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없다

백무산 -


고깃집 뒷마당은 도살장 앞마당이었다

고기 먹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 따라갔다

고뭐 먹는 데만 하루에 황소 서너 마리를 소비한다는

대형 고깃집 수백 명이 한꺼번에 파티를 열고

회식을 하고 건배를 하고 연중무휴

요란하고 벅적거리는 대궐 같은 집이다


그는 쇠를 자르고 기계를 분해하고

기름 먹이는 일을 하다 직장을 옮겨 우족을 자르고

뼈를 발라내고 피를 받아내는 일을 한다

소를 실은 차들과 고기를 싫어 나르는

트럭들이 들락거리는 마당을 지나


전동 문을 열고 들어서니 피를 뒤집어쓴

잘린 소 대가리가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다

바닥은 피와 똥과 체액으로 질펀한 갯벌이다

더운 피의 증기가 뻑뻑한 한증막이다

하수구 냄새와 범벅이 된 살 비린내가 고체 같다

욕탕 같은 수조는 똥과 내장의 늪이다


뜯긴 살점이 사방에 튀고 벽은 온통 피 얼룩이다

컨베이어 소리 기계톱 소리 갈고리 부딪는 소리

육절기 돌아가는 소리가 패널 벽에

왕왕 메아리 되어 울부짖는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지옥을 읽었다지만

지옥이 아니다

지옥과 닮지도 않는다

이곳은 천국의 부속 건물이다

천국의 주방이다


우리가 괜찮은 노동을 하고

그럴듯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장만하는 곳이다


식당으로 돌아와 함께 떠들고 고기를 먹었따

맛이 있어서 불안했다

그러나 안도했다

지옥은 편입되고 없었다

( 유심 2015 9월호, 2016년 오늘의 좋은 시 144P-145P)



불이론

-문 숙

개와 강아지는

나쁜 놈과 착한 놈만큼의 거리다

낮과 밤만큼이나 멀고도 가까운 사이

욕과 칭찬만큼이나 적대적인 관계

개는 부정어의 접두사

강아지는 사랑의 대명사

천한 것은 개

자식이나 손주처럼 귀한 것은 강아지


세상의 모든 강아지는

개를 빌려 세상에 왔고

세상의 모든 개들도

강아지를 거쳐서 왔다

밤이 낮을 품고 낮이 밤을 품듯

우리는 하나다


비틀비틀 취객 하나가 내 옆을 스치며

"개새끼"하고 지나간다

(시작 2015년 봄호, 2016년 오늘의 좋은 시 1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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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4 1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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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4 2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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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4 1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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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4 23: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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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8-06-25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것 그대로의 시가 다소 불편하긴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명징해 보이네요
누군가에겐 천국이 누군가에겐 지옥이라는 사실
지옥같은 곳에서도 밥 벌어먹고 산다는 사실
개와 강아지가 다른 개체가 아닌데도 상반된 의미로 쓰이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도 둘이 아니고 하나인지도 모르지요

대프리카 더위가 올 여름도 장난 아닐것 같은데.... 영양보충 해가면서 일하세요
세상에 나온 이상 내 몸은 나 혼자의 것이 아니더이다 ㅠ.ㅠ

yureka01 2018-06-25 11:53   좋아요 0 | URL
네..가급적이면 천국을 닮을 곳에 있기를 바라구요..그럼요..^^..

ㅎㅎㅎㅎ 매년 여름마다...어떻게 지날까 걱정이 됩니다..

오늘도 아 따 뭐....푹푹푹!~~~이네요....
지우당님도 여름철 건강나기 바랍니다~~감사드리구요~

cyrus 2018-06-25 15: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질 고약하고,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사람들한테 ‘개새끼‘라고 욕하면 안 돼요. 그건 개와 강아지에 대한 모욕입니다. 인성 최악의 사람들은 ‘개새끼‘ 소리 듣어도 나쁜 짓을 하고 다닙니다.

yureka01 2018-06-25 16: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러게요 ..개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말이죠..

어쪄면.개는 사람하고 가까이 지내게 된 죄? 때문일까 싶은데요.ㅋ
 

 

 

 

