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일본책 - 서울대 박훈 교수의 전환 시대의 일본론
박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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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옛날에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사실 한국인만큼 일본을 비판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일본에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고 일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의식에 기초한 일본 비난은 더 많은 사람을 장기간에 걸쳐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일본 비판을 통해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 법치와 인권, 평화와 복지의 세상을 여는 담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일본도, 세계인들도 우리를 존중할 것이며, 한국인들도 그를 통해 한 차원 높은 단계로 고양될 것이다.         p.8

 

일본 근대사 최고 권위자 서울대 박훈 교수가 막연한 혐오와 적대감을 걷어내고 일본과 한일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책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어 공분을 사고 있는 요즘 읽기에 좋은 책은 아닌 것 같지만, 마음을 다잡고 읽어 보았다. 저자는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을 '모르는 대상에 대한 공포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상에 대한 비하가 콤플렉스'처럼 엉켜 자리하고 있다며, 먼저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한국과 일본의 장단점과 다른 점과 비슷한 점을 짚어 보고, 근대사의 성패를 살펴보며 반일을, 혐한을 넘어서 새로운 관계를 도모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일치단결하는 지점이 바로 '반일'이라고 말한다. 식민지 된 지 110년이 넘었고, 해방된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반일 민족주의는 약해지기는커녕 더 기세를 떨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일 담론들이 과학, 학문적 근거하거나, 건전한 상식에 기초하지도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이 우려스럽다고 말이다. 그러니 목청만 높이는 대신, 차분히 앉아 생각하고 공부하고 조사해서 신중히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저자가 그동안 <경향신문>과 그외 몇몇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가깝지만 판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두 나라의 상호 인식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한국 시민들만큼 일본에 '관심'이 많은 경우도 달리 찾기 힘들 것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에 경쟁심을 불태우고, 그 동향에 신경을 쓰며 자주 비교한다. 젊은 세대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본 여행, 일본 음식, 일본 문화가 우리의 일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 '관심'에 비해 일본을, 특히 일본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문해보면, 자신 있는 대답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관심'은 과도한데, 풍부한 지식과 정보에 기초한 체계적인 이해는 너무도 부족한, 그래서 무지와 오해가 난무하는 상황이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p.246

 

혼술도, 혼밥도 익숙하고, 기괴한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는 일본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개인주의가 매우 희박한 사회라고 한다. 소속 집단보다 개인이 더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보통의 일본인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개인주의 혹은 개인이 강한 사회로, 그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만들어 냈다. 일본은 시위도 없고, 국민들의 정치 행동 또한 자주 일어나지 않는 나라이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여론 정치의 나라로 여전히 민심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일단 이것은 저자의 견해다) 한국이 민심의 나라라면 일본은 엘리트, 그중에서도 야쿠닌(관리 혹은 공무원)의 나라이다. 역사상 1000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은 한국은 지정학적 지옥이고, 지진을 비롯해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은 지질학적 지옥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해 강화도조약부터 메이지유신까지, 김옥균부터 사카모토 료마까지, 한일 근대사의 주요 장면과 인물들을 되짚어 본다.

 

저자는 무시와 두려움이라는 콤플렉스에 발 묶여 있는 한일 상호 인식을 역사와 현실에 비추어 이야기한다. 오늘날 한국인이 말하는 ‘반일’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준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아쉬운 점은 한일 상호 인식을 역사에 비추어 차근차근 들려 주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같은 시국에 '한국은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막 나라가 돼야 한다'는 외침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본에 대한 이야기들이 통찰력 있는 시각으로 담겨 있고, 막연한 반일과 혐한 대신에 상대에 대해 저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맞다. 일본에 대한 비판은 무력한 공포탄이 아니라 뼈 때리는 비판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불편한 진실도 직시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는 없었던 책이다. 어쩌면 더 다양한 담론을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하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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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인간 - 오야부 하루히코 문학상 수상작
츠지도 유메 지음, 장하나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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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개입한다고 해서 그들이 호적을 취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회적 약자인 그들의 처지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창고와 공장을 오가는 단조롭고 소박한 삶에서, 돌아갈 집과 직장을 동시에 잃고 의지할 곳 없이 바깥세상에 툭 내던져질 것이다. 이는 정의를 앞세운 일개 형사의 행동이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은 딱히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이 도쿄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어가려 했을 뿐인데. 리호코는 이제껏 법을 지키는 것과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일은 같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리호코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에 직면했다.           p.90~91

