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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노동을 위하여 - 좋은 일의 기준이 달라진다, 2021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황세원 지음 / 산지니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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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을 하며 살아간다. 생계를 위해서든 일을 통해 삶의 의지를 느끼기 위해서든.

누가 '나쁜'일을 하고 싶어할까? '나쁜'일인지 '좋은'일인지 주관적일수도 있지만 한국이 한창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던 시대(70~80년대)엔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흔히 생각하는 '나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박봉에 노동환경이 나빴더라도 경제성장을 피부로 느꼈기도 했고 성장에 대한 믿음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본인들이 느꼈을 노동을 하며 열악한 노동환경과 사회적인 평가가 자식에게 만큼은 이런 일 안시켜야지 하는 의지도 강했으리라.  

반대로 그 당시 '좋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판-검사등의 큰 일(?)하는 사람들이나 의사라던가 대기업의 사무직 노동자등이 하는 일일 것이다. 그 '좋은' 일이란게 그 일을 함으로써 보람되는 일이기때문에 '좋은'일이 된지는 의문이다. 주위의 평판일 수도 있고 급료의 차이일 수도 있고 덜 육체적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비정규직 일자리가 본격적으로 양산된 IMF시대를 거쳐 사람들 마음 속에 조금씩 '좋은 일'이라는 개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안정적인 일자리 즉, 정규직이라도 하는 것을 원했다. 그런 생각도 이제 20년이 넘게 흘렀다. 지금의 '좋은 일'은 뭘까? 대기업, 정규직의 일자리일까?


이런 물음으로 부터 출발한 이 책은 변화하고 있는 '좋은 일'에 대한 기준을 살펴보는 책이다. 

제목인 말랑말랑한 노동? 말랑말랑과 노동은 뭔가 쉽게 매치가 되지 않는다. 무슨 뜻일까? 표지에도 곰돌이 젤리가 보이고..

저자인 황세원대표는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을 오피스 노동이라고 칭하며 딱딱한(경직적인) 노동이라고 하였고, 흔히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동(예를 들면 돌봄노동, 택배노동, 학습지교사등)을 동네노동이라고 칭하며 이 경우엔 흐물흐물한(흘러내리는) 노동이라고 구분지었다. 


 저자가 보기엔 우리가 흔히 좋은 일자리라고 알려진 오피스노동도 너무 경직되어서는 문제가 생길것이고 동네노동의 흘러내리는 수준이 커진다면 그것 또한 문제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노동이 경직되는 것도 아닌 흘러내리는 것도 아닌 말랑말랑한 정도로 양쪽을 맞출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에서 이 책을 시작한다. 당연히 그렇게 되면 좋은 건 누구나 안다. 그렇다면 왜 실제론 안될까? 저자는 한국사회에 여러 걸림돌이 있다고 보았다.


먼저 '공부지상주의'가 한국에서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른나라또한 없는 것은 아닐테지만 한국은 특히 더 심하다는 것인데 한국을 사회진입직전까지 청소년기에 한줄로 서 있는 사회라고 보았다. 그럼 한 줄로 줄 세운(누가 앞에 있고 누가 뒤에 있는) 근거는 뭘까? 당연하게도 성적이다. 특히 대학입시 성적인 경우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우리사회는 이 줄세우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고..  


이제 우리, 고3 때까지 공부 잘했냐 아니냐는 최대로 치더라도 한 5년 정도만 인정해 주는 게 어떨까? 그다음에는 서로 어느 대학 나왔는지 묻지도 말고, 알려고 하지도 말았으면, 그런 얘기 꺼내는 사람은 ‘완전 구리다’고 여겨졌으면 좋겠다. 현재 하는 일과 지향에 따라서 자기를 들어내고 서로 이해하는 사람들끼리 잘사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p. 206)


단순화시켜 한국을 사람들이 한 줄로 100명이 서 있는 사회라고 가정해보자. 앞의 10~15명정도의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는 일터는 흔히 말하는 큰조직의 정규직이고 평균 이상의 복지, 사내 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좋은 일자리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 몇명만 들어가게 된다. 나머지의 사람들은 좋은 기업의 비정규직으로 들어가거나 중, 소기업혹은 동네노동에 종사할 확률이 높다. 이 동네노동은 사회적 차별도 있고 저임금에 무시와 하대도 있을 수도 있고 4대보험이 안되며 상대적 위험한 노동환경인 일자리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그룹이 들어가는 일자리의 질이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에 가만히 있었을까? 아니, 정부도 나름 정책을 펼치고 대책을 만들었다. 위의 모델을 통해 설명하자면 좋은 일자리에 10~15명 갈 수 있었던 것을 5명더 추가해 20명정도가 갈 수 있게 만들어 준 식이었다. 물론 5명 정도 더 들어가게 만들어주는 것 또한 의미있는 것 아니냐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맞다. 하지만 단지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조금 더 넗혀준 것으로 정부의 역할을 다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는.. 이제는 다른 식의 해법을 사회가 함께 고민해봐야한다.


IMF 외환위기 이후로 '불필요한 노동력을 줄이는' 식의 구조조정이 기업의 체질을 고치고 경쟁력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정부 및 공공기관조차도 필수 인력을 최대한 적게 잡고, 가능하면 외주화하거나 임시계약직으로 채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및 조직들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개입으로 장기근속(지속고용) 일자리들을 늘리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데다가 공기업, 대기업, 금융기관과 같은 조직들일수록 '공채'문화가 강하기 떄문에 인위적으로 채용 규모를 늘린다고 해도 이와 구분되는 직군이거나 임시 계약직일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 0년, 초회복의 시작』, p.72~73)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에 가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 중엔 그럼 공무원 공부해야겠다라는 방향이 생긴다. 공무원시험은 나이제한도 없고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공정'하다고 남아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이런 흐름에서 이제는 복병이 생겼다. 최근에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더믹이라던지 기술변화, 산업의 변화로 좋은 일자리로 가는 문(정부가 조금이라도 늘리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은 오히려 더 줄어드는 상황이다. 


