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을 삼킨 나라, 대한민국 - 중독이 일상이 된 시대, 마약 없는 내일을 위한 기록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29
조성남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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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보통 중독이 2차적 질병이라고 알고 있다.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복용하다가 중독이 된다거나 우울증을 없애기 위해 복용하다가 중독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독은 유전적, 정신사회적, 환경적 영향을 받는 1차적 질병이다. 일례로 부모 중 한 명이 알코올 중독인 경우 그 자녀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알코올 중독이 될 확률은 네 배나 높다는 통계가 있듯이, 중독은 유전적 성향과 환경적 요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또한 방치하면 결국 사망에 이르거나 그 전에 자살을 선택하는 등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이 파괴되고 나라가 망할 정도의 치명적 위험을 유발하는 만성 질환이다.             p.92


대한민국 대표 교수진이 펼치는 흥미로운 지식 체험, ‘인생명강’ 시리즈의 스물 아홉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전국 대학 각 분야 최고 교수진의 명강의를 책으로 옮겨 다양한 분야의 지식 콘텐츠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번에 나온 책은 마약 중독 치료의 최전선에서 40년간 수많은 중독자들을 치료해 온 조성남 교수가 대한민국의 마약 중독 실태와 그 해법을 밝히는 책이다. 


우리나라는 과연 마약의 안전지대인가, 아니면 위험한 나라인가.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마약 음료 시음 행사를 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젊은 세대 사이에서 마약류 약물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다, 의료용 마약류 중독 또한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특히나 10대와 20대의 젊은 층에서 마약 사범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책은 마약 범람시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긴급 보고서이기도 하다. 저자는 중독이 질병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 예방부터 치료, 재활에 이르는 회복 과정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정리하고, 재발 위기 극복과 회복의 과정을 제시한다. 




치료공동체에서는 중독을 어떻게 정의할까? 이곳에서는 중독을 그 사람 전체의 문제로 본다. 그 사람 전체에 어떤 문제가 있기에 중독이 나타난 거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중독은 하나의 증상일 뿐이며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행동,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 그로 인해 중독이라는 증상이 나타나는 거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증상만 고친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행동, 태도를 올바르게 바꿔나가는 게 진짜 치료라고 말한다.                 p.181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희피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대마가 확산되었다. 대마관리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젊은이들 사이에 대마초가 유행했고, 이어 1980년대에는 필로폰이 국내에 유통되며 급격히 퍼져나갔다. 매우 강력한 중추신경 흥분제인 필로폰은 남용할 경우 중독 증상이 나타나 심각한 의존성이 생기며, 중단 시 금단 증세가 유발되는 무서운 약물이다. 종류를 달리하며 우리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던 마약류 중독이 2000년대에 들어와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료용 마약의 남용이 점점 더 늘어나며 불법 마약보다 더 심각해진다. 매스컴을 통해 흔하게 접하는 프로포폴이 의료용 마약류 남용의 대표적 약물이다. 유명 인사와 연예인들이 프로포폴에 중독되거나 심지어 투약하다가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생겨났다. 최근 들어 문제의 심각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약물은 펜타닐이다. 이는 매우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청소년에게는 처방할 수 없으며, 성인의 경우에도 다른 진통제로는 더 이상 진통 효과가 없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2022년 12월,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이전에도 이러한 정책은 종종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마약류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치료와 재활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제는 인터넷을 통한 마약류 관련 정보의 확산과 SNS와 가상화폐 등을 통한 거래나 던지기 수법 등으로 접근성이 너무 쉬워져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청소년에게도 위험한 상황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질병은 조기에 발견해 신속히 치료하면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다. 중독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마약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를 깨달아 그에 따른 예방과 대책에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이다. 마약이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지금, 이 책을 통해 그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함께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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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셜리 1~2 세트 - 전2권
샬럿 브론테 지음, 송은주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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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한 책이 도착했습니다. 착한 가격에 박스 세트 구성이라 훌륭하네요. 샬럿 브론테의 유일한 국내 미출간작 초역이라는 점도 의미있고, 표지 분위기도 작가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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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의 심리학 - 예술 작품을 볼 때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오성주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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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첫눈에 반하는 상황은 비단 이성 교제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백화점에서 옷을 사거나, 이사할 집을 고를 때 같은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난다. 미술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모든 그림을 똑같이 충분히 긴 시간 동안 보는 것이 아니라, 처음 보았을 때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더 볼지 그냥 재빨리 지나칠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그림을 어떻게 관람을 하는지 살펴보자.                  p.61