 

한적한 주택가, 20대 남성이 갑자기 뒤에서 습격 당했다는 신고가 들어 온다. 발소리를 알아 차리고 피한 탓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남자는 범인이 전 여자친구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술집에서 헤어지자는 얘기를 했는데, 집요하게 쫓아와서는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갔다는 것이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출동한 가마타경찰서 강력계 여형사 리호코는 현장 근처에 숨어서 그쪽을 살피던 갸날픈 여성 하나를 체포한다. 순순히 자신의 범행을 자백해 수월하게 끝이 날 것 같았던 수사는 시작하자마자 암초에 부딪힌다. 하나가 이름도 주민번호도 없는 무호적자였던 것이다. 신분증이 없는 것은 물론 주소도, 직업도 없었고, 자신의 성도, 생년월일도, 출생지도 본적도 죄다 모른다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리호코는 연민을 느낀다.

 

결국 모든 것이 미상인 채 사건은 검찰로 송치되지만, 하나가 자백을 번복해 범행을 전면 부인하게 되고, 유력한 용의자임은 분명했지만 명백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결국 그녀는 풀려나게 된다. 리호코는 연민과 의심으로 하나의 뒤를 쫓다가 무호적자들이 모여 만든 수상한 집단공동체 '유토피아'를 발견하게 된다. 무호적자들이 사회 보험도 없이 공장에서 일하며, 거주용이 아닌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세상의 도움 없이 자기들끼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폐쇄된 이상향, 그중에는 미취학 아동까지 있었다. 리호코는 유토피아의 정체에 대해 취재하면서 리더인 료와 하나가 함께 버려진 아이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두 사람이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2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새장 사건의 당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인 미수 사건과 미제로 끝난 아동학대, 실종 사건이 연결되면서 서서히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마찬가지로 완벽한 인간도 없다. 불완전한 인간끼리 부족하더라도 서로 보듬어주며 겨우 그럴듯한 형태를 유지하며 산다. 그러나 태어난 순간, 한 사회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온 사람도 있다. 자신이 사는 곳이나 직업을 자기 의지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려는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고 사치스러웠는지 돌아보게 된다. 삶은 '완벽'이 아니라 '충분'을 지향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소한 부분은 눈감아주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p.325~326

 

오야부 하루히코 문학상 수상작이자, 국내에 <나와 그녀의 왼손>, <지금, 죽는 꿈을 꾸었습니까> 등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던 츠지도 유메의 신작이다. 도쿄대 법대를 졸업한 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우수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녀가 호적에 이름이 없는 사람, 즉 ‘무호적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데뷔작인 <사라진 나에게>였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호적에 대해 독자들이 의구심을 품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무호적자들이 호적을 얻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작가의 숙고 끝에 작품으로 탄생하게 된 이야기라 그런지 무거운 사회문제를 매우 현실적이고도, 먹먹한 드라마로 그려내어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서두에서 보여진 '새장 사건'은 세 살 남자아이와 한 살 여자아이가 빌라에 갇혀 지내다 구조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두 자녀만 두고 수일 동안 집을 비워 양육을 방임한 두 아이의 어머니가 체포되면서 사건은 종료되었지만, 수년간 아이들이 새와 함께 방에 감금된 상태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도,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이 사건 보도는 당시 여섯 살이던 리호코가 어른이 되어 경찰이 되도록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부모의 아동 학대 사건은 여전히 현실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 결코 이야기 속 상황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부모의 육아 방임, 믿을 수 없는 학대에 관한 뉴스를 세상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데 그치지 말고 사회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당연하게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취업해서 사회 보험을 들고, 세금이며 연금을 내며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어딘가에서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버젓이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 섞여서, 살아 있는 유령처럼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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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2 - 전2권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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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저 집이 아니라 추억을 사랑하는 거야. 일종의 '향수병'이라고 할 수 있지. 지난날은 행복했고, 그 시절 우리의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믿게 만드는 게 바로 향수병이지. 지난날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때가 좋았지.'라고 생각하는 건 사실 우리의 뇌가 병들어 향수든 우수든 찔끔찔끔 분비하는 탓이거든. 지난 과거가 헛일은 아니었다고, 공연히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니었다고 믿게 하려는 거야. 시간을 허비하는 건 인생을 내다 버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 1권, p.60

