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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란 정치성향을 떠나 대부분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단어다.
한국의 시민적 저항의 경험은 풍부하다. 현대사를 통해보더라도 권위주의 군사정권을 오래 겪으며 제1의 과제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고 실제 이루어내기도 했다. 이렇게 20세기를 겪으며 한국에서는 민주주의 가치를 가장 절대적으로 보는 시민들이 대부분 일 것이다. 나역시도 그랬었고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 제도는 불완전한 제도다. 이 제도는 생각보다 최선을 선택하기 보다 차선, 차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민주주의 하에서는 제도만으로 사회가 좋아지지 않는다. 의식적인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곧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현대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택하는 걸까? 좋은 제도는 아닐지라도 아직까지 이것보다 괜찮은 제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모든사람이 똑똑하고 선한 사람이 되길 지향하는 것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이 아주 약간 선해지는 것을 지향하는 제도라고 볼 수 있겠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정치인들이나 정치시민들이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만 제대로 작동하는 제도다,
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미국 45대 대통령선거에서 전세계가 경악한 아웃사이더인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이 되고 그가 미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미국헌법을 마음껏 주무르며 미국의 민주주의조차 쉽게 무저질 수 있음을 느끼고 현대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해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쓴 책이다.
기존의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하면 쿠데타로 인해 기존 권력을 불법으로 탈취하여 군부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현대민주주의의 위기는 저자들은 아웃사이더들에 의해 찾아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아웃사이더들이 어떻게 중앙정치로, 대통령까지 올라설 수 있었을까?
20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의 시나리오는 정황만 달리하여 전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아돌프 히틀러와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같은 아웃사이더 정치인들 모두 내부로부터, 그리고 선거나 강력한 정치인과의 연합을 통해서 권좌에 올랐다. 각각 사례에서 기존 엘리트 집단은 인기 있는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여도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으며, 나중에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어긋나고 말았다. 그들은 두려움과 야심, 그리고 판단 착오라는 치명적 실수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들은 권력의 열쇠를 잠재적 독재자에게 기꺼이 넘겨주었다.
(p. 21)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1인 1표다. 즉, 대중의 인기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정당은 (아예 외부사람이라도)인기가 좋은 사람을 내세워 선거에 이기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웃사이더들의 출현은 그렇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결과로 벌어지는 것이다. 처음엔 정당의 정치 지도자들이 인기있는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이더라도 그의 '인기'만을 이용할 뿐이지 충분히 이 정당시스템으로 '그'를 컨트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데리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커다란 오판이 그를 합법적으로 지도자로 만들어주고 결국 정당이 그에게 먹히는 꼴이 나는 경우가 벌어진다. 이 흐름을 우리는 최근에 어디서 보지 않았나? 지금 미국의 상황이 보여주고 있다.
잠재적 대중선동가는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 존재하며, 때로 그들은 대중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경고신호를 인식하고, 이러한 인물들이 권력의 중앙 무대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극단주의자나 선동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 떄 기성 정치인들은 힘을 합쳐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한다. 물론 극단주의자의 호소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중요하지마느, 더 중요한 것은 정치 엘리트 집단,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가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gatekeeper인 셈이다.
(p. 29)
그렇다면 이 아웃사이더들을 어떻게 기존에는 막아왔을까? 기존의 극단적이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려는 자가 출현했을 경우 이 사람을 기존의 정당의 지도부들이 정치적 결단을 통해 배제함으로서 아웃사이더들을 고립시켜왔다는 것이다. 정당이 대중의 인기가 높더라도 게이트키퍼로서 막아왔다고 하였다.
미국 현대 역사에서 어떤 주요 대선 후보도 헌법적 권리와 민주주의 규범을 무시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제를 설계했던 해밀턴을 비롯한 모든 건국자들이 우려했던 바로 그러한 유형의 인물인 셈이다.
미국 사회는 이러한 모든 신호를 인식해서 경고등을 울렸어야 했다. 그러나 문지기 기능은 프라이머리 과정에서 작동하지 않았고, 결국 대통령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 주류 정당 후보로 나서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당은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1930년대 유럽,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 남미에서 민주주의가 붕괴했던 역사의 교훈을 다시 떠올려보자. 문지기 제도가 제역할을 하지 못할 때 주료 정치인들은 위험한 인물이 권력의 중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p. 86)
그럼 미국 공화당은 트럼프의 출현을 막지 못했을까? 트럼프가 아무리 인기있더라도 결국 후보는 기존의 공화당 후보에서 나올 것이고 전당대회의 흥행몰이에 도움이 돼 그를 이용할 가치만 쏙 뽑아먹을 자신이 있었다고 오판을 했었다는 것이다.
