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리마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76
바를람 샬라모프 지음, 이종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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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면서 별점을 매길 때 마다 후하게 주지 말자, 별 다섯은 없는 셈 치자 다짐하나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런 책을 읽을 땐, 첫 장을 넘기면서 한 방 먹은 기분을 느낄 땐 더욱 그렇다. 『콜리마 이야기』의 첫 번째 단편인 「설원을 걸으며」는 아주 오랜만에, ‘압도당하는’ 체험을 선사했다. 단 두 페이지, 24줄의 위력이었다.

 

수용소 문학이라 하면 떠오를 작품이 많겠지만, 내게는 도서관 한 켠에서 만난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3부작」이 처음이었고 이후로도 계속 관심을 둔 편이었다. 다양한 증언과 고발을 통해 알려진 대표적인 강제 노동 수용소(절멸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이다. 그 곳에 가스실이 있었음은 모두가 알지만,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목격자’들은 그 곳에서 사라졌기에, 우리는 수용소에서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일들을 짐작만 할 뿐이다. 따라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야 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이성적 한계를 넘어서는 그 상황을 전해야 한다. (영화는 오히려 생각을 제한한다. 『쇼아』가 그 긴 러닝타임을 오로지 ‘증언’으로만 채웠음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아우슈비츠, 독일이 운영한 강제 수용소와 비교했을 때 소련의 굴라그(강제 노동 수용소)의 비극은 주목도가 덜하다.

 

굴라그를 증언한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 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다. 김학수 교수님이 번역한 『수용소 군도』의 경우, 범우사에서 열린책들로 판권이 넘어갔지만 전집은 절판이며 오로지 1권만 구입이 가능하다. 예전에 문의한 바로는 재출간 계획이 없다고 해 안타까울 뿐이다. 그의 작품도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솔제니친과도 교류했던 작가, 바를람 샬라모프의 작품을 읽고는 말 그대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정말 좋다. 생전 두 작가는 서로 교류한 바 있다. 솔제니친의 작품이 사미즈다트(지하출판)으로, 그리고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그 비극을 알릴 수 있었다면 샬라모프의 작품은 자국에서조차 오랜 시간 출간되지 못했다. 『콜리마 이야기』는 작가가 사망한지 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출간되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 작품은 유기적인 짧은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샬라모프 전집 7권 중 1권이다. 작품들의 분량만큼 내용이 간결하며 명확하게 서술되는데, 러시아 문학을 읽을 때 까다로울 수 있는 이름들도 전혀, 독서에 방해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이 곳의 반역, 반체제 인물들은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콜리마는 극동이자 극북에 위치한, 스탈린 체제 하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강제 노동 수용소이다. 수인들은 광산에서 노동한다. 아무리 건강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 곳에서 수개월이면 도호댜가(기진맥진하여 죽어 가는 사람)가 된다. '부실한 옷과 빈약한 배급 식량, 동상' 거기에 '엄청난 정신적 압박이나 절망'이 가세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하며, 그들의 일상생활은 굉장히 상세하게 그려진다. 담담한 필치로 있는 그대로 묘사되기 때문에 콜리마의 삶(그것을 삶이라 할 수 있다면-시인 네크라소프 인용)은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수용소 생활은 폭력에 취약하다. 권력은 깡패들이 쥐고 있으며, 지도부와 의사도 자유롭지 않다. 카드놀이에 걸 물건을 뺏기 위해 일어나는 살인, 도둑질은 일상으로 보인다. 무덤을 파 고인의 옷을 벗겨 속옷을 취하는 모습, 극도의 굶주림에 인육을 먹거나 얼어붙은 돼지를 훔쳐 그대로 입에 우겨넣는 모습, 광산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환자와 그를 적발하려는 의사(심지어 수인 출신)의 잔인성...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과 도둑질은 북극의 미덕이라 칭할 정도이다.

 

수인들은 생존을 갈망한다. 절망 속에서도 단 몇 시간의 노동하지 않을 자유, 잠깐 동안 몸을 녹일 수 있는 난로 앞에서의 특권, 빵을 하나 더 얻는 것과 같은 일을... 사랑과 우정, 연민으로 울어본 적은 있어도 배고파 울지는 않았다는... 아, 어떻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을까. 내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수용소가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언어를 넘어서는 그 비참함은 오로지 수인생활을 했고, 그를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은 작가의 글로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샬라모프의 다른 작품들도 이어 출간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큰 아이처럼 행동하고 연극에 열중하는, 화내지 않고 어린애처럼 서로 말다툼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행동을 눈치채고 감동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진짜 깡패 세계의 인간을 만나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그런 세계에 대해선 그 자신이 어떤 동정의 말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

  수용소 내에서 강도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수없이 많다. 불행한 사람은 강도에게 마지막 넝마를 빼앗기고 마지막 돈을 빼앗기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고발을 두려워한다. 강도가 수용소 당국보다 막강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강도는 노동자를 구타하고 노동을 강제한다. 수만 명이 강도에게 맞아 죽었다. 수용소에 수감된 수십만 명이 강도의 이데올로기에 정신적으로 타락하여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깡패의 무엇이 수인의 영혼 속에 영원히 자리를 잡았고, 강도와 강도의 모럴은 모든 사람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영원히 남겼다.