 

오래 전에 만났던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이라는 작품을 아주 좋아했었다. 미스터리와 소설쓰기라는 매혹적인 소재를 절묘하게 그려낸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고, 캐릭터, 플롯, 반전 모두 너무 흥미진진했던 터라 조엘 디케르라는 작가에게 한 눈에 반해버렸으니 말이다. 그 뒤로 출간되었던 <볼티모어의 서>와 <스테파니 메일러 실종사건>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오랜 만에 만나게 되는 조엘 디케르의 신작이 이렇게 두툼한 분량으로 출간되어 매우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다. 특히나 이번 작품은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과 <볼티모어의 서>를 잇는 삼부작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앞선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번 신작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 작품은 스토리 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건을 수사하는 중심 인물이 겹치기 때문에 연작소설 같은 느낌도 든다.

 

이 작품은 극중 작가인 마커스 골드만이 스승이자 멘토인 해리 쿼버트가 관련되었던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발표하고 유명인사가 된 시점 바로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현재 시점인 2010년과 11년 전인 1999년 시점을 끊임없이 오가며 알래스카 샌더스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살해된 사건을 파헤친다. 마커스 골드만이 형사인 페리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며 과거에 묻혀 있는 진실을 찾아내는 구성이라 자연스럽게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이 돌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을 가제본으로 만나본 사람들이 많을 텐데, 본격적인 이야기는 1권의 후반부부터 시작되어 2권에서 제대로 무르익은 재미를 보여주고 있으니 두 권짜리 본책으로도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본책은 1권이 484페이지, 2권이 5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인데, 가제본 도서는 358페이지까지라 1권도 채 되지 않는 분량이기 때문에 가제본만 읽고 나서 그 뒤의 내용을 읽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테니 말이다. 11년 전 당시 수사를 맡았던 페리가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에 관한 의문의 편지를 받고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커스와 함께 재수사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 주요 플롯이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이다 보니 1권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두 사람이 사건을 재수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니 진짜 이야기는 바로 그 다음부터 시작인 셈이다.

 

 

 

"사장님이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게 되실 수도 있어요." 로렌이 말했다.
주유소 주인은 로렌의 말을 듣더니 재미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생활 50년째야. 서로 숨길 게 뭐가 있겠어. 필리스는 나를 속속들이 알아. 아내가 모르는 비밀이 나에게 있을 리 없잖아."
그렇지만 루이스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비밀을 깊이 감추면 그 자신조차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잊고 있던 비밀이 하수구가 흘러넘치듯이 지표로 흘러나온다.           - 2권, p.203

 

