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사라진 밤
루이즈 젠슨 지음, 정영은 옮김 / 마카롱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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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거울 속 여자의 긴 금발 머리도 흔들렸다. 거울 속의 나는 나인데 내가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전혀 달랐다. 나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었던가?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의 엔진 소리도,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도, 방금 손을 씻을 때 사용한 비누의 라즈베리 향도 모두 너무 생생했다. 하지만 이게 현실일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p.20

 

뭔가 잘못됐다.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깬 앨리슨은 그 생각부터 들었다. 두통으로 인해 정신이 멍하고 머리가 울렸으며, 방 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게다가 기억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공백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지? 그녀는 남편인 매트와 별거 중인 상태였고, 친구인 크리시와 줄리아의 권유로 데이트 앱에 가입해 누군가를 만나러 갔었다. 전날 밤 데이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함께 살고 있는 크리시라면 뭔가 알지 않을까 싶었는데 집에 들어오지 않은 듯 했다. 그런데 상처를 살피기 위해 거울을 마주한 앨리슨은 혼란과 공포에 빠지고 만다.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던 거다. 분명 거울 속의 나는 내가 분명한데, 자신이 기억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병원에 간 앨리슨에게 의사는 뇌출혈이 조금 있었고, 인간의 안면인식 능력을 관장하는 신경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안면인식장애는 딱히 치료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시적인 현상일지 다시 얼굴을 인식하는 능력이 돌아올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다면, 자신이 만났던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그를 알아볼 방법이 없다는 거다. 만약 정말 데이트앱으로 만난 이완이라는 남자가 그녀를 공격한 거라면,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다시는 안전해질 수 없다는 얘기였다. 혼란에 빠진 앨리슨 앞으로 협박 편지가 도착한다. ‘데이트는 좋았어? 이 나쁜 년아. 경찰에는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손에는 피가 묻었거든.’ 그럼에도 그녀는 경찰에 신고를 할 생각은 없었다. 과거에 믿었던 경찰들로부터 가족이 위험으로 내몰렸던 경험이 있어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 밤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이모는 진실의 무게에 눌려 쓰러졌다. 이모도 우리가 겪은 그 많은 아픔을 견디기 위해 나처럼 오랜 세월 기억을 덧씌웠을까? 하지만 비밀은 아무리 덮어두려 해도 언젠가 드러난다. 추악하고 어두운 비밀은 어떻게든 밝혀져 우리를 파괴한다. 나는 절벽 앞 다 무너져가는 집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앞에서 소풍을 즐기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을 지탱하고 있던 그 작은 선의의 거짓말들. 서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거짓말들. 진실이 너무나 추악해서, 너무나 잔인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거짓말들.     p.390~391

 

안면인식장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한데, 자신에게 안면인식장애가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얼굴을 잘 외우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별로 닮지 않은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몇 년 전 방송에서도 한 연예인이 안면인식장애를 고백하면서, 1시간 넘게 이야기를 해도 다시 만났을 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털어 놓은 적이 있다. 그 밖에도 일상에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게 어렵다고 말한 연예인들이 꽤 많을 정도로, 이는 생각보다 흔할 수도 있는 장애이다. 반면 외부의 충격이나 두부 손상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고 한다. 이는 영구적인 손상일 가능성이 커서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앨리슨이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후천적 안면인식장애이다. 티비 속 유명인들은 물론, 가족, 친구, 그리고 자신의 얼굴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협박하고, 위협하고 있는 그 남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 오싹해졌다.

 

이야기는 안면인식장애를 겪게 된 여성의 심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폭력과 스토킹, 불법 촬영, 협박 등 현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범죄로 인한 공포와 범인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알아볼 수 없게 된 안면인식장애라는 특수성이 자아내는 오싹한 긴장감이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준다. 몇몇 복선들로 인해 중반 이후에 범인의 정체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데, 그런 독자들의 기대를 배신하듯이 작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단기기억상실증과 안면인식장애를 가지게 된 여성 주인공을 둘러싼 매우 현실적인 범죄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점차 가족 문제와 사회적 문제까지 포괄하며 묵직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지루할 틈 없이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는 심리 스릴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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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를 읽는 시간 - 신비한 원소 사전
김병민 지음, 장홍제 감수 / 동아시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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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들여다보는 휴대전화 화면을 살펴보지요. 단단하고 투명한 액정은 규소(Si)로 이루어진 사파이어 강화 유리이고, 그 아래에 화면을 구성하는 물질은 탄소를 기반으로 다른 원소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전도성 유기화합물입니다. 물질 안에서 전자의 이동으로 다양한 빛이 방출되고, 우리는 천연색의 화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면을 터치해 조절할 수 있는 기능에는 인듐(In)과 주석(Sn)이 원료로 사용됩니다. 휴대전화의 진동 기능은 네오디뮴(Nd) 자석이 들어 있는 작은 모터가 진동하기 때문이지요.    p.10~11