세계 곳곳 뿐만아니라 한국도 이미 저성장시대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코로나 팬더믹으로 이러한 흐름은 더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을 기존의 방식대로 유지하는 것이 괜찮은 걸까? 저자의 말대로 이제는 기존의 딱딱한 노동시장을 다양한 선택지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노동시장으로 변화해야 되지는 않을까? 사회전체로 봤을 때도 효율적측면에서도 좋은 방향일 지도 모른다. 이런 주장을 하면 노동계에선 발끈할 것이다. 아니! 그럼 쉬운 해고를 하는 사회가 되어야하냐고.. 이해는 간다. IMF시절 큰 사회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경영계에서 주장하는 유연한 노동시장을 떠올릴 수도 있고. 당연하게도 이런 변화의 전제조건은 노동의 질이 어느정도 비슷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노동의 최저선을 올려야 할 것이고 어떤 형태로 일하든 큰 차이없는 사회를 만드는 방향으로의 모든 구성원의 논의가 필요하다.  


두번째의 걸림돌은 정규직의 개념의 모호성이라고 하였다. 


정부는 대체로 정규직 전환을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형태로 전환해 주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일반적인 인식 가운데는 '임금을 포함해서 일자리의 전반적인 질적 수준을 높인다'는 뜻과 '직장 안의 차별적인 제도와 관행을 적극적으로 시정한다'는 의미가 존재한다.

(p. 89~90)


통계청에서 발표해서 분석하는 것으로는 우리나라의 정규직 비율을 보통 63~65%정도로 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물어보면 그렇게 느끼질 못한다. 정규직의 개념이 정부에서 보는 것과 일반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과 괴리가 있다. 이런 괴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올해 떠들썩했던 인천국제공항의 정규직 전환 갈등이었다. 아무리 정부가 선한 의지로 움직였을지라도 이 정도의 사회적 문제가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청년세대들의 공정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물론 문제가 있었다고 보지만 정부쪽에서 보다 더 세심하게 접근을 하지 못한 정책 실책의 탓도 크다.   


동시에 한국 사회에는 열악한 일자리에서 힘겨워하는 사람들, 심지어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일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진작 노력해서 안정적이고 좋은 일자리에 들어갔어야지'하는 식으로 개인 탓을 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사람들은 죽도록 노력해서 정규직이 되는 데, 비정규직들이 아무 노력 없이 그 희소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코로나 0년, 초회복의 시작』, p.74~75)


이 책에서 나오듯 그렇다면 일반 시민들이 생각하는 정도로 다시 정규직 비율을 추정해보면 7~10%정도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볼때 정규직 사회로의 이행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 가능할까? 오히려 위에 썼던 것처럼 노동의 최저선을 올리는 것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 이젠 IMF이전 호시절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렵다. 오히려 단기 근속사회로 도래하고 있는 시대인데 우리 대부분이 장기근속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꼭 하나의 직업만이, 정규직만이 아니더라도 좋은 일일 수 있다. 


우리에게 일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삶 전체는 아니다. 우리 삶에서 일이 큰 부분을 차지하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할 뿐이다.

(p.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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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2-04 04: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친구한테 똑같은 이야기를 들엇어요. 비정규직들을 그냥 쉽게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면, 자기들처럼 죽자사자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은 기운 빠진다고...... 정규직까지 되기 위한 자신들의 열심을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비정규직들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또는 비정규직들은 정규직들을 바라보면 나도 저들처럼 될길 소망하면서 매일 매일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는지....ㅠㅠ 참...머라할 답을 내기에 어려운 문제인것 같아요. 어느 정도는 우리의 직업 (일) 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점점 느끼고 있는 요즘이에요.

블랙겟타 2020-12-04 23:11   좋아요 2 | URL
댓글 감사합니다. han님 ^^
이 책에도 han님이 말한 질문이 나와요 . 설사 좋은 학력과 높은 입사 경쟁률을 뚫은 실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규직이 된 순간 신분이 높아져서 다른 사람을 차별할 자격이 생긴건 아니라고요. 물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취준생이나 입사한 2-30대의 입장은 당연히 이해는 가요. 그들이 이렇게 만든건 아니니깐요. 사회전체적으로 정규직이 하기에는 덜 중요하고 하찮은 일에 비정규직을 쓰는 관행이 없어지지 않는한 이런 인식이 바뀌기가 힘들 것 같아요. ㅜㅜ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그동안 사회전체적으로 은근히 암묵적으로 나눠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저 부터 반성을 하게되네요..

han22598 2020-12-05 07:32   좋아요 2 | URL
저에게도 사실 자신이 없는 부분이라서....더 실랄하게 비판을 못하겠어요. 누군가 너부터 똑바로 살아랏! 이럴 것 같아서요 ㅠ

블랙겟타 2020-12-06 23:05   좋아요 2 | URL
저도 그 부분에선 자유롭진 못하죠. ㅠㅠ
그와 별개로 어쨋든 한국도 단기근속 사회로 가는 흐름이라 모두가 이 새로운 미래를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정부나 정치권도 단순히 억지로 정규직을 늘릴 방향보다는 일의 형태가 다양해질 미래에 대응해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사회적 보험이라던가..)에 대한 정책적인 고민을 해봐야겠지요. 개인 차원에서도 모든 일에 대한 존중 위에 좋은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봐야겠구요..
(글은 이렇게 써놨지만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도 알기에.. ㅠㅠ)
 