알래스카 샌더스는 환한 햇살처럼 밝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게다가 어찌나 상냥하고 친절한지 그녀가 일하는 주유소 사장은 물론, 손님들 또한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운트플레전트의 스코탐 호수 근처 모래밭에서 알래스카의 시신이 발견된다. 곰이 시신을 훼손하고 있는 걸 누군가 발견해 신고한 것이다. 처음에는 곰에 의한 피해인가 했지만, 그녀의 사인은 교살이었다. 피해자의 가죽바지 뒷주머니에서 종이가 한 장 발견된다. '나는 네가 한 짓을 알아.'라는 컴퓨터로 쓴 짤막한 문구 한 줄이었다. 여러 미인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고,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스물 두 살의 젊은 여성은 대체 왜 살해된 것일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 그리고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과 <볼티모어의 서>에서도 화자로 등장했던 마커스 골드먼이 등장한다. 작가인 마커스 골드만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로 단 몇 주만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를 유명 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은 바로 스승이자 멘토였던 해리 쿼버트가 관련되었던 그 사건이다. 해리의 집에서 유해 한 구가 발견되었는데, 수십 년 전에 실종되었던 소녀로 추정되었고, 그 일로 해리는 체포된다. 어린 소녀와의 부적절한 관계, 살인과 오랜 세월의 은폐로 인해 도서관마다 비치될 정도의 문학적 교과서같은 위대한 작품을 쓴 국민 작가는 한순간에 추락한다. 마커스는 스승에게도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믿고, 그 사건에 뛰어들어 진실을 파헤치는 데 일조를 하게 되고, 그 과정을 소설로 써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에 등장하는 마커스는 바로 그 시점의 마커스이다. 첫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어 크랭크인에 들어가고, 두 번째 책 <해리 커버트 사건의 진실>이 출간되어 영화 판권 계약을 논의하고 있는, 유명 작가가 된 마커스말이다. 하지만 그는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해리가 사라진 뒤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던 중 11년 전에 있었던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의 재수사가 결정되고, 마커스는 페리와 함께 수사를 펼치게 된다. 그렇게 이 작품은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업그레이드 된 조엘 디케르의 면모를 보여준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단숨에 읽어 내리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을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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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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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들고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불결한 몸에는 강력한 힘이 넘쳐난다. 우리의 열등한 머릿속에서 미친 듯한 분노가 일어나 선명하게 불타오른다.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날리고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노려보고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날카롭게 다듬으면서 (...)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세력보다 더 오래되고 잠재적으로 더 대단한 분노를 느끼며 들고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번에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p.193

 

제인 오스틴에서 에밀리 디킨슨까지, 존 밀턴에서 월트 휘트먼까지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키워드로 재구성한 영미 여성 문학사, 무려 천백 페이지가 넘었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었다면, 이 책 역시 자연스럽게 읽게 된다. 이 책은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가 19세기 여성 작가들에 대해 파고들었던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이후 40년 만에 펴낸 신작이니 말이다.

 

 

이번에는 무대를 19세기에서 현대, 즉 1950년부터 2020년까지의 세계로 옮겨왔다. 그리고 '세상이 요동칠 때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고 독려해주는 듯한 여성 작가들을 불러들인다. 실비아 플라스, 존 디디온, 에이드리언 리치, 어슐러 르 귄, 수전 손택, 토니 모리슨 등 읽고 쓰고 맞서 싸운 여성들의 계보가 이 책 속에서 펼쳐진다. 전작이 워낙 방대한 분량이었기에, 육백 페이지를 훌쩍 넘는 분량이 가뿐하게 느껴지지만, 5주간 Mad Writing Club으로 읽게 되어 차근차근 나눠서 읽었다.

 

1950년대를 다루는 1부의 1장과 2장, 1960년대를 다루는 3장과 4장에 이어 1970년대가 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본격적으로 가부장제에 저항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2만여 명의 여성들이 미국 여성 참정권 획득 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여성 평등 시위'를 벌이며 1970년 여름이 시작되었다. 하원에서 성평등 헌법 수정안이 짧은 토론 끝에 통과되었고, 케이트 밀릿이나 수전 손택 같은 논객들은 가족 로맨스를 해체했으며, 토니 모리슨과 에리카 종부터 리타 메이 브라운에 이르는 소설가들은 여성을 쇠약해지게 만드는 성 역할에 대해 분석했다. 그야말로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을 마비시키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상태를 야기하는 억압에 대한 충격적인 각성이 시작되는 1970년대였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지만, 우리가 읽고 쓰는 것도 우리다.' 문장이 여운처럼 길게 가슴에 남았다.

