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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는 순간
안드레아스 알트만 지음, 전은경 옮김 / 책세상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열정은 누군가를 끝장낼 수 있다. 그러나 열정의 부재 역시 마찬가지다. 이 경우에는 파멸이 그저 오래 걸릴 뿐이다. 파멸은 시한부 사형선고처럼 다가온다. 그러니 '영광스러운 다섯 명'에게 못 이기는 척 떠밀리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단 한 번뿐인 삶 속으로.

삶이 선물이라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하루를 버텨내기에 급급하느라,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여력이 없는 게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바닥까지 떨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들, 모든 것을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삶의 선물에 걸 맞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삶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온 몸으로 깨닫게 되면 세상이 전과 같을 수 없으니까.

독일을 대표하는 여행 작가 안드레아스 알트만은 전쟁 후 미치광이가 되어 돌아와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와 납작 엎드린 개처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어머니, 전쟁터로 변해버린 집에서 생존을 건 투쟁을 벌여야 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자비한 인생은 국내에도 출간되었던 자전소설 <개 같은 시절>에 처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인생은 언제나 당신보다 크다!”라는 말로 포문을 열면서 이런 삶에도 온기와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야말로 지옥 끝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진심일 수밖에 없다. 고통과 아픔, 패배와 파, 광기로 얼룩진 삶을 거쳤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던 것들은 허세이거나 가짜일 수 없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시간을 도둑맞을 수 없는 활기찬 삶으로 도망치는 일, 이런 삶은 값비싸지 않고 많은 투자도 필요하지 않지만 입장료는 내야 한다. 엉덩이를 들어 움직이고, 어느 정도 용기가 있어야 하고, 혼자 있는 상태를 견디고, 길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창피함을 극복하고, 실패를 이정표로 인식하고, 도움을 청할 줄 알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실수를 인정하고, 더 현명한 새로운 실수를 시도하고,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대 잊지 않는 것, 이것이 입장료다.

안드레아스 알트만은 열여덟에 집을 나와 택시기사, 건설현장 관리, 북클럽 운영자, 주차장 경비, 연극배우 등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그 숱한 경험들과 그가 거쳐온 여행과 그곳에서 만나고 겪었던 것들이 결국 그의 삶을 구원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여행과 글쓰기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구원했는지에 대한 여정이기도 하다. 스무 개 이상의 직업과 세 개 이상의 학위와 열세 번의 심리치료로도 실패했던 그것을 어떻게 삶에서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목표 없이 떠다니는 루저의 삶이라는 늪에서 지금의 그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짧지 않았다. 거의 마흔이 다 되어서야 언어로부터 위로를 받고, 자유를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특히 '인생의 한 순간'이라는 챕터로 진행되는 짧은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보스턴 지하철 안에서 다리가 하나뿐인 남자에게 배웠던 뭉클한 예의, 야간 버스에서 라디오를 통해 비평가의 독설을 듣다가, 자신의 책을 읽고 있는 여성에게 위로 받았던 순간,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조문을 가서 느꼈던 마음, 시내버스에서 만난 난민 여자가 버스 기사 때문에 구원받는 느낌이 들었다는 이야기, 열세 살 체육시간에 자신을 다치게 했던 친구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느꼈던 뭉클한 따뜻함 등등.. 비루하고 처참한 우리네 삶을 온기 가득한 순간들로 바꿔주는 기적 같은 힘을 보여주는 순간들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아름답게, 온기 가득한 순간으로 바꿔주는 기적 같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만의 그 순간을 찾아 보기를. 인생은 생각보다 살만하다고 느끼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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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노히 1 - 시무룩 고양이
큐라이스 지음, 손나영 옮김 / 재미주의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트위터에 떴다 하면 수많은 리트윗과 하트 세례를 받는 일본에서 지금 가장 핫한 고양이네코노히'를 단행본으로 만났다. 뚱뚱하고 소심한 고양이네코노히의 시무룩한 표정이 매력인 네컷만화로 대사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마다 공감! 을 외치게 되는 너무 재미있는 책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표정의 고양이들이 많지만, 네코노히는 독특하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힐링을 안겨주어 사랑받 는 고양이가 아닌가 싶다.

