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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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신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쪽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두려워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는가? 글쎄,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로지 순간을 즐기며, 오늘만을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다 갑자기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들이 모조리 잘못된 거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면? 애초에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렇다면 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20여 년 전쯤에 쓴 일기장에서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재빨리,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한다. 이제 그 말을 다시 해볼까. 천천히, 곱씹어서. '.... 두려워할 것 없다."

쥘 르나르는 말한다.

"가장 진실한, 가장 정확한, 가장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이다."

한때, 그러니까 어렸던 내가 죽음에 매혹되게 된 계기는, 요절한 천재 작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 덕분에 작가의 삶 자체에도 어떤 환상 같은 걸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영화로도, 책으로도 출간되었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류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고 있던 터라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래 전이라 출간 순서나 내가 먼저 만났던 작품이 어떤 건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아뭏튼 이 두 작품 때문에 감수성 풍부했던 그 시절 나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고, 인생은 짧고 굵게, 불꽃처럼 살다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후에 꽤 나이가 든 후에 동생이, 난 그때 언니가 스무 살 까지만 살겠다고 해서, 당시에 진짜 무서웠다고 말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 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어느 정도 성인이 되고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는 게 바빠서인지 '죽음'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도 주변에서 가까운 누군가 죽거나 했던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줄리언 반스의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오랜 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줄리언 반스가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도 자살과 기억의 문제가 등장했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도 사별과 살아남은 삶에 대해서 그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해왔던 '죽음'이 이번에는 전면에 나섰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에서는 반스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아우르며 회고록 같은 분위기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사유하고 있다. 신을 그리워하는 태도를 질척하다고 일갈해버리는 철학과 교수 형,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 어머니, 전신을 지배하는 병마와 싸우다 병실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등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그들의 죽음과 함께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는 가벼운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하고, 어느 순간 묵직한 철학서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 허구의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줄리언 반스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자식들이 집을 떠날 때 자신이 죽을 날을 전에 없이 예민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물학적 기능은 완료되었으니, 이제 우주가 그녀들에게 바라는 것이라곤 죽음뿐일테니까.

그러나 주요한 논점은 당신이 죽은 후에 당신의 자식들이 '당신을 이어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절멸하는 게 아니며 이런 선견지명이 의식적인 혹은 잠재의식적인 차원에서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이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는 말과도 같다. 줄리언 반스 처럼 자신이 그린 최고의 죽음까지 꿈을 꿀 필요까진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언젠가 자신에게 죽음이 온다는 생각을 자각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묵직하고, 어둡고, 우울한 주제를 이렇게나 경쾌하고, 깔끔하고, 가볍게도 그려낼 수 있다니 새삼 줄리언 반스의 글에 감탄한다. 여전히 그의 에세이보다는 소설이 더 좋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놓친다면 당신은 언젠가 꼭 후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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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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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플레는 재료가 매우 간단하다. 계란과 설탕, 바닐라 시럽과 크림 그리고 버터와 소금 조금이면 된다. 달걀을 노른자와 흰자로 분리하고, 노른자에는 바닐라 시럽과 크림을, 그리고 흰자를 따로 거품 내어 두 가지를 잘 섞은 뒤 오븐에 구우면 완성이다. 레시피 또한 재료만큼이나 간단한데, 사실 완벽하게 부풀어 오른 수플레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븐 안에서 멋지게 부풀어 오른 수플레라도 조금만 있으면 푹 꺼져 버리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접하기 위해선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따뜻한 수플레를 내어 줘야 하는 까다로움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라니. 마치 구름을 떠먹는 것 같은 맛이다. 우리네 인생 또한 수플레와 닮아 있다. 한껏 부풀어 오른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푹 가라앉아 바닥을 치게 만드는 게 삶이니 말이다.