 

사람의 몸은 원소는 탄소, 수소, 산소, 질소 등 60가지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체는 이 원소들을 중심으로 대사를 하며 생명을 유지한다. 우리가 매일 들여다보는 휴대전화의 화면, 배터리 등 역시 규소, 인듐, 주석, 네요디뮴 등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플라스틱 등 물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세상은 수많은 물질로 가득 차 있는데, 원자를 기준으로 보면 118개의 원소만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을 만드는 재료는 우주가 생겨났을 때 모두 만들어졌고, 이 재료들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변하며 물질을 구성하고 우주 안에서 순환한다.

 

 

이 책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인 118개의 원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헬리베붕탄질산플네나마알규인황염아칼칼. 주기율표 1번부터 20번까지 맨 앞 글자만을 떼서 외우는 이 방식은 지난 수십 년 간 변하지 않았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주기율표를 외웠던 기억이 나는데,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암기를 하고 있다고 하니 재미있게 느껴진다.

 

저자는 주기율표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줄곧 느껴왔다고 하는데, 이는 주기율표를 처음 접할 때, 제대로 된 방식으로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주기율표를 구성하는 원리의 아름다움과 주기율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나 이 책은 겉모습부터 여타의 다른 책들과는 뚜렷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누드사철 방식으로 제본되어 시원하게 잘 펴지는데다, 글 양쪽으로 여백이 넓어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공부를 하기에 딱 좋다. 구성도 굉장히 독특한데, 표지 앞면을 1부에 해당하는 <주기율표를 읽는 시간>으로, 표지 뒷면은 2부에 해당되는 <신비한 원소 사전>으로 되어 있다. 두 권의 책이 하나로 되어 있는 듯한 느낌으로, 각각의 표지에 맞춰 앞으로 읽고, 뒤로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주기율표를 굳이 건축물에 빗대어 이야기한 이유는 주기율표에 배치된 원소들의 위치가 결국 원소의 특별한 특징과 성질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질을 원자 번호별로 전부 외울 수는 없습니다. 주기율표에는 이런 성질이 잘 정돈되어 원소들이 배치되어 있지요. 그래서 원소가 주기율표에 자리 잡은 지리적 위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건축물에 대입하면 주기율표의 구조가 쉽께 떠오르고, 주기율표가 좀 더 친근해지리라 생각합니다.     p.113

 

1부에서는 물질의 비밀과 원소와의 관계에서 시작해, 원자와 원소라고 하는 개념의 발견과 주기율표가 서서히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려준다. 쉽게 설명하고, 천천히 훑어나가는 과정이라 어렵지 않게 주기율표와 화학의 매력에 대해 느낄 수 있다. 2부에서는 118개 각 원소의 개괄적인 특성을 소개하면서, 각 원소에 얽힌 다양한 역사상의 에피소드 혹은 쓰임새를 소개하고 있다. 다양한 컬러 이미지와 함께 사전 식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 잘 읽히고,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읽기에도 좋다.

 

 