 

 

펠로시가 일어선다. 엄숙한 모습으로. 그러고 난 뒤 악평을 불러일으키는 것만큼이나 상징적이고 극적인 몸짓으로, 침착하게 대통령 연설문 각 부분의 각 장을 반쪽으로 찢는다. 거짓 텍스트, 자아도취의 텍스트, 나라를 분열시키고 나라의 안전망들을 와해시키려는 불한당의 텍스트를 찢어발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그저 트럼프의 장광설에 등장하는 "미친 낸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미친 여자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타당한 이유로 여전히 미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마찬가지다.          p.488

 

케이트 밀릿의 <성 정치학>, 수전 손택의 <O 이야기>,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 마거릿 애트우드 <신탁받은 여자>, 실비아 플러스의 <벨 자> 등에서 여성 작가들은 등장인물의 행복을 파괴하는 사회화 과정을 주제로 여성의 삶에 대해 묘사했다. 예전에는 '정상적이고' '규범적으로' 보였던 모든 것이 기이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동안 학교에서 배웠던, 피비린내 나지만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역사는 바로 가부장제의 역사이자 우리가 깨어나 벗어나려 애쓰는 악몽과도 같은 제도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는 1950년대에서 시작해 폭발하는 1960년대, 깨어난 1970년대를 거쳐 이번 주에는 페미니즘을 다시 쓴 1980년대와 1990년대, 후퇴와 부활의 2000년대에 이르렀다.

 

 

"이론의 여지 없이 누구나 받아야 하는 존중을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는 N.K.제미신이 '부서진 대지' 3부작을 쓰고 책을 헌정한 대상들에 대해 밝힌 말이다. '부서진 대지' 3부작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라, 이 작품의 의미하는 바와 영향력에 대해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어 더욱 반갑게 읽었다. 여성의 생각과 언어가 거부되던 시대에 의문을 품고 반기를 든 여성 작가와 예술가들의 계보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언어'가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열정적인 분노를 강력한 글쓰기로 승화시킨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잊어선 안될 것이다.

 

Mad Writing Club 5주차가 되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다시 첫 장을 살펴보고 싶어 졌다. 이 책의 첫 장에서 저자는 '항의 행진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글을 쓴다'고 서두를 열었다. 2017년 1월 21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 있었던 항의 시위인 여성 행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직접적인 시위 참가가 불가능해 나름의 연대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았던 것이 바로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거였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제2물결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위해 대표적 여성들(시인, 소설가, 극작가, 가수, 저널리스트, 이론가 들)을 선별하면서 이 책이 시작되었다.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가 19세기 여성 작가들에 대해 파고들었던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이후 40년 만에 펴낸 신작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지만, 이야기의 무대가 19세기에서 현대, 즉 1950년부터 2020년까지의 세계로 옮겨왔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실비아 플라스, 존 디디온, 에이드리언 리치, 어슐러 르 귄, 수전 손택, 토니 모리슨 등 읽고 쓰고 맞서 싸운 여성들의 서사는 그 자체로 뭉클해지는 뭔가가 있었다. 우리와 우리의 많은 친구들은 유리 천장을 깨부수고, 깨진 유리들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미쳐 있다. 현실은 여전히 미친 듯 화가 나고 혼란스럽고 반발감이 치솟게 우리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나가기 위해선, 읽기와 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었다면, 이 책 <여전히 미쳐 있는>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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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가르면 피가 나올 뿐이야
스미노 요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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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교차로 한가운데에서 아카네는 당연히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 없어. 이야기 속 인간이 이 세계에 있을 리 없어. 그러나 조금 전에 본 얼굴도 체격도 복장도, 틀림없이 머릿속에 그린 모습 그 자체였다. 잡음을 찢는 듯한 그 발소리도 뇌가 확실하게 기억한다.
쫓아가야지. 그렇게 결정한 것도 잠깐, 눈앞에 키가 큰 그림자가 나타났다. 올려다보자 양복 입은 남성이 방해된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봐서 아카네의 감정이 자기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p.38