에드바르 뭉크,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구스타프 클림트 등 우리는 같은 예술 작품을 볼 때도 각자 다른 느낌을 가진다. 예술은 매우 주관적인 경험이며,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예술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예술을 이해하는 데 많은 통찰을 줄 수 있고,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하는 책이 있다. 객관적인 그림 감상법이 있다면, 그림을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서울대에서 약 10년 동안 학부생을 대상으로 예술심리학 강의를 진행한 오성주 교수는 예술심리학의 흥미로운 실험과 결론을 통해 그림 감상에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준다. ‘예술심리학’이란 예술을 심리학적 분석 대상으로 삼는 학문으로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영감이나 광기, 시대적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에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이야기를 들려줘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나 그림을 감상할 때 화가의 심리 상태나 그림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감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능동적인 심리적 과정으로 풀어내는 것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어떤 교양미술 책에서도 볼 수 없는 미술 작품 감상법을 제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깊은 감동을 받고, 어떤 사람은 무심히 지나치기도 한다. 사람은 로봇이 아니다. 각자의 타고난 성격, 삶에서 축적된 고유한 경험, 그리고 그들이 속한 성별, 연령대, 성격,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감상에 영향을 미친다. 그림 감상에서의 개인차를 성격 차이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약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내놓을 만큼 일관된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그림 감상에 많은 요인들이 복잡하게 관여하기도 하고, 이를 측정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기도 하다.                p.335


그림의 제목과 설명이 그림 감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 연구팀은 그에 대해 추상화와 반추상화 그림 12장을 사용해 제목과 설명의 효과를 검증한 실험을 진행했다. 추상화와 반추상화는 구상화에 비해 불분명하기 때문에 제목과 설명의 효과가 더 두드러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실험은 참여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고, 아무런 정보 없이 그림만 감상하는 그룹과 제목과 함께 감상하는 그룹, 제목과 50단어 내외의 설명문을 함께 제공하여 감상하는 조건으로 진행했다. 참여자들은 각 그림을 보며 자신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즉 그림을 얼마나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했는지를 7점 척도로 평가했다. 실험 결과, 참여자들은 제목과 설명이 없는 조건, 제목만 잇는 조건, 제목과 설명이 함께 제시된 조건 순으로 그림을 더 의미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그림에 대한 정보가 풍성할수록 사람들이 그림을 더 의미있다고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경향은 그림이 추상적일수록, 그리고 제공되는 정보가 작품과 직접적으로 연관될 때 강해졌다.


이렇듯 예술심리학의 실험은 전시 기획자와 큐레이터가 관람객의 그림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어떤 정보를 제공해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또한 미술관 관람객의 행동을 분석한 심리학 연구들을 통해 미술관에서 어떤 감상 전략을 취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예술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일반 감상자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통찰을 줄 수 있고,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심리학에서는 예술 작품을 경험하는 마음은 실재하는 것이고, 심리학에서 널리 개발된 다양한 방법들을 이용해 그 마음을 측정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 책을 통해 예술 경험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방법으로 감상의 요령을 배울 수 있었다. 미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든 적이 있다면, 미술은 좋지만 감상은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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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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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동안 나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고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건 그해 봄의 많은 불확실성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작가 중에 그런 체험을 하지 않은 이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왜 평생 애도하며 사는 기분인지 알고 싶다. 그 감정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도무지 사라지려 하질 않는다.             p.19~20