  수용소 관리는 난폭하고 잔인하며, 교육 담당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의사는 양심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깡패 세계의 폭력에 비하면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수용소 당국은 그래도 인간이다. 그렇다, 그렇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인간적인 면이 보인다. 그러나 깡패는 인간이 아니다.

  깡패의 도덕이 수용소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한하고 전면적이다. 수용소는 완전히 나쁜 인생 학교이다. 유익하고 필요한 것은 누구나 아무것도 거기서 얻지 못한다. 수인 자신도, 그 관리도, 경비도, 우연한 목격자도, 이를테면 기사, 지질학자, 의사도, 수용소의 상관도, 그 부하도.

  수용소 생활의 1분 1초가 독이 되지 않는 시간이 없다.

  거기엔 인간이 알아서는 안 보아서는 안 될 일이 너무 많다. 만약 보았다면 죽는 편이 낫다.

  수인은 거기서 노동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채울 수 없다.

  수인은 거기서 아첨과 거짓말, 크고 작은 비열한 행위를 배우면서 이기주의자가 된다.

  자유의 몸으로 돌아갈 때 수인은 수용소 시절 동안 자신이 성숙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관심이 편협하고 부족하고 난폭해진 것을 안다.

  도덕의 벽이 어디론가 옆으로 밀려났다.

  비열한 짓을 하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거짓말하고도 살 수 있다.

  약속은 할 수 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친구의 돈을 술값으로 써 버릴 수 있다.

  구걸하며 살 수 있다! 걸식하며 살 수 있다!

  사람은 비열한 짓을 하고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수인은 태만, 거짓,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증오하는 데 익숙해진다. 자기 운명을 슬퍼하며 온 세상을 비난한다.

  사람에게 저마다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고통을 과대평가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동정을 잊어버린다. 그냥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회의. 그것은 아직 괜찮다. 그것은 수용소의 유산 중 아직 나은 편에 속한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배운다.

  그는 두려워한다. 겁쟁이가 된다. 자신의 운명이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밀고를 두려워하고,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분쇄되었다. 도덕관이 변했는데, 그 자신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콜리마 이야기』, 「적십자」, 252-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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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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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의 진 루이즈는 뉴욕에서 메이콤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되어 잠시 다니러 온 것이다.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독립심이 강하며, 전형적인 남부 여성으로 그려지는 알렉산드라 고모와 대척점에 서 있다. 바지와 코르셋은 두 사람의 거리감을 보여주는 단어다. 진 루이즈는 고모가 질색하는 백인 하층민 출신(화이트 트래쉬)의 변호사 행크와 데이트하면서 그와 결혼한 모습을 그려보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고향에 돌아와 추억을 더듬던 것도 잠시, 그녀는 아버지와 행크가 참여하는 메이콤 주민 협의회가 실은 인종차별 집회임을 목격한다. 동류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배신에 진 루이즈는 고통스러워하고, 아버지를 우상화하던 자신-어린 스카웃-을 졸업함으로써 성장하는 모습이 주된 줄거리이다.


진 루이즈는 메이콤을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그리워한다. 뉴욕에서도 ‘메이콤 트리뷴’을 읽으며 고향에 대한 소식을 찾는다.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한 애정은 핀치스 랜딩을 팔았다는 말에 반응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그녀에게 메이콤은 동화 같은,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소중한 세계이다. 그래서 진 루이즈는 ‘귀향’한 날, 아빠의 질문-연방대법원의 판결과 NAACP(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상상조차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잭 핀치의 말대로 진 루이즈는 ‘인종적으로 사고’한 적이 없으며, 그녀에게는 ‘사람’만 있을 뿐이니... 1950년대 미국은 인권운동이 일던 시대였다. 애티커스의 질문 속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여 교육시키는 것이 불법이라 선고한 것이다. 진 루이즈가 얘기하는 ‘버스 스트라이크’는 버스에서도 행해진 인종분리,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강요받은 로자 팍스의 거절에서 비롯한 운동들을 가리킨다.