일본을 禁하다 - 금제와 욕망의 한국 대중문화사 1945-2004
김성민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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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시절 많은 과목 중에 특히 근·현대사를 좋아했었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왕 순서나 왕의 업적을 외우는 국사파트보다 조선이 끝나고 일제강점기때 일어난 독립운동의 연도는 더 잘 외웠다. 이 과목에서 배울 수 있었던 크고 작은 전투도 많이 나오는 독립운동사를 배우며 뭔가 국뽕(?)에 취해 이야 우리나라 대단하네 라며 감탄하며 신나게 공부했었다. 당연히 이 부분을 좋아했으니 그 당시 적국인 일본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았다. 일본의 횡포에 부글부글 민족적 감정이 끓어오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와 함께 어릴때 부터 나에게 영향을 많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 일본문화였다. 특히 만화(망가)라던가 일본에니메이션(아니메메)였는데 당시엔 일본국적의 만화/애니메이션인지도 모르고 보았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 것 인지 알고 봤던게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공식적인 일본문화개방이 있기 전이였기에 등장인물에 대한 이름도 현지화해서 한국이름이었으니 말이다. 예를 들면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아니라 '강백호'거나 피구왕 통키(불꽃의 투구아, 돗지 단페이)의 주인공이 '이치게키 단페이'가 아니라 '나통키'였던 것 처럼.  


역사과목을 통해 일본을 미워했으면서도 (몇몇은 일본문화인지도 모른채)일본문화에 영향을 받은 이런 나의 이중성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어느정도 설명해준 것이 이 책『일본을 禁하다』였다. 

이 책은 일본문화 개방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문화사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는 '금지'담론을 생산하는 정치 영역에서는 접촉이 허용되지 않는 '위험한 손님'이었지만, 실제 대중문화를 둘러싼 경제적·문화적 현장에서는 매우 복잡한 시선과 욕망이 중층적으로 투영된 대상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금지와 월경이 동시에 작동했던 근저에는 경제 발전과 근대화의 상징의 척도였던 자본주의 문화와 그것이 생산하는 현대성을 둘러싼 욕망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p. 43)


광복 후 친일의 역사를 제대로 끊어내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광복 후 대한민국의 운명에 대한 주도권을 잡은 미국의 전략적인 무시인지는 모르지만 생각보다 일본 대중문화가 비공식적으로 한국에 전파가 되고 있는 중이였다. 공식적으론 일본 문화를 금지하고 정치적으로도 반일을 외쳤던 시대였지만 특히 한국의 상층부나 정권을 잡고 있는 쪽에선 (가장 가까운 나라이자 우리보다 앞서 경제 고성장 중인 나라인) 일본을 내심 부러워한 것을 넘어 일본 문화를 늘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시작을 반일민족주의로 시작했으나 그 본인도 일본 메이지유신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기도 하고 우리나라보다 앞서 경제 고성장 중인 이웃나라 일본에 대한 로망(이 것은 단순하게 친일정권이였나를 넘어 당시 북한보다도 못 살았던 한국의 처지를 볼때 고위층에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우리의 미래는 일본이다라던지 가장가까운나라인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만이 성장할 수 있겠다라는 현실적인 전략과  동아시아에서의 반공블럭의 축인 일본과 하루빨리 외교관계가 복귀하는 것이 나쁠 것이 없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반일에 대한 전체적인 국가 분위기를 시민들과의 합의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 아무것도 준비되어있지 않은채 위로부터의 강압적인 정책 추진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를 바탕으로 (지금도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사건인) 1965년에  한일 국교화 정상화를 우여곡절 끝에 성사시켰다. 하지만 아직 시민들은 '반일'을 갑자기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기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공식적으로는 왜색이라며 비난하면서도 일본문화는 비공식적이거나 교묘하게 수입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97년 공식적인 일본문화개방 전 까지 유지가 되었는데 특히 수입된 일본애니메이션에서 '왜색'이라는 이유로 기모노라던가 신사가 나오는 장면은 아예 통편집되거나 극중에 나오는 일장기는 어설프게 태극기로 그려넣는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있었던 이유다.


한국 대중문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일본 대중문화는 단순한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침략으로 인식되었으나 ('문화 제국주의 비판'으로서의 정당성), 동시에 일본 대중문화를 미국 대중문화로부터 얻고자 했던 것과 같이 자본주의 문화의 하나의 모델로 인식했던 것과 같이 자본주의 문화의 하나의 모델로 인식했던 한국 대중문화 산업은 일본 대중문화를 배제하는 대신 국적을 지우고 적극적 모방, 표절하는 방법으로 산업적 성장을 피했다('산업적 근대화'로서의 정당성).

(p. 231)


97년 일본문화개방전까지 한국에서 트랜디한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은 대개 일본 드라마나 프로그램의 형태와 매우 유사한 형태였는데 좋게봐주면 모방이겠지만 표절이라고 볼 수 있는 사례도 상당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이 시기를 지나 나중에 일본문화를 정식으로 접했을 때 한국문화와 전혀 위화감을 갖지 못했을 때의 충격은 한국 프로그램 포맷이 일본 포맷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어찌됬건 이러한 과정들이 결국은 한국문화의 성장도 이끌어와 내가 어렸던 시절과는 다르게 지금 자라고 있는 어린세대들은 일본 문화는 일본 문화인채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거니와 k-적인(?) 대중문화를 더 쉽고, 많이 접하고 있고 심지어 일본문화보다 더 좋다고 느끼고 있으니 한국의 대중문화의 위치가 변했긴 했나보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일본이라는 타자가 '과잉된 존재'였다면, 전후 일본에서 한국이라는 타자는 자이니치在日나 북한, 다른 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줄곧 '부재'해온 것이다.

