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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지은 집 - 가계 부채는 왜 위험한가
아티프 미안 & 아미르 수피 지음, 박기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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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지은 집
아티프 미안, 아미르 수피 지음 박기영 옮김
2014년 10월 30일 초판 1쇄, 열린책들

 


미국 연준의 테이퍼링이 마무리되면서 내년 미국 금리 인상이 예상되고 있다. 이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내년 금리 인상으로 한계가구 중 일부가 디폴트할 것으로 예상되나 통화정책을 포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하우스푸어 정책을 진행하다 포기했는데 이유는 주택경기의 회복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하우스푸어로 상징되는 가계부채의 상황은 어떠할까?


이 책은 미국의 대침체와 관련하여, 세계를 뒤덮은 암울한 경제상황이 가계부채에서 시작되었음을 가정하고, 다양한 통계자료를 통해 가설이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데이터를 올바르게 분석하기 위해 <레버드 로스 프레임워크>를 도입한다.


2008년 찾아온 미국의 대침체는 지난 대공황 시기와 놀랍도록 비슷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 내 가계 부채는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가계 지출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가계 부채의 원인이 되는 모기지 대출은 어찌해서 늘어나게 되었는가? 저자들은 지난 90년대 동아시아 위기에서 그 단초를 찾고 있다. 경제위기 이후 이 국가들은 미국 국채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해외 자금이 미국 내로 흘러 들었으나, 이 자금들이 불태화되지 않은 것이 재앙의 시초라는 것이다. 은행에서는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이들에게도 대출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와 관련한 사기도 성횡하였다. 결국, 신용팽창으로 인한 자산가격의 거품이 가계 부채를 불러온 것이다.


이는 가난한 이들이 더 가난해진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집값이 하락하면 순자산이 적은 가계에 충격을 준다. 집값이 떨어지더라도 갚아야 할 대출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빈털터리가 된다. 채무자들은 자산을 팔아야 하고, 그들은 자산을 시장가격보다 낮게 팔게 된다. 문제는 잠재적 구매자와 감정평가사가 이러한 투매된 가격에 맞춰 해당 지역의 다른 집들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지역의 모든 집값이 동시에 하락한다.


이렇게 가계부채가 많고 집값이 크게 떨어진 지역에서는 주택 소유자의 순자산이 대폭 감소하면서 소비도 줄었다. 가계 부채의 증가와 자산 가격의 폭락 그리고 심각한 경제후퇴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이들이 욕심부려 진 빚을 왜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갚아야 하는가? 있을 수 있는 얘기다. 여기에 대한 해답 또한 <채무자 섬과 채권자 섬> 모델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과 관련한 실제 사례도 등장한다. 이유는 바로 <경제문제는 채무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결과는 자산과 부채의 분배 상태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일어났다. 주택과 금융 자산, 즉 순자산을 많이 소유한 계층은 그들이 투자한 주식의 거품이 붕괴하더라도 큰 타격을 입히지 않았다. 이미 그 위험성을 알고 투자하기도 했고, 그들의 자산구조는 주택이 순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한 저소득층의 자산 구조와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주택 시장의 붕괴는 한계가구에 타격을 입혔고 총수요를 감소시킴으로써 미국의 대침체를 불러온 것이다.


저자들은 <책임 분담 모기지>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직접 가계 부채를 공략하자고 주장한다. 금융 중개 기능도 중요하지만 스페인 사례와 같이, 결국 은행도 가계 부채의 증가로 총수요가 감소하면 타격을 입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되는 가계 부채를 주식의 형태를 띤 채무 재조정을 통해 해결해보자는 것이다. 이 모델은 도덕적 해이가 불러올 상황까지 마크하고 있으며 앞에서 열거한 자료들에 의거,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채권자들과 정부 당국이 과연 새로운 형태의 이 모델을 받아들일 것인가? 저자 역시 현실적으로는 실현가능성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통화 정책, 재정 정책만으로는 경기 침체를 극복할 수 없으며 환부를 도려내듯이 가계부채부터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용어, 도표의 등장 없이도 현 경제상황을 투시할 수 있게끔 하는 좋은 책이다. 이보다 더 쉽게, 그리고 와 닿게 경제를 논할 수 있을까? 지역 경제블록이 덩치를 키우면서 글로벌 시장의 벽이 사라지고 있는 요즘, 미국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가계부채가 1000조를 넘어섰으며, 급격한 가계지출 감소로 가계수지가 흑자로 돌아선 우리 한국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2014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가계부채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아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책날개에 씌어진 2014년 최고의 경제학 서적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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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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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은 소중하다. 첫 사랑, 첫 연애, 첫 직장, 첫 아기... 처음이란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뒤잇는 일들에 있어 지표가 되기도 하고 또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이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쉬워.〉

