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지은 집 -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
강인숙 지음 / 열림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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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사 년이 된 맞벌이 부부가 국민주택 수준의 집을 마련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는 것은 그 무렵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때는 온 국민이 모두 가난한, 절대빈곤의 시기였고 그중에서도 문인들은 더 가난했다.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서 대부분의 문인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용 집필실이 있는 작가들이 많은 요즘 문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처절한 빈곤이었다. 글을 쓰라고 제공하는 작가의 집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던 시기의 이야기다.            p.182

 

빈손으로 시작해 원하는 집을 찾기까지 십육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동갑내기 부부의 주택 편련의 연대기를 그리고 있는 책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들어가 살 장소, 바로 집일 것이다. 이 부부에게 집이 필요한 이유는 거주의 목적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글을 쓰는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각각의 서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어령, 강인숙, 두 사람 모두 대학교수였고 글 쓰는 사람이었기에 그들 부부의 집에는 두 개의 서재가 필수적이었다. 특히 강의 준비나 평론, 논문 등은 책을 많이 펼쳐 놓고 써야 하는 글이어서 다른 곳에서 쓰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혼 후 한 동안은 단칸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구석에서 밤을 새워 글을 쓰면, 나머지 가족은 불빛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들이 서재가 두 개인 집에 장착하기까지 그들은 집 때문에 항상 쪼들리는 살림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 책에는 1958년 성북동 골짜기의 단칸방에서 시작해 1974년 마침내 평창동 집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과 영인문학관을 설립해서 운영 중인 현재가 모두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공간을 거치며 살아 왔던 부부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 들어 있다. 청파동, 한강로, 신당동, 성북동, 그리고 평창동에 이르는 시간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그들 부부가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마침내 원하는 크기의 집을 짓는 데 성공한 것은, 1974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사람도 집도 하나도 없는 텅 빈 산 중턱에 외딴집을 지었다. 아이가 셋이었고, 부부 각자를 위한 서재를 위해 방이 아주 많은 큰 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혈족들을 떠나보내는 와중에도, 눈앞에 다가와 있는 삶은 우리에게 '오늘의 과업'을 수행할 것을 강요한다. 현실은 슬프다고 봐주는 법이 없다. 빅토르 위고의 말대로 "오늘의 과제는 싸우는 것" 이어서,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면 곧 그 싸움터로 돌아가야 한다. 대학 교수들은 부모님 상을 당해도 닷새 후부터 강의를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요, 현실이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처럼 결국 털고 일어나 집짓기를 마무리했다. 어쩌면 그 바쁜 일정 덕에 그 기간을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p.380

 

이어령, 강인숙 부부가 십육 년 동안 살아온 여덟 곳의 집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도배지 한 장만 새로 붙인 방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하고, 머리맡에 높은 어항이 얼어붙어 있을 정도로 방이 냉골이었던 날도 있었고, 학교 선생으로 일하며 받는 보너스가 이만 오천 원이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4.19와 5.16을 동네 한복판에서 목도했던 순간들과 박경리 선생, 김지하 시인 등 문인들과 교류하던 시간과 대가족이 북적이며 살아온 풍경들도 페이지 가득 펼쳐진다.

 

이들 부부가 마흔한 살부터 일흔넷이 되는 2007년까지 삼십삼 년의 세월을 산 곳은 평창동 집이다. 세 아이의 결혼식도, 여덟 손자의 돌잔치도 그 집에서 치렀고, 열여섯 명의 대가족이 되어 북적거리며 삶의 전성기를 보낸 곳이다. 그러다가 부부 둘만 남는 세월이 온다.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하다 보니 신혼초처럼 그 넓은 집에서 둘이만 살게 된 것이다. 부부는 슬프고 외로운 마음을 공부하고 글 쓰는 일로 메꾸어 갔다고 한다. 하지만 집이 너무 커서 유지하는 일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고, 결국 살던 집을 허물고 문학관을 만들 준비를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영인문학관이다. 2001년 개관한 영인문학관은 해마다 2~3회의 기획전을 열고 있으며, 이어령 선생이 13년간 '문학사상'을 하면서 수집한 원고, 초상화, 편지 외에 문인, 화가의 부채, 서화, 애장품, 문방사우 등을 소장품으로 가지고 있다. 근대문학의 성숙기인 70~80년대 작가들의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영인문학관의 특징이기도 하다. 글 쓰는 부부가 수십 년에 걸쳐 집을 마련하고, 그것이 결국 근대문학의 자료를 소장한 문학관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담백하면서도, 어딘가 뭉클한 여운을 남겨 주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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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낼 수 있다
보도 섀퍼 지음, 박성원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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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했다. "자네가 어떤 사람에게 내재하는 무언가를 알아보고 인정해주면 그것은 생명을 얻고 현실이 된다네. 자네가 그것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를 바라보듯이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이 지내야 해. 우리는 우리 안의 선한 것들을 깨워 일으켜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과 함께 지내야 해. 그러면 우리 안의 아름답고 선한 것들이 깨어나 발현된다네.      p.134

