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의 산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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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진짜 이유가 뭐지요?" 인터뷰 영상에서 사회자는 미너부도티어-첸 박사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수고를 들여 기계를 인간처럼 만드는 거죠? 그냥 인간을 만들어내는 건 거의 비용이 들지 않잖아요?"

미너부도티어-첸 박사는 대답했다.

"인류가 가장 위대하면서 가장 끔찍한 이유는 바로 이거예요. 우리는 결국,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은 반드시 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지요."              p.60~61


베트남의 고립된 군도 꼰다오에는 바다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오랫동안 전해 내려져 왔다. 원래는 그림자와 갑자기 물에 빠져 죽는 현상과 해안가에 나타나는 형상처럼 아이들을 겁주려는 신화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제로 불법으로 낚시하던 어부 몇 명과 거북이 알을 밀렵하던 공원 관리자가 한 명이 괴물에게 공격받아 죽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 이제는 모든 주민이 그 이야기를 믿었다. 섬에 위험한 존재는 바다 괴물 외에도 상어, 창꼬치, 사람... 등 더 많았지만, 바다 괴물은 위험하기만 한 게 아니라 똑똑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그건 물속에서 나타난 게 아니라 해변을 따라 내려왔다. 처음엔 땅에 낮게 붙어 있어 마치 모래 위를 움직이는 얼룩 같았던 그것은 갑자기 팔 끝으로 일어섰다. 움직이는 모습은 문어가 맞았지만, 거의 사람 형체를 하고 사람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그게 가능한 것일까?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두족류의 지능을 연구하는 하 응유엔 박사는거 대 기업 ‘디아니마’의 의뢰를 받고 그곳에 도착한다. 하 박사는 깊은 밤 해변으로 올라와 두 개의 '팔'로 걸어다니며 조개를 사냥하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인간을 날카로운 조개껍데기 단면으로 찔러 죽이는 문어에 대해 연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인간과 유사한 형태의 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문어의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극중 하 응유엔 박사가 집필한 책 <바다는 생각한다>와 앤캐틀러 미너부도티어-첸 박사의 <마인드 건설하기>라는 책의 구절이 각 장 사이마다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 또한 대단히 흥미로웠다. 실제로 존재하는 책이라면 구매해서 읽어 보고 싶을 정도로 통찰력 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으니, 서사와 서사 사이에 방점을 찍어 주는 이 인용문들 또한 놓치지 말고 꼼꼼히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SF 소설을 꽤나 많이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다. 굉장히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을 토대로 쓰여진 데다 담담하게 흘러 가는 서사도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작품이 데뷔작이라니, 그저 감탄 또 감탄하며 읽었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할 수 있는 종이 아니에요. 절대. 분명 저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연약한 작은 사회, 이미 우리가 수 세기 동안 체계적인 거대 산업 규모로 망가뜨리고 있던 해양 생태계의 남은 부분마저 파괴하는 걸로 끝날걸요. 우리는 또 다른 종족들을 쓸어버리겠지요. 게다가 이번에는 자기들끼리 문화를 만들어 살아가고 있는 종족들을 말이에요. 멸종이 아니라 집단 학살이 될 거예요. 그것도 제가 그들이 사는 삶을 이해할 기회를 얻기도 전에 일어날 거라고요......"                p.405


이 작품의 배경은 '인류세' 말기이다. 인류세란 인류로 인한 지구온난화 및 생태계 침범을 특징으로 하는 지질학적 시기를 뜻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들 중심으로 생각하며 진화해왔고, 해양자원을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시키며 생존해왔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작품 속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존의 국가 개념이 모두 해체된 근미래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인간과 문어와 안드로이드라는, 결코 섞일 수 없는 ‘종’들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어 준다.




'과학'을 넘어선 이야기가 현실 세계에 펼쳐진 것 같은 이 소설은 언어에 대해서, 소통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보여준다. 책표지와 책배에 새겨진 문양들은 극중 문어가 만들어낸 신호이자 일종의 기호 언어이다. 바닷속 깊은 곳을 보여주는 듯한 푸른색 표지의 색감과 실버 컬러 띠지까지 책의 외관 또한 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매혹적인 입구가 되어 주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한 과학책을 읽다가 문어에 관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암컷 문어는 대부분 평생 단 한 번 알을 낳고, 그 알들이 부화하고 나면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암컷 문어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굶은 상태로 최장 4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알을 끌어안고 보호했다. 문어 알은 다른 생물들에게 귀중한 영양분일테니, 자리를 이탈해 사냥하러 갈 수가 없었던 거다. 오로지 몸에 저장해 둔 에너지로 무려 4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을 희생해 알을 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실제로 문어는 지능을 가지고 있는 굉장히 똑똑한 생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5억 개의 뉴런 중 일부만 뇌에 있고, 나머지는 8개 다리에 분포되어 각각 다리가 독립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어 뛰어난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닷 속의 산>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탐구하는 문어의 세계를 매우 현실적이고 과학적으로 구축해내고 있다. 그래서 SF 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과학 서적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는데, 덕분에 너무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이라니, 이렇게 생각하는 SF라니... 감탄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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