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더 유
J. S. 먼로 지음, 지여울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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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있기 전에 케이트는 경찰에서 민간인 신분의 '초인식자'로 일을 했다. 인구의 2퍼센트는 사람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안면 인식 장애, 즉 안면실인증이라 불리는 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 정반대 지점에는 '초인식자'라고 불리며 사람의 얼굴을 절대로 잊지 않는 1퍼센트가 존재한다. 케이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실제로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한번은 그저 눈만 보고 용의자를 분간해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p.23

 

한 번 본사람의 얼굴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초인식자’ 케이트는 경찰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일하며 수많은 용의자들을 식별해 수사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여섯 달 전 일어난 교통사고로 뇌를 크게 다쳤고, 현재는 병원에서 만나 연인이 된 젊은 사업가 롭의 자상한 보살핌을 받으며 요양 중이다. 어느 날 케이트는 롭과 대화를 나누다 그가 오래 전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 존재를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첨단 기술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는 그가 도플갱어라는 미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의문이었던 케이트는 며칠 뒤 그가 자신이 알던 롭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같다고 느끼게 된다. 혹시 그가 롭이 두려워하던 도플갱어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 케이트는 점점 혼란스러워지는데... 과연 이것은 케이트의 망상인 것일까, 아니면 회복되어 가는 케이트의 뇌가 보내는 경고인 것일까.

 

롭은 영국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신생 기업의 창업주이자 뇌와 기계를 상호작용하게 하는 ‘직접 신경 인터페이스’ 기술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냉장고나 집의 잠금장치 등 거의 모든 곳에 첨단 기술을 적용하고 있는 그는 왜 '도플갱어'라는 미신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혹시 도플갱어가 미신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라면? 그리고 그가 만난 적이 있다는 그 도플갱어가 현실에 진짜 나타나 그가 이룬 모든 것들과 집, 회사,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전부 빼앗아 가게 된다면 말이다. 그렇게 깨닫고 나서 보니 케이트는 그의 모든 점들이 자신이 알던 롭의 모습과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해서 케이트가 가르쳐 줘야 했던 롭이 능수능란하게 프랑스어로 언론에서 인터뷰를 한다던가, 평소에 절대 마시지 않던 음료를 카페에서 마신다던가, 영상 통화 중에 무심코 지은 표정에서 그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케이트의 불안과 의심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즈음부터 그녀에게 크고 작은 사고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는데, 과연 케이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당신도 알겠지만 누군가를 흉내낸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야." 제이크가 앉은 자리에서 몸을 똑바로 세우더니 탁자 위에 놓인 케이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갠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간단히 차지할 수는 없어. 누군가의 신분을 갈취한 다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 사람으로 살아가다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일란성 쌍둥이라면 혹시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롭한테는 쌍둥이 형제 같은 건 없어. 그렇지 않아?"                 p.322

 

자신의 도플갱어와 마주치는 것은 불길한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도플갱어가 실재 존재하는 지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된 것이 없으므로, 그 상징이나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속설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보통 자신의 도플갱어와 마주치게 되면 한 쪽이 죽게 된다는 속설로 공포영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오싹하기 그지 없다.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또 다른 존재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면 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자아분열과 같은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이 작품 속에서 케이트가 겪게 되는 증상을 '카그라스증후군'이라고 하는 망상증으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한때 얼굴 인식에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었던 성능 좋은 방추상회 때문에 도플갱어를 본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럴듯하게 설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케이트가 사고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플갱어 이야기에 집착하게 되는 초반부에 이어, 사실 교통사고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증거가 나오면서 본격적인 스릴러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뇌에서 얼굴을 인식하는 부분인 방추상회가 뛰어난 인물로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과학수사과의 베아테 뢴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었다. 방추상회라는 단어 자체를 그때 처음 알게 되었었는데, 수사관 중에 정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범죄자 검거에 아주 큰 도움이 되겠다 생각했었다. 얼굴을 알아보는 것만으로 용의자를 특정하고, 그 중에서 범인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수사에 굉장한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J. S. 먼로는 비슷한 수천 개의 얼굴을 구분하고, 마주친 사람의 얼굴은 모조리 기억하는 능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뇌와 기계를 상호작용하게 하는 기술을 등장시키고, 도플갱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더해 한층 더 복잡하고 스릴 있는 심리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최첨단 기술과 비과학적인 미신이 공존하는, 독특한 심리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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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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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 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 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 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 제대로 경함할 수 있다고 말할 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p.21