(…)

냉전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속에서 함께 미국을 욕망하고, 고도성장과 발전주의를 경험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상호의 '현대'가 갖는 다양한 문제를 공감하고 공유하기를 꺼려한 두 나라의 억압된 포스트콜로니얼한 문화적 관계는, 그렇기 때문에 '65년 체제'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 235)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 중엔 예전 박근혜 정부때 한-일 관계가 좋았었는데 말이지라고 회상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 시절이 결코 좋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당시가 일본 쪽에서 볼 때 우리를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한-일관계가 좋았다고 하기엔 한국이 정치적으로 피해를 많이 봤다. 지금의 일본의 아베정권을 보고 있자면 한숨만 나오는데 언젠가 합리적인 정치세력의 대표가 총리가 되는 날이 오길 바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생각보다) 문화적으로 영향력을 끼친 나라이면서도 알면 알수록 어려운 나라인 일본과 언젠가는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얽힌 문제들을 진지하게 논의해볼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도 되면서 진짜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 이 책의 독서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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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05-31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대중문화(일드, 일본영화, 음악, 만화까지)를 정말 청소년기에 아주 열심히 섭취하면서 자란 저로서도 흥미로운 주제예요. 의식은 반일이었지만, 정말 문화는 일본 문화 좋아했었더랬죠~.
 
보통이 아닌 날들 - 가족사진으로 보는 재일조선인, 피차별부락, 아이누, 오키나와, 필리핀, 베트남 여성의 삶
미리내 지음, 양지연 옮김, 조경희 감수 / 사계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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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적부터 일본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TV를 통해 즐겨봤었던 더빙된 만화영화가 나중에 일본애니메이션임을 알게되고 한국의 애니와 일본의 애니의 격차를 실감했을 떄  

그리고 그 때 당시 서울에 계신 이모집에 샤프 텔레비젼을 보았을때, 아버지께서 일본출장을 다녀오며 사온 일제 사인펜세트를 받고 좋아했던 그런 날들을 지나며 그런 일본을 동경 했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때도 특유의 시니컬함이나 철학적인 의미를 지닌 일본 만화나 일본 영화를 보며 철학적인 부분을 어설프게나마 그곳에서 배웠고 괜히 어른스러워졌음을 느끼며 뿌듯했었다. 그와 동시에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민족투사가 되어 일본욕을 마음속으로 했던 적도 있듯 과거의 일본은 싫어했고 현대의 일본을 좋아했다. 그리고 일본 관련 책을 읽으며 뉴스를 보며 와 양국이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었다.


예전에 대학에서 일본정치 수업을 수강했었는데 그땐 뭐 민족성에 대한 주제였던것 같다. 그 수업에서 한국이나 일본이 비슷한 점이 유독 단일민족임을 강조한다는 것이라고 했었던 게 생각이 난다. 그래 나도 그때 속으로 뭐가 한국이 단일민족이냐. 한반도에서 얼마나 많이 침략을 받기도.. 새로운 나라가 새워지기도 했는데 그 속에서 유일한 민족의 피로만 이어져 있을까? 인종적으로 몽골계 동양인이 매우 다수이기에 흡사 그렇게 느껴지고 뭔가 국가적으로 단결하기 위해 이런걸 이용하는거지 라고 생각했었다. 한국은 강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아직 여러민족이 이루어진 형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 되본 적이 없다. 이웃나라인 일본도 비슷하다. 일본도 예전부터 단일민족임을 주장하며 강한 배타성을 가진 나란데 이 나라엔 아직도 깊게 내재된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내 마이너리티라고 볼 수 있는 재일조선인, 피차별부락, 아이누족, 오키나와인, 이주민들 등 이다.


이 책 『보통이 아닌 날들』은 가족사진을 통해 이러한 일본내 마이너리티 여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왜 가족사진일까? 재일조선인의 집에는 가족사진이 많았다. 다른 피차별부락, 아이누족, 오키나와인, 이주민들도 비슷했다. 


사진은 모순을 갖고 있고 가족사진 또한 모순덩어리 같은 것 아닐까요? 물론 개인의 초상에도 참과 거짓의 모순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요즘의 셀카도 거짓이 가득하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셀카는 한 개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에 비해 가족사진은 다수가 찍으니까 더욱 거짓이 확대된다고나 할까요. 가족사진에 사람과의 이상적인 관계를 담으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현실의 관계를 숨기고 사이좋은 가족이기를 바라는 욕망을 찍으려 하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지지요.

(p. 271) 


출신으로서 사회적·경제적 차별받았고 동시에 여성으로서 받았던 이중적 차별을 겪고 있는 그들이 좋든, 싫든 가족과 커뮤니티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동시에 구속하는) 곳이였다. 현실이 아무리 혹독했더라도 그곳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을 바라며 가족사진으로 남겼다. 


1993년 어머니는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는 서른여섯이었다. 어머니의 앨범을 정리하는데 잊고 있던 사진이 나왔다. 친구 어머니들과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어딜 보나 일본인인 기모노 차림의 어머니 사진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찢어서 버렸다. 재일조선인의 장녀로 교토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 일본 사회의 혹독한 차별 속에서 형제들을 돌보느라 학교도 가지 못하고 늘 누군가를 위한 인생을 살아온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어머니를 멸시하는 일본인처럼 되라고 강요했다. 부끄러웠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p. 40) (황보강자)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할머니가 점심으로 북엇국을 끓여주셨다.