 

세계 최고의 머니 코치이자 경영 컨설턴트로 손꼽히는 보도 섀퍼는 ‘인생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 성공한 자수성가형 리더’이다. 26세에 고액의 채무를 지어 파산한 상태였던 그를 구한 것은 코치의 한마디였다. 그 말 덕분에 좌절과 낙담에서 빠져 나와 4년 후인 30세에 재정적 자유를 이루게 된다. 그는 어떻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러한 자신의 인생을 토대로 쓴 이 책은 경제적 자유와 정서적 자유를 이룩할 수 있는, 그걸 토대로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인생을 살던 한 남자, 카를은 어느 날 일어난 자동차 사고를 계기로 인생을 바꿔 줄 '멘토' 마크를 만나게 된다. 특히나 '자의식'을 구축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는데, 보도 섀퍼는 ‘나는 내가 마음에 든다’, ‘나는 잘하고 있다’, ‘나는 해낼 수 있다’는 내적 확신을 가지는 것,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바로 자의식이라고 말한다. 마크는 카를에게 묻는다. '자네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가? 자네는 자신이 자랑스러운가' 카를은 대답한다. '그저 그래요'라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난 내가 너무도 자랑스럽고, 지금 모습 그대로 만족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질문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지, 자신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지,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는지 여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마크는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카를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너의 일부야. 나는 네가 모든 것을 준비해놓고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나타나지. 나는 너의 일부야. '난 해낼 수 있어'라고 확신하는 너의 일부야. 너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자문하지. 너의 삶 전체가 너를 이 순간으로 이끌었어. 너는 지난 몇 달 동안 정말 치열하게 연습해 왔지. 그렇게 연습한 결과 이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고, '난 해낼 수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지.        p.306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카를은 대학 공부가 전혀 즐겁지 않았고, 매우 힘겨웠다. 그의 부모님은 카를이 자신들처럼 변호사가 되길 기대했지만, 카를은 읽고 쓰기를 매우 힘들어했고, 우등생이 아니었다. 카를은 여태껏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아주 우연히 마크를 만나게 된 뒤, 그와 함께 자의식 아카데미에 가게 된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조차 자의식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그는 점차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타인들에 의한 자아상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나의 자아상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이 책은 자존감이 낮고, 자의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청년이 어떻게 꿈을 실현하고 성공하는지에 대한 여정을 소설처럼 그려내고 있다. '나는 소중한 존재다. 나는 환영받는 존재다. 나는 스스로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자기 존중, 즉 자존감을 발견하고, 단단하게 수립해가는 과정은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사고법과 연습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자존감이 낮아서 고민이라면,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그리고 내가 계획하는 모든 바를 이루고, 나는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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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그리면 거짓이 된다
아야사키 슌 지음, 이희정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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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토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어?"
"없어요. 어차피 똑같은 인생을 걸어갈 뿐이니 되풀이하는 의미가 없어요."
그도 역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약 20년 인생에서 아무런 후회가 없다는 걸까. 하루토다운 대답이기는 했지만 속인은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틀림없이 나는 내가 고르지 않았던 무수한 선택을 놓고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다르다. 지금의 자신에게 100퍼센트 납득하고 있다.        p.104

 

나는 어릴 때 그리던 인생을 살아왔을까. 만약 딱 한 번, 원하는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몇 살의 나에 시계바늘을 맞출까. 이룰 수 있었던 꿈, 이루지 못한 꿈... 바꾸고 싶은 과거의 한 순간들.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누구나 자신이 고르지 않았던 무수한 선택을 놓고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딱히 다시 하고 싶은 게 없다고, 살아온 인생에 아무런 후회도,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없다고 말하는 두 사람이 있다. 지금의 자신에게 100퍼센트 납득하고 있어, 뭐든지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해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천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천재뿐, 이 두 사람은 타고난 재능이 넘쳤던 천재 소년, 소녀였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천재가 등장한다. 생활 태도를 포함해 모든 점에서 서투르기 짝이 없었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은 망설임 없는 터치로 거침없이 그리는 다키모토 도코. 그리고 너무도 세밀하고 정밀해서 마치 그림이 아닌 사진과 같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또 한 명의 천재 하루토. 집안 형편이 어려운 도코는 일곱 살에 처음으로 세키나 미카가 운영하는 미술 학원에 온다. 도코의 엄마도, 아빠도 모두 화가를 지망했던 터라 딸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것이다. 도코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하고, 화를 못 참아 어느 학원을 가더라도 며칠 만에 문제를 일으켜 나오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미카는 도코에게 맞춰 여러가지 배려를 해줬고, 결국 그녀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곁에서 함께 하게 된다. 하루토는 동생인 고즈에와 함께 학원을 방문했다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무렵부터 미카의 아틀리에에 등록한다. 도저히 열한 살 소년이 그릴 법한 수준이 아닌 하루토의 그림을 보며 미카는 도코에 비견할 만한 천재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도코의 작품이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반면, 하루토의 작품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히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차이가 있었다.

