 점차 성장하고 있는 인구 대국들 사이의 '문명의 충돌'로 향하고 있다고 봤다. 반면 또 다른 일각에서는 세계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아래 통합되어 더 큰 보편적 평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봤다. 또 다른 학자들은 보편적인 글로벌 자본주의 제국이 떠오르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 질서 안에서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연합해 세계를 지배하며 분할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논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전쟁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p.133

 

저자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이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의 원인은 이데올로기 대립에 있지 않다. 이는 명확히 자본 간 경쟁에서 비롯됐고, 그것이 지정학적 충돌을 부추기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미국과 중국 기업들 사이의 변화가 두 나라의 정치적 관계 변화의 기저에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중국 시장에서 미국 기업이 맞닥뜨린 압박이 커지면서 전반적으로 중국에서 사업 확장이 위축되었고,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알려진 일부 기업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적 조치에 의지하게 된다. 거기다 중국이 기술 자립을 위해 노골적인 경제 스파이 행위를 포함해 불법적인 도용이 벌어졌고, 그 결과 미국 기업들이 지식재산권 문제로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도 늘었다. 그리고 광범위한 중국산 제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매겨 중국과 무역 전쟁에 돌입했던 트럼프 이후 새로 선출된 바이든 행정부조차 관세를 철회하지 않고 중국에 대한 대립적 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냉전 종식 이후 1990년대 미국과 중국 사이의 공생관계가 부상했다가 최근 몇 년간 이 관계가 미중의 경쟁관계로 대체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두 강대국이 전쟁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아니면 더 조화로운 관계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미중 경쟁의 경제적, 지정학적 기원을 살펴보고, 합법적인 글로벌 통치 기구의 중재와 중국과 미국 경제의 재조정이라는 갈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접근법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저자는 미중 간의 관계는 악화될 게 분명하지만, 직접적인 군사 충돌보다는 WHO, WTO, UN과 같은 글로벌 통치 기구에서의 경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어떻게 될지는 오직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분량이 많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저자의 전작인 <차이나 붐>과 함께 읽으면 더 심층적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의 한국어판에는 저자와 직접 상의해 책 본문에 포함되지 않았던 두 편의 대담과 한 편의 논문을 부록으로 수록해 책의 내용을 좀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으니, 세계 정치 경제의 변화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 보길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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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굴레 - 헤이안 시대에서 아베 정권까지,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
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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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대 일본의 수많은 모순은, 에도 시대에 존재하던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회의 간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인 동시에 꽉 막힌 얼굴 없는 관료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오사카 상인 집안들과 점점 경직화되던 사무라이 계급의 선례를 생각하면 그다지 혼란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충성과 자기 부정을 광기의 수준으로까지 가져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기괴한 비디오 게임이나 헨타이, 망가, 괴상한 패션으로 대변되는 엉뚱하고 전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뿌리도 에도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p.102

 

야마모토 요지와 가와쿠보 레이의 패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모노노케히메>와 같은 애니메이션, <링>과 같은 공포영화, 포켓몬... 이러한 모든 문화 현상 사이에 도대체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일까. 귀여운 것에 대해 질릴 정도로 집착하는 듯한 문화가 어떻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성적 도착을 과도하게 묘사하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는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이 다 일본 문화일 수 있는가. 일본의 대중 문화와 예술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더 재미있는 것은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한국만큼 일본과 문화적으로 비슷한 나라는 없다는 것. 이는 정치, 경제 체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은 옥스포드대학 출판사의 '누구나 알아야 하는 지식' 시리즈의 한 권으로 쓰였다. 일본 독자들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일본에 호기심을 갖고 좀더 이해하고 싶어하는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쓰인 책이라는 말이다. 저자인 태가트 머피 역시 미국인이다. 그는 국제정치경제 전문가로 40년이 넘는 세월을 일본에서 살아온 내부자이자 동시에 외부자인 셈이다. 덕분에 그의 통찰력은 상당히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에서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는 일본의 천황 제도, 헤이안 시대의 유산, <겐지 이야기>를 비롯해 위대한 문학작품들을 거쳐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로 넘어간다. 에도 시대의 대중 문화와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 그리고 난징 대학살 등 일본이 천황의 이름으로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거쳐 전후 일본의 경제 부흥기에 도달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불과 20여 년 만에 세계 2위의 산업 경제 대국으로 탈바꿈한 것은 당시에 존재하던 그 어떤 경제 개발 이론으로도 설명되지 않았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일본의 정치 문화에는 다른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을 참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스며들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때때로 이러한 태도는 실현 불가능한 공상에 가까운 목표와, 가장 냉철하고 비정한 전술의 공존을 가능케 한다. 일본이 중국에 맞설 수 있도록 과거 일본 제국 육군의 기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아베의 비전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지만, 일본이 무모한 목표를 좇느라 터무니없는 옆길로 빠졌던 일은 아베 정권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에 사용되었던 존황양이, 팔굉일우(세계 만방이 모두 천황의 지배하에 있다는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 대공아 공영권과 같은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p.600