 

태양과도 같은 아이, 솔, 솔랑주Solange는 프랑스 남서부 지방 클레브에 산다. 18세기의 고성이 있지만 그 외엔 평범해서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곳. 엄마, 아빠는 항상 바빠서 옆집 비오츠씨가 아이를 돌봐준다. 솔랑주 나이 10살, 생리를 시작하면서 뭔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신체적 변화와 남녀의 다름에 대해 반응한다. 섹스는 무엇일까 백과사전을 펼쳐봐도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옆집 개 륄리가 다른 개들 밑에 깔려 있는 것을 보고 돌을 던진다. 아빠의 그것과 비오츠씨의 그것은 다르게 생겼다. 까날 플뤼스에서 포르노를 보다가 들킨다. 해부학적으로는 이해한다. 남자의 끄트머리가 튀어나와 있고 여자는 그 반대이니, 전자가 후자에 들어간다. 이 정도면 알만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해변에서 비웃음 당하던 비오츠 씨를 자신처럼 느끼고 또 보호해주고 싶던 솔랑주는 13살이 되었다. 친구들은 섹스 얘기를 한다. 로즈 어머니가 읽어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떠올린다. 여자는〈소유〉되는 것이던데 나도 나를 누군가에게 주어야 하나.

 

소설은 불친절하다. 이야기는 조각난 기억들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초점은 언제나 섹스에 대한 관심이고 이야기 중반 쯤 아빠는 왜 사라졌는지(이혼으로 추정), 델핀은 왜 자살 기도를 했는지 그리고 엄마가 솔랑주를 옆집에 맡길 수 밖에 없던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솔랑주 역시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독자만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ㅡ너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너는 돌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 그게 진실이야! 286p

 

ㅡ네 가족은 공중분해되고 있는데 너는 아무 생각 없이 편히 쉬고 있어. 호텔 방에 있는 것처럼 마음 편히, 손톱에 매니큐어 바를 생각만 하고, 모든 사람이 너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 287p

 

솔랑주에게 첫 경험은 자랑할만한 것이기도 하고 얼른 치러야 할 통과의례 같이도 느껴진다. 가장 친한 친구 로즈는 첫 경험을 한 후로 왠지 멀리 느껴진다. 어른스럽기도 하고 여자로서 완성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데 없는 외로운 소녀 앞에 〈그럴듯해 보이는〉아르노가 나타난다. 사르트르가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마리화나를 말며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기는 이 오빠, 솔랑주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주도 아닌 암캐 취급을 하는 그에게 푹 빠진 소녀는 충격적인 첫 경험을 하지만 무엇이 잘못된건지 모른다. 원래 이런 건가? 처녀를 부담스러워하는 아르노에게 가기 위해, 솔랑주는 어른 남자 비오츠를 끌어들이고 마침내 귀찮게만 느껴지던 처녀를 잃는다.

 

ㅡ팬티를 다시 입을 때, 작은 핏방울 하나가 보인다. 이러려고 그 난리를 떨었다니, 잘하는 짓이다. 289p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에서 마리아 크로스는 레몽 쿠레주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그는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레몽 역시 그녀를 둘러싼 루머에 편승하여 사춘기의 열정을 발휘하려 했었다. 17년이 지나고서야, 그는 사랑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비슷한 관점에서 『가시내』의 비오츠를 보자. 어른들의 태도를 통해 어렴풋이 그를 〈루저〉라고 파악해왔던 솔랑주도 느낄 정도로, 〈사랑〉의 힘은 그에게 생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진실은 어떠했던가. 그가 기저귀를 갈아주며 사랑해왔던 아이는 그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간편했기에 그를 유혹했다. 비극적인 진실 앞에 쓰러진 그의 옆에서 오리고기 조림을 먹을 걸, 생각하는 솔랑주는 잔인할 정도의 이기심을 보여준다. 아르노에게 솔랑주가 정부에 불과하듯이, 비오츠도 그러했던 것이다. 어리석은 아이는 보르도로의 탈출을 꿈꾸며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성가셔 한다.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 『팻 걸』에서 엘레나는 페르난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신의 처녀를 준다. 영화 첫머리에서 엘레나의 동생, 아나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첫경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할 거야. 날 사랑하는 척 했다는 걸 알고 슬플 일이 없을 테니까.」