 투명한 국물 속에서 황금빛이 도는 말린 생선과 콩나물이 너울너울 춤추었다. 한 입 떠먹는데 눈물이 떨어졌다. 할머니가 끓여주신 국은 엄마가 만들어주던, 내가 너무나도 싫어했던 바로 그 국과 똑같은 맛이었다. 나는 엄마가 할머니에게 전수받은 집안의 맛을 엄마의 병을 이유로 거부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본 사회에 동화되어 평범하게 살아가라고 그 누구보다 세차게 엄마를 몰아붙였던 사람이 엄마의 딸인 나이지 않았을까. 나는 내 앞에 놓인 차별에 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편협한 시각에 사로잡혀 엄마를 궁지로 몰아갔다.

(p. 116) (최리영)


엄마의 삶 속에 '젠더적 관점'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엄마에게 일이란 '성역할의 분담'같은 단어 너머에 있었다. 엄마는 일터에서 접하는 부당한 대우, 이를테면 '남자 일을 하는 여자', '여자 주제에'같은 멸시의 시선을 어떻게 느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엄마는 딸인 나와 여동생을 정말 아끼고 사랑했지만 어른이 된 뒤 엄마와 여자로서 마주않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다. 분명 엄마도 나와 여동생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을까. 뒤 돌아보니 자꾸 마음에 걸린다. 

 늘 싱글싱글 웃으면서 땀을 훔치던 엄마는 딸과 속마음 한 번 나누어보지 못한 채 1999년 2월 19일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62세였다.

(p. 207) (야마자키 마유)


평소처럼 둘이서 저녁식사 뒷정리를 하는데 엄마가 괴로운 표정으로 비밀을 얘기하듯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참관일에 갈 테니까, 미리 참석자 확인 명당에 엄마 이름을 한자로 써놔. 꼭 적어놓아야 해."


그때 엄마가 지은 표정이 지금도 뇌리에 또렷하다. 아니 잊어서는 안되는 기억으로 내 마음속에 새겨졌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부끄러운 듯도 햇다. 지금 생각해보면 10살 남짓한 딸에게 지어 보일 표정은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 표정을 본 순간, 엄마가 참관일에 오지 않았던 진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딸에게 조차, 아니 딸이기 때문에 더욱 말할 수 없는 절박한 이유. 엄마는 글을 쓸 줄 몰랐던 것이다. 아마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생각만 하다보니 엄마의 사정 따위는 전혀 신경 쓸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사람은 누군가에게 쉽게 상처를 준다. 10살인 내 안에도 남을 차별하는 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변명이 들어 있었다. 어린애가 뭘 아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 엄마에게 미안했다. 자식에게 이런 부탁을 해야만 했던 엄마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쓰리다.

(p. 208~209) (야마자키 마유)


재일조선인3세로 살아온 황보강자씨, 부락민과 한국인사이에서 태어난 최리영씨, 피차별부락출신의 야마자키 마유씨.

그들 모두 일본내에서 마이러니티의 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나 자라며 어릴적부터 '일반적'인 일본인과 다름을 느끼기 시작했고 더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 어머니에게 학교졸업식때 저고리가 아닌 기모노를 입어달라고 부탁해 실제 기모노를 입고온 어머니의 모습에 기뻐했었고.(황보강자) 어머니가 늘 해주신 그 일본음식 같지 않은 북엇국을 싫어해 어머니에게 제발 일본사회에 동화되어 살라고 모질게 다그친 적도 있었고(최리영) 다들 오는 학부모 참관일에 늘 오지 않던 어머니에게 왜 안오냐고 한번 오는게 힘든거냐고 크게 화를 낸적도 있었다.(야마자키 마유) 하지만 그들 또한 단지 일본인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을 결국 국가는 사회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이 후 그녀의 어머니들이 겪었을 지독한 차별로 인해 자신의 학교도 온전히 마치지 못한채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양육해야 했을 상황을 이해했을때 그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이 책은 일본내의 마이너리티의 삶을 산 이들이 다음세대로 이어진 이야기로서만이 아닌 마이너리티 여성의 이야기기도 하다. 출신과 성이라는 이중의 차별 속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그들 일생의 이야기는 울림이 크다. 일본뿐만의 이야기일까? 한국이라고 다를까? 한국내 다문화가정의 여성의 삶, 매매혼으로 한국으로 건너온 여성들의 삶을 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신경써야될 이유를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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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24 16: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책을 알고 갑니다, 블랙겟타님.

블랙겟타 2019-10-24 23:1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ㅎㅎ ( •◡-)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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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란 정치성향을 떠나 대부분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단어다.

한국의 시민적 저항의 경험은 풍부하다. 현대사를 통해보더라도 권위주의 군사정권을 오래 겪으며 제1의 과제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고 실제 이루어내기도 했다. 이렇게 20세기를 겪으며 한국에서는 민주주의 가치를 가장 절대적으로 보는 시민들이 대부분 일 것이다. 나역시도 그랬었고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 제도는 불완전한 제도다. 이 제도는 생각보다 최선을 선택하기 보다 차선, 차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민주주의 하에서는 제도만으로 사회가 좋아지지 않는다. 의식적인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곧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현대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택하는 걸까? 좋은 제도는 아닐지라도 아직까지 이것보다 괜찮은 제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모든사람이 똑똑하고 선한 사람이 되길 지향하는 것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이 아주 약간 선해지는 것을 지향하는 제도라고 볼 수 있겠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정치인들이나 정치시민들이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만 제대로 작동하는 제도다,


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미국 45대 대통령선거에서 전세계가 경악한 아웃사이더인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이 되고 그가 미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미국헌법을 마음껏 주무르며 미국의 민주주의조차 쉽게 무저질 수 있음을 느끼고 현대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해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쓴 책이다.