 

사이먼 레이랜드는 런던에 있는 삼촌이 물려준 저택으로 향한다. 동양학자였던 삼촌은 그에게 집과 가구와 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이곳에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명료함을 얻기로,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이 지나간 지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삶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에게 무슨 끔찍한 일이 있었고, 그것은 레오나르디 박사의 말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미 그 상황에 대한 것은 끝이 났고, 미래가 그에게 다시 열린 지 6주가 지난 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레이먼드는 평생 번역가로 살 예정이었지만, 아내가 갑자기 사망하고 출판사를 유산으로 받은 뒤 출판사를 11년 동안 경영해 왔다.

 

 

레이랜드는 삼촌이 그에게 아라비아어로 쓰인 글을 읽어 주었던 대여섯 살 때부터 언어에 매혹되었다. 강압적인 아버지와 학교가 싫어서 가출해 낡은 호텔의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모두 잠든 조용한 시간에 가장 낯선 언어, 가장 낯선 단어를 배우며 그 문학적 매력을 즐겼다. 그렇게 낯선 글자와 단어, 울림과 시의 연들이 그의 몸 안에 차곡차곡 쌓였으니, 그가 번역을 독학하던 숱한 밤을 거쳐 결국 번역가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래이랜드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 진행되며, 최근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우리는 알게 된다.

 

어느 날 그는 갑작스럽게 언어 장애와 마비 증상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뇌졸중이 아닐까 생각하며 병원으로 간다. 다행히 뇌출혈은 아니었지만, 그의 뇌 사진을 보고 의사는 그에게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완전히 없애거나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치료로 조금 늦출 수는 있겠지만 몇 달 혹은 1년쯤의 시간이 그에게 남았다고 선언한 것이다. 불안과 절망에 휩싸인 그는 다가오는 삶의 붕괴를 막기 위해 낯선 시대와 지역에 관한 책을 무더기로 사들이고,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두문불출한다. 왜 이 모든 걸 더 일찍 읽지 않았을까, 내 인생의 시간으로 뭘 했던가? 절망하면서,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저항과 광기 속에서 집중력과 기억력으로 무장하고 맞선다. 그러다 그것이 오진임을 알게 되고, 앞으로 남은 생의 첫날을 런던의 저택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내 정신에 새겨졌다고 말하고 싶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텍스트가 많아. 갈고 닦아 잊을 수 없는 언어로 점점 더 넓어지는 내면의 다락방, 그곳에 번역한 언어에 대한 기억이 쌓여갔어. 이런 다락방에만 살면서 평범한 삶의 공간으로 향하는 계단을 더는 찾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어. 어쩌다 그 계단을 내려오면 자연스럽고 자명하게 말하는 법을 잊은 이방인처럼 움직였지. 번역 언어, 특히 복잡한 번역 언어는 상황이 무척 특이해. 그게 내 언어이긴 해. 근원이 내 안에 있고, 그걸 빚고 만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야. 하지만 타인의 도장이 찍히지. 내 언어는 내 언어지만, 원래 언어는 원래 언어니까.               p.508

 

레이랜드는 방사선과에서 사진이 바뀌는 바람에 시한부를 선고 받았고, 그 오진과 더불어 77일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불현듯 다시 미래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생긴 후에는 절대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고, 다가올 미래 또한 달라질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중요한 건 삶이 계속된다는 것이라는 걸 그는 깨닫게 된다.

 

"인생은 아름답다. 삶이란 언제나, 매 순간 시작되니까."

 

레이랜드는 책과 원고로 가득한, 천장까지 닿는 책장에 에워싸인 채 13년을 일했지만, 오진을 받고 삶을 정리하며 출판사를 팔아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쉼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는 오래 전 계획했던 여행을 준비했고, 먼 길을 떠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삶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살아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시간 속에서 그는 죽은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책상 앞에 앉아 그간의 일을 돌아보고, 마침내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누구나 살면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다시 세상이 열리기도 하고, 완전한 절망에서 희망을 찾기도 하며, 지금까지 살아 왔던 방식과 다른 세계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그 동안 놓치고 살았던 많은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그 눈부신 순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더 없이 섬세하고, 사색적으로 펼쳐 보인다.

