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았던 서문, 1장을 지나 2장, 3장으로 오니 아.아. 조금은 이해가 된다. 4장 5장으로 넘어가면 술술읽혀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 이 책을 연휴에도 부여잡기로 했다.
2장에선 1장에서 살펴본 '노동윤리'의 역사와 전통적으로 투쟁하고 저항했던 마르크스진영으로 들어가본다.
노동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마르크스주의아니던가. 2장을 보면 알듯이 마르크스주의 진영안에서도 여러 갈래가 존재한다.
'더 많은 일'
처음 살펴볼 사례는 저자가 '사회주의적 근대화'라고 일컷는 쪽이다. 레닌으로 대표되는 쪽으로 '노동윤리'와 투쟁하고는 있지만 지향하는 것은 '더 많은 일'이다. 그'자본주의'는 노동이 가진 잠재적인 성장을 완벽하게 이끌어내지 못하고 우리가 공산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에서 발전한)생산력을 자본주의에서보다 생산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렇기에 여기에선 노동자의 '자기희생'과 '인내심'을 강조하였으며 무쇠같은 노동규율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레닌은 미국의 '테일러주의'를 칭송하였다. 레닌시기의 소련을 생각해보면 어떤 느낌인지 떠올려 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의 문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문제삼아 대립각을 세웠을 뿐, 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노동윤리'를 여기서는 지지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더 나은 일'
두번째 사례는 1969년대 영미권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인기를 끌엇던 쪽이다. 에리 프롬의 <마르크스의 인간관>으로 대표되는 것으로 이 책에서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라고 칭하고 있다. 프롬은 자본주의에 대항해 내놓은 것은 앞서 레닌이 주창했던 '더 많은 일'이 아닌 ' 더 나은 일'이다. 프롬은 마르크스가 소외되고 의미없는 노동을 생산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으로 전환하는 것을 핵심적으로 강조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문제는 진정한 자아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에 기존의 노동을 '더 나은일'로 변경함으로써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본주의의 자본주의 비판은 최근의 포스트-포드주의의 노동조건과 비슷한 면이 있다. 단순한 노동의 반복을 통해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아닌 노동에 뭔가 감정적인, 감성적인 자아실현을 주문하고 있는 요즘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것은 앞서 레닌이 표방한 '더 많은 일'보다는 나아갔지만 아직 이 책에서 주장하는 '노동윤리' 거부와는 뭔가 다르다.
'더 적은 일'
고로 자율주의 전통은 근대화 모델과는 달리 자본주의 아래서의 노동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는 노동 착취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인본주의자들 역시 노동을 비판하지만, 자율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의 해방이 아니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자율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 투쟁의 구호중 하나인 "일할 권리"를 새로운 구호 "노동 거부"로 바꾸자고 주장하면서, 말할 것도 없이 마르크스의 발걸음을 따룬다. 여기서의 마르크스는 자유가 노동시간 단축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던 그 마르크스다.
(p. 159)
마지막으로 살펴볼 곳은 '자율적 마르크스주의'다. 안토니오 네그리로 대표되며 기존의 사회주의운동들이 노동을 신성시 하며 노동부과를 당연시 하며 '노동거부'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비판하며 사회주의는 '더 많은 일'도 아니며 '더 나은 일'도 아닌 '더 적은 일'로 가야한다고 하였다. 저자도 이 자율적 마르크스의 주장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3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대안에 대해서 탐구하기 위해 1970년대 페미니즘의 가사임금 요구를 살핀다.
먼저 그것에 앞서 가사노동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한쪽은 정통적인 진영으로,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지 않은 비생산적 노동으로 보는 쪽이였으며, 다른 한쪽은 덜 정통적인 진영으로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잔접적이거나 직접적으로 창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생산의 필수요소로 파악되어야하고 그래서 가사노동을 재생산노동, 나아가 생산노동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논쟁의 끝은 마르크스 이론의 기술적 해석의 싸움으로 변질이 되며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렸다.
이 책에서는 마리아로사 델라 코스타와 셀마 제임스의 저작인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전복』을 중심으로 가사임금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가사임금의 요구는 가사노동을 칭송하려는 것이 아니며, 신성시 하고자 의도한 것 역시 아니다. 이 페미니스트들이 무급 가사노동의 생산성을 주장한 것은 도덕적 선언이 아니었다. "생산적인 것이 도덕적 의무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의 시각에서만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가사노동의 비가시성과 그 도덕화 모두에 맞서려는, 즉 가사노동이 일호서는 폄훼되면서 애정노동으로 과대평가되는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의제에 담긴 어려움과 급진적 야망을 뚜렷이 이해할 수 있다.
(p. 197)
델라 코스타와 제임스는 가사노동을 '일'로 칭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일'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 가사노동의 거부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가사임금 운동조차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영감도 지지도 받지 못한 채 그리고 몇 가지의 한계도 있었던 탓에 성공적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앞서 가사임금의 요구에 대한 두 가지 비판을 논한 바 있다. 하나는 가사임금을 주부들에게 지급함으로써 젠더 분업이 더 공고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더 많은 형태의 일에 임금을 지금함으로써 임금 시스템의 완전성이 의문시되기보다는 옹호된다는 것이었다. 기본소득 요구는 이에 비해 더 실효성 있는 대안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개인에게 보편적으로 소득을 지급하자고 제안하고, 그리하여 일에 대한 소득의 의존을 낮춘다. 이를 통해 임금 시스템과 가족 제도가 소득 분배의 신회성 있는 메커니즘으로서 기능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게끔 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해법을 내놓는다.
(p. 230)
당시 주장했던 가사임금의 형태는 주부들에게 지급하는 것이였는데 이는 곧 젠더 분업을 더 확실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었으며 취지와는 무관하게 이는 자본주의 남성노동자-여성가사노동자의 시스템을 공고하게 해줄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저자인 케이시 윅스는 이 관점을 없애버리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 맞게 정치적으로 세련된 형태로 이 요구들을 다시 고려해야 한다며 그 적절한 방법으로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기본소득을 받음으로써 일에 대한 의존도 줄인다는 효과도 있다.
기본소득 요구는 가장 내 특정 젠더 구성원을 잠재적 수혜자로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관점이자 자극으로서 훨씬 나은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기본소득 요구는 현실화된 젠더 범주를 재생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혜택이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 요구는 다른 상황에 놓인 여러 주체의 관심사에 부응할 수 있다. 그 주체들에는 가사임금 요구가 닿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한 여성 계층까지 포함된다. 하지만 기본소득 요구의 젠더 중립성을 고려하면, 재생산노동의 조직화와 젠더분업을 논의 의제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회적 재생산의 조직화와 재생산노동의 젠더 분업이 기본소득 요구의 설명과 전파가 일으키는 관점의 일부로 자리 잡게 할 수 있다.
(p.232)
최근들어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전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완전'한 기본소득은 보기가 어려운 것 같다. 기본소득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스위스는 부결로 끝이 났고 한국에서도 지난 대선에서 여러 후보들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놓았지만 '완전'한 기본소득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사회수당의 성격이거나 실업부조형의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최근의 청년수당이 이런형태다. 아직 일반 시민들의 생각과 현실적인 문제등으로 인해 바로 도입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지금 그나마 행해지고 있는 '비 완전'한 기본소득'이 '완전'한 기본소득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못 일어나라는 법은 없다. (노동여부에 관계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이루어 질 날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