 

일본의 경제 기적에 이어 고도성장의 제도적 기틀을 이루는 요소들을 살펴보고, 교육 시스템과, 관료 제도를 거쳐 야구와 샐러리맨 문화가 등장한다. 일본 사회에 샐러리맨 문화를 퍼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미국에서 수입해온 스포츠인 야구였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어 1980년대 말 일본의 버블 경제와 금융에 대한 장이 시작되는데, 여기까지가 삼백여 페이지이니 겨우 반 온 셈이다. 무려 6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분량이라 시작할 때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술술 페이지가 잘 넘어가긴 했다. 그럼에도 담고 있는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시간은 꽤 걸린 것 같다. 나머지 후반부의 내용에서는 비즈니스와 해외 투자, 일본 문화와 정치에 대해서 다룬다. 저자가 국제정치경제학 연구자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나 심도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일본에 여러 번 여행을 다녀왔고, 일본어 공부를 꽤 오랫동안 한 적도 있고, 일본의 문학 작품들은 정말 많이 읽어 왔고, 일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들도 남들만큼은 본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는 것을 읽는 내내 느꼈다. 일본의 근대사와 정치, 외교관계, 경제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나는 내용들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는 두툼한 페이지만큼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의 긴 흐름 위에서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를 하나로 꿰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옥스퍼드대학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을 때 저자는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생각을 역사 및 문화와 결합시켜 다른 종류의 글쓰기를 통해서는 불가능한 작업을 해보리라”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를 모두 다루고 있는 이 책이 탄생한 것이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일본의 사회 현상 뒤에 어떤 역사적 배경과 경제적 논리가 숨어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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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욘더
김장환 지음 / 비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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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긴 죽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말한 대상은 물론, 인공지능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속의 이후였다.
"내가 죽어? 나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아. 그럼 여기 있는 나는 뭐야?"
"그건 나를 위한 착각이야." 나는 다시 한번 내 속에 존재하는 이후에게 말했다.
"착각? 그럼 여기 있는 나는 뭐야?" 인공지능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너는 진짜 네가 아니야."          p.117

 

이야기의 배경은 2040년대, 현실과 사이버스페이스가 한데 섞이고 인류가 기계와 어울려 새로운 진화를 꿈꾸는 유비쿼터스 월드의 뉴 서울이다. 아내 '이후'를 암으로 먼저 떠나 보내고 남겨진 '홀'은 사람과의 연락도 끊고, 일도 손에서 놓은 채 슬픔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낸다. 그렇게 이 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의 부재에 조금은 익숙해졌고, 불현듯 일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프리랜서 인터뷰어로 일하던 그는 한 매거진의 편집장에게 연락해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보, 나야."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그에게 도착한다. 스팸 광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홀로그램 메시지로 아내의 얼굴이 나타난다. 아내의 목소리는 내가 보고 싶지 않냐고, 나를 보러 오려면 이곳으로 찾아 오라고. '홀'은 아내가 죽기 전 자신의 기억 전체를 바이앤바이 서버에 제공해 인공지능 아바타를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자살로 추정되는 의문사가 도시 곳곳에서 급증했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사실 연쇄적인 자살 추정 사건들이지 딱히 의문사라 이를 까닭은 없어 보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현장에 브로핀 헬멧이 있었다는 거다. 브로핀은 가상현실을 이용해서 고통을 통제하는 것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성을 지키며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었다. 해당 기술을 이용해 바이앤바이라는 회사에서는 죽은 사람의 마음과 기억 전체를 옮겨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날 수 있는 가상공간 '욘더'를 만들었다. 그리고 슬픔에 빠져 약해진 사람들, 매일 고인의 아바타를 만나러 가서 거짓 대상과 대화를 하는 이들을 초대한다. 고인의 입을 통해 나와 함께 여기 들어와서 살지 않겠냐는 말을 듣게 된 이들은 고민한다. 죽은 가족과,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를 꿈꾸며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죽은 아내 '이후'를 다시 만나게 된 '홀' 역시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린 서로를 잃을 수도 있어." 이후가 말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 안 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꾸만 되풀이되는 기억이 아니라 진짜 망각, 진짜 오블리비언일지 몰라. 당신은 여기 자신의 의사대로 들어오지 않았고 이제는 나의 의사에 의해서 머물고 있는 거야. 내가 저 세상에서 당신을 만나 사랑한 것은 당신에게 넘치던 삶의 활기 때문이었지.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살아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당신은 이미 죽었어. 더 죽을 필요는 없지."            p.351

 

이준익 감독, 신하균, 한지민 주연의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욘더>의 원작 소설이다. 2010년 일억 원 고료 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번에 전면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영상화를 기념해 드라마 포스터가 담긴 디자인으로 새롭게 단장했고, 2022년 감각으로 문장과 표현을 다듬고 개정판 작가의 말도 수록했다.

