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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 강간 영웅 신화 ~ 12. 여성이 반격한다
원시사회에 관한 인류학 연구는 '강간'에 관련해 얻을만 한게 있을까?
우리가 동떨어진 원시 부족에 대한 민족학적 연구는 강간이 남자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면서 여성을 재산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신호이자, 여성이 선을 지키도록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기제로서 이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현실세계에서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문화를 정의하고 지배하는 남성들의 공적, 사적 환상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전혀 다를 게 없다.
(p. 444)
얻을만 한거? 있다.
이때까지 읽으면서 알게되었던것 처럼 원시사회를 통해서도 '강간'이 남자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면서 여성을 재산으로 간주한다는것을 자연스럽게(?) 재확인할 수 있다.
역사상 강간 영웅 신화는 명예롭지 못하면서도 끈질기게 남성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주제였다.
대중문화는 강간 영웅 신화에 일조하면서 강간 미화에 앞장섰다.
남성이 자기 부인과 딸, 여자 친구, 여자 형제, 어머니가 당한 성폭력을 남성 자신의 트라우마적 상처로 전유하는 일은 꽤 흔하다. 이때 남성은 강간당한 여성이 겪는 정서적 고통을 깎아내리려 들기 마련인데, 이것이야말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p. 465)
눈앞에서 아내가 강간당한 것을 보는 남자의 존재가 있을 때만, 강간은 기득권에게서 토지를 몰수하는 행위이자 남자가 남자에게 맞서 벌이는 충격적인 행위로 의미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강간 영웅 신화가 만들어지는 와중에 정작 여성에게는 하찮은 역할만 부여된다는 사실은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p. 466)
영화 제작자는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제공할 뿐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남성인 영화 제작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관해 남성으로서 그들 고유의 생각을 대중에게 전한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소위 대중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뿐아니라, 그 사고방식을 형성하고 영속화한다. 나는 대중문화계 인물들이 정말로 심각하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기때문에 이 장에서 그런 인물들을 다뤘다.
(p. 473)
여성을 평가할 때 아름다움을 다른 어떤 특징보다 더 높이 치는 문화가 아니라면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그보다 평범한 이가 살해된 사건보다 특별히 더 유감스럽거나 더 비극이 될 이유는 없다. 미인이 살해당해야만 사건에 더 주목하는 관행 덕에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파멸의 씨앗을 품게 된다.
(……)
남성은 행동하는 주체로 다루면서, 여성은 피해자로서만, 특히 아름다운 피해자에게 지면을 더 할애하면서 양념처럼 곁들인다. 그리하여 강간은 여성의 아름다움 때문에 유발되는 치정 범죄라는 신화가 엄청난 신빙성을 얻게 되고, 여성 자신도 강간당하는 것이, 심지어는 살해당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증거라고 믿게끔 영향을 받게 된다. 미녀의 아름다움은 야수가 확인해준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은 누구나 가진 것이 아니지만, 피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p. 530 ~ 531)
멀리 갈 것도 없다.영화로 국한해서 보자면 얼마나 여성캐릭터들을 어떻게 다뤄왔는지..
여성은 대부분 주변부 캐릭터던가 아님 (눈앞에서 다른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는 것을 발견을 통해)주인공의 분노를 일으키는 유발도구로서 소비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강간당한 피해여성보다 그걸 본 남성의 관점에서 트라우마적 상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거나 한다.
그리고 감독들의 개인적인 욕망이 들어갔는지 아니면 너무 예술적인 것에 심취한 나머지 영화에 불필요하게 강간하는 씬을 자세히 묘사하는 경우가 꽤 있다.
좋은 의미나 좋은 의도로 만든 영화라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
그의 예로 3년전에 개봉한 <눈길>, <귀향>이라는 영화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비슷한 소재로 다룬 영화다.
같은 아픔을 다뤘음에도 평가는 상반되었다.
한국 영화는 실제 피해를 다룰 때 피해 사실을 자세히 묘사하고 피해자를 최대한 불쌍하게 그리는 경우가 많다.
지나치게 피해 현장을 생생하게 그리는 순간, 피해 고발과 정상화는 사라지고 자극적인 장면만 남게된다.
<귀향>은 그런 영화였다.
지나치게 성폭력의 장면을 보여줌으로서 '나의 일'이라기 보다 '남의 일'로 바라보게 되었다.
가볍게 영화관에서만 불쌍하고 그런 존재로만 소비되어버렸다.
<눈길>은 그와 반대로 최대한 직접적, 자극적인 묘사하지 않고도 의미를 전달하였다.
충분히 자극적인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도 의미를 전달할 방법은 많다.
<귀향>의 결과물은 피해여성에 대해 전형적인 남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에서 나온 한계다.
남성은 언제나 강간해왔지만, 남성의 강간 이데올로기가 여성 스스로가 강간을 욕망한다는 교리에 의존하기 시작한 것은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이 등장하면서 생긴 일이다. 여성은 본성상 마조히스트며 '공통에 대한 욕정'으로 갈증이 나 있는 상태라는 교리는 1924년 프로이트가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라는 논문에서 최초로 제안한 것이다.
(p. 490)
남성의 강간 이데올로기(정복하는 쪽의 대중심리)가 만연한 상황에서는 그 거울상으로 여성의 피해자 심리(정복당하는 쪽의 대중심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심리의 한 극단에는 강간 환상에 탐닉하는 여성 성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 여성들이 성에 대한 환상을 즐길 때, 그 환상은 대개 남성이 만든 조건에서 나온 산물이며, 그 조건을 벗어난 환상은 만들어질 수 없다.