 

『파수꾼』의 절정은 애티커스와 진 루이즈의 설전이다. 이 대화를 통해 진 루이즈는 어린 시절, ‘스카웃’을 졸업하게 되는데 이보다 핵심을 찌르는 것은 잭 삼촌과의 대화이다. 아빠와 행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조카의 말에, 잭은 ‘남부 전역에서 거의 사라진 철학’ 얘기를 꺼낸다. 인척으로 구성된 보수적인 지역 사회, 농경을 중심으로 한 중세 장원과 같은 사회. 이들을 내전에 참여하도록, ‘동족 의식’을 부여한 것은 ‘남부의 정치적 독자성’을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실제 노예를 본 사람은 5퍼센트에 불과했으므로 결코 ‘노예’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목적은 남부 연합의 국가 승인, 연방 탈퇴였고 노예제는 구실이었을 뿐이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시간이 흘러 재건되었어도 남부의 ‘자치’에 대한 유산은 여전했다. 진 루이즈의 헌법 제 10조에 대한 생각, ‘연방이 주의 자치권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역시 남부 사람다운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재건된 남부는 연방(북부)의 간섭이 탐탁지 않다. ‘남부의 전통과 가치를 수호’하고, ‘남부의 일은 남부가 알아서 한다’는 생각은 당시 인권 운동의 선봉에 섰던 NAACP와 맞물린다. 새로운 문명에 준비되지 않은 남부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연방정부가 거대정부가 되어 자치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공포가 불러온 결과는 애티커스가 ‘방어’라고 표현한 지역 공동체(클랜)들의 성립이었다. 남부와 북부의 발전 정도와 가치관의 괴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영화화된 소설 『헬프』와 진 루이즈가 커피 모임 전 고모와 나눈 대화를 교차해보자. 알렉산드라는 메이콤 가정부들이 몇 해 동안 NAACP 회원이었다며, 고용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1960년대 미시시피 주를 배경으로 하는 『헬프』에서 흑인 가정부들은 고용주의 가정을 돌보지만 사소한 일로도 해고당하며, 주인과 같은 화장실을 쓰지도 못한다. 이런 배경, 그보다 앞선 시기의 메이콤에서 백인과 흑인이 같은 교실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연방’의 법령이 어떻게 받아들여졌겠는가?

 

진 루이즈는 이러한 논리를 가진 애티커스를 거세게 비난하며, 이 모습은 자신의 가치를 고집하는 알렉산드라 고모와 겹쳐진다. 잭의 말대로 고집불통다운 모습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들의 본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색맹’이라 자책하지만, 그 범주에 스스로를 넣지 않았다. 진 루이즈는 메이콤 유지인 핀치 집안에서 태어났고, 변호사이자 주 의회 의원을 역임한 애티커스의 딸이다. 그녀의 행동들은 행크의 말대로 ‘스카웃’이기 때문에, 핀치 집안의 아이이기 때문에 용인된다. 캘퍼니아 집에 들어서는 진 루이즈에게 경의를 표하는 흑인들을 떠올려보자. 그들 중 한 명은 직업학교 교장이자 교수요, 다른 한 명은 목사였다. 아버지 뻘인 지보는 그녀를 ‘미스 스카웃’이라 부르며 쩔쩔맨다. 엉망인 문법을 구사하며, 자신을 ‘백인’으로 대하는 캘퍼니아 앞에서 절망하는 진 루이즈. 그 집 지붕 아래 있는 흑인들과 캘퍼니아는 무엇이 다른가. 진 루이즈는 자신이 사회에서 ‘핀치’ 집안의 ‘백인 여성’으로서 누리는 권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동류라 생각했기에, 하층민 출신의 백인과는 결혼을 생각해보지만 흑인과의 결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 루이즈 역시 보수적임을 보여준다. 흑인들이 능력을 발휘할 교육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간과하고, 그들을 이류 시민으로 분류하는 아버지에 반대하는 그녀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생각의 물꼬를 틔워주며 대화를 주도하는 잭도 마찬가지다. 또 진 루이즈가 스스로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기보다 잭의 조언을 받아들여 고향에 남을 것을 시사하는 대목도 좀 안타까웠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진 루이즈가 그 시대 여성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롭게 사고하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독립한 주체적인 존재로서 성장하는 주인공이,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주장만큼이나 진보적이라 느껴졌다. ‘파수꾼은 개인의 양심이지 집단의 양심이 아니다’라는 잭의 말은, 자신의 양심과 아버지의 양심을 동일시했던 ‘스카웃’과의 대화 속에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집단의 양심’이 필요하다. 소설 속에서도 NAACP의 존재가 두려움을 불러오지 않는가. 진 루이즈는 남부 사회에서 자라났지만 그 가치관을 이어받지 않은 별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별종, 기득권층에 있으면서 소외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는 별종들이 함께, ‘집단적 양심’을 형성하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백인들이 참여하면서 인권 운동이 더 활발해졌던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에서 그려진 애티커스의 변화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오히려 『앵무새 죽이기』에서 느꼈던 그의 수동성(톰의 변호는 판사의 지명, 흑인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대한 의문이 『파수꾼』을 통해 풀렸다. 또 애티커스가 NAACP의 활동을 포퓰리즘이라 하고, 잭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프레임 논리를 지적하는 두 형제의 시각 차이도 흥미로웠다. 『파수꾼』이 『앵무새 죽이기』의 초고였다는 사실은 다듬어지지 않은 적나라함에서 알 수 있었고 (주석의 도움 없이) 책장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는 점은 개고를 권한 편집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품보다 쉽고 명확한 교훈을 드러내는 『앵무새 죽이기』와 언제나 비교되겠지만, 거기서 얻는 즐거움도 지극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청사에는 남부연합 국기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인종차별문제와 폭력사건들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다른 대륙에서는 정체성 문제로 심화되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도 여전한 갈등... 다시 한 번, 문학의 울림이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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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9-02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리뷰는 진짜 짱이에요!