기존의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하면 쿠데타로 인해 기존 권력을 불법으로 탈취하여 군부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현대민주주의의 위기는 저자들은 아웃사이더들에 의해 찾아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아웃사이더들이 어떻게 중앙정치로, 대통령까지 올라설 수 있었을까?


20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의 시나리오는 정황만 달리하여 전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아돌프 히틀러와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같은 아웃사이더 정치인들 모두 내부로부터, 그리고 선거나 강력한 정치인과의 연합을 통해서 권좌에 올랐다. 각각 사례에서 기존 엘리트 집단은 인기 있는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여도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으며, 나중에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어긋나고 말았다. 그들은 두려움과 야심, 그리고 판단 착오라는 치명적 실수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들은 권력의 열쇠를 잠재적 독재자에게 기꺼이 넘겨주었다.

(p. 21)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1인 1표다. 즉, 대중의 인기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정당은 (아예 외부사람이라도)인기가 좋은 사람을 내세워 선거에 이기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웃사이더들의 출현은 그렇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결과로 벌어지는 것이다. 처음엔 정당의 정치 지도자들이 인기있는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이더라도 그의 '인기'만을 이용할 뿐이지 충분히 이 정당시스템으로 '그'를 컨트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데리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커다란 오판이 그를 합법적으로 지도자로 만들어주고 결국 정당이 그에게 먹히는 꼴이 나는 경우가 벌어진다. 이 흐름을 우리는 최근에 어디서 보지 않았나? 지금 미국의 상황이 보여주고 있다. 


잠재적 대중선동가는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 존재하며, 때로 그들은 대중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경고신호를 인식하고, 이러한 인물들이 권력의 중앙 무대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극단주의자나 선동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 떄 기성 정치인들은 힘을 합쳐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한다. 물론 극단주의자의 호소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중요하지마느, 더 중요한 것은 정치 엘리트 집단,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가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gatekeeper인 셈이다.

(p. 29)


그렇다면 이 아웃사이더들을 어떻게 기존에는 막아왔을까? 기존의 극단적이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려는 자가 출현했을 경우 이 사람을 기존의 정당의 지도부들이 정치적 결단을 통해 배제함으로서 아웃사이더들을 고립시켜왔다는 것이다. 정당이 대중의 인기가 높더라도 게이트키퍼로서 막아왔다고 하였다. 


미국 현대 역사에서 어떤 주요 대선 후보도 헌법적 권리와 민주주의 규범을 무시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제를 설계했던 해밀턴을 비롯한 모든 건국자들이 우려했던 바로 그러한 유형의 인물인 셈이다.

 미국 사회는 이러한 모든 신호를 인식해서 경고등을 울렸어야 했다. 그러나 문지기 기능은 프라이머리 과정에서 작동하지 않았고, 결국 대통령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 주류 정당 후보로 나서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당은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1930년대 유럽,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 남미에서 민주주의가 붕괴했던 역사의 교훈을 다시 떠올려보자. 문지기 제도가 제역할을 하지 못할 때 주료 정치인들은 위험한 인물이 권력의 중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p. 86)


그럼 미국 공화당은 트럼프의 출현을 막지 못했을까? 트럼프가 아무리 인기있더라도 결국 후보는 기존의 공화당 후보에서 나올 것이고 전당대회의 흥행몰이에 도움이 돼 그를 이용할 가치만 쏙 뽑아먹을 자신이 있었다고 오판을 했었다는 것이다.


왜 정당은 게이트키핑 능력을 상실하고 왜 무리한 수(아웃사이더를 끌어드리는 악마의 유혹)을 쓰면서까지 정당 스스로가 무너지는 흐름으로 가고 있을까? 두 저자는 정당간 양극화에서 답을 찾았다. 상대가 너무나도 미워서 꼭 이겨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하면서부터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경기에서의 경쟁자가 아닌 죽여야하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서로 더 격렬한 증오와 미움을 동원해야만 상대방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초만 하더라도 왼쪽진영에서 일어났던 흐름이 20세기 후반부터는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다. 기존의 주류정치에 있던 보수정당들이 자기 정당으로서의 능력을 계속해서 잃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좌파를 경쟁자가 아닌 없애버려야할 존재로 인식하여 무조건 이기기 위해 인기영합적인 인물(더 극우적인 인물)을 영입해서 선거에 뛰어든다. 그들(아웃사이더)을 이용하는 순간 보수정당내 중도보수층은 이탈해버리고 더 오른쪽에 있는 지지층이 들어오고 이는 곧 선거에 이기더라도 정당스스로가 파괴되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2016년 선거 이후로 진보 진영의 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민주당도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른다면 공화당이 규칙을 어기면 민주당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상대가 자제의 규범을 저버린 상황에서 혼자서 자기통제와 예의를 지키는 것은 권투 선수가 한 손을 묶고 링 위에 올라서는 것과 같다. 악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 들 때 규칙을 지키려는 자들은 바보취급 받는다.

(…)

 그러나 우리 두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당이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첫째, 외국 사례들은 이러한 대응 전략이 오히려 전제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전면적인 전략은 중도 진영을 위협함으로써 야당의 지지도를 떨어뜨린다. 반면 여당 내 반대파조차 야당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 단결함으로써 친정부 세력을 집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야당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때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 정당성을 확보한다.

(p. 269 ~272)


상대방이 이미 암묵적인 룰을 깨고 반칙을 범하고 있다. 그와 경기를 하고 있는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많은 구경꾼들은 나에게 "야 바보처럼 룰 다 지켜가면서 하지말고 너도 똑같이 해라." 라고 외친다. 

