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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종주는 양쪽 다 한 번씩인데, 고류다케, 가시마야리가타케 각각 왕복한 건 합쳐서 열 번은 넘지 싶어.
─그런데 다음에 또 하치미네기렛토에 가도 돼? 아무리 너라도 아직 올라보지 않은 산이 있을 거 아냐.
─응. 일본 100대 명산에서만도 아직 스무 곳이 안 될 수도.
─그럼 왜?
─좋아해.
덜컹했다. 좋아하는 대상이 나인 것도 아닌데. 부럽기도 했다. 좋아한다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p.60
올해 예순다섯 살인 다니자키 아야코는 마흔 두 살인 마미야 마미코와 함께 산에 오른다. 부모 자식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나는데, 가족도, 친척도 아닌, 알고 지낸 지 아직 이 년도 되지 않는 사이로 함께 등산을 하게 된 것이다. 아야코는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카페를 홀로 운영하고 있다. '고류다케'는 남편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산으로, 함께 오자고 약속했었는데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가이드가 동행하는 등산을 위해 산악 가이드를 신청했고, 가이드인 야마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악 사진가이기도 하다. 남편이 생전에 그의 사진에 반해 현재도 카페에 그가 찍은 사진이 있다. 산을 좋아하던 남편이 그 중에서도 왜 고류다케를 좋아했을지 이유가 궁금했던 아야코는 산에 직접 올라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 마미코는 대학시절 산악부 출신이다. 산악가이드인 야마네와는 동창 사이로 같은 산악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산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아야코의 카페에서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산악사진가가 된 야마네의 사진을 보며 자신이 믿을 수 없었던 미래를 손에 넣었구나 싶어 놀란다. 가이드 신청은 아야코가 직접 했기에 마미코는 산악 당일에 와서야 가이드가 야마네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척 하지 않은 채로 등산이 시작된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한 사람과 기어코 자신의 꿈을 이루어낸 사람의 마음 속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남편을 생각하며 후회와 회한에 사로잡힌 아야코와 산악부 동기인 마미코와 야마네, 세 사람의 등반은 무사히 잘 진행될까.

살아갈 수 있을까? 문득 그런 불안이 스친 순간, 숨을 쉬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과호흡을 일으키고 말았어. 다행히 혼자 조치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밖에 나가야겠어.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만 해.
... 어쩐지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듯한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장거리 이동은 못 해. 곧장 줄이 툭 끊어지려 하더라. 그래도 나이가 들면 좋은 의미에서 이 줄이 뚝 끊어지지는 않는 법이잖아.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는 줄이 속삭였어. 낮은 곳이어도 되지 않을까? p.250~251
미나토 가나에가 산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고 하면 누군가 다치고, 죽고, 속이고, 배신하는 미스터리 장르를 예상하겠지만, 이 작품에선 아무도 다치지 않고 타인의 선의에 기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자들의 등산일기>에 이어 등산을 소재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힐링 드라마를 만날 수 있다. 각자의 근심과 걱정을 안은 채 산으로 향하는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세 시즌에 걸쳐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네 개의 에피소드가 각각 완결된 단편인 연작소설집으로 일본의 다양한 명산들을 글로 만나는 재미도 일품이다.
남편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산에 올라 후회와 회한에 사로잡힌 60대 여성, 대학시절 산악부였지만 현실과 타협해 사느라 잊고 살았던 산을 오랜만에 다시 오른 40대 여성, 성악과 피아노, 바이올린이라는 각기 다른 전공을 가졌지만 연습 메이트로 만나 함께 산에 오르게 된 음악대학 1학년 친구들,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산행을 계획한 딸과 일찍 남편과 사별한 뒤 딸을 혼자 키워온 엄마의 모녀 여행 등 각자 나이도, 상황도 다른 여성들이 저마다의 고민과 사정으로 산에 오른다. 바위투성이의 길을 다 올라가면 단숨에 시야가 탁 트이고, 하늘이 손에 닿을 것만 같다. 은하수가 뚜렷해 밤하늘이 아니라 우주가 펼쳐진 것 같은 기분이 곳도 있다. '인생에 ‘등산’이라는 두 글자가 없는 사람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분명 산을 좋아하게 되리라 기대'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싱그러움과 무해한 자연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지친 일상을 위로해주며 재생과 회복을 선사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