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에 문학동네에서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출간될 예정이란 소식을 들었다. 총 4권. 예습하는 뜻에서 미뤄뒀던 BBC 드라마를 보았는데, 연초에 KBS에서 수입하여 방영한 것을 결제하여 보았다. 경건하게 마음의 준비를 다 하였으나, 검수를 꼼꼼하게 하시는지 출간이 점점 미뤄졌고 출판사에 따로 문의를 넣기도 여러 번…. 결국 문학동네 카페를 염탐하기에 이르렀다. 『전쟁과 평화』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신이 났다. 정말 마지막 알림인 듯 한데, 10월이면 1권부터 순차적으로 출간된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분들께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지난 5월에 써 두었던 리뷰를 가져왔다.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는 순전히 사적인 감상이며 일부 정보는 당시와 달라졌을 수 있다. 이 드라마를 보았음은 짤막하게 페이퍼에도 쓴 적이 있는데, 『전쟁과 평화』를 정말 사랑하시는 ㅂ님께서 BBC 버전을 비롯해 이제껏 나온 영화들에 대한 평을 해주셨고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댓글을 읽으며 느껴지는 ㅂ님의 내공과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ㅠㅠ 나는 이래서 알라딘이 너무 좋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해당 페이퍼를 링크하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을 읽어보셨으면 한다.
페이퍼 Don't look back : http://blog.aladin.co.kr/769383179/8486555
이 글은 줄거리 요약과 BBC 버전 드라마에 대한 짧은 감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줄거리를 피하시려면 마지막 다섯 문단 혹은 네 문단만 읽으시길 권한다. 참고로 KBS 방영 버전은 자막이 있어 좋지만 편집된 부분도 있는 듯 했다. 이 드라마는 《피키 블라인더스》 등에 참여한 톰 하퍼의 연출이고, 《오만과 편견》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유명작품에 참여한 각본가 앤드류 데이비스의 이름이 눈에 띈다. 방대한 내용을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 6편으로 구성되었는데,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로케이션 촬영하여 분위기를 잘 살렸다. 영상미가 빼어나다.
작품은 1805년경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혁명에 긍정적이고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모습은 러시아 사교계와 맞지 않다. 그가 사생아라는 것도 따돌림 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피에르는 아나톨리 쿠라긴과 돌로호프의 방탕한 생활에 어울려 친우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의 진지한 충고를 받기도 한다. 안드레이는 사교계의 위선에 질려 임신한 아내를 아버지의 영지에 맡기고 전쟁에 나간다. 한편 피에르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예상치 못한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는다.
피에르는 곧 자신의 친척인 쿠라긴 공작의 딸 엘렌 쿠라기나와 결혼하게 되지만 조건을 노린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다. 쿠라긴은 아들 아나톨리도 부유한 지참금을 가진 안드레이의 동생, 마리야 볼콘스카야와 결혼시키려 하나 실패한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의 편에 서서 나폴레옹의 군대에 맞서나 크게 패한다.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다. 이 전투에서 안드레이는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데, 나폴레옹은 그가 생각했던 인물이 아니었고 전쟁이 얼마나 허망하며 삶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피에르는 투서로 인해 엘렌이 돌로호프와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되며, 자신을 조롱하는 돌로호프와 결투를 벌인다. 크게 상심한 그는 아내에게 결별을 고하고 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프리메이슨에 입단하는 한편 영지에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들을 돌보며 나누는 삶을 실천하려 애쓴다. 안드레이는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내가 출산 중 사망하자 염세주의에 빠진다. 소식을 들은 피에르는 친우를 찾아와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을 격려한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로스토프 가를 찾은 안드레이는 나타샤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조건이 많이 다른 이 혼인에 반대하는 아버지 볼콘스키 공작은 조건을 붙인다. 1년간 떨어져 있을 것, 돌아온 후에도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결혼하라는 것이다. 나타샤는 안드레이의 부재를 잘 견뎌냈지만 아나톨리 쿠라긴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 결국 약혼은 취소된다. 피에르는 나타샤를 위로하며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자각한다. 분노와 슬픔에 빠진 안드레이는 전쟁터로 복귀하고, 나타샤는 종교에 의지한다. 한편 볼콘스키 공작이 사망하고, 영지민들의 저항에 발이 묶인 마리야를 나타샤의 오빠 니콜라이 로스토프가 구해주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싹튼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안드레이는 병상에 누운 아나톨리를 발견하고,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용서한다. 퇴각하는 러시아군이 불을 지른 모스크바로 프랑스군이 진주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피난길에 오른 로스토프 가는 부상병들을 보살피고 안드레이와 나타샤가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나타샤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안드레이는 결국 세상을 떠난다. 한편 나폴레옹을 암살하려던 피에르는 프랑스군에 포로로 붙잡힌다. 그는 감옥에서 플라톤 카라타예프라는 농부에게서 삶을 대하는 태도, 깨달음을 얻는다.