 

언젠가 방송에서 죽은 아내를 그리는 남편이 VR을 통해서 아내를 만나는 장면을 봤던 적이 있다. 4년 전 아내를 잃고 다섯 아이와 남겨진 남편은 현재 구현 가능한 기술로 죽은 아내와 애틋한 '단 하루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그는 가상의 공간에서 아내와 만나 함께 마주보고 눈을 마주치며 손을 잡고 춤을 추었고, 아내와 자주 찾던 숲길을 걸을 수 있었다. 모션캡처 기술을 이용해 배우의 동작과 표정을 3D 모델에 입히는 등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굿바이, 욘더>는 사랑했던 대상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정말로 있다고 믿고 싶어지도록 하는, 죽은 이의 기억과 성격을 고스란히 지닌 인공지능이 진짜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브레인 다운로드를 통해 들어가는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공간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현실에서의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그곳에 갈 수 있을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죽음을 초월해서 같이 할 수 있다면 그곳은 천국일까? 한번도 불멸의 삶을 꿈꿔 본 적이 없어서인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욘더라는 현실을 초월한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육체가 없는 인간, 다운로드된 정신을 통해서 누구나 가장 행복한 상태로 지낼 수 있다면, 나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정말 이런 상상의 공간이 가능하게 될까. '오직 사랑하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세계, 욘더'가 던지는 질문은 이 작품을 읽는 이들에게 어떤 대답으로 돌아올지도 궁금해진다. 각색 과정에서 원작 소설과 드라마가 달라지는 부분도 있다고 하니, 두 작품을 함께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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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 2022년 뉴베리상 100주년 대상 수상작 오늘의 클래식
도나 바르바 이게라 지음, 김선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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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랫입술이 떨렸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할머니를 남겨 두고 떠난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할머니가 내 뺨에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네가 나를 떠나는 건 불가능해. 나는 네 일부란다. 너는 나와 내 이야기를 지니고 새로운 행성으로, 그리고 수백 년 미래로 가는 거야.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모르겠다.”         p.13

 

핼리 혜성의 궤도 이탈로 멸망을 앞두고 있는 지구, 부유한 사람들과 선택된 이들만 새로운 행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에 올라탈 수 있다. 열두 살 소녀 페트라는 사랑하는 할머니를 지구에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과학자인 엄마, 아빠와 동생 하비에르와 함께 어쩔 수 없이 우주선에 탑승한다. 여행을 하며 잠들어 있는 동안 지구에서의 기억은 모두 삭제되고, 각자가 행성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식이 뇌에 직접 주입된다. 그렇게 2061년 7월 28에 지구를 떠난 그들은 2442년 새로운 행성 세이건에 도착한다. 380년 후에 깨어난 페트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기억이 삭제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각자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며 살아간다. 페트라는 식물학 및 지질학 전문가 제타1을 연기하며 함께 우주선에 올랐던 가족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분 다 기억 삭제에 실패해서 재프로그래밍을 했지만, 그것마저 삭제로 두 분 모두 2277년에 제거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삭제된 것이 페트라의 부모들만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페트라는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다. 자신 역시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는 걸 저들이 눈치 챈다면 사령관이 그녀를 제거하든지 다시 프로그래밍하려 들 것이다. 페트라는 같은 방을 사용하는 제타 대원들에게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과 함께 이곳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쿠엔토가 뭐야?"
내가 안 된다고 말하기도 전에 수마가 물었다.
긴장해 배가 옥죄어 왔다. 이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바라건대, 지구의 이야기가 저 아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이고 가족이 누구였는지 상기시켜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억한다 해도, 이 방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겠다고 마음먹지 않기를 나는 기도했다. 모두 나를 지켜보며 기다렸다. 이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p.229~230

 

행성 이주 계획의 주체인 '콜렉티브'는 지구와의 영원한 단절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한다. 갈등, 기아, 전쟁으로 가득 찼던 세계에 대한 기억을 단 하나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되었던 것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들은 지구의 기억들을 모조리 삭제해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지구에서 수백 년의 시간을 거쳐온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어버린 채 오로지 임무를 위해서만 움직이며 산다. 과연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를 인간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그 속에서 페트라는 진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이 작품은 2022년 뉴베리상 100주년 대상 수상작이다. 1994년에 뉴베리상을 수상한 로이스 라우리의 <기억 전달자>를 잇는 SF 명작이라고 극찬을 받았는데, 과거의 기억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기억 전달자'가 된다는 점이 명맥을 같이 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페트라는 이야기꾼 할머니 덕분에 쿠엔토(스페인어로 '이야기')가 왜 중요한지, 이야기가 어떤 힘을 줄 수 있는지, 종이로 만든 책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알고 있다. 극중 '이야기 없는 세상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라는 말처럼, 이야기를 사랑하고, 이야기의 마법 같은 힘을 믿는 다면 가슴 뭉클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제 머나먼 과거가 된 지구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의 눈부신 여정을 함께 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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