여기, 완전히 다른 세 나라 세 도시의 전혀 다른 부엌에서 하나의 수플레가 만들어지고 있다

수플레는 변덕스러운 미인과 같다. 아무도 그녀의 기분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 어떤 책에도 수플레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이 없다. 그 어떤 사람도 수플레를 완벽하게 만드는 법을 말할 수 없다. 오븐에 넣고 25 30초가 됐을 때 꺼내야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 어떤 오븐을 써도 완벽한 온도를 맞출 수 없다. 모든 요리사는 수플레를 수없이 만들어보면서 자신만의 최선의 조리법을 찾아낸다. 그릇과 오븐을 수십 번도 넘게 써서 시도해본 후에야 최고의 수플레를 만들어낸다. 그릇과 오븐이 닳도록 만들어보고 마침내 아주 긴 전쟁 끝에 생긴 자제력을 얻고서야 그런 수플레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아니와 릴리아는 30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이어오다 최근 몇 년 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다. 베트남에서 입양한 아이들 장과 덩에게 그들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무한한 사랑을 주며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자식들은 자라면서 점점 부모가 소원해졌고, 정부에서 입양으로 보조금을 받으며 자신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었다고 오해하고 비난했으며, 가끔 집에 놀러 와도 한 시간 이상 머무는 법이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위해 장만한 방 일곱 개와 무수한 벽장들과 욕실이 네 개나 딸린 거대한 집에 아니와 릴리아 단 둘만 남았다. 남편인 아니는 우아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자신의 습관과 시간을 존중하길 원했고, 릴리아는 점점 더 고독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남편이 뇌혈관 이상으로 쓰러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크와 클라라는 22년 동안 결혼하고 줄곧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왔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클라라를 위한 널찍한 부엌 외에는 침실 하나에 매우 작은 아파트였지만, 그들은 너무도 행복하기만 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만 입양은 원하지 않았던 그들이었기에, 둘만의 생활에서 안정을 찾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둘이 공유하는 사소한 일상의 목록들이 늘어가는 만큼 행복은 커져만 갔다. 여느 때와 같았던 금요일, 마크는 화랑에서 일찍 퇴근해 집으로 가는 길에 케이크 가게에 들러 디저트를 몇 개 샀다. 하지만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평소처럼 커피 향이 나지 않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자 클라라가 부엌 조리대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수플레 실험을 계속했다. 이제 웬만한 조리법은 다 외워서 특별한 종류의 수플레에 들어가는 재로를 볼 때만 그 책을 한 번씩 보면 됐다. 그렇게 만든 수플레 한가운데가 금방 꺼져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가끔은 꽤 오랫동안 부풀어 오른 채 있기도 했다. 릴리아는 수플레의 맛과 그 조리법에 완전히 빠져버렸다....수플레가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그 흥분된 순간과 그에 따른 실망이나 행복한 감정은 그녀의 의미 없는 일상에서 가장 달콤한 부분이 됐다. 얼이 금요일 밤마다 해가 지기 18분 전에 촛불을 켜는 것처럼, 카노가 해가 뜰 무렵에 기도를 하고 울라가 가부좌를 틀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명상을 하는 것처럼 릴리아는 그런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