 

휴대폰 배터리가 빨간 색으로 변하면.. 딱히 급한 연락이 올 게 있는 게 아니더라도 안절부절, 쭈뼛쭈뼛, 뭔가 불안해해 지곤 한다. 만두를 먹다가 제일 중요한 소만 홀랑 간장에 빠질 때라던지, 열심히 피망완자전을 구웠는데 피망 따로, 속 따로 분리되어서 결국 따로 먹게 된다던가, 핫도그를 먹는데 계속 소시지가 뒤로 쑥 빠져서 빵만 먹게 되는 그런 경우.. 누구나 살면서 한 두 번쯤 겪어 봤을 법한 상황들이다.

 

멋진 날씨를 기대하고 간 여행지에서 비가 와서 숙소와 실내를 벗어나지 못한다거나, 식당에 갔는데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불안감과 압박감으로 급하게 먹어야 했거나, 캔을 따려는데 고리만 톡 떨어져버려서 난감하거나, 랩을 뜯는데 자꾸 한쪽으로만 뜯어져 결국에는 랩을 뜯지도 쓰지도 못하게 된다거나 그런 상황들.. 뭐 이리 간단한 일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지 화가 나거나, 혹은 어이없어 헛웃음 짓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이 책 속에 가득하다.

고양이 네코노히가 그려내는 일상 속 소소한 실패들이 내 얘기 같아서 깔깔 대고 웃으면서 읽다 보니, 사실 그리 심각하게 볼 것도 아니었는데 싶은 생각도 든다. 남이 겪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보고 읽으니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독특한 것이 대부분 일본 만화가들이 거치는 과정(잡지 연재 후 단행본으로 엮어서 내는)이 아닌, 트위터라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SNS를 플랫폼 삼아 성공한 케이스라는 것이다. 트위터 연재로 성공한 사례는 일본 만화계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라 업계의 변화를 이끄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만화이기도 한데, 보통의 네 컷 만화들과는 다르게 짧은 네 컷 안에서 대사라고 할 만한 것은 의성어, 의태어 정도 밖에 없다. 대사 없이 상황에 대한 모든 것을 단 네 컷의 그림 안에 다 표현해내면서도, 메시지가 한번에 확 다가오는 그림들이라 몰입감도 뛰어 나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멈출 수가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출간 전에 여러 국내 대형 커뮤니티에서 짤방으로 돌며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만화이기도 하다. 한국어판 단행본을 기다리다 원서를 사서 보거나, 몇몇 에피소드를 직접 번역하여 공유하는 현상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단행본에서는 큐라이스 작가 트위터에서 공개하지 않은 에피소드가 가득 실려 있다고 하니, 기다렸던 분들은 꼭 단행본으로 만나보셔야 할 것 같다. 사소한 실패들이 이어지며 되는 일이 없어 언제나 울상인, 그럼에도 너무 귀여운 시무룩 고양이 네코노히. 일본에서는 그 인기를 증명하듯 웬만한 굿즈들은 다 나왔을 정도로 캐릭터 상품이 많이 출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여행을 가게 되면 몇 개 사와야 할 것 같다. 작년에 일본에 갔을 때만 해도 쿠마몬 캐릭터 상품들이 대세였는데, 올해는 네코노히가 장악하고 있나 보다.

 

네코노히의 소소한 일상들을 따라 가면서, 이번엔 꼭 성공해서 ‘SUCCESS’라고 외치기를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고양이의 삶도 이런데 우리 인생도 소소한 실패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한다. 되는 일 없어 세상 억울한 네코노히의 석세스 도전기가 어느 순간 내 모습에 이입이 되는 것이다. 

 

사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순간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결과와 상관없는 마음이 아닐까. 인생은 언제나 흐림 뒤 맑음! 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번에 실패했으니 그걸 바탕으로 다음에는 잘 될 거야. 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혹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는 아니지만, 다른 방향으로 해도 크게 상관없구나. 라는 긍정적인 마인드도 좋고 말이다. 스트레스가 목까지 차 올랐을 때, 정말 뭘 해도 다 내 마음 같지 않아 잘 안 될 때, 대체 나는 왜 이모양이냐고 자책하지 말고 네코노히를 만나보자. 당신의 인생에도 ‘SUCCESS’가 이어지는 나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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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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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때문인가요?" 여자가 물으며 포트에 든 커피를 따라주었다.

"그도 그렇지만." 별 지장이 없는 이야기만 해서는 여자에게서 뭔가를 끄집어낼 수 없을 것이다. "저는, 술은 혼자 마십니다."