 

첫경험을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사랑하는 이와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상적인 일이다. 현실적으로는 솔랑주처럼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나이스 또한 솔랑주 또래의 아이였다. 결핍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아나이스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선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솔랑주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그 애는 그냥 발랑 까진 애라고 말하고 싶지만은 않다. 10대라고 왜 성욕이 없겠는가? 어른들이 강조하는 피임이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보다는 이제는 탐폰을 쓸 수 있다는게 더 크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을 어찌 탓하겠는가. 다만 솔랑주가 헤프다고 생각했던 나탈리가 처녀라는 것, 진실된 순간을 위해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좀 더 씁쓸해졌을 뿐이다.

 

마리 다리외세크가 적나라하게 솔랑주의 내면을 파헤치면서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사춘기, 인생관이 형성되어가는 중요한 시기. 좁지만 꽉 찬 세상 속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영혼을 담은 육체는 어른과도 같지만 아직 그 내면은 보호받아야할 존재이다. 솔랑주에게는 역할상을 보여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부모는 제대로 된 관심을 주지 못했으며, 부모나 마찬가지인 비오츠도 그녀를 이끌고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아빠 친구는 솔랑주의 앳된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아빠는 딸을 불러 못 알아들을 소리를 하며 피임교육을 한다. 엄마도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준다. 그나마 제대로 된 것처럼 보이는 로즈 부모님도 로즈의 말에 의하면, 잠자리가 없다고 하니 성적인 것에 관심을 쏟는 솔랑주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소외된 솔랑주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 같은 아르노에게 이끌리게 된다. 아르노는 될 대로 주워섬기는 것에 불과하건만.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랑과 욕망의 차이를 구분해냈다. 그녀가 쌓은 다양한 경험과 자아성찰은 가질 수 없는 것, 결핍된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속성 그리고 그 덧없음을 알게 했다.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는 아이, 철 없는 솔랑주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불안정한 현재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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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입 더 - 철학자 편
데이비드 에드먼즈 & 나이절 워버턴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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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 한입 더>, Philosophy Bites Back은 아이튠즈의 팟캐스트의 철학 부문에서 경이로운 성공을 거둔 대담 음성 파일(방송은 아니니까!)을 글의 형태로 바꾸어 엮은 책이다.  전작인 <철학 한입>은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고 이번이 두번째 책이다. 대담은 [○○의 철학에 관해 ○○에게 듣다] 라는 제목으로, 진행자인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나이젤 워버턴과 초대된 철학자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이 책의 장점은 말할 것 같으면 1. 재미있다! 2. 재미있다! 3. 재미있다! ...... n+1. 나의 대뇌 피질의 일정 부분을 철학 한 입 만큼의 교양으로 채워준다는 것이다. 왜 재미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재미있어서 그렇다고 할 수 밖에요...

 

사실 철학은 우리 삶을 관통하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주제다. 누가 그랬더라. 의식주의 욕구가 채워지면 그만큼 교양에 대한 욕구, 지적인 욕구를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고. 그러한 점에서 <철학 한입 더>는 잘 차려진 뷔페와도 같은 책이다. 안타깝지만 식사(?)는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제공되며, 골라 먹을 수 있도록 다양한 철학가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식사량이 많지 않은 이유는 독자와의 밀당을 위한 영리한 전략인 듯 하다. 그 주제를 잘 모르는 독자일지라도 한입 정도는 소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 책은 독자가 너무 골치아프지 않게, 하지만 읽고 나면 "그래, 나는 이런 내용을 궁금해 했더랬지!" 혹은 "이제 흄의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은데?"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상가에 대해 조금 더 찾아볼까"라는 능동적인 생각이 들 정도의 정량을 제공한다. 마중물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장점은 2012년에는 이 팟캐스트의 1200만 다운로드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실 대화로 철학이나 교양을 풀어가는 이야기는 이전에도 존재했다. 지금 떠오르는 것은 한때 세간을 풍미했던 <소피의 세계>, <수학 귀신>이라는 책이다. 두 책들 모두 각각의 주제를 좀 더 쉽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철학 한입>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팟캐스트 파일 안에서 뛰노는 "살아있는" 음성을 잡아 잠시 책에 옮겨 놓은 것과 같은 생생함이다.