(p. 504)
우리가 이제껏 살펴보았듯 남성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권력충동의 핵심 요소로, 여성이 그런 남성 섹슈얼리티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찾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은 여성이 직면한 성적 딜레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풀기 어려운 매듭이다.
(p. 506)
남성의 강간이데올로기가 여성의 마조히즘적 성향과 연결시킨 큰 공은 여러번 나왔듯 프로이트의 결과물이다.
남성이데올로기의 큰 테두리안에 강간 환상에 탐닉하는 여성의 성 심리가 있다고 가두어 버리면서 강간 이데올로기는 더욱 더 공고해졌다. 여성은 이 남성의 섹슈얼리티안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찾을 수 밖에 없었던 딜레마가 지금껏 계속되어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남성들은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특권을 여성이 자기 것으로 주장해선 안 된다고 말해온 것이다. 충고에 담긴 메시지란 실상 평생을 두려움 속에서 살라는 것 이상은 아니다. 여기에 남성의 충고나 규칙을 따르지 않은 여성은 자신이 저지른 위반에 응당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심각한 경고까지 덧붙였으니 도움을 주기는커녕 문제만 악화시킬 뿐이었다.
(p. 623)
강간은 여자가 조심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누구보다 우리를 걱정하는 선의 넘치는 남자들조차 강간 억제 대책을 제시한다면서 진부한 주의 사항이나 늘어놓는다. 강간은 공격성을 찬양하는 왜곡된 남성적 가치관이 만들어낸 사회 문제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여성만의 문제로 취급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본심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신원 미상 강간범의 유령을 들이밀 때조차 정작 그런 강간 행위의 본질적 원인에 심리적 책임을 지는 일은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p. 626)
남성들 또한 강간 문제에 아예 외면하고 있지는 않다. 그나마 강간문제에 관심있는 남성들 조차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헤치지 않은 선에서 그 틀 안에서 사고하는 것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을 위한다는 말을 하더라도 전혀 '도움을 주기는커녕 문제만 악화'시킬 뿐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것인양 한발자국 물러난 채 관망하듯이 뒷짐지고 있는 모습과 다를바 없다.
읽기 힘들었다. 같이 읽지 않았으면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랏을 것이고 알았더라도 두꺼워서 쉽게 읽을 엄두도 못냈다.
현재는 어떨까?
나 부터가 이 강간 문제, 남성 이데올로기를 진지하게 고민해왔던 적이 있던가?
부끄럽게도 지금조차 이런 문제에 무뎌져서 살아왔고 그동안 특별한 어려움 없었다.
몇년전 우연히 봤던 '악어프로젝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뭐? 이정도라고? 에이 설마..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더 촉발된 젠더이슈에서 남성의 강한 백래시는 나를 혼란 속에 더욱 빠뜨렸다.
남성들은 왜 저렇게 까지 하지?
그 이후 메갈, 워마드로 대표되는 사태를 통해서 남성들은 어떻게 해왔나?
이전 한국사회에서 보지못한 남성언어의 미러링을 통한 행동은 남성쪽을 멘붕에 빠뜨렸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되찾고 전보다 가열찬 여성혐오로 반격을 했다.
지난달, 바른미래당의 하태경 의원실 주최로 열린 국회 토론회는 '워마드를 해부한다'였다.
바미당이 청년의 마음을 잡겠다는 슬로건은 고작 이런 형태였다. 그 청년이란 단어 속에 여성은 없었다.
패널이란 사람들도 안희정 재판 1심 무죄판결을 옹호한 발언으로 주목받은 모 변호사, 소위 이퀄리스트인 모 작가등이었다.
X무위키에서의 노골적인 조작사건에 불과했던 역사도, 정체도 알 수없는 단어인 '이퀄리즘'은 아직도 죽지않고 살아나 어떤 작가에겐 이퀄리스트라고 칭해지고 있다.
이런 토론회가 성평등한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가?
결국, 성토대회에 불과했던 것일까?
지금의 10-20대를 보면 어떠한가?
그 세대의 여성들이 이미 페미니즘 입문서나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해나갈때
젊은 남성은 여성에 대한 혐오만 가득할 뿐 그들과 대화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 여성과 남성간의 인식과 생각의 격차는 젊었을 때부터 벌어지고 있다.
고통과 폭력에 노출되어있는 여성과 그냥 그대로 살아간 남성 간의 차이는 이 책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봤지만
실망스럽게도 지금도 그 간극은 유효하다.
읽기 힘들었다. 같이 읽지 않았으면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을 것이고
알았더라도 두꺼워서 쉽게 읽을 엄두도 못냈다.
이 책을 읽었다고 내가 뭐라도 알게 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순 없다.
아직도(!) 부끄럽게도 많은 것을 모른다. 모르는건 자랑이 아니다.
결국은 계속 알아나가야한다.
남성은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 현실의 한꺼풀 뒤에 숨어있는 잔인한 진짜 현실과 마주해야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강간에 역사를 부여하고자 했다.
이제 우리가 함께 강간의 미래를 단호히 부인할 차례이다.
(p. 633)
출처 및 참고
http://deepr.kr/50
Deepr, 위안부 할머니를 보는 두 가지 시선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4293
미디어스, '워마드를 해부한다'를 해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