 

 

 

"널 그리면 거짓이 돼."
이윽고 온화한 말투로 하루토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하루토의 본심일까. 역시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괜찮아. 거짓이라도. 하루토가 그린 그림이라면 나한테는 거짓이 아니니까."
"넌 날 너무 지나치게 믿어. 언젠가 크게 다칠 거야."
"괜찮아. 하루토는 다정하니까 아파도 아무렇지 않아."        p.332

 

도코와 하루토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스승 세키네 미카 역시 어린 시절부터 특출한 재능을 가졌다는 소리를 들어온 미술가다. 스스로도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미카는 예술 분야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자신의 재능이 생각했던 것보다 독보적인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현실과 타협한 미카는 결혼이라는 선택도 버리고, 화가로서의 인생도 포기하는 대신, 제자를 가르치는 미술 학원을 운영하기로 한다. 그리고 줄곧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바란다. 그러다 다키모토 도코와 난조 하루토라는 뛰어난 재능의 천재 두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후로 그녀의 인생은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재능을 지켜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너무도 다르지만 서로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주고 받는 두 천재와 그들을 지켜보고, 도와주고, 질투하고, 함께 걸어가는 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아야사키 슌은 국내에 라이트 노벨 작품들이 주로 번역되어 있는 작가로 연애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번 작품은 '연애 없는 사랑이야기'이자 압도적인 재능의 천재들이 빚어내는 청춘 예술 소설이다. 오글거리는 연애 소설은 딱 질색이라면, 색다른 사랑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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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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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는 그 책방에 오래 머물렀다. 어떤 도시를 그곳에 있는 책을 통해 알아가는 것, 이는 그가 언제나 해오던 일이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처음 가본 외국 도시는 런던이었다. 칼레로 돌아오는 배에서, 지난 사흘 동안 유스호스텔과 대영박물관과 무수히 많은 책방과 그 주변만 빼고는 이 도시를 거의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야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잖아!"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넌 여기서 아주 많은 것을 놓쳤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 책들은 다른 곳이 아닌 여기에 있잖아.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p.94~95

 

때로 인생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저 매일을 성실하게, 눈 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멈추고 뒤돌아 보면 깨닫게 된다. 언젠가 나는 이렇게 살거야,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하겠지, 해보고 싶었던 것들, 시간이 없어 미뤘던 것들을 배우고 해볼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들이 내 삶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내가 꿈꾸던 많은 것들 없이 내 인생이 앞으로도 계속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느끼는 순간, 그 동안 쌓아온 모든 삶을 박차고 일어나 다른 생을 선택하기 위해 훌쩍 떠날 수 있을까.

 

15년 만에 다시 이 작품을 만나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헌학 교사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매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되는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도시로 향한다. 우연히 포르투갈어로 적인 책 속에서 발견한 문장 때문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의 긴 여정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문장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보여준다. 충동적으로 수업을 중단하고 학교를 뛰쳐나와 낯선 도시로 가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언어를 읽기 위해 어학원을 다니고, 사전을 뒤져가며 작가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그레고리우스는 또 다른 자기 자신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흘러간 역사를 관통하는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그레고리우스는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p.339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처음 읽었던 것은 두 권으로 출간되었던 2007년이다. 이번에 나온 것은 세 번째 개정판으로 합본이라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양장본이다. 이미 많이들 읽어 봤을 만한 작품이라 현대의 고전 같은 느낌도 드는데, 이번 개정판은 감각적이고 무게감 있는 표지로 새롭게 단장했고 본문의 시작부터 끝까지 세심히 살펴 오늘의 감수성으로 다듬었기에 새롭게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자신의 본명인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인문, 철학서도 저술했는데 국내에도 여러 권 번역 소개되어 있다. 소설을 집필할 때는 두 명의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과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의 이름을 조합한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을 사용하한다. 작가의 최근작인 소설 《언어의 무게Das Gewicht der Worte》도 비채에서 나올 예정이다.