 

이 책의 대담 모두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쉽게 설명하려고 해도 어려운 주제들도 있다. 이름이야 들어봤을지 몰라도, 처음 듣는 철학자의 철학 이야기는, 어깨 너머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기웃거려봐도 긴가민가하기도 하다. 어찌 첫 술에 배부르랴? 그럴 때는 과감하게 다음 사상가를 탐색할 것을 권한다. 다른 시대, 다른 사상가네 문도 두드려보고 발도 담가 보면 앞선 시대의 사상가 역시 조금씩 이해가 갈 듯하고 또 흥미가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대담들이 재미있는 이유는 철학자들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도 함께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x축, y축의 좌표를 발견한 장본인이라는 사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명제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고맙지만 고맙지 않은(?) 발견을 한 사람이라니, 소소한 사실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몽테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죽음과의 입맞춤'이 그에게 가져온 변화와 그가 후대 철학자에게 미친 영향들은 왜 그가 철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번도 그를 철학자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우리 시대에 중요한 화두를 던지는 마키아벨리의 피렌체 활동모습을 보면서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공상도 좀 했다. <향연>을 읽어서인지 플라톤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었고, 그의 철학이 어려운 나머지... (죄송하지만) 우스갯소리로 변태(!)같다고 생각했던 위대한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대담 역시 흥미로웠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해체론의 데리다의 용서에 관한 이야기까지,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나를 철학의 세계에 살짝 빠뜨렸다가 그 세계를 그리워할만큼의 미련을 남긴다.

 

이 책을 있게 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대한 대담의 일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가르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그에게 배울 것이 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무언가를 배웠더라도 자신이 가르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것 중에서 소크라테스가 옳게 말한 것이 있어요.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교육을 받거나 교육을 한다면 - 가장 좋은 것은 둘을 함께 하는 것이죠 - 소크라테스적 방법이야말로 본질적 방법이에요. 소크라테스적 방법이 교육의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가 <교육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의 핵심에 있는 무언가를 이루고 있으니까요.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을 성찰하고 우리도 우리 자신의 생각을 성찰할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명령이나 독단이나 고집이나 강요 없이 남과 토론하는 것 말이에요. 대화 참여자는 자신에게 진실해야 해요. 자신의 믿음에 솔직하고 자신의 믿음이 아귀가 맞는지 정직하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을 존중해야 해요. 이 모든 교훈은 분명 소크라테스가 가르쳐 준 것이죠. 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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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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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중 「살인자의 건강법」, 「사랑의 파괴」 같은 작품의 제목은 들어본 적이 있다. 명성에 비해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푸른 수염」을 읽기를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다.

 

사튀르닌(25세, 벨기에 출신의 비정규직 이주 노동여성)은 파리 7구에 위치한 저택 내의 욕실 딸린 방을 500유로에 임차하는데 성공한다. 그 방을 거쳐 간 여성들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집주인 돈 엘레미리오(44세, 히키코모리 에스파냐 귀족)가 건 조건은 바로 암실 출입금지.

 

짐을 옮긴 첫 날, 집주인은 직접 요리를 해서 동거인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사튀르닌은 묘한 긴장감 아래서 집주인에 대해 알아 나간다. 취미는 중세 종교 재판 기록 읽기이며 혈통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 혈통에 기인한 이유- 내장의 길이가 길어서 우주 여행을 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16세기 면죄부 밀매 또한 필연적이었다던가 하는 얘기들… 사튀르닌은 돈 엘레미리오가 <미치광이>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를 어찌할까. 단지 <가능성>에 불과했던 사튀르닌은 돈 엘레미리오에게 찍히고 만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식사 후, 순금으로 된 잔에 노른자 크림을 채워줬더니…

 

「바로크 양식의 금잔에 담긴 불투명한 노른자 크림이 너무 아름다워요! 노란색과 금색은 …… 가장 광택이 없는 것에서 가장 눈부시게 번쩍이는 것까지 펼쳐진 빛의 색깔 그 자체이기 때문이에요.」