2020년의 뉴욕, 불확실한 봄이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도시가 봉쇄되었고,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규칙이었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 산책을 나가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낙인 노년의 소설가에게도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소설가의 지인이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가 도시가 봉쇄되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집에 홀로 남은 앵무새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지능이 매우 높고 사교적인 종의 앵무새라서 혼자 두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원래 새를 돌봐 주기로 한 친구의 아들이 있었지만, 대학이 문을 닫고 친구들도 모두 뉴욕을 떠나자 낯선 아파트에 혼자 갇혀 있고 싶지 않았는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소설가는 이 일을 뜻밖의 행운으로 여겼다.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기보다, 적어도 하루의 일부를 다른 공간에서 보낼 구실이 생긴 것이니 말이다. 새의 이름은 유레카였고, 아주 작은 품종의 초록빛깔을 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밝고 싱그러운지 열대 식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덕분에 그 기이하고 불안했던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준다. 매일 아침 기대에 부풀어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기괴하리만큼 인적 없는 거리를 몇 블록 걸어가서 자신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깃털 달린 친구를 만나는 단순한 허드렛일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집을 오가며 유레카를 돌보던 소설가는 자신의 집을 자원봉사자로 뉴욕에 온 의사에게 빌려주고, 아예 그 아파트에 머무르며 앵무새를 돌보기로 한다다. 그렇게 소설가는 앵무새 유레카와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며 잔잔한 기쁨을 느끼지만, 먼저 앵무새를 돌보다가 사라져 버린 대학생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면서 원치 않은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잘못된 생각. 심리학자들은 그걸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신 건강을 위해선 중단시켜야 한다. 작가에겐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작가에게 강박적인 되새김질은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어두운 생각을 따라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하며, 작가는 상상력에게, 멈춰, 거긴 가지 마, 하고 말할 수가 없다. 타인들의 삶을,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는지를 상상하는 것, 그게 작가의 일이 아닐까?                p.195


우리는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살아 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지속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이미 늦었을 때가 많다. 팬데믹으로 인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많은 일상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불과 몇 달 사이에 도시의 모든 것이 바뀌었으며,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평범한 일상이 건네주는 위안의 소중함을 말이다. 당시 국내에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고, 해외의 경우 도시 전체가 봉쇄되기도 했다. 외출을 하지 못하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줄어든 사람들이 답답함과 우울함을 느끼며 코로나 블루를 호소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지긋지긋했던 팬데믹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일상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팬데믹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읽고 있자니, 새삼 오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노년의 소설가와 너무 똑똑한 앵무새, 그리고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는 대학생이 함께 지내며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서로 연대감을 쌓아가는 이 이야기는 잔잔하고, 담백하게 펼쳐진다. 친절했던 이웃이 예민해져 날카로운 말을 내뱉게 되고, 산책 나온 개들조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해 봄,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세상은 소설 속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겪은 세계였다. 시그리드 누네즈 특유의 건조하면서 온기 있는 문체와 독특한 유머 감각으로 무장한 이 작품은 문학에 대한 각종 비평과 사회적 트라우마 속에서 지켜내는 일상의 작은 나날들을 보여준다. 드라마틱한 서사는 없지만 극중 소설가의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의식의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것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이다. 과거와 현재, 문학과 예술, 인생, 그리고 상실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의 평온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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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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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종주는 양쪽 다 한 번씩인데, 고류다케, 가시마야리가타케 각각 왕복한 건 합쳐서 열 번은 넘지 싶어.

─그런데 다음에 또 하치미네기렛토에 가도 돼? 아무리 너라도 아직 올라보지 않은 산이 있을 거 아냐.

─응. 일본 100대 명산에서만도 아직 스무 곳이 안 될 수도.

─그럼 왜?