하지만 두 저자는 그럼에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공화당처럼 우리도?' 라고 하는 순간 민주당은 절대 못이길 것이라고 했다. 사실 반칙도 먼저 쓴놈이 더 잘 쓴다. 그래서 뒤 늦게 반칙쓰는 놈들이 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 뭐가 대안이냐라고 묻는다면 저자들은 민주당 너네가 공화당내에 있는 합리적인 인물들이 힘이 생길 수 있게끔 해라는 것이다. 공화당 내에 있는 중도보수층을 자기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공화당내 정치적 힘을 발휘하게 해서 반칙을 시도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합리적 대화 파트너로 만들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즉각적인 효과를 내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방법일 수도 있고 정말 오래걸리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제도 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주장에 끌릴 수 밖에 없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동시에 언제든 민주주의는 제도적 위기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들어와 많이 듣게 되는 '사이다'발언. 언젠가부터 우리는 '사이다'만 찾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알게된 '그것은 알기싫다' 296편 방송에서 조성주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들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책임있는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책임있는 결과혹은 변화를 생각한다면 그런 극단적인 분노와 주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실질적인 우리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 또는 힘과 변화를 추구할 수 있을까? 악마의 유혹에 어떻게 하면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정치로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나부터 반성해본다. 이 책을 덮은 뒤, 많은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 

지금 이 순간도 '고구마'일지라도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책임있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께 감사를 드린다. 


참고

https://soundcloud.com/xsfm/296a

그것은 알기 싫다, 293a. 시사 아카데미:자해하는 민주주의 /조성주


https://soundcloud.com/xsfm/296b

그것은 알기 싫다, 293b. 시사 아카데미:증오와 민주주의 /조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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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수 없는 여자들 - 공부한 여자들은 왜 밀려나는가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1
최성은 지음 / 스리체어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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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만난 것은 진짜 우연이였다.

도서관에서 책장 속을 지나던중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다.

무심결에 책을 꺼내 대충 훑어보니 가볍기도 하거니와 한 때 관심있었던 임금격차에 관한 이야기라 그 시간 이후로 자리로 돌아와 읽어갔다.


저자는 여성·아동정책 분야의 연구자로서 저자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여성 노동자로서 직접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오늘날 한국 여성이 어떤 노동환경에 직면해 있으며 왜 소외될 수 밖에 없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얇지만 알차게 기록한 책이다.  


1만 5000명 대 454명. 500대 한국 기업의 임원 성별을 조사한 결과는 우리 사회의 성비 불균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

 노동 시장 구조를 연구한 저자는 이런 현상이 축적된 불평등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이유로 노동 시장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높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기업은 언제든 회사를 떠날 수 있는 여성들을 교육하지 않았고, 여성들은 고숙련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핵심 노동에서 소외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결국 여성의 일은 임금이 낮은 직무에 한정되고, 아이를 위해 경력 단절을 택한 여성은 다시 사회로 복귀하지 못한다. 여성은 아무리 배워도 일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p. 104)


기사를 찾아보니 18년에는 여성임원이 518명으로 책에서 인용한 수치인 17년보다 64명이 늘었다. 퍼센트로 보자면 3.0%에서 3.6%로 0.6%포인트가 상승했다. 사실 3.6%도 매우 갈길이 멀다. 어쨌든,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오늘날 뉴스에서 쉽게볼 수 있는 커다란 성별 임금격차라던가 성비 불균형의 원인이 축적된 불평등의 결과라고 보았다. 예전에 성별 임금 격차에 관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었다.


임금격차가 있는 건 맞는데. '격차'를 세밀하게 나눠보니 그 격차의 일부는 '차별'이 아니라 생산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정확한 판단이야. 그 격차를 무조건 차별이라고 하면 안되지. 생각보다는 높다고 할 수 없어.


이런 식으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았고 노동 경제학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있다. 그럼 좋다. 이것을 받아들이더라도 그 생산성의 '차이'는 왜나는 걸까?


흔히 한국은 여성의 경력단절현상이 뚜렷한 나라다. 그 현상을 보여주는 근거로 여성의 연령대별 경제활동참가율을 보면 전형적인 M자 커브다. 다시말하면, 남성의 경우 어릴때부터 올라가기 시작해 40대에서 정점을 찍고 나이듦에 따라 참가율이 내려가는 역U자 커브인데 반해, 여성도 어릴때부터 올라가다가 40대 이전에서 팍 떨어졌다가 다시 조금 올라가다가 결국 나이듦에 따라 떨어지는 자연 감소로 이어진다. 이 M자 커브는 모든 나라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들도 70-80년 경에는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남자의 형태와 비슷한 형태로 바뀌어갔지만 여전히 M자 커브가 남아있는 나라는 OECD국가중에선 일본과 한국정도다.


이 내려가는 구간인 20대-40대 시기에 여성들이 겪게되는 출산과 육아때문에 퇴사 혹은 휴직으로 인해 노동경제학적으로 볼때 가장 경력을 많이 쌓아야할 시기에 경력단절이 일어나 인적자본의 축적면에서 남성에 비해 불리해지고 이는 곧 임금의 격차와 연결이 된다.


생산레짐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여성학자 마가리타 에스테베즈 아베는 생산 체제를 구성하는 제도적 맥락이 젠더 격차를 만들고, 성별 직종 분리 현상을 강화시킨다고 분석했다. 에스테베즈 아베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 가사 노동의 불평등으로 인해 여성이 떠안게 되는 부담을 여성 특정 위험women-specific risk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여성은 결혼과 출산, 양육 등의 이유로 해고당할 수 있다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 동시에 꾸준히 기술을 키울 기회를 누리지 못하거나 습득한 숙련의 가치가 하락할 수 있다는 위험도 안고 있다.