페르다는 파리에 사는 딸 오이쿠와 매주 금요일 아침에 긴 통화를 하는 걸 낙으로 살고 있다. 지난 6년 동안 파리에 살아온 딸과의 통화로 마치 한집에 살면서 같은 문제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꼈고, 덕분에 막내딸이 그리워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여느 때와 같았던 아침, 딸에게 온 전화라는 생각에 설레며 전화를 받은 그녀에게 어머니의 이웃에게서 연락이 온다. 어머니가 넘어지면서 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최대한 빨리 오라고 말이다. 페르다의 어머니인 네시베 부인은 여든 두 살 된 노인으로 엄살이 아주 심하기로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부터 엄마를 모시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뉴욕, 파리, 이스탄불 세 도시에서 가정에 헌신해왔지만 남편과 자신들에게 소외된 고독한 릴리아와 삶의 전부였던 아내를 잃게 된 마크와 다치고 나서 점점 더 괴팍해지는 엄마를 모시면서 한 순간도 편히 살 수 없게 된 페르다, 세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소소하게 펼쳐진다. 특히나 이들에게는 각각의 소울 푸드가 있는데, 음식이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 더 이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릴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불행하다고 느껴지거나 피곤해지면 항상 닐라가가 먹고 싶었다. 감자와 고기와 생선 소스를 넣은 양배추 수프가 바로 지금 그녀에게 필요했다. 그 친숙한 냄새가 그녀를 감싸고 위로해주며, 그 냄새가 그녀를 두 팔로 껴안고 잠시지만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줬던 것이다. 페르다는 기운이 없거나 울적하거나 낙담할 때면 언제든지 살렙을 한 잔 만든다. 오이쿠는 야생 난초 뿌리로 만든 이 음료를 맛보고는 차이 라떼와 똑같은 맛이 난다고 했다. 페르다는 이 음료에 계피가루를 뿌려 마시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마크가 아프거나 울적해할 때면 클라라가 몇몇 제철 채소를 알맞게 익혀 요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며, 몇 분만 있으면 자신의 따뜻한 품과 이 요리가 마법을 발휘할 거라며 그를 꼭 안아주곤 했었다. 그렇게 아내가 남긴 추억 속에는 항상 요리가 함께 했었기에,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게 되고 만다. 이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이유로 수플레를 만들면서 부엌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기적들은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다. 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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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목에 방울달기
코니 윌리스 지음, 이수현 옮김 / 아작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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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내가 이 책을 만났을 당시의 상황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평일 내내 아기와 전쟁을 치르느라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상태에서, 토요일 아침부터 기차를 타고 울산에 내려가 결혼식에 참석하고 당일 밤 기차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당연히 체력은 방전되고, 눈도 피곤하고, 졸리기 시작하는 즈음이었다. 옆에서 남편은 자기 시작했고, 나는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왜냐하면 집에 도착하면 다시 육아 전쟁에 뛰어 들어야 하므로, 기차 안에서의 두 시간이 유일하게 책을 볼 수 있는 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눈꺼풀은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고, 어깨는 뭉쳐 있었고, 피곤으로 두통도 약간씩 오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셈인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단 세 장 만에 내게서 잠과 피로를 확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삐딱하게 고개를 젖히고 최대한 허리를 눕히고 좌석에 기댄 상태로 책을 읽던 내가 자세를 다시 고쳐 앉고 집중하게 만들어 주었다.

 

,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궁금한가?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보시라.

이렌느 캐슬이 골프 클럽과 한 일이라고는 헤지테이션 왈츠뿐이었고, 나는 잠시 후에 불을 켜고 브라우닝의 책을 펼쳤다.

브라우닝은 플립을 알았던 게 분명했다. 플립에 대한 시라고밖에 볼 수 없는 '스페인 회랑의 독백'을 썼으니 말이다. 그는 확실히 플립이 시를 다 구겨버린 뒤에 나왔을 법한 "으아아, 이 골칫거리야"라는 구절을 썼고, "저기 내 심장의 혐오가 가네"라고도 썼다. 나는 다음에 플립이 계산서를 나에게 떠맡기면 그 구절을 읊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작품의 대략적인 스토리라인은 이렇다. 하이텍의 연구 개발부에서 1920년대 미국의 단발머리 유행의 기원을 찾는 사회학자 샌드라 포스터는 부서간 연락 보조원 플립의 실수로 잘못 배달된 소포를 전해주러 생물학부로 내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혼돈이론을 전공한 생물학자 턴블 박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다 해진 코르덴 바지에 두꺼운 뿔테 안경, 발가락에 구멍이 난 캔버스 등... 도저히 무언가로 분류할 수 없게 만드는 독특한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오랜 시간 유행과 패션을 분석하며 보냈기에, 대부분 첫눈에 상대를 파악하는 편이었는데도, 유행과 전혀 무관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그의 스타일은 정의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샌드라는 유행에 대한 그의 면역능력이, 어쩌면 유행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풀어낼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플립이 턴블 박사의 연구비 신청서를 잃어버리는 덕분에 그를 도와주려는 샌드라의 제안으로 그들은 원숭이 대신 양으로 공동 연구를 진행해보기로 한다. 마침 그녀에겐 양 목장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커다란 플롯은 문서 작업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회사 내에서 단발머리 유행을 연구하는 사회학자와 혼돈 이론 학자가 만나 새로운 연구를 하게 과정이 전부이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는 주요한 플롯이 아니라 이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에 있다. 애초에 셜록 홈즈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소한 것이야말로 두말할 나위 없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일상사만큼이나 기이한 것도 또 없다고 말이다. 이들이 하고 있는 연구도, 매일같이 바뀌는 유행도, 문서 작업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회사 하이텍도,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게 만드는 엉뚱한 플립의 만행들도, 사실 그 내용만 보자면 그렇게 사소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작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데 모여서 한 개인에게 몰고 오는 '혼돈'은 절대 사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사건이 다른 모든 사건에 영향을 주면서 반복과 재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과'란 사실 어마 어마(?)하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코니 윌리스의 정신 없는 수다에 취해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결론이 시종일관 떠들어대던 유행의 기원과 그 동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곳으로 다다른 게 된다는 것 또한 독특한 재미를 더해 주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내 말 잘 들어." 나는 암양의 턱을 잡은 채로 말했다. "난 하루에 감당할 만큼은 다 겪었어. 직장을 잃었고, 평생 만난 사람 중에 양처럼 행동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도 잃었고, 유행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모르겠고 영영 알아내지 못할 거고, 이젠 질렸어. 순순히 날 따라왔으면 좋겠다. 당장 날 따라왔으면 좋겠어." 나는 디스크 조각을 바닥에 던지고 돌아서서 내 연구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양이 방울양 이었다. 내 뒤를 따라 총총히 생물학부까지 두 층을 내려가고, 연구실을 통과해서 방목장까지 갔으니 말이다. 마치 메리와 메리의 작은 양처럼. 그리고 나머지 양떼도 꼬리를 흔들며 뒤따라왔다.