"어머, 정말요? 외로운 술이로군요." 여자는 물을 탄 술잔을 들고 내 맞은편 자리로 돌아왔다.

"습관이 된 지 칠 년이나 되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도심의 화려한 고층빌딩숲 외각에 있는 허름한 '와타나베 탐정사무소', 그러나 그곳에 와타나베는 없다. 지금 홀로 사무소를 운영하는 것은 탐정 사와자키이다. 어느 날 그곳에 오른손을 주머니에 감춘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찾아 온다. 혹시 지난주에 르포라이터인 사에키라는 사람이 여기 찾아오지 않았냐고. 사에키 씨가 이곳에 들렀을 지난 주 목요일 이후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와자키는 사에키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남자는 사에키 씨의 신변에 위험에 있을 지도 모른다며 그의 행방을 쫓아달라고 돈뭉치를 남긴 채 가버린다. 이삼 일 안에 여기 다시 들르겠다는 말만 남긴 채. 그 뒤로 유명 미술 평론가 사라시나 슈조의 대리인이라는 변호사에게 연락이 와서 역시나 사에키 나오키라는 남자를 아느냐고 묻는다. 알고 보니 사에키는 사라시나 슈조의 사위였고, 위자료 오천만 엔을 받고 딸과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러 오기로 했었는데, 나타나지도 않고 그 뒤로 연락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사라시나의 딸인 나오코가 정식으로 남편을 찾아 달라고 사와자키에게 의뢰를 하게 되고, 사와자키는 알 수 없는 의뢰인과 영문 모를 의뢰 내용을 쫓아가기 시작한다. 아내의 애정을 받아들이고 얌전히 있으면 언젠가 그룹의 재산 절반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 데 위자료 오천만엔에 몸을 빼려고 하는 서른 살 청년 사에키 나오키라는 인물도 미스터리하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역시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르포라이터의 실종은 결국 당시 세상을 발칵 뒤엎어놓은 도쿄 도지사 저격사건과 맞닿아 있음이 밝혀지는데, 거기까지 이르는 수사 과정이 차갑고 비정한 밤의 도시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애정과 진실을 배려하는 것이 증오와 거짓을 배신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더 깊은 상처를 입힌다는 생각을 했다. 직업상 서로 기쁨을 나눌 수 없는 사람들의 배반을 보는 건 일상다반사지만 괴로움 또한 서로 나누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고 오히려 커지는 모양이다.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굳이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받는 길을 선택한 여자의 마음을 나는 이해하려고 해보았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진실은 털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과작 작가로 유명한 하라 료는 데뷔 이래 19년 동안 단 여섯 권만 썼고, 사와자키 시리즈도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가는데 6년이 걸렸으며, 네 번째로 가는 데는 9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즐기려면 기다림과 인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출간되는 그의 작품도 역시나 그랬는데,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내가 죽인 소녀>에 이은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를 만나는데도 무려 4년이나 걸렸고, 그 이후 또 3년이 다 되어서야 시리즈 유일의 단편집인 <천사들의 탐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뒤, 이번에 사와자키 시리즈 시즌 2를 알리는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가 출간되면서 절판되었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도 새로운 옷을 입고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하라 료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하드보일드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드보일드는 스토리 그 자체로서의 매력보다는 문체와 스타일에서 묻어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광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텐데,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래서 그가 툭툭 뱉어내는 말투, 그리고 행동에 대한 묘사에서 빚어지는 그 분위기가 정말 매력적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뺀 무덤덤하고 시크한 행동. 가끔은 위험한 순간에조차 무모하게 용기 있는 순수함(?) 이라고나 할까.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한다거나, 자신이 피해를 볼만한 상황에서 빠진다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한다거나 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캐릭터. 그야말로 온몸으로 '하드보일드'를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매혹적이다. 음식으로 치자면 ''이 아니라 '풍미'가 좋다고 해야 할까. 논리적인 사고보다 인생관에 대한 사색을 중시하지만 사건 해결에 있어서는 날카로운 예리함으로 기지가 번뜩이고, 트릭이나 의외성보다는 분위기로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립탐정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노라면 어디선가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진짜 보일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오래도록 절판되었던 책을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된 당신의 행운에게 감사하길. 정말 세련된 하드보일드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와자키 시리즈로의 입문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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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긋기의 기술 -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거리 두기
와키 교코 지음, 오민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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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때로는 침묵이 최선의 방어책이에요.”