(p. 32)


여기서 나온 것처럼 성별 직종 분리도 중요한 젠더 임금격차의 이유가 된다. 여성이 경력 단절후 다시 노동시장으로 재진입시 제한된 취업기회로 인해 들어가는 직종들이 단순 노무직이나 서비스업쪽으로 몰리게 되며 남성과 여성간의 직업군이 나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적인 노동시장의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의 기업 내부 노동 시장은 남성 중심의 생계 부양 모델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대기업에서 형성되고 발전했다. 기업은 남성을 충원해 가족 부양을 위한 연공 임금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해 왔다. 내부 노동 시장으로 진입이 제약된 여성은 비정규직이나 영세 기업에 취업해 외부 노동 시장을 채워왔다. 한국에서는 성별에 따라 노동 시장이 분절되고, 고학력 여성의 취업 유인이 약화됐기 때문에 미국처럼 일반 교육으로 여성 고용 프리미엄 효과가 높을 수 없었다. 양질의 일자리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승진에 있어서 여성을 장벽에 부딪히게 하는 구조적 기제가 작동했다.

(p. 40~41)


현대의 어느나라에든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은 경제 발전시기에 가부장제하에서 남성임금노동자-여성전업주부 시스템이 가지는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이 시기에는 남성중심의 내부 노동시장과 - 여성중심의 외부 노동시장으로 이분화되는 구조였다. 

그렇다면 학력의 차이가 거의 없어진 오늘날에는 달라졌을까?


남성 중심의 핵심 노동 시장과 여성 중심의 외부 노동 시장이라는 이중 구조는 한국 경제를 지배해 온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중화학 공업화 시기가 끝나고, 화이트칼라라 불리는 사무직이 주류가 된 한국 사회는 과거와 다를까.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어려움을 논할 때 '여성 차별은 옛말이고, 요즘은 여성이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거나 '여성이 일자리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 불황으로 남녀 가릴 것 없이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이라며 여성만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회피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핵심 노동과 주변 노동이라는 이중 구조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p. 42)


아쉽지만 당연하게도(?) 이중구조는 오늘날에도 다른 형태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히려 옛날과 다르게 여성에게 우대하는 시대라던가 장기 불황시기라는 이유로 여성이 겪는 문제들을 은폐하고 있다. 


좋은 일자리를 얻고 승진하는 기준이 명확하다면 여성은 더 공평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여성들이 학력 증명이나 자격증, 전문 학위로 노동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직종을 선호하는 이유다. 여성 교사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들은 지원자들이 같은 시험을 치르고, 점수에 따라 합격 여부가 갈리는 것이 더 공정한 방식이라고 여긴다.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등에서 자격증을 취득해서 전문직, 관리직으로 진출하려는 여성들이 많은 현상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여성이 특정 전문직에 몰리는 현상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 평등한 일자리가 적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p. 17~18)


과거와는 다르게 전문직종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인데 이것을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 진출이라고 보기보다 성 평등한 일자리가 적다는 의미로 해석해야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한국 사회의 발전주의 체제는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화를 가속화하고, 남성 중심의 내부 노동 시장과 정규직 중심의 제한적 사회 복지를 발달시켰다. 남성 노동자를 선호하는 대기업중심의 숙련 흡수현상으로 고등 교육이 과잉 팽창됐지만, 한국의 여성은 미국의 여성들처럼 고등 교육에 따른 고용 프리미엄도 얻을 수 없다. 한국은 수직적인 성별 분리뿐 아니라, 수평적 성별 분리도 강하게 나타나는 사회다.

(p. 87)


이렇게 수직적인 성별 분리뿐 아니라, 수평적 성별 분리도 강하게 나타나는 사회인 한국에서 여성의 일자리문제의 해결을 위해 저자는 여성운동의 조직화, 성 주류화에 대한 사회전반의 인식제고, 동등한 위치에서의 경쟁등을 말했다. 


그렇게 견고할 줄만 알았던 남자임금노동자-여성 전업주부의 시스템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가속화와 함께 세계적인 장기 불황의 여파로 인해 이성부부하에서 남성만이 임금노동자인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사회전반에서 여성의 일자리확대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 같지만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성평등한 사회로 가고 있다고 묻는다면 그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날에는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제의 사회하에서 기존과 또다른 복잡한 차별이 자행되고 있는 것 같다.


앞서 내가 읽었던 책들 속에서 느끼고 이 책에서도 느끼지만 가부장제는 변신의 변신을 통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한다. 

이 견고한 가부장제를 어떻게 부술 수 있을까. 균열이 보일듯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을 살고 있으면서 고민이 다시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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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8-20 06: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언급된 내용일 수 있지만, 건강에 대한 인식도 여성의 경력 단절의 다른 원인입니다. 고용주는 늘 건강한 근로자를 원해요. 그러나 여성 근로자가 만성 질환에 시달리면 고용주는 퇴사를 권유합니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근로자의 병결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아프더라도 참으면서 일하는 남성 근로자를 선호하는 편이죠. 물론, 만성 질환에 시달리는 남성 근로자 역시 (아픈) 여성 근로자와 마찬가지로 취업/재취업 기회가 적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편견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편견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취업을 어렵게 만듭니다.

블랙겟타 2019-08-20 17:54   좋아요 1 | URL
맞아요. cyrus님 말대로 건강에 대한 부분도 고용주의 선호에 따른 선입견에 의한 차별이라고 봐야죠. 여기서 상대적으로 여성은 불리합니다. 이 책에서는 또 말하는 것이 보통 장시간 근로가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평가받는다는 풍토가 사회적으로 일 가정 동시에 지켜야 한다는 압박을 가진 여성들에게 특히 불리한 환경일 수 밖에 없다고도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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