유행의 기원을 연구한다는 발상 자체도 재미있는데, 사실 그것을 몸소 실행하고 있는 캐릭터는 더욱 흥미진진하다. 샌드라 박사는 근무 시간 외에는 카페에서 디저트나 음료의 유행을 파악하거나, 도서관에 주기적으로 들러 베스트셀러와 도서관 운영 유행을 관찰한다. 그 주에는 어떤 예약 목록이 있는지 확인하고, 사서가 어떤 의상을 입었는지 체크하는데, 그 중에서도 그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도서관 운영 방침 중 하나에 온몸으로 대항한다는 점이다. 매년 출간되는 신간들로 인해 서가 자리가 언제나 부족하기에, 최근에 대출된 적이 없는 책들은 판매 전을 통해 숙청하게 된다. 작년 판매 전에서 그녀는 디킨스의 황폐한 집이 판매되는 것을 보고는 대체 왜 디킨스 책을 버리는 거냐며, 황폐한 집은 훌륭한 책이라고 소리쳤다. 그 후로는 그렇게 방출되는 책들을 막기 위해 책들을 직접 대출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어서 대출한 적이 없던 작품들이나, 모든 고전 작품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 읽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 낡은 책들 모두를 말이다. 그렇게 거의 1년 동안 대출이 없었던, 인기가 없는 책들이 그녀에 의해 구제된다.

다들 알다시피 찰스 디킨스는 '대놓고' 매우 장황한 작가이다. 그에 비해 코니 윌리스는 작품 전체의 페이지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특유의 수다 덕분에 '장황하게' 느껴지는 작가이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은 범죄 및 공포 장르의 모든 형태가 존재하고 있는 엄청난 대작이지 않은가. 사실 나는 디킨스를 대하는 샌드라의 태도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마구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말 특이하고, 이상하지만, 자꾸 생각나는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이들 과학자들의 일상을 가장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등장인물인 바로 부서간 연락 보조원인 플립이다. 그녀는 코걸이를 하고 흰올빼미 문신을 새겼으며, 무슨 일이든 해달라고 하기만 하면 한숨을 내쉬고 눈을 굴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무슨 일을 부탁하든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시간이 없다며 투덜대고, 정리하지 않아야 할 서류들은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쓰레기통으로 넣어 버리고, 헤어 스타일이며, 의상이며 기괴한 유행을 쫓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샌드라에게 자신의 계산서를 떠맡기고 가버리는, 기본적으로 무례하고, 배려심 없고, 무능력하고, 지극히 개인주의에 입각해 있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등장해, 지나치며 가는 곳마다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재능을 가진 이 인물은 극중 수많은 사람들의 골칫거리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돈으로 빠뜨리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아주 엄청난 캐릭터이다. 이런 캐릭터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일상이라니, 평범할래야 평범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의미 있는 과학적 돌파구가 현저히 많이 나타날 테고, 늘 그렇듯 혼돈이 군림할 것이다. 나는 멋진 일들이 일어나리라 예측한다.