그렇지만 전 파수꾼을 읽기 위해서는 앵무새 죽이기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오래되어서..

에이바 2015-09-03 10:2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고맙습니다. >_<

오류를 고쳤어요. 『헬프』와 교차한 부분은 헤스터가 아니라 알렉산드라 고모와의 대화였어요! 『파수꾼』을 먼저 읽으셔도 상관없는데 앞부분은 많이 지루했어요. 스카웃(진 루이즈) 폭발하는 장면쯤 되면 흥미로워져요. 역시 싸움구경이 최고(?) 이례적으로『파수꾼』은 두번 읽고 리뷰를 썼어요.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cyrus 2015-09-02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수꾼>과 <헬프>의 한 장면을 비교하는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조만간 <앵무새 죽이기>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이것과 같이 읽을 수 있고, 비교할만한 흑인 문학 작품을 알아보고 있어요.

에이바 2015-09-03 10:25   좋아요 0 | URL
cyrus님 댓글 달아주신 후 오류를 고쳤어요. 『헬프』와 교차한 부분은 헤스터가 아니라 알렉산드라 고모와의 대화였어요. 『헬프』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작품이고, 알렉산드라 발언 부분에서 떠올라서 언급하게 되었어요. ^^
 
노예 12년 - Movie Tie-in 펭귄클래식 139
솔로몬 노섭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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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년 뉴욕에서 태어난 솔로몬 노섭은 ‘자유인’으로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일거리가 뜸해지는 시기에 나타난 두 사내는 서커스단의 바이올린 연주자를 찾는다며 후한 삯을 약속한다. 다른 도시로 가기에 앞서, 자유인이라는 증서를 발급받으라는 충고를 한 그들을 신뢰하는 솔로몬. 건네받은 술 한 잔에 정신을 잃었던 그가 깨어난 곳은 워싱턴 DC, 아이러니하게도 국회의사당을 마주본 건물의 지하였다. 자신이 법의 수호를 받는 자유민임을 알리자 돌아온 것은 심한 매질이었다. 그는 자유를 기다리며 적당한 때를 기다린다. 그 적당한 때는 12년이 지나서야 선의의 이름으로 찾아온다.

 

솔로몬 노섭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흑인이었기 때문에 노예로서 경험한 대우, 그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다. 실제 그의 구명을 위해 주고받은 편지들은 이 글이 상상이나 과장이라 할 만한 논란을 불식시킨다. 특히 목화와 사탕수수 재배를 설명하는 챕터를 보면 사실적인 기술에 놀라게 된다. 노예는 재산, 동산이라는 말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자신을 죽이려고 개 떼를 푼 작업반장으로부터 달아나, 뱀과 악어가 득실거리는 늪을 지나는 생고생을 하고서도 다시, 주인집 앞에 서야했던 그에게 어찌 이런 말을 하겠는가. '자유를 열망하면서 왜 도망치지 않았냐'고. 기적 같은 만남으로, 12년 만에 자유를 되찾은 솔로몬은 노예상인들을 고소하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증언의 효력이 없다. 이후 그는 노예 해방을 위한 운동에 투신한다. 솔로몬의 르포는 헤리엇 비처 스토에게 헌정되었다. 바로 남북 전쟁을 일으킨 문학으로 함께 손꼽히곤 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작가이다. 솔로몬은 노예주를 탓하기보다는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노예 제도의 존재가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더 악화시키는 것 같았다. 날마다 인간이 고통받는 모습을 목격하면 잔인하고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노예들이 괴로워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죽어 관도 없이 묻히는 모습을 보는데, 어떻게 인간의 목숨을 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물론 어보이엘르 교구에도 윌리엄 포드처럼 선하고 착한 사람은 많았다. 전지전능한 신께서 창조하신 그 어떤 생명의 고통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 여리고 착한 타지인처럼 이들도 노예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고 아파했다. 노예 상인의 잔인함은 개인의 잘못이 아닐 제도의 잘못이다.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관습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노예의 등을 채찍으로 내리치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어릴 때 고착된 인식은 좀처럼 바꾸기 힘든 법이다. [14장 중에서]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관습과 문화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기 어렵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고 하지만 이 명제에서 말하는 인간이라는 단어는 일부 인간에게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이미 '구별짓기' 되는 것이 아닌가... 『노예 12년』의 이야기는 비단 흑인들만의 이야기라 볼 수 없다. 솔로몬은 노예시장에서 자유인이었던 ‘동양인’도 만났다. 그 시절이었다면 ‘나’도 ‘노예’로 팔려 조금이라도 채찍질을 피해보려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뉴욕에 살 때 솔로몬이 ‘다른 흑인’들이 노예로 고통 받는 사실에 무감했던 것처럼, 일상 속에서 나 역시 ‘차별’로 인한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윌리엄 포드처럼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내 안위와 이익을 위해 눈감고 모른 체 하는 일들... 차별은 나 혹은 우리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집단을 '범주화'하는 행위이다. 요즘에는 차별보다 혐오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청사에서 남부군 국기를 내린다는 기사를 봤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6월, 찰스턴 시 교회 총격사건 가해자가 인종전쟁을 일으키겠다며 남부군 국기 앞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을 주도했던 주였다. 놀랍지 않은가. 남북전쟁이 끝난 지 150년인데 공공장소에 떡하니 걸려있는 남부군 국기라니... 노예제는 더 이상 '합법'이 아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방법만 달리할 뿐 다른 의미의 노예제는 여전하다는 생각도 든다. 노동과 경제는 뗄 수 없는 문제이니 이제는 인종, 문화, 성, 연령에 따른 인권 문제로 부상하는 듯하다. 진정한 글로벌이라 해야할까... 사회가 진보해도 여전히 제자리일 수 밖에 없는 걸까. 55년 전 쓰인 『앵무새 죽이기』가 오늘날 여전히 미국 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니, 어쩌면 편견/구별짓기는 사회가 발전한다고 해서 쉽게 타파될 수 없는 것일지도. 솔로몬이 지적하는 자연스러운 관습의 문제점과 타자화를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더불어 교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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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8-2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고착된 인식은 좀처럼 바꾸기 힘든 법이다` 를 보니,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네요. 에이바님도 리뷰 말미에 쓰셨고요..