왜 정당은 게이트키핑 능력을 상실하고 왜 무리한 수(아웃사이더를 끌어드리는 악마의 유혹)을 쓰면서까지 정당 스스로가 무너지는 흐름으로 가고 있을까? 두 저자는 정당간 양극화에서 답을 찾았다. 상대가 너무나도 미워서 꼭 이겨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하면서부터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경기에서의 경쟁자가 아닌 죽여야하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서로 더 격렬한 증오와 미움을 동원해야만 상대방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초만 하더라도 왼쪽진영에서 일어났던 흐름이 20세기 후반부터는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다. 기존의 주류정치에 있던 보수정당들이 자기 정당으로서의 능력을 계속해서 잃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좌파를 경쟁자가 아닌 없애버려야할 존재로 인식하여 무조건 이기기 위해 인기영합적인 인물(더 극우적인 인물)을 영입해서 선거에 뛰어든다. 그들(아웃사이더)을 이용하는 순간 보수정당내 중도보수층은 이탈해버리고 더 오른쪽에 있는 지지층이 들어오고 이는 곧 선거에 이기더라도 정당스스로가 파괴되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2016년 선거 이후로 진보 진영의 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민주당도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른다면 공화당이 규칙을 어기면 민주당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상대가 자제의 규범을 저버린 상황에서 혼자서 자기통제와 예의를 지키는 것은 권투 선수가 한 손을 묶고 링 위에 올라서는 것과 같다. 악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 들 때 규칙을 지키려는 자들은 바보취급 받는다.
(…)
그러나 우리 두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당이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첫째, 외국 사례들은 이러한 대응 전략이 오히려 전제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전면적인 전략은 중도 진영을 위협함으로써 야당의 지지도를 떨어뜨린다. 반면 여당 내 반대파조차 야당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 단결함으로써 친정부 세력을 집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야당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때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 정당성을 확보한다.
(p. 269 ~272)
상대방이 이미 암묵적인 룰을 깨고 반칙을 범하고 있다. 그와 경기를 하고 있는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많은 구경꾼들은 나에게 "야 바보처럼 룰 다 지켜가면서 하지말고 너도 똑같이 해라." 라고 외친다.
하지만 두 저자는 그럼에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공화당처럼 우리도?' 라고 하는 순간 민주당은 절대 못이길 것이라고 했다. 사실 반칙도 먼저 쓴놈이 더 잘 쓴다. 그래서 뒤 늦게 반칙쓰는 놈들이 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 뭐가 대안이냐라고 묻는다면 저자들은 민주당 너네가 공화당내에 있는 합리적인 인물들이 힘이 생길 수 있게끔 해라는 것이다. 공화당 내에 있는 중도보수층을 자기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공화당내 정치적 힘을 발휘하게 해서 반칙을 시도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합리적 대화 파트너로 만들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즉각적인 효과를 내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방법일 수도 있고 정말 오래걸리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제도 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주장에 끌릴 수 밖에 없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동시에 언제든 민주주의는 제도적 위기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들어와 많이 듣게 되는 '사이다'발언. 언젠가부터 우리는 '사이다'만 찾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알게된 '그것은 알기싫다' 296편 방송에서 조성주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들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책임있는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책임있는 결과혹은 변화를 생각한다면 그런 극단적인 분노와 주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실질적인 우리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 또는 힘과 변화를 추구할 수 있을까? 악마의 유혹에 어떻게 하면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정치로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나부터 반성해본다. 이 책을 덮은 뒤, 많은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
지금 이 순간도 '고구마'일지라도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책임있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께 감사를 드린다.
참고
https://soundcloud.com/xsfm/296a
그것은 알기 싫다, 293a. 시사 아카데미:자해하는 민주주의 /조성주
https://soundcloud.com/xsfm/296b
그것은 알기 싫다, 293b. 시사 아카데미:증오와 민주주의 /조성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