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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굴레 - 헤이안 시대에서 아베 정권까지,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
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2월
평점 :
외부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대 일본의 수많은 모순은, 에도 시대에 존재하던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회의 간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인 동시에 꽉 막힌 얼굴 없는 관료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오사카 상인 집안들과 점점 경직화되던 사무라이 계급의 선례를 생각하면 그다지 혼란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충성과 자기 부정을 광기의 수준으로까지 가져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기괴한 비디오 게임이나 헨타이, 망가, 괴상한 패션으로 대변되는 엉뚱하고 전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뿌리도 에도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p.102
야마모토 요지와 가와쿠보 레이의 패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모노노케히메>와 같은 애니메이션, <링>과 같은 공포영화, 포켓몬... 이러한 모든 문화 현상 사이에 도대체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일까. 귀여운 것에 대해 질릴 정도로 집착하는 듯한 문화가 어떻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성적 도착을 과도하게 묘사하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는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이 다 일본 문화일 수 있는가. 일본의 대중 문화와 예술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더 재미있는 것은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한국만큼 일본과 문화적으로 비슷한 나라는 없다는 것. 이는 정치, 경제 체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은 옥스포드대학 출판사의 '누구나 알아야 하는 지식' 시리즈의 한 권으로 쓰였다. 일본 독자들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일본에 호기심을 갖고 좀더 이해하고 싶어하는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쓰인 책이라는 말이다. 저자인 태가트 머피 역시 미국인이다. 그는 국제정치경제 전문가로 40년이 넘는 세월을 일본에서 살아온 내부자이자 동시에 외부자인 셈이다. 덕분에 그의 통찰력은 상당히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에서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는 일본의 천황 제도, 헤이안 시대의 유산, <겐지 이야기>를 비롯해 위대한 문학작품들을 거쳐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로 넘어간다. 에도 시대의 대중 문화와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 그리고 난징 대학살 등 일본이 천황의 이름으로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거쳐 전후 일본의 경제 부흥기에 도달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불과 20여 년 만에 세계 2위의 산업 경제 대국으로 탈바꿈한 것은 당시에 존재하던 그 어떤 경제 개발 이론으로도 설명되지 않았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일본의 정치 문화에는 다른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을 참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스며들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때때로 이러한 태도는 실현 불가능한 공상에 가까운 목표와, 가장 냉철하고 비정한 전술의 공존을 가능케 한다. 일본이 중국에 맞설 수 있도록 과거 일본 제국 육군의 기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아베의 비전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지만, 일본이 무모한 목표를 좇느라 터무니없는 옆길로 빠졌던 일은 아베 정권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에 사용되었던 존황양이, 팔굉일우(세계 만방이 모두 천황의 지배하에 있다는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 대공아 공영권과 같은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p.600
일본의 경제 기적에 이어 고도성장의 제도적 기틀을 이루는 요소들을 살펴보고, 교육 시스템과, 관료 제도를 거쳐 야구와 샐러리맨 문화가 등장한다. 일본 사회에 샐러리맨 문화를 퍼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미국에서 수입해온 스포츠인 야구였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어 1980년대 말 일본의 버블 경제와 금융에 대한 장이 시작되는데, 여기까지가 삼백여 페이지이니 겨우 반 온 셈이다. 무려 6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분량이라 시작할 때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술술 페이지가 잘 넘어가긴 했다. 그럼에도 담고 있는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시간은 꽤 걸린 것 같다. 나머지 후반부의 내용에서는 비즈니스와 해외 투자, 일본 문화와 정치에 대해서 다룬다. 저자가 국제정치경제학 연구자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나 심도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일본에 여러 번 여행을 다녀왔고, 일본어 공부를 꽤 오랫동안 한 적도 있고, 일본의 문학 작품들은 정말 많이 읽어 왔고, 일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들도 남들만큼은 본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는 것을 읽는 내내 느꼈다. 일본의 근대사와 정치, 외교관계, 경제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나는 내용들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는 두툼한 페이지만큼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의 긴 흐름 위에서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를 하나로 꿰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옥스퍼드대학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을 때 저자는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생각을 역사 및 문화와 결합시켜 다른 종류의 글쓰기를 통해서는 불가능한 작업을 해보리라”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를 모두 다루고 있는 이 책이 탄생한 것이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일본의 사회 현상 뒤에 어떤 역사적 배경과 경제적 논리가 숨어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