에이바 2015-08-28 11:46   좋아요 0 | URL
여러 갈래로 생각해봄직한 이야기죠. 씁쓸하기도 하고요... 우리나라에서 이미지 좋은 북유럽 복지와 평등도 교육에서 시작되고요. 인간이 부단히 배우는 존재이니 더 많이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아요.

sijifs 2015-08-2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전 영화를 보다가 솔로몬 노섭이 자유인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평온함때문에 그를 풀어주지 않은 ˝착한˝백인이 솔로몬을 납치하거나 비인권적으로 대한 ˝나쁜˝백인보다 더 싫었습니다. 이 글을 읽다 갑자기 그 착한 백인이 생각나네요

에이바 2015-08-28 11:53   좋아요 0 | URL
시지프스님 말씀에 중도는 XX이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결국 침묵은 동조라는 얘기겠죠... 근데 솔로몬은 그 백인 `주인`을 좋아했어요. 이해도 좀 하고... 당사자 일이 되면 아무래도 그렇겠죠.

sijifs 2015-08-28 17:26   좋아요 0 | URL
솔로몬의 주인이었던 사람 중에서 그나마 제일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던 사람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래도 욕하고 때리는 사람보다야 인간적으로 대해주려고 한 사람이 나으니까요

에이바 2015-08-28 19:0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그래서 솔로몬이 어쩌면 자유인이라고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도 솔로몬을 악덕 주인에게 팔아요. 솔로몬을 아낀 것은 어쩌면 인간이라기보단 가치재이기 때문일지도... 한계가 있죠...

2015-08-28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8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8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9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5-08-29 20:13   좋아요 0 | URL
저도 막 4부 시작하는 중인데.. 앞부분이 너무 지루해서 진도가 안나가더군요. 이제 막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게 비록 전에 쓰여 프리퀄이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되었자나요. 흥미로와지고 있었는데 낮에 스크린 채널에서 타임 패허독스란 영화를 봤는데 갑자기 중산부터 봐서 원작이 있나 살피다가 sf 세트 네권짜리를 사버렸어요. 이북으로.. 단편이라 살짝 새치기 중.. 제가 이래요. 이거 읽다 저거 읽다.. ㅎ

2015-08-29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5-08-29 20:24   좋아요 0 | URL
앗 그영화 알고 계시군요. 전 중간부터 봤는데 놓쳐서 얼마나 아쉬운지.. 얼핏 자막 올라가는 거 버니까 로버트 하인라인이라구 본 것 같아서 책 뒤졌더니 dvd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운좋으면 4권짜리 단편 중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거의 처음 읽는 본격 sf장르라 새롭네요. 얼마전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자젤도 사 놓고 못봤는데 아 읽을 욕심은 많은데 잡다구리한 일은 많고 주말이면 많이 읽으려고 벼르지만 먹고 치우고 씻고 뭐하러 이리 쓸데없이 낭비하며 살아야 되나 싶어 짜증이 나네요

2015-08-29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5-08-29 21:02   좋아요 0 | URL
이런 세계가 있었군요. 단편일 거라 예상은 햇지만 이렇게 짧을 줄은 헐
. 감사합니다. 에이바님에게 물어보면 뭐든 해결되네요 ㅎㅎ

2015-08-29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8-2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미국의 노예 차별 문제가 동성애 이슈보다 더 오래 갈 것 같아요. 미국 대통령이 흑인인데도, 일부 지역에서는 비인간적 차별이 잔존하고 있으니까요.