“네? 말을 하지 말라고요?”

“네. 이건 제가 간혹 쓰는 팁인데요. 누군가가 제게 정말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 눈을 2~3초 정도 똑바로 쳐다보고 살짝 웃어줘요. 그리고 바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며 다른 화제를 꺼내죠. ‘네 말은 대꾸할 가치도 없어라고 은연중에 말해주는 거예요.”

초등학교 시절 짝꿍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가 되면, 책상 위에다 선을 좍 그어 놓고는, "넘어 오지마."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유치하지만 그것만큼 상대에 대한 확실한 의사 표현이 있을까 싶을 만큼 아이들만의 돌직구 표현인 셈이다. 보통은 의사 표현이 비교적 확실한 여학생들이 주로 그렇게 선을 긋고는 했는데, 뭐 그런다고 그 선을 제대로 지키는 남학생들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른이 되어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직장에서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공간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처럼 선을 그어 놓고는, 내 영역에 들어오지 마세요.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미 어른이 된 우리는 눈치도 봐야 하고, 내 처지도 살펴야 하느라 어릴 때처럼 '당당하게 거리 두기'를 선언할 수가 없다. 슬프게도 말이다.

와키 교코의 <선 긋기의 기술>이라는 책은 눈치 보지 않고, 정색하지 않고, 불편한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팁을 알려 준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해, 욕이라도 한마디하고 쿨하게 등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을 것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지긋지긋한 사람들을 깔끔하게 떼어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우선 당당한 태도부터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도 겁먹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어깨 펴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태도 말이다. 이 책은 이렇게 인간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핵심 원칙부터 시작해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동료라는 특정 인간관계에서 발생하기 쉬운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 사례를 통해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해결 방법들도 제시되어 있어 바로 실전에 활용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안타깝지만, 사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달라짐으로써 상대도 달라지길 기대하는 것뿐입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 각각 정리해본 다음,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에 쏟는 편이 현명하고, 마음도 더 편합니다.

후반부에 가면 타인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인간관계가 등장한다. 바로 '나와의 관계'이다. 저자는 말한다. 자꾸 신경을 긁는 상대가 있을 때,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어떻게 해야 내가 행복해지지?" 사람들이 의외로 남 중심 선택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가 않다고 한다. 유독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적당한 선을 그을 수 있게 되려면, 나 중심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거다. '나 위주'로 살아도 큰일 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우리가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하는 ''과의 관계, 스스로를 컨트롤 해야 하는 '의욕'의 문제에 대해 살펴 본다.

특히나 재미있었던 것은 중간 중간 등장하는 '선 긋기의 기술'이라는 코너였다. 직접적인 사례를 들어 놓고, 평상시에 우리가 어떻게 하는 지를 보여주고는, 그럴 때 마음과 생각을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였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부모님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마음으로는 "짜증나고 거슬려. 날마다 마음이 무거워."인데, 정작 생각은 "잘 되라고 하시는 말씀이니까, 내가 참아야지."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용기를 내어 부모님에게 진짜로 하고 싶은 말, 진심을 전하는 것이다. 혹은 친구로부터 상처가 되는 말을 듣고 나서 마음은 "분하고 서글퍼..."인데 생각은 "내가 말을 잘못 꺼냈다가 모임이 깨지면 어떻해?" 라며 자기 자신보다 주위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느라 기분이 상한다. 그럴 때 그런 관계는 끊으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고, 선을 넘어오는 수준의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참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우리는 마음보다 생각을 우선시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생각은 나를 먼저 고려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 타인을 먼저 고려하기 때문에, 마음이 멍드는 것을 무시하기 일쑤이다. 그러느라 늘 스트레스 받고, 남의 눈치를 살피고, 내 감정을 돌보지 못하고 있다.

, 이제 선을 그어보자. 이 책에서 알려주는 팁들을 활용해 어떤 상황에서도 관계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 다면, 언제나 당당하고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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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이브스 2 - 화이트스카이
닐 스티븐슨 지음, 성귀수.송경아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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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무런 전조도,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달이 폭발했다. 달의 붕괴는 그 어떤 평범한 천문학적 현상으로도 초래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천문학자들을 비롯해 전문가들 역시 이 상황에 대해 딱히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제 문자는 당신이 지금 저와 같은 방에 있었으면 한다기보다, 당신의 머릿속이 저 아래가 아닌 이곳 우주, 클라우드아크에 집중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가족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집니다, 닥터 해리스."