붉은색과 금색, 푸른색과 금색 그리고 노란색과 금색의 차이를 정확히 지적하는 사튀르닌에게 돈 엘레미리오는 엄숙하게 <사랑>을 선언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약간 맛이 간 집주인은 20년 전부터 두문불출하는, 중세시대와 종교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하느님의 실체>인 황금의 속성을 정확히 지적한 사튀르닌에게 느낀 사랑의 감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금은 하느님의 실체다. → 에스파냐는 금에 대해 예민하다. → 금을 이해하는 것은 에스파냐를 이해하는 것. 그것은 곧 대공작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카르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튀르닌은 루브르 미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고 이것은 예술사 계통에 능통한 것을 의미한다. 여자이고 벨기에인이지만 프랑스에서 꽤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박식한 여주인공은 바로크 잔을 알아보고, 순수하게 아름다운 색채를 감탄했다는 이유로 에스파냐 대공작의 젠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다음날 식사 시간, 여주인공은 남자의 연애사를 알고 싶지 않다며 선을 긋는다. 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인 <암실에 대한 금기>를 깨지 않고자 하는, 자기 보호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사튀르닌은 똑똑하고, 호기심이 많은 여성이며 돈 엘레미리오에게 8명의 여인에 대한 살인 혐의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기를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동거인이 원하는 적정선을 넘지 않으면서 아찔한 밀고 당기기를 시도한다. 그녀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면서 고가의 샴페인과 멋진 요리들로 주의를 흩으려 놓은 것이다. 사튀르닌의 죽마고우 코린이 놀러왔다가 놀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약간은 오만할 정도의 태도로 남자를 대하는 사튀르닌과 그녀를 이상화하며 숭배하는 듯한 돈 엘레미리오의 모습은 기이할 정도이다. 살짝 맛이 갔지만 호감이 가는 대공작 때문에 코린은 친구를 걱정하며 집으로 떠난다.

 

코린의 우려처럼 사튀르닌은 대공작에게 마음을 주게 되고, 그를 저항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돈 엘레미리오에게 끌리는 감정을 증폭시키게 된다. 하지만 현명한 사튀르닌은 사라진 여덟 여인의 행방을 알아내게 되고,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추리도 성공한다.

 

부와 권력을 소유한 귀족 남성, 엘리트이지만 외국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여성은 원작의 푸른 수염과 그 아내에 대치된다. 원작의 푸른 수염이 계급 차이와 두려움 때문에 합당한 소외를 받았다면, 아멜리 노통브의 푸른 수염은 부모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스스로를 가두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원작의 여성은 푸른 수염의 <선택>을 받아 아내가 되고, 조력자인 두 오빠의 등장으로 위기를 탈출한다. 그러나 사튀르닌은- 돈 엘레미리오가 놓은 <신성한 우연>이라는 덫에 걸리긴 했지만, 주체적 자아를 가진 현대 여성으로서 스스로를 사랑이라는 위기(?)에서 구해낸다.

그리고 암실. 부모의 죽음 이후로 문을 걸어 잠그고 지내던 남자는 관계를 맺으면서 암실이라는 은신처를 만들게 된다. 사랑, 자신을 휘두르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마음의 모든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비밀과 선언이 실체화된 것이다.

 

다른 이가 만든 요리조차 권력의 요소라 거부하는 이 남자가, <살아있는> 사튀르닌을 암실에 허락한 것은 사랑의 감정이 이를 뛰어넘었음을 보여준다. 선을 넘으면 <사랑>을 가둠으로써 감정의 강제적 종결을 꾀했던 대공작이 진전을 보인 부분이다. 어쩌면 완전한 사랑이란, 또 자신의 이상이란 살아서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사랑을 자신의 암실에 초대함으로써 위대한 혈통의 에스파냐 남자, 교양있는 변태, 매력적이던 돈 엘레미리오는 사랑을 완성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사랑은 콩깍지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콩깍지가 벗겨지는 날은 지옥이 될 거라는 농담도 함께.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이 너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게 되니까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상처받고 싶지 않아 몸과 마음을 사리면서, 그 말은 조금씩 잊혀졌다. 팍팍한 삶일수록 아름다움과 로맨스를 동경하게 된다는데 사튀르닌이 미친(?) 순정남 돈 엘레미리오에게 마음을 주면서 느끼는 감정과 나의 감정이 서서히 동화되는 것을 보면 내 삶도 좀 팍팍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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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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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이자 9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 모음집이다. 제목은 적을 만들다, 부제는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축제, 학회, 강연 등 특별한 기회가 생겼을 때 쓴 글들로, 마지막에 글을 쓴 연유와 날짜가 명시되어 있다. 번뜩이는 기지와 백과사전 같은 지식들이 담겨있는 글들은 다른 주제를 담고 있다. 여행기나 에세이집처럼 술술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잠시 멈추고 사유하게 하는 좋은 글들이다.

 

14개의 칼럼 중에 가장 즐겁고 흥미롭게 읽었던 몇 편을 소개한다. 먼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적을 만들다」.