책을 감싸고 있는 두툼한 띠지를 펼치면 주기율표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를 포스터처럼 크게 활용할 수 있고, 그 뒷면에는 시한 교수가 1976년에 발표한 주기율표, 벤파이가 1964년에 발표한 주기율표, 하이드가 1975년에 발표한 주기율표도 만날 수 있다. 주기율표의 모습이 다양하게 존재해왔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색다른 모양으로 만들어진 주기율표들을 만나게 되니 매우 흥미로웠다. 책 구매 시 받을 수 있는 빅 사이즈의 대형 주기율표 포스터도 있으니, 띠지에 수록된 것과 함께 주기율표를 두 개나 얻게 되는 셈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주기율표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일 것이다. 저자는 '주기율표는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알려주는 주기율표를 읽어내는 새로운 시선은 주기율표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실험실이나 교과서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주기율표는 이 복잡한 세상과 우주를 이해할 수 있게끔 우리를 인도해주는 지도이다. 수백 년에 걸쳐 인간이 하나씩 쌓아 올려온 노력의 결정체이기도 한 주기율표의 네모진 칸 하나하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는 주기율표의 원리와 거기 내포된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하는 주기율표 ‘덕후’로서 그 애정을 고스란히 이 책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화학이나 주기율표에 대해서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조금은 그 아름다움에 대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세상이 왜 그렇게 작동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복잡한 표에 숨어 있는 화학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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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사냥꾼 - 집착과 욕망 그리고 지구 최고의 전리품을 얻기 위한 모험
페이지 윌리엄스 지음, 전행선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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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은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척추동물 전문 고생물학자인 토머스 홀츠가 즐겨 말했듯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룡이다. 공룡은 치명적인 죽음과 강인한 생명력을 둘 다 상징했다.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공룡들은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공룡은 1억 6,600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하다가 대량 멸종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6,600만 년 후에는 문화적으로 재기해 명성을 누리고 있다(여전히 새들이 남아 있으니, 전부는 아니고 거의 멸종한 것이다).    p.29

 

2012년 뉴욕 시의 경매장에 100만 달러를 넘어선 가격에 최종 낙찰된 공룡화석이 등장했다. 몽골에서 최초로 발굴된 이 공룡화석은 높이 2.4미터, 길이 7.3미터에 이르렀으며,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사촌뻘 되는, 거의 완전한 화석이었다. 티라노사우루스 바타르, 일명 아시아의 티라노라 불리는 타르보사우르스였다. 이 공룡 뼈를 경매에 내놓은 건 미국 시민이자 전직 수영선수였던 서른여덟 살 남자였고, 그는 이 일로 최악의 시련에 부딪치게 된다. 한 고생물학자가 이 공룡의 출토 지역이 자신이 태어난 몽골의 고비 사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후 공룡화석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몽골과 미국의 국제분쟁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결국 공룡화석의 판매자는 미국 법정에 서게 된다.

 

이 책의 저자인 페이지 윌리엄스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일어나기 힘든 전대미문의 ‘공룡화석’ 밀수 사건의 조사를 위해 10여 년의 시간을 쏟아 부었다. 이 책은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이름도 전혀 바꾸지 않았고, 새롭게 끼워 넣은 정보도 없는, 완전한 실화이다. 공룡화석 경매 사건을 다루는 논픽션으로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자연사 수집품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과 공룡을 둘러싼 과학과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다양한 이들의 너무 다른 시각에 대한 이야기도 대단히 흥미롭다. 과연 화석은 발굴자의 것인가, 인류 공동의 유산인가? 수천만 년 전 이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화석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발굴자? 땅주인? 고생물학자? 아니면 인류 공공의 것일까?

 

 

새로운 법은 어떤 측면에서 고생물학자와 직업적 화석사냥꾼 양측을 다 화나게 했다. 내무장관의 서면 허가 없이는 연방 재산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들도 자신들이 화석을 발굴한 장소를 대중에 공개할 수 없었다. 이 법안은 밀렵꾼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열린 과학이라는 개념에는 역행했다... 어쨌든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듯했다. 정책 입안자들은 마치 황금이라도 찾아다니듯이 마구잡이로 땅만 파헤치는 부패한 인간들에게는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서, 평판 좋은 상업적 화석사냥꾼들에게는 설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고심했다.   p.290~291

 

화석을 찾아 다니고 탐내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 그룹, 즉 고생물학자, 수집가, 상업적인 화석사냥꾼이다. 대부분의 화석 상인은 자신들이 화석을 수집하고 판매함으로써 자칫 침식되어 사라져버렸을 유물을 구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화석의 거래를 금지함으로써 특정 유형의 화석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생물학자들은 과학의 근간이 되는 대상을 옹호했고, 상업적인 화석사냥꾼들은 그들의 거래를 옹호한다. 거래상들은 많은 경험과 현장 지식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고생물학자가 아니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고생물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생물학자와 직업적 화석사냥꾼은 극명하게 상반된 주장을 펼쳐왔지만 말이다. 좀처럼 해결이 힘들 것 같은 그 첨예한 갈등이 이 작품의 가장 드라마틱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공룡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호기심거리나 어린 시절에만 열광하는 흥미거리 내지는 화석으로만 존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이 책을 통해서 공룡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화석이나 공룡에 문외한이었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공룡 화석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게 해줄 것이고, 공룡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무조건 권하고 싶은, 너무도 매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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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요스트 더프리스 지음, 금경숙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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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는 내 손에서 자발없이 교태를 부리듯 떨었고,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는 까닭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그에게 할 말과 그를 도발할 방도를 짜 놓았으나, 정작 내 안에서는 끓기 시작할 때 부글거리는 우유처럼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었다. 분노가 아니라면 불신의 감정이었다 -- 아니 어쨌거나 나에 대한 분노였다. 모든 가능성을 따져 보았으면서도 그가 여기에 실제로 있을 가능성은 빼 놓았다는 것, 그 역시 선제공격능력이 있다는 것, 전화선은 양방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라는 존재의 현실성.    p.117~118