에이바 2015-08-28 19:07   좋아요 0 | URL
인종 차별이요? 아무래도 그렇죠. 어떤 성별에 끌리느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지만 피부색과 생김새는 그럴 수 없으니까요... 말씀대로 흑인 대통령 집권기에 유색인종 강경진압 등 차별 문제가 불거지고 있죠... 어쩌면 그동안 봉합해 온 문제들이 터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요..

cyrus 2015-08-28 22:27   좋아요 0 | URL
흑인 차별인데 제가 실수로 ‘노예 차별’로 잘못 썼어요. ^^;;
 
로마 공화정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
데이비드 M. 귄 지음, 신미숙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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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제국 이전, 공화정 시기의 로마를 다루고 있다. 건국 신화를 통해 도시국가 로마의 기원을 살펴보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화하게 된 계기를 설명한다. 공화정 체제가 안착한 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세력이 된다. 이 시기의 로마는 ‘디그니타스와 글로리아’ 즉, ‘위엄과 영광’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선조들의 업적을 모방하고 능가하라는 요구는 후손들이 정복전쟁에 몰두하도록 채찍질한다. 로마에 있어 가장 큰 영광은 정복 전쟁 후 개선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마르스 평원과 대경기장을 지나 유피테르 신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 끝나는 여정이다. HBO TV 시리즈인 『롬Rome』에 등장하는 사례를 보자. 카이사르 시해를 망설이는 브루투스를 설득할 때, 카이사르의 ‘독재’를 과거의 ‘왕’에 비유한다. 브루투스의 직계 선조가 왕을 끌어내린 주역, 공화정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젊은 귀족들은 정복전쟁에 몰두하게 되고, 팽창한 로마는 내부의 모순을 견디지 못한다. 공화정의 몰락을 불러온 셈이다.

 

로마의 지배층을 지배한 ‘위엄과 영광’은 로마인의 생활과 정치,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파트로누스와 클리엔스’라는 ‘보호자와 피보호자(피호민)’이라는 관계형성은 로마시민의 계층화를 불러온다. 자영농 군인, 노예와 도로망 구축에 따른 정복전쟁과 무역의 번성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계층은 로마인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로마인의 두번째 이름인 씨족명은 사회적 서열을 나타낸다. 또한 이름을 통해 가문의 역사와 형제 중 맏이인지를 알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로마의 종교는 주신(유피테르: 그리스의 제우스)이 따로 있었지만 새로운 신에 개방적이었다. 이는 만신전으로 확인된다. 외국신을 로마에 흡수함으로써 정복지와의 유대감을 확립하면서 로마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세 번의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 공화정은 중요한 변화를 맞이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등장으로 공화정 최초로, 한 개인의 권위와 영광이 원로원의 집단 지배권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스키피오 이후 나타난 기사계층과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로 인한 빈부 격차는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 시도를 불러온다. (이들의 농지개혁은 실패하지만 이후 카이사르가 계승한다.) 잇따른 군사적 위기는 군사지도자, 군벌의 출현을 불러온다. 그 시작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였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이어진다.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가 다루는 시기이다.)

 

공화정기 문화의 절정은 기원전 1세기의 카툴루스와 키케로가 수립했는데, 키케로는 마리우스처럼 아르피눔 출신의 신진세력이었다. 위대한 웅변가였던 그는 군사적 재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천재였으며 로마 하면 떠오르는 문장가이기도 하다. 당시 로마인들의 가치와 세계를 반영한 예술과 건축, 회화와 조각 등도 소개하고 있다.

 