 

다정한 부모님, 사이좋은 친구들, 먹고사는 데에 걱정이 없고, 괴롭힘 같은 일과도 무관하게 학교에 다니고, 용돈이나 벌 생각으로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고, 그동안 사귄 연인들과의 관계도 문제없이 행복했던, 평범한 여고생 아카네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끊임없이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자신의 본마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매순간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자신이 좋은 인상을 준 것 같다고 느껴야 안도하는, 그럼에도 그러한 자신의 감정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연인 앞에서도, 아르바이트 동료 앞에서도, 친구 앞에서도 오로지 한 가지 감정에 지배된 채 행동하는 자신을 절실하게 혐오하면서도, 사랑받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사느라 아카네는 하루하루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간코너에서 <소녀의 행진>이라는 소설책을 만나게 되고, 폭발할 것 같은 경탄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아무도 알 리 없는 나 자신을 이해해준다고,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봐주지 않는 내면을 봐준다고, 존재해도 된다는 희미한 권리를 자신에게 부여해준다고 느낀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 속 인간이 현실 세계에 있을리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얼굴도 체격도 복장도, 틀림없이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린 모습 그 자체였던 터라 아카네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걸게 된다. 그리고 아카네는 그와 함께 소설 속 주인공 소녀가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재현해보게 되는데... 언젠가는 자신도 주인공 소녀처럼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람이든 물건이든 소설이든, 이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를 만난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아카네에게서 수줍은 미소가 사라졌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래도 지울 수 없는 기쁜 빛을 입가에 남기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은 저를 지탱해줘요. 고민이 많더라도 주인공처럼 언젠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어요. 그렇지, 아이 씨도 언젠가 읽어주면 좋겠어요."               p.188

 

누구나 살면서 기댈 곳이 하나쯤 필요하다. 이 고루한 삶을 버티게 해 줄 무언가.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이겨낼 수 있는 무언가. 그걸로 인해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다시 살아갈 힘이 된다. 그게 소설이든, 노래든, 영화든, 혹은 아이돌이든 간에 말이다. 그로 인해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행동이 바뀌게 되는 경험은 삶을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생의 지표로 삼게 되는 건 크게 문제가 없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을 만들어낸 이야기인 픽션에 완전히 빼앗기는 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작품 속 아카네처럼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을 흉내 내고, 소설 속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상과 비슷한 행동을 하면서, 점점 자신의 현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아카네 외에도 타인에게 보여줄 자신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아이돌과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연출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본성을 폭로하고자 몰래 촬영을 하는 소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여장을 하고 다니는 아름다운 청년 등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여지고 있다.

 

이 작품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화제의 데뷔작만큼이나 파격적인 제목을 가진 스미노 요루의 신작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배를 가르면'이라고 번역한 원제는 본심을 털어놓는다는 관용어라고 한다. 본심을 내보이는 것을 배를 가른다고 표현하다니.... 너무 파격적이지만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무시무시한 제목에 비해 담고 있는 내용은 스미노 요루 특유의 감성이 돋보이는 청춘물이라 부담없이 읽어도 된다. 작가 역시 집필 초기 단계에 제목을 떠올렸을 때 그로테스크하다고 판단했다고 하는데, 사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작가의 감성과도, 의미 면에서도 적합한 것 같다고 느껴졌다. 자연스레 데뷔작과도 연결되는 제목이기도 하고 말이다. 누구나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는 진심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한 채 살고 있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한다는 명목 하에, 혹은 내면은 보여주기가 어렵거나 싫어서 등 이유는 각기 다르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구원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적과도 같고, 마법과도 같은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허구의 이야기가 가진 힘,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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