 

이 아름다운 소설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파스칼 메르시어가 1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장편소설이다. 현지에서는 2020년에 출간되어 13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유럽 문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파스칼 메르시어를 세계적 작가로 만든 모든 강점이 담겼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데, 직접 읽어 보니 앞으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분량 내내 수많은 작가와 번역가와 출판인, 그리고 문학을 삶의 지침으로 삼은 이 모든 이들의 삶이 우아한 언어로 그려져 있다. 레이랜드는 수십 년 동안 번역을 해 왔고, 언어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낯선 언어들을 공부해 온 인물이라 언어에 대한 그의 열정이 매 페이지마다 그려져 있는 것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몰타어와 사르데냐어, 베르베르어, 그리스어, 튀르키예어, 히브리어, 그리고 알바니아어, 러시아어, 라틴어 등등 그는 수많은 언어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문학과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게 될 것 같다. 그러니 시간을 들여서 느린 호흡으로 읽어 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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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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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마. 가즈미는 어디 있지? 당신은 알 거 아냐?'
'그래, 잘 알지. 진짜 가즈미는 죽었어.'
다케우치는 고래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랬군. 언제 어디서 죽었지?'
'언제? 어디서? 무슨 소리야? 그건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무슨 소리지?'                 - '맨션의 여자' 중에서, p.50

 

도쿄의 후미진 골목에 간판도 없이 운영되는 비밀 아지트 같은 곳이 있다. '트랩핸드'는 과거 미국에서 잘 나가던 마술사 가미오 다케시가 운영 중인 바로 카운터석과 안쪽에 탁자가 하나 있는 작은 가게이다. 그곳에서 다케시는 바텐더를 하면서 손님들을 응대한다. 키가 크고 얼굴도 멀끔하고 모델처럼 스타일이 좋은 다케시에게는 타인의 속임수를 간파하거나, 수수께끼나 음모를 해결하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전작인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에서는 조카와 함께 형이 살해된 사건의 진범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트랩 핸드를 찾은 수상한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마요가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서 반가웠다.

 

건축사인 마요는 리모델링 의뢰를 맡게 된다. 방 두 개짜리 맨션을 사서 리노베이션을 맡긴 미모의 여자는 엄청난 부자로 보였지만, 어딘가 비밀이 많은 사람같았다. 다음 번 상담을 둘이서 조용히 얘기할 만한 곳에서 하고 싶다는 요청에 마요는 삼촌인 다케시에게 부탁한다. 마요에게 대략의 사정을 듣게 된 다케시는 의뢰인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데 동의하고 장소를 빌려 주는데, 남편의 죽음으로 막대한 금액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의뢰인의 취향이 이상했다. 세 종류의 플랜을 준비했는데, 과감한 콘센트와 심플한 콘셉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견적은 제일 비싸지만 평범하고 지루한 디자인을 고른 것이다. 의뢰인의 취향을 의심하는 마요에게 다케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미망인이 유산을 물 쓰듯 쓰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거라고. 문제는 그 남아도는 돈이 어떻게 하면 나한테까지 흘러오게 하느냐라고 말이다. 자, 과연 마요가 맡은 의뢰는 누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어지게 될지, 이후 이야기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급 전개 되기 시작한다.

 

 

 

"무엇이 행복이라 여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가미오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노 씨에게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피 흘릴 것도 각오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죠. 안 그런가요?"             - '환상의 여자' 중에서, p.228~229

 

