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사라진 밤
루이즈 젠슨 지음, 정영은 옮김 / 마카롱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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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거울 속 여자의 긴 금발 머리도 흔들렸다. 거울 속의 나는 나인데 내가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전혀 달랐다. 나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었던가?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의 엔진 소리도,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도, 방금 손을 씻을 때 사용한 비누의 라즈베리 향도 모두 너무 생생했다. 하지만 이게 현실일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p.20

 

뭔가 잘못됐다.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깬 앨리슨은 그 생각부터 들었다. 두통으로 인해 정신이 멍하고 머리가 울렸으며, 방 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게다가 기억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공백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지? 그녀는 남편인 매트와 별거 중인 상태였고, 친구인 크리시와 줄리아의 권유로 데이트 앱에 가입해 누군가를 만나러 갔었다. 전날 밤 데이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함께 살고 있는 크리시라면 뭔가 알지 않을까 싶었는데 집에 들어오지 않은 듯 했다. 그런데 상처를 살피기 위해 거울을 마주한 앨리슨은 혼란과 공포에 빠지고 만다.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던 거다. 분명 거울 속의 나는 내가 분명한데, 자신이 기억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병원에 간 앨리슨에게 의사는 뇌출혈이 조금 있었고, 인간의 안면인식 능력을 관장하는 신경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안면인식장애는 딱히 치료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시적인 현상일지 다시 얼굴을 인식하는 능력이 돌아올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다면, 자신이 만났던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그를 알아볼 방법이 없다는 거다. 만약 정말 데이트앱으로 만난 이완이라는 남자가 그녀를 공격한 거라면,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다시는 안전해질 수 없다는 얘기였다. 혼란에 빠진 앨리슨 앞으로 협박 편지가 도착한다. ‘데이트는 좋았어? 이 나쁜 년아. 경찰에는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손에는 피가 묻었거든.’ 그럼에도 그녀는 경찰에 신고를 할 생각은 없었다. 과거에 믿었던 경찰들로부터 가족이 위험으로 내몰렸던 경험이 있어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 밤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이모는 진실의 무게에 눌려 쓰러졌다. 이모도 우리가 겪은 그 많은 아픔을 견디기 위해 나처럼 오랜 세월 기억을 덧씌웠을까? 하지만 비밀은 아무리 덮어두려 해도 언젠가 드러난다. 추악하고 어두운 비밀은 어떻게든 밝혀져 우리를 파괴한다. 나는 절벽 앞 다 무너져가는 집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앞에서 소풍을 즐기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을 지탱하고 있던 그 작은 선의의 거짓말들. 서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거짓말들. 진실이 너무나 추악해서, 너무나 잔인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거짓말들.     p.390~391

 

안면인식장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한데, 자신에게 안면인식장애가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얼굴을 잘 외우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별로 닮지 않은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몇 년 전 방송에서도 한 연예인이 안면인식장애를 고백하면서, 1시간 넘게 이야기를 해도 다시 만났을 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털어 놓은 적이 있다. 그 밖에도 일상에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게 어렵다고 말한 연예인들이 꽤 많을 정도로, 이는 생각보다 흔할 수도 있는 장애이다. 반면 외부의 충격이나 두부 손상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고 한다. 이는 영구적인 손상일 가능성이 커서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앨리슨이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후천적 안면인식장애이다. 티비 속 유명인들은 물론, 가족, 친구, 그리고 자신의 얼굴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협박하고, 위협하고 있는 그 남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 오싹해졌다.

 

이야기는 안면인식장애를 겪게 된 여성의 심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폭력과 스토킹, 불법 촬영, 협박 등 현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범죄로 인한 공포와 범인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알아볼 수 없게 된 안면인식장애라는 특수성이 자아내는 오싹한 긴장감이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준다. 몇몇 복선들로 인해 중반 이후에 범인의 정체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데, 그런 독자들의 기대를 배신하듯이 작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단기기억상실증과 안면인식장애를 가지게 된 여성 주인공을 둘러싼 매우 현실적인 범죄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점차 가족 문제와 사회적 문제까지 포괄하며 묵직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지루할 틈 없이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는 심리 스릴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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