"죽었죠.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달은 일곱 개의 큰 덩어리와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조각들로 붕괴되었고, 달의 파편들은 무한정 충돌을 계속하면서 점점 더 작은 조각들로 나뉜다. 문제는 증가하는 유성충돌이 '화이트 스카이'사태로 이어지고, 며칠 뒤 '하드레인' 현상이 시작될 거라는 거였다. 암석들이 지구 대기권으로 떨어지게 되면, 전체 지표면이 황폐화되고, 빙하는 부글부글 끓는 상태가 된다. 유일한 생존방법은 대기권을 벗어나는 것. 땅속으로 들어가든지, 우주로 나가는 방법 밖에 없다. 화이트스카이까지 남은 시간은 2, 그리고 하드 레인이 시작되면 향후 5천 년에서 1만 년 사이의 어느 지점까지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을 비롯해 과학자들은 2년 안에 최대한 많은 인원과 장비를 궤도로 쏘아 올려야 했고, 노아의 방주와 같은 우주선에 인류를 대변할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태워 우주로 보낼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렇게 달의 폭발 이후 1년까지의 이야기가 1권의 내용이었다.

2권에서는 달이 붕괴하고 예상대로 2년 후 하드레인이 시작된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시작된 하드레인은 화염과 폭발로 순식간에 도시들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다. 바윗덩어리에 이어 보다 작은 유성들이 세계 전역을 뒤덮으며 쏟아지기 시작하고, 우주에서 바라볼 때 대양의 푸른빛에 구름과 빙하의 흰빛이 어우러진 구체였던 지구가 이제는 온통 오렌지 빛깔로 보인다. 지구가 불타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클라우드아크의 지휘를 맡고 있는 마쿠스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 그 법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제부터 클라우드아크 헌법이 발효되었다고 선언한다. 아직 지구에 살아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셈에 넣지 않는다면, 이제 전세계 인류의 수는 오직 클라우드아크에 있는 천오백 여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들 또한 우주에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유성 충돌로 죽고, 분산되어 있는 아클렛이 희생되면서 사상자는 더 늘어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 사람들이 널리 공유하고 있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 합의가 있었다. 남자는 희귀 자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들, 꼭 집어 말하면 건강하고 기능이 멀쩡한 자궁들은 귀한 자원이었다. 그런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남자들, 아니면 더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자살 방식을 선택한 남자들은 계속 위험한 업무에 자원하면서 본능적으로 여자들을 우주선 안의 안전한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인듀어런스 호가 클레프트에 도달하기까지 3년 동안 인구의 대다수는 여러 가지 원인, 즉 우주 방사선, 자살, 암 등으로 사망하게 된다. 파벌로 나뉘어 싸우기도 하고, 식량이 없어지자 식인 풍습에 빠지기도 하는 등.. 여러 요인으로 인구는 점점 더 줄어 들게 된다. 그렇게 그들이클레프트라고 하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에 도달할 무렵 우주에는 단 여덟 명의 생존자만이 남게 된다.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이미 폐경기에 접어든 사회학자 루이사를 제외하면 가임기의 인구는 일곱 명, 세븐이브스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유전학 실험실을 이용하여 인류의 재건에 필요한 자원을 보유하고자 한다. 2권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곧 출간될 3권에서는 일곱 명의 여자들이 남자 없이 스스로 임신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자손을 이을 수 있는 실험을 하게 되고, 수백 년 후 이들의 프로젝트가 어떻게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 내는지 그로부터 5,000년 후의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이 작품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에 무게를 두고, 탄탄한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쓴 '하드 SF' 장르에 속한다. 하드SF 작가들은 적어도 관련 과학지식에 관한 한 자신만만한 무장을 하고 창작에 착수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작가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 때문에 국내외 과학소설 열혈 애호가들은 하드SF야말로진정한 과학소설이라 치켜세우기도 한다. 반면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에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엔터테인먼트 대중문학이지 과학 에세이나 논문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 그리 어렵게만 느낄 필요는 없다. 특히나 닐 스티븐슨은 눈부신 상상력과 천재성으로 인류사를 다시 쓰는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게 만든다. 1권보다 2권이 더 긴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했으니, 아마도 마지막 이야기인 3권은 더한 재미를 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어서 빨리 이 매혹적인 스토리의 마지막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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