이 작품에는 블랙 쇼맨이 등장하는 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돈 많은 미망인과 그녀를 스토킹하는 의문의 남성, 사귈까 말까 고민하는 첫 데이트 중인 커플,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재즈 뮤지션의 비밀 연인이 등장해 각자의 사연이 전개된다. 다케시는 거짓말을 꿰뚫어 보고, 마술 같은 트릭을 쓰고, 인물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합성할 수 있는 신기술 ‘딥페이크’를 활용하는 등 각자의 사건 해결을 위해 능력을 발휘한다. 다케시는 전작에서도 형사 행세를 하며 주변 이웃을 탐문 조사한다던가, 스마트폰의 암호를 슬쩍 보는 것만으로 알아 맞추고, 무대 위의 화려한 마술사만큼이나 멋진 솜씨를 선보이며 사건을 추리해 나갔었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괴팍했던 성격 역시 여전한데, 그 모습 그대로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작가의 제안으로 전 세계 최초 공개, 한국 단독 선출간이라는 점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지만, 구성이나 분량 모든 면에서 조금 가볍게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코로나 이후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낸 것도 화제였던 전작에 비해 가볍게 에피소드 위주로 풀어 나가는 단편이라 앞으로 이어질 블랙 쇼맨 시리즈의 장편 신작을 만나기 전에 브릿지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고 말이다. 요즘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장 공들여 만들고 있는 캐릭터가 블랙 쇼맨이라고 하니, 아마도 더 묵직한 다음 이야기를 위한 워밍업의 개념이라도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례적으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을 빨리 만나게 된 거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반가운 마음부터 들 것이다. 속도감 있는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호흡에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블랙 쇼맨 시리즈의 다음 장편을 고대하며 이 작품을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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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국가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50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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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행하고도 벌받지 않는 가장 좋은 경우와 불의를 당하고도 보복하지 못하는 가장 나쁜 경우의 중간인 셈이지요. 양쪽 극단의 중간인 정의가 좋은 것이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불의를 행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 불의를 당하지 않게 해주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할 수 있는 진정한 남자라면 불의를 행하지도 당하지도 못하게 하자는 계약은 맺지 않을 겁니다. 제정신이라면 말이지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의 본질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이요 정의의 기원입니다.              p.71

 

오래 전 '러셀 서양철학사', '틸리 서양철학사' 등의 책을 읽을 때 흥미로웠던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였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인데, 스스로 전혀 글을 쓰지 않았지만 제자 플라톤을 통하여 서양 철학의 전체 발전에서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발휘한 진정한 사상가였으니 말이다. 플라톤의 대화록은 스승과 제자의 사유가 결합되어 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한다. 플라톤이 썼던 글은 모두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그가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번에 만나게 된 <국가>도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처럼 소크라테스가 전날에 케팔로스의 집에서 나눈 대화와 논의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1권에서는 정의가 악덕이자 무지인지 아니면 지혜이자 미덕인지 살펴본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와의 대화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 즉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진실을 말하는 것과 빌린 것을 돌려주는 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런 일이 때에 따라 정의가 되기도 하고 불의가 되기도 하는 건지에 대해서 의견을 물은 것이다. 이 질문은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이어 받아 대화가 진행된다. 친구란 무엇인지, 좋은 사람이란 어떤 의미인지, 친구인 나쁜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고, 적이지만 좋은 사람에게는 해를 입히는 게 정의라고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는 쉬지 않고 계속된다. 2권부터는 대화 상대자가 아리스톤의 아들이자 플라톤의 작은 형인 글라우콘과 플라톤의 큰형인 아데이만토스로 바뀌어 10권까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여러 유형의 불의한 국가들을 살펴보고, 국가의 통치자로 어떤 인물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내가 말했네.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의 협력자인 법도 그것을 바라는 게 분명하네. 그래서 아이들을 다스릴 때 처음에는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있는 가장 훌륭한 부분으로 그들의 내부에 있는 가장 훌륭한 부분을 보살피지 않는가? 우리 안에 있는 수호자와 통치자가 우리를 대신해 아이들의 내부에도 있게 하는 것이네. 국가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내부에도 바른 정치체제가 세워져야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다네."                p.475

 