퇴각하는 나폴레옹군을 추격하던 러시아군에 의해 피에르가 구출된다. 돌아온 피에르는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산다. (엘렌은 사망) 모스크바에서 마리야, 나타샤와 재회한 그는 안드레이를 추억하며 우정을 나눈다. 피에르와 나타샤, 마리야와 니콜라이는 전쟁이 끝난 후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다. 마음을 확인하고 가정을 꾸린 그들이 함께 식사하는 목가적인 풍경에,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피에르의 나레이션이 깔리며 드라마의 막이 내린다.
굵직한 줄기만 정리하다보니 줄거리가 간단해진 감이 있다. 드라마는 좋았지만, 원작 읽기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배우들이 아무리 호연했다 하여도 BBC 시각으로 각색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상이 무척 아름다우며 인물의 내면 변화와 깨달음을 얻는 장면들을 섬세하게 연출하고 있다. 안드레이의 경우, 그가 멍하니 하늘을 눈에 담으며 전쟁의 허무함과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장면, 피에르가 찾아와 허무를 떨치라 조언하는 장면, 나타샤와의 첫 만남,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반추하는 모습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영화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제: 시베리아의 이발사)》인데 그 이유는 러시아인들의 열정과 사랑, 순수하고도 거침없는 정신세계를 잘 녹여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지 안에서 살아가는, 또 그 땅을 가슴에 담은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적합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 그러니까 사고의 한계치가 애당초 다르다 해야 할까? 원작도 읽기 전이고, 문학 세계에서 편견을 갖고 싶진 않지만- 다소 절제된 분위기의 《전쟁과 평화》는 영국의 《전쟁과 평화》란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번역되는 모든 언어는 현지화 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 있으니 이런 생각은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3인- 피에르 베주호프는 폴 다노, 나타샤 로스토바는 릴리 제임스, 그리고 안드레이 볼콘스키는 제임스 노튼이 맡았다. 폴 다노의 영국 억양이 자연스럽다. 선함을 잃지 않는 피에르를 잘 표현한 것 같은데 배우가 동안이라는 것이 아쉽다. 뛰어난 연기로 유명하지만 피에르는 이제껏 맡은 배역(약간 도라이들)과 완전히 달라 새로웠다. 폴 다노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 캐스팅되었다.
볼콘스키 남매를 연기한 제임스 노튼과 제시 버클리 역시 인상적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사유하는 장면이 많은 안드레이를 표현했고, 종교적이며 신중한 마리야 역시 눈에 띠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좋은 만남을 가지는 중이란다. 반면 릴리 제임스가 분한 나타샤는 좀 별로였다. 《다운튼 애비》에서의 연기가 훨씬 낫고, 아직 대작의 주연을 맡기엔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니콜라이 역을 맡은 잭 로우든은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 수상자다. 돌로호프를 연기한 톰 버크도 인상적이었고 나폴레옹으로 나온 마티유 카소비츠도 반가웠다.
원래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 3부작’을 쓰려고 했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을 위해 그 시초가 되는 프랑스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피에르, 안드레이 등)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나폴레옹에 맞선 조국전쟁을 설명해야했다. 그래서 1869년에 출간된 《전쟁과 평화》의 원제는 《1805》였다. 1863년 집필을 시작했을 때 톨스토이의 나이는 겨우 서른다섯을 넘겼으니 여러 모로 대단하다고 하겠다. 1805년에서 1820년의 러시아,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철학을 담은 이 소설을 시일 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10월 10일 『전쟁과 평화』 1권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