로마 공화정은 5백 년 동안 지속된 체제이다. 왕의 추방에서 시작하여 황제의 등장으로 끝나는 로마의 비극은 외부의 공격이 아닌, 내부 투쟁에 의한 것이었다. 앞서 밝혔듯이 귀족간 경쟁, ‘영광’에 대한 갈망은 로마를 팽창시켜 군벌을 탄생시키고 내란을 불러온다. 『로마 공화정』에서는 제정 시기로 넘어간 로마도 살짝 다루고 있다. 제국으로의 변모는 로마시민권의 확대를 불러왔고, 4세기 기독교가 로마에 뿌리내리면서 공화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화정의 역사와 영웅 이야기는 성경에 반영되었고 기독교 교부들의 저술이 키케로의 자리를 대신했다. 14세기, 르네상스 시기 로마 공화정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마키아벨리와 셰익스피어는 로마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 여러 저술을 남긴다. (셰익스피어의 경우는 희곡) 흥미로운 것은 로마 공화정이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데 그 부분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공화정 시기의 로마를 정리하기에 제격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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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
토머스 하디 지음, 서정아.우진하 옮김, 이현우 / 나무의철학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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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버빌가의 테스》를 쓴 토마스 하디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첫 작품이라길래 궁금해졌다. 캐리 멀리건이 출연하는 영화도 있고... 1874년에 쓰인 소설이지만 현대의 로맨스 구도와 아주 유사하게 흘러간다. 여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세 남성의 이야기인데 당시 사회나 종교적 함의를 더 알았다면 좀 더 색다르게 읽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밧세바는 좋은 교육을 받고 외모도 뛰어난 젊은 여성이지만 재산이 없어 숙모 댁에서 일을 돕는다. 같은 마을의 자영농 가브리엘 오크가 청혼하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얼마 후 가브리엘은 사고로 재산을 모두 잃게 되고 삼촌의 유산을 상속받은 밧세바는 부유해진다. 가브리엘은 밧세바의 농장에서 양치기로 일하게 된다. 밧세바는 방종한 관리인을 내쫓고 직접 농장을 관리하는 한편, 이웃 볼드우드에게 장난으로 발렌타인 카드를 보낸다. 볼드우드는 진지하게 구애를 하고,  이에 놀란 그녀는 자신이 경솔했다며 진심으로 사과한다. 꽤 슬기롭게 농장을 꾸리던 밧세바는 잘생긴 군인 트로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주변인들 몰래 결혼한다. 트로이는 도박에 빠져 농장을 빚더미에 올린다. 주인공이 어리석은 결혼을 후회하고 있을 무렵, 남편의 옛 애인이 주검이 되어 나타나고 이어 남편도 실종되는 등 한바탕 사건이 벌어진다.

 

소재만 보면 호러가 따로 없다. 죽음, 살해, 사형, 화재 등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주인공 밧세바의 ‘허영’을 벌하기 위한 장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허영은 있지 않은가. 하물며 외모가 뛰어나고 좋은 교육을 받은 인간이라이라면 더욱! 밧세바가 손거울을 보는 모습을 지켜본 가브리엘은 이를 허영이라고 평가한다. 혼자 있다고 생각한 순간까지 ‘평가’받아야 하는 여성의 운명이여! 밧세바가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거울 좀 봤기로서니... 그녀에게 구애한 세 남자 모두 밧세바의 외모를 칭찬하고 인정하지 않는가. 물론 밧세바가 충동적인 구석이 있긴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대부분의 경우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엄청난 결점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지역사회에서 존경받고 나이도 지긋한 볼드우드는 농장을 팽개치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트로이의 실종 후 조용히 살고 있는 밧세바에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볼드우드의 모습은 소름이 끼친다. 트로이와 패니, 아기 문제와 농장, 사람들의 시선에 ‘밧세바 볼드우드’라는 이름표가 달린 혼수들이 빼곡한 방이 합세하니... 밧세바의 어리석음을 탓하다가도 불쌍해지는 것이다. 그녀의 ‘허영’을 벌하고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 해도 너무 가혹한 일들이 아닌가.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보는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오크가 스스럼없이 ‘아내’라 지칭하고 주위의 축하를 받지만 밧세바가 웃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부분 말이다. 이례적으로 독립적이라 평가받던 여성도 결국 누군가의 ‘아내’로 끝난다. 이 소설이 페미니스트 문학으로 꼽히는 이유가 밧세바의 '독립심'이라는 이유라는데 여러모로 시대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나마 신부가 마냥 웃지 못했다는 것, 결혼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쉬운 점을 조금 달랜다.

 

이 소설은 로맨스를 다루면서도 자연 풍경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과 상호작용이 아주 섬세하다. 토마스 하디가 중요하게 여긴 요소인 듯하다. 그런 점에서 가브리엘 오크는 밧세바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가브리엘은 종교를, 오크는 자연을 상징한다. 소설 초반부에서 그가 말 없이 자연과 합일하는 모습과 교회성가대의 베이스를 맡은 신앙심을 떠올려보자. 더불어 밧세바를 향한 헌신과 의리는 그 ‘모든’ 일을 겪은 여주인의 애정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재산도 좀 모아진 터라 신분 차도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말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왜, 토머스 하디가 여주인공에게 밧세바라는 이름을 주었을까 하는 것이다. 밧세바는 성경 속 우리야의 아내로, 다윗 왕의 눈에 들어 동침해야 했던 안타까운 여인이다. 남편은 심지어 전장에 나가 죽지 않는가.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본 건 다윗인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탕녀가 되어버린 인물, 주변 남성에 의해 평가된 소설 속 여주인공의 모습과 겹친다면 비약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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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8-24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읽으려고 사뒀기 때문에 이 리뷰를 읽지 않으려고, 첫 단락만 읽고 그냥 패스하려고 했는데, 다 읽어버리고 말았어요. 하하하하하. 그나저나 마지막 단락의 성경속 밧세바 얘기가 더 흥미롭네요. 저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성경을 읽어야 하는걸까요? 흐음.