이번에 현대지성 클래식의 50번째 책으로 나온 <국가>는 가독성이 매우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서양 철학이라고 하면 다소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할 거라고 생각하게 마련인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굉장히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서 깜짝 놀랄 것이다. 그리스어 원전을 직접 옮긴 완역본이고, 사변적이고 복잡다단한 원문을 세심히 다듬었으며, 여러 번의 교정을 통해 최대한 원문을 존중하면서도 가독성 높은 편집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주가 366개나 되는데도 본문을 벗어나지 않고 해당 페이지에서 바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더욱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후반부에 수록된 18페이지의 세심한 해제 또한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현실에서는 정의가 불이익을 당하는데, 정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중에 누가 더 행복한지'에 대한 질문자체가 흥미롭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좋고,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완벽한 불의를 버려두고 정의를 선택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불의를 행하더라도 고상함으로 위장하는 데 성공한다면, 누가 진정으로 정의를 존중하려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이는 2,4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당대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근본적으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후세 사람들은 <국가>에 '정의론'이라는 부제를 붙이기도 했는데, 개인의 정의든, 국가의 정의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가 '정의'인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의 정의를 살펴보기 위해 이상적인 국가와 불의한 정치체제를 가진 국가들을 차례대로 고찰하며 정의를 행하는 것 자체가 더 좋고 행복한 이유에 대해 치밀하게 논변한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는 내내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여러 방향으로 사유할 수 있어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플라톤 철학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으로 읽을 수 있는 현대지성 클래식의 <국가>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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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그녀는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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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기와 비슷하다. 감기 바이러스는 어느새 몸속으로 침투하고, 알아챘을 때는 이미 열이 난 상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열은 사라져간다. 열이 났던 게 거짓말처럼 여겨지는 날이 온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이 그 순간이 찾아온다. 그 무렵, 하루는 말했다. 나는 언제까지고 후지 곁에 있을 거야.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후지시로와 하루만 예외일 리는 없었다.         p.58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백화>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던 가와무라 겐키의 대표적인 연애 소설 <4월이 되면 그녀는>이 옷을 갈아 입고 개정판으로 나왔다. 6년 전에 출간 당시에 읽었던 작품을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이번에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결혼을 앞둔 남자가 9년 전에 헤어진 과거의 연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으면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사랑이 점차 사라져 가는 세상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정신과 의사인 후지시로는 수의사인 야요이와 곧 결혼할 예정이다. 그들은 도심에 자리 잡은 고급맨션에서 삼 년째 함께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시절 첫사랑에게서 편지가 한 통 온다. 그녀는 볼리비아의 우유니라는 새하얀 소금호수로 에워싸인 도시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체코 프라하,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 인도의 카냐쿠마리를 거치며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를 기점으로 대학 사진부 동아리에서 처음 만나 연인이 되는 후지시로와 하루의 이야기와 첫사랑과 갑작스레 멀어지고 이후 수 년간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없었던 후지시로가 현재의 연인 야요이를 만나게 된 스토리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후지시로가 야요이를 만나던 당시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직전에 파혼을 하고 그와 만나기로 했었다. 그리고 삼 년의 연애 후 결혼을 앞두고 있는 지금, 그녀는 또 다시 결혼식을 앞두고 사라져 버린다. 사라져버린 약혼녀, 아이없이 섹스리스 부부로 살고 있는 그녀의 여동생, 출중한 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남자와 연애라는 감정에 전혀 관심이 없는 동료 나나, 그리고 첫사랑의 실패 이후 자신보다 상대를 더 생각하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후지시로를 통해서 '연애가 사라진 세상'이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왜 타인을 사랑할까. 왜 그 감정이 사라져가는 걸 막을 수 없는 걸까. 모든 현인이 도전해온 미해결된 난제. 언젠가 인간을 능가한 인공지능이 거기에 해답을 내주는 날이 올까. 영화 속에서는 노란 셔츠 남자가 옥상으로 올라가 해가 뉘엿뉘엿 더디게 지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모든 걸 잃은 남자는 편지를 쓴다. 옛날 아내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에워싸듯 우뚝 솟은 고층빌딩 창들이 하나 또 하나 오렌지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p.147

 

누구나 한때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 극중 하루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이 한순간이라는 것도 조금씩 알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섹스하고, 결승점으로 결혼하게 되어 있는 게 대부분인데, 이 작품은 그런 사회 통념에 대해 전면으로 부딪치고 있다.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고, 함께 사는 그 혹은 그녀가 상대를 계속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확인하느냐고. 그저 어느 정도 연령이 되면 결혼하고, 그 후에는 서로만 사랑하며 끝까지 가족을 지키며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규칙처럼 되어 버린 것 아니냐고 말이다.

 

잃어버린 사랑과 확신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고민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영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그리고 있다. 애초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한순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한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고 믿고 평생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것부터 말이 안되는 일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남자와 여자가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동반자로 서로를 사랑하는 게 전제가 되는 건 이상한 건 아닐까. 누구랑 연애를 하든 다다르는 종착지는 똑같다고, 극중 인물을 통해 작가는 말하고 있다. 달과 태양이 겹쳐지는 한순간, 사랑하는 서로의 마음이 겹쳐진, 일식 같은 순간은 말그대로 기적같은 찰나에 불과하다고.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부터 믿을 수 없는 기적이라고. 누군가에게는 생애 단 한번만 찾아오기도 하고, 아예 찾아오지 않기도 하는 그 기적을 우리는 왜 유지시킬 수 없는 걸까. 살아있는 한 사랑은 떠나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감정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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