─좋아해.

덜컹했다. 좋아하는 대상이 나인 것도 아닌데. 부럽기도 했다. 좋아한다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p.60


올해 예순다섯 살인 다니자키 아야코는 마흔 두 살인 마미야 마미코와 함께 산에 오른다. 부모 자식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나는데, 가족도, 친척도 아닌, 알고 지낸 지 아직 이 년도 되지 않는 사이로 함께 등산을 하게 된 것이다. 아야코는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카페를 홀로 운영하고 있다. '고류다케'는 남편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산으로, 함께 오자고 약속했었는데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가이드가 동행하는 등산을 위해 산악 가이드를 신청했고, 가이드인 야마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악 사진가이기도 하다. 남편이 생전에 그의 사진에 반해 현재도 카페에 그가 찍은 사진이 있다. 산을 좋아하던 남편이 그 중에서도 왜 고류다케를 좋아했을지 이유가 궁금했던 아야코는 산에 직접 올라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 마미코는 대학시절 산악부 출신이다. 산악가이드인 야마네와는 동창 사이로 같은 산악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산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아야코의 카페에서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산악사진가가 된 야마네의 사진을 보며 자신이 믿을 수 없었던 미래를 손에 넣었구나 싶어 놀란다. 가이드 신청은 아야코가 직접 했기에 마미코는 산악 당일에 와서야 가이드가 야마네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척 하지 않은 채로 등산이 시작된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한 사람과 기어코 자신의 꿈을 이루어낸 사람의 마음 속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남편을 생각하며 후회와 회한에 사로잡힌 아야코와 산악부 동기인 마미코와 야마네, 세 사람의 등반은 무사히 잘 진행될까.





살아갈 수 있을까? 문득 그런 불안이 스친 순간, 숨을 쉬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과호흡을 일으키고 말았어. 다행히 혼자 조치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밖에 나가야겠어.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만 해.

... 어쩐지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듯한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장거리 이동은 못 해. 곧장 줄이 툭 끊어지려 하더라. 그래도 나이가 들면 좋은 의미에서 이 줄이 뚝 끊어지지는 않는 법이잖아.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는 줄이 속삭였어. 낮은 곳이어도 되지 않을까?                   p.250~251


미나토 가나에가 산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고 하면 누군가 다치고, 죽고, 속이고, 배신하는 미스터리 장르를 예상하겠지만, 이 작품에선 아무도 다치지 않고 타인의 선의에 기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자들의 등산일기>에 이어 등산을 소재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힐링 드라마를 만날 수 있다. 각자의 근심과 걱정을 안은 채 산으로 향하는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세 시즌에 걸쳐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네 개의 에피소드가 각각 완결된 단편인 연작소설집으로 일본의 다양한 명산들을 글로 만나는 재미도 일품이다. 


남편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산에 올라 후회와 회한에 사로잡힌 60대 여성, 대학시절 산악부였지만 현실과 타협해 사느라 잊고 살았던 산을 오랜만에 다시 오른 40대 여성, 성악과 피아노, 바이올린이라는 각기 다른 전공을 가졌지만 연습 메이트로 만나 함께 산에 오르게 된 음악대학 1학년 친구들,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산행을 계획한 딸과 일찍 남편과 사별한 뒤 딸을 혼자 키워온 엄마의 모녀 여행 등 각자 나이도, 상황도 다른 여성들이 저마다의 고민과 사정으로 산에 오른다. 바위투성이의 길을 다 올라가면 단숨에 시야가 탁 트이고, 하늘이 손에 닿을 것만 같다. 은하수가 뚜렷해 밤하늘이 아니라 우주가 펼쳐진 것 같은 기분이 곳도 있다. '인생에 ‘등산’이라는 두 글자가 없는 사람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분명 산을 좋아하게 되리라 기대'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싱그러움과 무해한 자연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지친 일상을 위로해주며 재생과 회복을 선사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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