뉴욕의 택시기사가 던진 질문,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 칼럼을 쓰게 했다고 한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 거의 자연적인 현상의 측면에서 규명하는 일이 아닌, 그 적을 만들어 내서 악마로 만드는 과정이다.

​고대 로마의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적을 만들기는 이방인, 다름의 완벽한 전형인 외국인이 대상이었다. 그리고 민족 간의 접촉확대로 적은 더욱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 적은 단순한 이방인에서 기독교와 대치되는 유대인으로 구체화된다. 여자는 문학의 대상이기도 하고 풍자의 대상이기도 했다. 고대,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자는 끊임없이 악마가 되었다. 절정은 중세의 마녀 사냥이었다. 노교수에 따르면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은 이민자의 이름으로, 루마니아인(집시을 적의 이미지로 그리는 현대의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적, 그리고 나의 적은 누구인가? 현실을 반영하는 좋은 글이었다. 에코는 사르트르의 희곡으로 마무리한다. 우리는 타자를 적으로 만들고 지상에다 산 자들의 지옥을 건설한다. L'enfer, c'est les autres. 타자는 지옥이다.


밀라네지아나 축제의 간담회에서 발표한 「불꽃의 아름다움」도 흥미로웠다.

 

불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서서히 감소하고 있다. 예전에 불이 수행했던 기능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형태가 맡게 되었다. 우리는 불꽃에서 빛의 개념을 분리했기에, 이제 불꽃은 가스 불(거의 보이지 않는)과 성냥이나 라이터(적어도 아직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촛불(성당을 다닌다면)로만 경험 가능하다.

불의 열기는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며 인류의 문명과 함께 해왔다. 마찰을 통해 발생하기에 강한 성적 의미도 지니며 분노에서 사랑까지 층동의 은유로도 사용된다. 변신의 도구이기도 하고 생명과 죽음, 파괴, 고통의 요소이자 순결과 정호, 더러움의 상징이다. 양면적 속성을 띠는 것이다. 기호학자답게 에코는 신적인 요소, 연금술, 예술의 동기, 현시적 경험, 재생, 현대의 에크피로시스로서의 불을 탐구하며 사고를 확장시킨다.


「보물찾기」는 기독교와 관련한 성물들을 다루고 있다. 예수의 피를 보관하고 있는 벨기에 브뤼주의 성혈 성당은 방문한 적이 있기에 흥미로웠다. 가장 큰 보물찾기는 성배 탐색이겠지만 에코는 2천 년의 시간으로도 부족하다고 끝맺는다. 그리고「천국 밖의 배아들」은 배아의 형성, 원죄의 유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설명한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인데, 중세 교부철학이 논리적으로 성서를 정리하면서부터 지금까지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논쟁거리로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열과 침묵」, 「위키리크스에 대한 고찰」에서는 사회적 이슈의 본질을 꿰뚫는 힘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음과 검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는데 칼럼이 짧으니만큼 일독을 권한다.

 

내가 만약 내일 신문에 나의 부정행위가 폭로될 것이고 그로 인해 심각한 피해가 나에게 닥칠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어김없이 제일 먼저 경찰서나 역 인근에 폭탄을 설치하러 갈 것이다. 그 다음 날 신문의 주요 면에는 폭탄 사건이 대문짝만하게 실릴 것이고, 나의 개인적인 경범죄는 뒷면의 작은 기사로 마무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1면에서 기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진짜 폭탄이 설치되었을지 누가알겠는가! 

14개의 칼럼은 각자 상이한 주제를 담고 있는 짧은 글이지만, 그 깊이 때문에 14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은 에너지를 요했다. 에코의 글을 읽으며 언제나 드는 생각은, 80대의 지성이 그보다 훨씬 젊은 나보다도 더 활동적이고, 능동적인 사고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럼 중 「율리시스, 우린 그걸로 됐어요」는 말 그대로 읽기만 가능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은 「더블린 사람들」외에는 읽은 적이 없는데! 교수님의 방대한 지식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음이다. 하지만 각 칼럼은 언제 어디서 펼쳐도 독자를 사색의 세계로 인도하며, 이는 진정으로 <읽는 기쁨>을 준다. 많은 글 중에서도, 자극적인 듯 자극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사유>를 요구하고, 글쓴이와의 소통을 요구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지성인 에코가 가지고 있는 스펙트럼이 어마어마하며,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 지성이 조금 더 성숙할 즈음,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깨달음을 줄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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