과학적인 돌파구는 대개 사소한 사건들이 촉발했다. 욕조 물이 넘치는 광경, 산들바람의 움직임, 계단 위에 놓인 발의 압력. 길고 고생스러운 연구만큼이나 행운과 우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거기서 코니 윌리스는 우리에게 '이전에는 아무도 연관시킬 생각을 하지 못한 발상들을 합치고, 전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관련성을 보는 것'이 비단 과학적인 돌파구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의 진부한 일상, 그 속의 따분한 반복과 관습 너머에 있는 무의미해 보이는 변수들에게 선을 그어 연결해보자.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혼돈이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을 벗어나 당신의 삶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낼지 누가 알겠는가.

멋진 일들이 생기리라.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내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코니 윌리스는 나의 평범한 일상을 다른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그냥 보는 대신 관찰하도록, 듣는 대신 경청하도록, 평범한 속에서 특별한 것을 주목하도록 이끌었다. 이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그냥 이 작품과 한 눈에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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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위해 산다
더글러스 프레스턴.링컨 차일드 지음, 신선해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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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살 기드온 크루는 눈 앞에서 아버지가 인질을 앞세워 농성을 하다 경찰에게 사살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8년 뒤, 그의 어머니는 죽어가는 병상에서 그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아버지가 실제로 했던 프로젝트의 내용과 그로 인해 벌였던 인질극이 그의 '실수'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스스로의 잘못으로 죽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음모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에다 어머니는 유언으로 그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해달라고 말한다.

"복수해다오."

"뭐라고요?"

"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해. 터커 그 인간을 박살 내다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놈에게 똑똑히 알려줘 그놈이 그렇게 된 이유를. 누가 그랬는지를."

"맙소사,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당황한 기드온은 황망히 주위를 둘러보며 숨죽여 속삭였다. "엄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요?"

다시 10년이 흐르고, 기드온은 눈부신 변장술과 남다른 두뇌 회전력으로 아버지의 결백을 밝혀내어 멋지게 복수에 성공한다. 엄청난 복수극이 될 줄 알았던 이야기는 시작 후 70여페이지 만에 간단히 마무리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아버지의 복수극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기드온은 복수극으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정부의 협력업체로부터 첩보원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최첨단 신무기 설계도를 미국으로 가져오고 있는 중국인 과학자의 뒤를 밟아, 가능한 빨리 설계도를 빼돌리라는 것이 그의 임무이다. 그것도 중국인 과학자가 공항에 도착하기 단 네 시간 전에 받은 임무이다. 당연히 기드온은 그 임무를 거절한다. 누구도 성공하지 못할 말도 안 되는 미션이라며, 자신은 이런 일을 해본 적도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공교롭게도 이 일의 적임자가 기드온 밖에 없다며 그의 화려했던 과거 이력에 대해 샅샅이 밝히고, 마지막으로 그가 시한부 신세라는 병원 자료를 내민다. 기드온 자신도 몰랐던 병명을 밝히면서. 아버지의 복수극을 벌이며 칼에 맞았던 상처를 치료한 병원에서 우연히 검사 과정에서 알아낸 병명은 동적맥기형으로 앞으로 길어야 1년을 살 수 있는, 누구도 손쓸 수 없는 불치병이라고 말이다.

남은 1년을 조국을 위해 일하고, 이번 일만 끝내면 엄청난 돈을 가지고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으리라는 그들의 제안은 유혹적이었고, 기드온은 얼결에 임무를 맡게 된다. 사실,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다는 것만큼 강한 무기가 또 어디있겠는가. 애초에 천재적인 실력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기드온이었지만, 위험천만한 임무에서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만큼 위험을 불사하게 만드는 동기도 없을 테니 그에겐 지금 세상 그 어떤 것도 무서울 게 없다. 게다가 이건 FBI, CIA, 정부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세계 경제 구도와 인류 전체의 명운을 바꿀만한 미션이 아닌가. 그렇게 음모는 점점 복잡해지고, 얽혀 있는 관련 인물들은 점점 늘어나고, 남아 있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미션이 거대해질 수록 기드온의 활약은 점점 더 화려하고 멋들어 진다. 속도감은 그 어떤 작품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시원시원하고, 스토리는 긴장감 넘치고, 캐릭터 또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괴짜 매력남이고, 이 작품은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다.

