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서 온갖 가능성이 폭발했다.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던 권태는 이제 불필요해진 것 같았다.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하며 점점
넓어지기만 하는 새로운 루비콘 강을 철벅철벅 금욕적으로 건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의 삶이 죽은 것처럼 지루한들 무슨 문제겠는가? 새로운 삶이 또 있는데, 만세!
정신과의사 루크 라인하트는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와 자신의 심리 치료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감정들이 쌓여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솟았고 눈 앞에 보이는 주사위를 보며 생각한다. 만약 저 주사위 윗면이 1이라면 아래층으로 내려가 동료의 부인을
강간하자고. 주사위는
던져진다. 1이었다. 처음엔
주사위의 결정에 충격을 받아 잠시 꼼짝도 못했지만,
이내 침실에 있는 아내에게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선언하고 아래 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동료의
아내에게 말한다. "당신을
강간하려고 내려왔어요." 대체, 이 남자
제정신인 걸까? 주사위
눈이 1이 나올 확률은
겨우 6분의 1에
불과했다. 게다가 주사위가 그
순간 자신의 눈에 띌 확률은 아마도 100만분의 1쯤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강간을
저지른 것은 운명의 지시임이 분명했고, 고로 자신은 무죄라고 생각하는 남자라니.
치어리더 출신 아내와 귀여운 두 아이를 가진 가장이자 정신과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멀쩡한 남자의 삶이 주사위로 인해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에는 주사위가
그의 삶에 그리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저 정상적인 자신이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대안들을 선택할 때 주사위를 이용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주사위가
그의 환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상황은 조금 더 걷잡을 수 없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그 동안 정신과의사로서 그는 이해심
깊고, 너그럽고,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과 잔인성과 헛소리를 받아주는 성자처럼 굴어왔다.
그런데 주사위를 핑계로 환자들의 초라한 약점이 눈에 띌 때마다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더니, 그 동안 억눌려온
충동을 발산하며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는 주사위를 한 번 던질 때마다 자신이 새로 태어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 위대한 망할 놈의 기계 사회는 우리를 모두
햄스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를 보지 못해요.
오로지 한 가지 역할만 할 수 있는 배우라니, 그런 헛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무작위 인간, 주사위족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주사위족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주사위족이 생겨날
겁니다."
루크는 수동적인 태도와 자신만의 공상에 빠져 있는 환자에게 당신은 강간이나 절도나 살인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는 진료실
밖에 새로온 접수원이 예쁘지 않냐고. 그 여자를 강간하라고 시킨다. 사실 그 직원은 중년의 콜걸로 루크가 그 환자와 데이트를 시키기 위해 일부러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런 식으로 벌어지는 이해하기 힘든 진료와 그가
여러 사람들과 벌이는 성에 대한 실험들, 스스로를 주사위맨이라 칭하면서 마치 주사위 인생을 종교라도 되는 식으로 환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믿도록 만드는 이 작품의
스토리를 이해하거나 공감하기는 다소 어렵다.
게다가 개인의 작은 일탈로 시작했던 루크의 '주사위'가 후반부로 갈수록 각지에 주사위 센터가 설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사위족이 되어
가는 식으로 일종의 종교처럼 퍼져나가는 단계에 이르면,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잣대에 대한 기준마저 모호해지게 된다. 과연 이들이 벌이는, 사회적 통념상 허락되지 못할 행위나 비도적적이고
무질서한 행동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이해해야 할 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작품이
바로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소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은 우리 삶의 방향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기도
하니, 일상의 그 수많은
선택들이 쌓여 나라는 한 인간을 만든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이 작품은 '컬트 소설'임이 분명하다.
바로 그 선택이라는 것의 주체를 인간이 아닌 주사위를 통한 무작위성의 우연에 기대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주사위 눈
개수에 맞춰 여섯 가지 선택지를 쓰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만,
최종 결정을 해주는 것은 주사위를 통한 랜덤의 우연이고, 그 결과를 행동으로 옮겨 그것을 운명으로 만드는
것은 또 자신의 의지이다. 모든 괴로운 일을 주사위의 손에 맡겨서 주사위가 강간을 지시하면 강간하고, 금욕을 지시하면 금욕하고, 낯선 나라로 날아가라고 하면 그곳으로 간다. 과연 이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이런 작품이 세계 60개국에 번역되어 2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출간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20세기
최고의 컬트소설’로 추앙 받는
이 현상이야말로 사람들이 주사위족이 되어 간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상하지만 색다르고,
단순하지만 도발적이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강렬한 작품이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권태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극중 루크 처럼
당신의 삶도 송두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할 수도 있다.
금기를 깨트리는 것이 처음에야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