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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
토머스 하디 지음, 서정아.우진하 옮김, 이현우 / 나무의철학 / 2015년 5월
평점 :
《더버빌가의 테스》를 쓴 토마스 하디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첫 작품이라길래 궁금해졌다. 캐리 멀리건이 출연하는 영화도
있고... 1874년에 쓰인 소설이지만 현대의 로맨스 구도와 아주 유사하게 흘러간다. 여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세 남성의 이야기인데 당시 사회나
종교적 함의를 더 알았다면 좀 더 색다르게 읽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밧세바는 좋은 교육을 받고 외모도 뛰어난 젊은 여성이지만 재산이 없어 숙모 댁에서 일을 돕는다. 같은 마을의 자영농
가브리엘 오크가 청혼하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얼마 후 가브리엘은 사고로 재산을 모두 잃게 되고 삼촌의 유산을 상속받은
밧세바는 부유해진다. 가브리엘은 밧세바의 농장에서 양치기로 일하게 된다. 밧세바는 방종한 관리인을 내쫓고 직접 농장을 관리하는 한편, 이웃
볼드우드에게 장난으로 발렌타인 카드를 보낸다. 볼드우드는 진지하게 구애를 하고, 이에 놀란 그녀는 자신이 경솔했다며 진심으로 사과한다. 꽤
슬기롭게 농장을 꾸리던 밧세바는 잘생긴 군인 트로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주변인들 몰래 결혼한다. 트로이는 도박에 빠져 농장을 빚더미에 올린다.
주인공이 어리석은 결혼을 후회하고 있을 무렵, 남편의 옛 애인이 주검이 되어 나타나고 이어 남편도 실종되는 등 한바탕 사건이 벌어진다.
소재만 보면 호러가 따로 없다. 죽음, 살해, 사형, 화재 등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주인공 밧세바의 ‘허영’을
벌하기 위한 장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허영은 있지 않은가. 하물며 외모가 뛰어나고 좋은 교육을 받은 인간이라이라면 더욱!
밧세바가 손거울을 보는 모습을 지켜본 가브리엘은 이를 허영이라고 평가한다. 혼자 있다고 생각한 순간까지 ‘평가’받아야 하는 여성의 운명이여!
밧세바가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거울 좀 봤기로서니... 그녀에게 구애한 세 남자 모두 밧세바의 외모를 칭찬하고 인정하지 않는가. 물론
밧세바가 충동적인 구석이 있긴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대부분의 경우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엄청난 결점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지역사회에서 존경받고 나이도 지긋한 볼드우드는 농장을 팽개치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트로이의 실종 후 조용히 살고 있는 밧세바에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볼드우드의 모습은 소름이
끼친다. 트로이와 패니, 아기 문제와 농장, 사람들의 시선에 ‘밧세바 볼드우드’라는 이름표가 달린 혼수들이 빼곡한 방이 합세하니... 밧세바의
어리석음을 탓하다가도 불쌍해지는 것이다. 그녀의 ‘허영’을 벌하고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 해도 너무 가혹한 일들이 아닌가.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보는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오크가 스스럼없이 ‘아내’라 지칭하고 주위의 축하를 받지만 밧세바가 웃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부분 말이다.
이례적으로 독립적이라 평가받던 여성도 결국 누군가의 ‘아내’로 끝난다. 이 소설이 페미니스트 문학으로 꼽히는 이유가 밧세바의 '독립심'이라는
이유라는데 여러모로 시대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나마 신부가 마냥 웃지 못했다는 것, 결혼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쉬운 점을 조금 달랜다.
이 소설은 로맨스를 다루면서도 자연 풍경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과
상호작용이 아주 섬세하다. 토마스 하디가 중요하게 여긴 요소인 듯하다. 그런 점에서 가브리엘 오크는 밧세바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가브리엘은 종교를, 오크는 자연을 상징한다. 소설 초반부에서 그가 말 없이 자연과 합일하는 모습과 교회성가대의 베이스를 맡은 신앙심을
떠올려보자. 더불어 밧세바를 향한 헌신과 의리는 그 ‘모든’ 일을 겪은 여주인의 애정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재산도 좀 모아진 터라 신분 차도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말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왜, 토머스 하디가 여주인공에게 밧세바라는 이름을 주었을까 하는 것이다. 밧세바는 성경 속
우리야의 아내로, 다윗 왕의 눈에 들어 동침해야 했던 안타까운 여인이다. 남편은 심지어 전장에 나가 죽지 않는가.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본 건
다윗인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탕녀가 되어버린 인물, 주변 남성에 의해 평가된 소설 속 여주인공의 모습과 겹친다면
비약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