노딩 크레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놈은 애써 감추었지만, 기드온은 분명 놈의 두려움을 감지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놈도 인간이라는 증거일 뿐. 반면 기드온 자신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여기가 막바지다. 이 굴뚝에서 살아 나갈 방법은 없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이러거나 저러거나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그 생각이 오히려 묘한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노딩 크레인이 절대 알지 못하는 비밀무기를 손에 쥔 셈이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펜더개스트' 시리즈의 콤비 작가 더글러스 프레스턴 & 링컨 차일드가 만들어낸 새로운 주인공 기드온 크루는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또 다른 임무를 부여 받는다. 과연 이 시리즈가 또 이어져서 그에게 남아 있는 시한부 인생 또한 그의 또 다른 활약을 볼 수 있을 지도 기대가 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의 작품 목록에 Gideon's Sword 이후에 Gideon's Corpse 라는 작품도 있었으니 아마도 다음 임무까지는 이어질 테고, 그의 새로운 활약도 매우 궁금해진다.

사실 펜더개스트라는 캐릭터는 스릴러 역사상 정말 보다 보다 처음 보는 말도 안 되는 인물이었다. 외모는 순정만화 뺨치고, 키도 크고 날렵, 우아한데 강인한 체력까지 갖췄으며 부자에 매너는 기본인데다 변장과 임기응변에 능하고 상대를 끄는 능력마저 겸비한데다, 뛰어난 통찰력과 박식함까지 갖추었으니,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완벽한 캐릭터가 아닌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기드온 크루 역시 조금 색깔만 달리 했을 뿐 펜더개스트 못지 않다. 그래서 그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 저리 빠져 나가고, 목적을 이루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개연성이 조금 떨어진다거나, 너무 쉽게 가는 것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이 더글러스 프레스턴 & 링컨 차일드 콤비 만의 매력인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나치게 완벽해서 현실에서 있을 법하진 않지만, 허구의 이야기를 이보다 더 완벽하게 이끌고 갈 수는 없다 싶은 만큼의 캐릭터를 우리가 또 어디서 만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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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그라운드
S.L. 그레이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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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뉴스에서 지구 멸망의 날을 대비한 '초호화 지하 벙커 시설'이 화제라는 소식을 본 적이 있다. 무려 100억원대 규모의 이 건축물은 핵전쟁, 자연 재해 등 인류 멸망 상황을 대비한 지하 벙커 시설로 약 200명의 인원이 함께 생활할 수 있다고 했다. 개인용 거주 공간은 침실 및 거실 욕실 주방 시설이 있는 아파트먼트 형태로 설계되었고, 자체 공기 정화 시스템 및 의료 시설, 발전기, 컴퓨터가 비치된 사무실 등이 있어 장시간 생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벽한 공간처럼 보였다.

 

미사일 격납고를 개조한 지하 14층 아파트도 있었는데, 역시나 비상 발전 시설과 최첨단 보안 장치까지 갖추었고, 밖에 나가지 않고 취미 생활도 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최고 32억원의 비싼 가격에도 금새 동이 났다고 했다. 아마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초호화 지하 벙커 '성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하 14층 아파트를 모델로 이야기를 구상했으리라. 극중 등장하는 벙커는 8층짜리이지만, 구조와 기능이 거의 흡사하니 말이다.

고급 아파트를 지하에 파묻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정말로 그런 거니까.

더 자세히.

알았어...........밖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여. 그냥 해치 입구만 있는데 꼭 금고 문처럼 생겼어(시시해). 그리고 풍력발전용 터빈이 있고 창문 대신 LED화면이 있어(시시해). 잠수함 문짝 같은 문이랑(완전 시시해), 생체 인식 잠금 장치랑(이건 근사하고). 고급스러운 장식처럼 꾸며놨지......진짜 편집광적인 보안 장치야. 누가 여길 부수고 들어온다고 그러는지. 문명으로부터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이거든. 여긴 메인 주 한복판이야. 숲하고 들판밖에 없어. 무슨 중간계나 그런 데 와 있는 것 같아.

