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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동안 나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고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건 그해 봄의 많은 불확실성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작가 중에 그런 체험을 하지 않은 이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왜 평생 애도하며 사는 기분인지 알고 싶다. 그 감정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도무지 사라지려 하질 않는다. p.19~20
2020년의 뉴욕, 불확실한 봄이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도시가 봉쇄되었고,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규칙이었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 산책을 나가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낙인 노년의 소설가에게도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소설가의 지인이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가 도시가 봉쇄되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집에 홀로 남은 앵무새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지능이 매우 높고 사교적인 종의 앵무새라서 혼자 두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원래 새를 돌봐 주기로 한 친구의 아들이 있었지만, 대학이 문을 닫고 친구들도 모두 뉴욕을 떠나자 낯선 아파트에 혼자 갇혀 있고 싶지 않았는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소설가는 이 일을 뜻밖의 행운으로 여겼다.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기보다, 적어도 하루의 일부를 다른 공간에서 보낼 구실이 생긴 것이니 말이다. 새의 이름은 유레카였고, 아주 작은 품종의 초록빛깔을 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밝고 싱그러운지 열대 식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덕분에 그 기이하고 불안했던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준다. 매일 아침 기대에 부풀어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기괴하리만큼 인적 없는 거리를 몇 블록 걸어가서 자신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깃털 달린 친구를 만나는 단순한 허드렛일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집을 오가며 유레카를 돌보던 소설가는 자신의 집을 자원봉사자로 뉴욕에 온 의사에게 빌려주고, 아예 그 아파트에 머무르며 앵무새를 돌보기로 한다다. 그렇게 소설가는 앵무새 유레카와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며 잔잔한 기쁨을 느끼지만, 먼저 앵무새를 돌보다가 사라져 버린 대학생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면서 원치 않은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잘못된 생각. 심리학자들은 그걸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신 건강을 위해선 중단시켜야 한다. 작가에겐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작가에게 강박적인 되새김질은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어두운 생각을 따라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하며, 작가는 상상력에게, 멈춰, 거긴 가지 마, 하고 말할 수가 없다. 타인들의 삶을,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는지를 상상하는 것, 그게 작가의 일이 아닐까? p.195
우리는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살아 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지속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이미 늦었을 때가 많다. 팬데믹으로 인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많은 일상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불과 몇 달 사이에 도시의 모든 것이 바뀌었으며,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평범한 일상이 건네주는 위안의 소중함을 말이다. 당시 국내에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고, 해외의 경우 도시 전체가 봉쇄되기도 했다. 외출을 하지 못하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줄어든 사람들이 답답함과 우울함을 느끼며 코로나 블루를 호소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지긋지긋했던 팬데믹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일상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팬데믹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읽고 있자니, 새삼 오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노년의 소설가와 너무 똑똑한 앵무새, 그리고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는 대학생이 함께 지내며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서로 연대감을 쌓아가는 이 이야기는 잔잔하고, 담백하게 펼쳐진다. 친절했던 이웃이 예민해져 날카로운 말을 내뱉게 되고, 산책 나온 개들조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해 봄,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세상은 소설 속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겪은 세계였다. 시그리드 누네즈 특유의 건조하면서 온기 있는 문체와 독특한 유머 감각으로 무장한 이 작품은 문학에 대한 각종 비평과 사회적 트라우마 속에서 지켜내는 일상의 작은 나날들을 보여준다. 드라마틱한 서사는 없지만 극중 소설가의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의식의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것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이다. 과거와 현재, 문학과 예술, 인생, 그리고 상실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의 평온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