 

이야기의 화자는 잡지 <몽유병자>의 편집장인 프리소 더포스로 그는 히틀러 연구학의 독보적인 권위자 요시프 브리크의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프리소에게 브리크는 독자가 원하는 어떤 주제라도 두 달에 한 번씩 꾸준하게 5천 자 에세이를 써 주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하던 일을 다 제쳐 놓고 그에게 온전히 집중하고는 했다. 그들은 함께 여행을 가고, 가족의 생일날에 동행하고, 그가 쓴 글을 제일 먼저 읽고 비판과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어느 날 브리크는 칠레에서 이름이 히틀러인 남자를 만났는데, 좋은 기삿감이 될 수 있으니 함께 칠레에 가보라고 제안을 한다. 프리소는 기분 전환도 할 겸 칠레에 가는데, 비행기 탑승 계단에서 넘어져 찰과상을 입게 되는데 상처에 감염이 되는 바람에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 겨우 살아남았지만,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는데 바로 요시프 브리크가 갑자기 운명했다는 거였다. 암스테르담에서, 창문에서 추락했는데 사고였는지는 조사 중이라고 온 신문에 기사가 났다는 거다.

 

프리소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유일한 멘토이자 친구를 잃은 상실감에 괴로워한다. 학계와 언론은 브리크의 업적을 재조명하며 그의 후계자에 주목하는데, 바로 추도식에서 눈길을 끄는 추도 연설을 했던 그의 제자 필립 더프리스라는 청년이었다. 프리소는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이 아니라, 그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점에 강렬한 질투에 사로잡힌다. 그는 필립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전 세계 히틀러 학자들이 모이는 학회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만신을 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데, 지극히 사적인 그의 복수극은 거대한 산사태가 되어 대소동을 일으키게 된다.

 

 

나는 이 상황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지, 내가 어떤 부담을 져야 할지, 누가 관련되어 있는지, 그리고 만약 '실수였네, 미안'이라고 할 수 있는 해법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양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 상상 속에서는, 호텔에 걸어 들어가 외투 주머니 양쪽에서 구식 리볼버 권총을 꺼내어, 수위, 경비, 사환, 프런트 직원, 청소원, 숙박객, 니나, 스베더르 뷔르허르스, 필립 더프리스를 한 명씩 한 명씩, 자욱한 포연 속에서 볼링핀인 양 꽝하고 쓰러뜨리는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히틀러가 강도 든 은행을 덮칠 때처럼, '1인의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p.221~222

 