 

이 작품을 다시 읽기 전에는 세세한 내용들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무려 15년 전에 읽었던 작품이니 말이다. 다만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헌학 교사가 어느 날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여자를 구한 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타게 된다는 서두의 이야기만은 여전히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반복되는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켜켜이 쌓인 시간과 경험으로 알게 된 지금, 이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불안함과 혼란스러움,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과 철학적 사유, 역사와 미스터리를 넘나드는 비밀스러운 매력이 가득한 작품이다. 온갖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조용하고 우아하며, 고풍스럽게 아름다워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책을 읽고, 낯선 곳을 여행하고, 흘러가는 삶을 붙잡고 사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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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버지니아 울프 -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수사네 쿠렌달 지음, 이상희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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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보통의 독자>에서 이렇게 썼다.
누군가 우리에게 지금 영국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작품이 100년 뒤에도 남아 있을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거기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어떤 책들은 그럴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책들은 그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p.68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남성 중심 사회에 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졌고,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이기도 했으며, 출판사를 운영하며 당대의 작가들을 발굴했고, 모더니즘 소설의 실험적인 작가로서 비평가와 독자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부모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딸이었으며, 만성적인 정신 분열증을 평생 겪었고, 결국 스스로 강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평소에 버지니아는 별일 없는 한 매일같이 혼자 산책을 나서곤 했다. 그날 남편과 친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거실에 두고 집을 나섰을 때도, 이웃 주민 몇 명이 그녀를 목격했지만 평소처럼 산책 중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녀가 큼직한 돌멩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갈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강물로 뛰어들어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남긴 글은 여전히 당대의 현실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빛나고 있다.

 

이 작품은 독일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사네 쿠란델이 감각적인 수채 일러스트를 통해 그려낸 버지니아 울프의 그래픽 노블 버전 전기이다. 만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형적인 프레임을 벗어나 이미지와 텍스트가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의식의 흐름'대로 읽어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발전시킨 새로운 서술 기법처럼 말이다.

 

보통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때, 침울하고, 핏기 없는 안색의 신경쇠약증 환자 같은 이미지를 먼저 생각하게 마련인데, 이 책의 아름다운 수채화들은 그 어둡고 우울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 더욱 의미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상징>에서 이렇게 썼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그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다. 나는 머리를 손질하지 않는다. 손톱도 깎지 않는다. 대체 왜 나는 이 모든 것을 쓰는 것일까? 왜 말도 안 되는 것을 쓰는 것인가?
나중에 그녀는 원고에서 이 구절을 삭제했다.         p.120

 

버지니아 울프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여름이면 그들은 콘월 지방의 세인트이브스의 톨랜드 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버지니아의 유년 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섯 살이던 버지니아는 그곳에서 이부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경험으로 거울에 대항 공포를 가지게 된다. 열세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고 슬픔에 잠긴 가족들 사이에서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는 그녀에게 다들 정상이 아니라는 말을 해댔다.

 

이 작품은 그렇게 버지니아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와의 애증 관계로 고통 받았던 10대 시절과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던 20대를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마침내 글을 쓰게 되고, 독학으로 지성을 쌓아 젊은 지식인들의 모임인 블룸즈버리 그룹에서 그들과 교류하고, 레너드 울프와의 결혼 생활과 출판사를 만들어 남편과 책들을 출간하던 시절을 거쳐 생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특히나 버지니아 울프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 내밀한 일기와 에세이, 편지 속 문장들을 다양하게 인용하며 그녀의 삶을 그려내고 있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수사네 쿠렌달은 버지니아 울프가 무언가를 읽거나 글을 쓰는 장면들이 유달리 많이 그렸다. 아홉 살 때 집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담아 잡지를 만들었던 일, 다양한 장소에서 작품을 쓰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들, 킹스칼리지에서 그리스어 수업을 듣는 장면과 헨리 제임스의 작품에 대해 비판적인 평론을 쓰는 장면 등등... 끊임없이 뭔가를 계속 쓰는 삶이 책 속에 가득 담겨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과 '매년 500파운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자기만의 방>이 출간된 것은 1929년이다. 그로부터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성들의 삶은 과연 자유로워졌을까. 여성들의 위상이야 확실히 당시보다는 나아졌겠지만, 여전히 가부장제와 불평등, 억압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나 기혼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경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며, 매년 500파운드에 해당되는 금전적인 지원 역시 전무할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의 목소리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를 나타내는 구호처럼 당대의 현실 속에 살아 있다. 이는 우리가 지금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수채 일러스트를 통해 재구성된 버지니아 울프의 계속 쓰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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