 

, 여기 질병, 지진, 핵폭발 등 어떤 재앙이 일어나도 안전한 지하 벙커가 등장한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모습을 보고 설명을 들었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누구도 초호화 지하 벙커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을 말하지는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인간은 욕망의 화신이고, 배려보다는 개인주의를 지향하며, 만약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하는 존재들이니, 애초에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지내야 한다면 그들간의 불화야 어느 정도 예상된 바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실제 존재하는 지하 벙커의 설계도와 시설이다.

아래 수영장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그곳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미국까지 빠르게 퍼지자, 일부 상류층 사람들은 초호화 생종형 지하 벙커인 성소로 몰려든다. 그들은 거액으로 성소의 주거권을 구매했기에, 함께 이동할 가족 외에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따라서 가족과 함께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황야에 위치한 그곳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선 그들의 거취를 알 수 없게 된다. 과연 이것은 그들에게 안전일까. 위협일까.

 

이야기는 6명의 등장인물 각자의 시점에서 교차되어 진행된다. 게임에 미쳐있는 한국인 소년 재이, 종교를 맹신하는 부모를 둔 소녀 지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얼결에 성소에 오게된 베이비시터 케이트, 편집광에 독설가인 아내를 애증하는 제임스,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인 전직 발레리나 트루니, 그리고 성소의 설계와 건설에 참여했던 프로젝트 매니저 윌이다. 8층짜리 지하 벙커에는 2층부터 5층까지 총 다섯 가족이 입실을 했고, 그 외에는 성소에 투자하고, 설립한 담당자 그레그가, 나머지 하나는 아픈 아내를 두고 그레그의 부탁으로 잠시 점검 차 들른 윌이 사용하고 있다. 그밖에 의료실과 수영장, 체육실, 냉장고 저장실, 정수시설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망각의 영혼 때문에 공기가 더 탁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삭막한 공허함이 남았다....시체들은 쌓여만 가고, 이제는 지금 이게 진짜로 일어난 일인지 판단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이것은 한 편의 발레일지도 모른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햄릿>이나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처럼,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 주지육림에서 무용수들은 몸부림치며 뛰어다니다가 결국 추락하고, 페인트가 튄 타이즈와 가는 팔다리의 집합체가 되어 흡족하게 쌓여가는. 그러나 머리가 깨진 소년에게는 어떠한 흡족함도 없고, 실수로 마지막 숨을 놓친 늙은 여자에게는 어떠한 미학적 아름다움도 없다.

 

각자의 개성과 집안 사정만큼이나 다양한 인물들이 갑자기 함께 살게 되었으므로, 당연히 여기저기 삐걱대는 불협화음이 들리기 시작했지만, 어찌되었든 이곳은 위험한 바깥 세상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라고들 여기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성소의 잠긴 문을 열 수 없게 되고, 음식과 물마저 오염되며,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의심하고 믿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 벌어지는 살인 사건들. 이제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비단 바깥에 있는 바이러스 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성소는 결코 안전하지 못한 장소로 돌변한다.

올초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신인작가의 소설을 할리우드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로 제작하겠다고 나서면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시나리오와 소설을 쓰는 새러 로츠와 편집자이면서 소설가인 루이스 그린버그가 공동 필명 'S. L. 그레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그들의 다섯 번째 소설이 그것이다. 이 작품 역시 지금 당장 영화화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감각적인 장면 전개와 밀도 있는 스토리 전개가 인상적이다. 게다가 실제로 미국에선 테러 공포로 인해 지하벙커가 인기가 있어 최상위층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집 앞마당 지하 5미터 지점에 설치하는 벙커가 보급되고 있다고 하니, 이 작품 속 상황은 언젠가 우리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 아닌가. 이 벙커는 집안에서 바로 이동이 가능하며, 핵폭발은 물론 생물학전, 화학전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공간으로 삼천 만원에서 오천 만원의 가격으로 2011년부터 보급되고 있다고 하는데, 굳이 재난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솔깃해지는 부분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 속 이야기가 더 와 닿고, 오싹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은 실재 상황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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