에이바 2015-08-24 13:06   좋아요 1 | URL
아뇨아뇨 다락방님 제가 말씀드릴게요. 짧은데 기억에 의존하는 거라 디테일은 틀릴 수 있어요.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게 짱돌 던져서 이긴 건 아시죠. 그 다윗이 왕이 되고 시간이 흘러 늙고 지쳤던가 그래요. 그러다 어느 밤 옥상을 걷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욕정을 느껴요. (이 부분이 어디선 유혹이라고 해석되는데 제가 본 이야기는 밧세바는 다윗이 보는 걸 몰라요.) 밧세바는 유대민족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던가 그래요. 남편은 우리야 장군이고 금슬도 좋았어요.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 동침하죠. 애가 생겨요.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으려 우리야를 전장에서 소환해요. 충신인 그가 집에 돌아가 동침하지 않은 걸 알고 죄를 덮으려 우리야를 가장 치열한 전장에 보내 전사시켜요. 밧세바를 아내 삼고요. 이로 인해 신이 노해 벌을 내리고 태어난 아이는 죽어요. 결국 다윗의 욕심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결국 권력에 대항 못한 밧세바(남편과 아이의 죽음)는 벌을 받고 다윗은 용서받아요. 참고로 다윗과 밧세바의 둘째 아들이 솔로몬 왕이에요.

그러고 보니 등장인물들의 포지션과 겹치는 부분이 있네요... 관음하는 장면도 그렇고요. 어느 이야기에서나 밧세바는 참 안 됐어요...

one fine day 2015-08-24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로 봤는데요. 영화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서 꺼리짐한 스토리는 다 패스가 되더라구요. 여주가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주체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었습니다. 영화에서 밧세바와 볼드우드의 함께 노래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전 그장면에서의 밧세바가 참 아름다웠어요. 뭐랄까.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고 격정적인 사랑도 다 빛을 바래지만, 그 순간만큼은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주는 듯 했죠.
원작이 있는 영화들은 대부분 영화보다는 책이 더 좋을 때가 많은데, 이 소설은 책으로 보면 많이 답답하지 않을까 싶어 망설여지네요.

에이바 2015-08-24 13:54   좋아요 1 | URL
one fine day님 말씀처럼 수긍할 만한 전개였어요. 아무래도 페미니즘 문학이라 생각하고 읽었기 때문에 순전히 밧세바 입장에서 쓴 리뷰이고요... 사실 글을 읽으며 밧세바가 별난 여성으로 여겨질지언정 어디 감히 여자가 이런 느낌이 들진 않아서 좋았어요. 세 남성 모두 밧세바에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적어도 말로는 말이죠. ^^;; 글의 전개는 속도감 있고 명쾌해서 말씀하신 부분들이 답답하진 않았어요. 초기작이니만큼 덜 다듬어진 맛은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흐름이 얼마나 섬세한지... 영화를 좋아하셨다면 원작도 괜찮다고 느끼실 거예요. 저는 배우들 모두 제 상상보다 예쁘고 멋져서 좀 슬펐어요.

프레이야 2015-08-24 14:09   좋아요 0 | URL
영화제목은 무엇인지요?

에이바 2015-08-24 14:16   좋아요 1 | URL
영화 제목도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입니다. 캐리 멀리건이 밧세바로 나오고요. 가브리엘과 볼드우드가 잘생겨서 슬프더라고요. ㅠㅠ 로맨스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프레이야 2015-08-24 14:25   좋아요 1 | URL
캐리 멀리건‥ 아 그러고보니 제목 본 기억이 납니다. 찾아서봐야겠어요.~^^

one fine day 2015-08-24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마스하디 작품은 워낙 테스에서 질려버려서 좀 망설였는데 읽어보겠습니다 ^^
영화제목은 책 제목과 같구요. 제가 아름답게 본 장면의 배경의 음악이 유튜브에 있길래 퍼왔습니다 ^^.

http://youtu.be/WCm1XNVD_0c

에이바 2015-08-24 14:28   좋아요 0 | URL
테스보다는 혈압이 덜 올라요. 테스는 정말 ^^^^^^^^^^^^^^!!! 캐리 멀리건은 노래도 잘 하네요. 영상도 아름답고... 잘 봤습니다.^^

꼬마요정 2015-09-05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서... 좀 찝찝했어요. 그 시대에 여자 혼자 살기 힘들어 결혼을 해야 한다면 그래도 오크가 낫긴 하죠. 나름 신의도 있고... 볼드우드는 무서웠어요. 얼마 전 기사에서 본 애인을 살해한 남자 같다고나 할까요.. 여튼 재미있게 읽었어요. 불쌍한 밧세바..

에이바 2015-09-08 14:4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볼드우드의 집착이 섬뜩했어요. 밧세바가 가진 것 없는 여성이었다면... 음... 그래도 오크가 제일 낫죠. 이러쿵저러쿵 대는 하인들도 단칼에 정리하고 성실하고요. 한편으론 밧세바를 위해 준비된 남자라는 생각도 들었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