이 작품은 네덜란드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라 불리는 요스트 더프리스의 장편소설로 플랑드르 지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황금책부엉이상을 수상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낯선 네덜란드의 작가의 이 작품은 사실 읽기에 만만치가 않았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둘러싼 농담과 진지한 연구들이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괴짜 연구자들이 현대 지식인 사회를 풍자하는 부조리극이라는 점도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더디게 만든다. 게다가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며,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우스꽝스러운 거짓말이 뒤섞여 벌어지는 이야기라 좀처럼 집중하지 않으면 서사의 줄기를 제대로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에 비해 흥미로웠던 점은 자신의 책이 그 어떤 소설보다 ‘픽션’임을 자각시키는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과 히틀러라는 인물이 가진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의 매력과 영향력에 대한 연구를 주저하지 않는 괴짜들의 지적 유희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지점이었다. 한 젊은이가 경쟁자에게 밑도 끝도 없는 복수심을 가지게 되는 소소한 이야기에서 출발해 브리크의 유산에 주목한 이스라엘 첩보부가 접근하고, 나치로부터 오른팔 경례를 되찾으려는 과격파 시민단체가 난입하며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그 엉망진창 대소동이 주는 색다른 재미도 빼놓을 수 없을 테고 말이다. 요스트 더프리스는 이 작품에서 히틀러가 대중에게 친근한 캐릭터로서 불멸성을 갖게 된 아이러니를 꼬집고, 하나의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의 밝고 어두운 면을 풍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스승이자 친구를 제대로 떠나 보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유별나고 긴 고별사를 인상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현대 네덜란드 문학과 젊은 세대 작가들의 저력을 확인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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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아이가 위험하다 (리커버) - 사춘기 전에 키워야 하는 7가지 내적 능력
에일린 케네디 무어 외 지음, 박미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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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아이를 이렇게 다루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학교나 직장에서는 지적할 때 이렇게 부드러운 방법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강하게 키우려고 일부러 험하게 다뤄야 하나? 우리는 부모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식을 더 이해하고 감싸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중요한 점은 아이를 '강인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대처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다. 아이가 상냥하게 피드백받는 연습을 많이 하면 선의에서 나온 비판을 참아낼 역량을 키울 수 있다.    p.133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한다는 굴레와도 같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다 처음 겪는 것이라 답을 알 수 없는 시험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니 말이다 게다가 가정환경과 부모의 역할이 아이의 학업성취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은 부모의 입장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매 순간 내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우리 아이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의심하게 되니까 말이다.

 

이 책은 부모가 아이의 성적과 실력 향상만을 바라고 정작 아이의 내면을 소홀히 하여 아이들을 스트레스와 상처에 노출시켜 경쟁사회 부적응의 악순환에 놓이게 만든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일린 케네디 무어와 마크 S. 뢰벤탈은 잠재력은 많지만 기대만큼 해내지 못하는 아이, 학습 능력은 뛰어나지만 스트레스가 심한 아이, 즉 똑똑하지만 불행한 아이에 주목한다. 그리고 실제 상담 사례를 바탕으로 하는 구체적 시나리오, 직접 시도할 수 있는 실용도 높은 해결책을 통해, 영리한 아이들이 겪는 문제를 이해하고 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길러야 하는 일곱 가지 내적 능력을 제시하고 있다. 완벽주의를 다스리는 방법, 친구들을 끌어들이는 능력, 자신의 기분을 다스리는 법, 어른들과 잘 지내고 인정받는 기술, 스스로 학습 동기를 부여하기, 경쟁심 조절하기, 세상을 즐기고 행복해지는 법 등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주제들이 아니라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어떤 아이들은 패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한다. "내가 졌어"가 금세 "나는 못해"로 돌변한다. 어른이 "괜찮아. 그냥 게임일 뿐이잖아!"라고 다독여줘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패배는 흠이 있고 모자란다는 판단과 같다. 패배를 힘들어하면서도 자기가 승리했을 때 패자를 감싸 안아주지도 못한다. 멋진 패자가 되기 힘든 아이들은 흔히 멋진 승자가 되지도 못한다.    p.179

 

이 책에 기술된 사례와 전략은 주로 일곱 살에서 열세 살 아이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학교생활이 시작되는 시기이고, 학업에 대한 강도가 아직까지는 세지 않은 연령대이다. 이 시기에 아이의 대처 능력이 극적으로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부모가 해야 하는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흔히 ‘머리 좋다’, ‘똑똑하다’라고 표현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나 영리한 아이들은 과도한 기대 혹은 우려 때문에 정상적인 발달 과정과 다른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사소한 비판에도 분노를 느끼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부모는 아이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내적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아이가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성까지 포괄하여 넓은 관점에서 자신을 규정하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는 부모들의 착각이다. 당신의 자녀는 잘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했다면, 혹시 이렇지는 않은지 살펴보자.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거나 싫증을 잘 내는가? 열 가지 잘한 일보다 한 가지 작은 실수에 집착하진 않은지, 친구들과 공동으로 하는 일을 싫어하거나 힘들어 하진 않은지, 어른들과 쓸데없는 힘겨루기를 하거나 학교 선생님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는지,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려 하고,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지는 않은지 말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남과 비교할 수 없지만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 궁금하다면, 자녀에게 힘든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용적 심리 교육을 해주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길러야 하는 능력과 이를 위해 부모가 해야 하는 역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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