돌이켜 보면, 사진 찍기에 있어서 제일 즐거웠었던 때가 그립다. 강아지 같이 멋모르고 짖는듯이 컹컹거리며 시작했던 때가 있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방법을 익히고 나서 얼마간에 이어진 사진은, 지금 생각해봐도 그 시작할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 뭔지도 모르고 단지 카메라로 찍고 보고 읽는 재미. 그런 재미 때문에 군대 제대한 이후로 한 번도 새벽에 일어난 적이 없는데 눈을 뜨고 한 겨울 새벽길을 달려 바다 일출을 찍겠다는 일념을 만들어 낸다. 과정의 고역을 알면서도 그 재미 때문이 사진이 이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시작할 무렵의 재미는 사실, 하나도 없다. 호기심과 흥미로서만 이루어진 사진 찍기가 어느덧 시간이 지나 늙어가는 걸 느낀다. 아무래도 다시는 그 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시간은 점점 떼를 타게 만들고 사진의 흥미를 낡아가게 만든다. 덩달아 내가 늙어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직도 나는 좋은 사진이라는 것을 선명하게는 모른다. 여전히 좋은 사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언 듯 즉답하기 곤란하다. 글쎄 좋은 사진이 뭘까. 이 "좋은 사진"이라는 주제가 결국 사진 재미를 느끼는 것의 후발로 따라 묻는 질문이 생길 무렵은 사진이 점점 호기심도 없어지고 흥미도 떨어지고 심드렁해질 즈음에 찾아온다. 시작점에 이어서 지속적으로 변하는 순간이 되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지금은 좋은 사진 하나 담고 싶지만 막상 좋은 사진의 정의를 내리기가 여간 곤란하지 않다. 물론이다. 결국 대답하기 곤란함, 좋은 사진이라는 모호성이 계속 사진을 찍어나가는 원동력이자 추력이 된 셈이니까 사진은 정말 아이러니하다고나 할까 한다. 내가 원하는 좋은 사진을 많이 담았더라면 아마 더 이상 사진을 담지 않았을 텐데 여전히 이 좋은 사진의 정의를 찾는 과정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문학의 시를 읽고 시인의 감수성을 사진에 접목시켜 보고 한 장소에서 몇 년간 지속적인 사진을 담는 경향이 만들어진 것이니까.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에서,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했다. 피사체를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너도 그렇다고도 했다. 사진을 찍고자 자세히 보고 오래 보게 된 습관을 만든 점이 사진을 통해서 배운 가장 큰 성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좋은 사진이란 늘 요원한 기분이랄까. 그야말로 끝이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항상 사진을 찍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이 아쉽고 피사체의 관점이 아쉽고 이렇게 밖에 찍지 못하는 재능이 아쉽고 싸구려 카메라가 고급형 카메라가 된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도 아쉽고, 아니 내 삶 전체가 아쉬움이 짙게 물이 들어간다. 그러니 늘 아쉬움이라는 갈증에 목이 타는 증상이 불만으로 생긴다. 땅을 파서 지하수를 만나 물이 고여야 하는데 난 지금 어디서 무엇을 파고 갈증에 물도 나오지 않는 우물을 파고 있는 걸까.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다 보면 왜 굳이 좋은, 이 "좋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왜 좋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 것인지, 더 모르겠다. 하다못해 다른 작가들처럼 전시회라도 하고자 찍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의뢰받아서 대가를 바라며 의무감으로 찍는 것도 아닌데 왜, 좋은 사진을 찾으려 하고 찍으려 하는 것인가라는 궁극에 수렴하는 질문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부질없음의 커다란 성벽에 막혀서 이 벽을 넘고자 끝없이 깨부수고 부질없다는 이 성벽을 넘어 부질 있음으로 의미 부여를 하고 싶은 욕망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게 부질 있고 없고가 대체 무슨 차이란 말일까. 있든 없든, 고만고만하게 가야 할 운명일진데 왜 부질없음에서 부질 있음을 찾는 걸까. 인간은 끝없는 자신의 정체성하고 싸우고 있는 셈이다.

 

너무 헐레벌떡으로 살아온 탓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여유도 없고(나는 결혼 시작부터 전세 마이너스 대출부터 시작했으니까.) 늘 돈이 치이고 전셋집에 치이고 회사에 치이고 늘 치이다 보니 급급하고 사는 게 사는 거 같지가 않았다. 몇 달을 베낭매고 돌아다녀 본 적도 없고 하물며 일주일이라도 방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꽉 짜인 내 삶의 환경이라는 체재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삶의 감옥이 아니었을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제한은 늘 자본의 구속이나 다름없고 늘 허덕거림이 지난하고 지루한 일상의 진부함이 싫었던 반작용이 사진으로 버티려는 심리상태가 아니었을까 한다. 아니면 술로 버티려니 몸이 벌써 고장이니 말이다.

 

 

 

 

 

 

 

 

지금이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이전에는 그랬다. 여자는 그저 애 잘 낳고 시부모 모시고 남편 내조 하는 스타일의 삶처럼, 그런 시집이나 빨리 가는 게 할머니의 아버지 세대가 가진 일반적인 가족관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러니 딸이 태어나면 아들이 아니었음에 섭섭했고 딸을 빨리 키워 시집보내면 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할머니 시대의 딸들은 학교 보낼 생각이나 가르쳐야 할 대상은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부자집이었더라면 달랐을 수도 있지만 깡촌 시골에서 부자는 어려웠으니, 가만 생각해보면 유독 우리나라에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 몇몇이 있는 이유도 여자들이 배우지 못하는 환경에 기회의 확대가 더 필요했을 것이고 그래서 나온 학교가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화학당, 숙명학당등이 나중에 여자대학으로 발전했던 이유이다. 요즘처럼 입시에 차별을 두었다간 사단이라도 크게 날 일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여자들만 들어갈 특혜라도 주어야 할정도의 궁여지책이었다. 그 당시 학교를 가지 못하게 했던 생각들이 요인들이야 많았겠지만 우선 아들부터 학교 보내는 게 먼저였고 딸은 대충 키워서 시집이나 보내버리면 그만이라는 남성 중심사상은 근대화의 물결에서도 여전했다. 그 시절에 태어난 딸들이 이제 나이가 들어 70, 80이 되고 나니 문맹이란 것의 회한이 없을 리가 없었기도 했다. 이처럼 시골에서 할머니를 대상으로 글을 익히게 하고 문자를 읽게 하는 과정으로 나온 시집 같은 형식의 책이 나온 배경이다. 하다못해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도 집안이 가난하면 학습권은 아들에게 밀리는 케이스를 종종 보는데 그때 할머니들의 세대에는 오죽했을까 상상되고도 남는 일이다. 뭐 가까이는 우리 집 와이프 조차도 시골에서 고등학교 들어가는 게 며칠을 울고 불고 해야 들어 갈 수 있는 걸 이야기 듣곤 하니 말다했을 정도가 아니었겠는가 한다.

 

요즘이야 너무나도 당연한 문자 홍수 시대에 문자의 청정지대?에서 산다는 것의 불편함을 할머니들은 전 시대를 관통해서 살았다. 학교를 못들어가서 글을 읽지 못해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왜 할 말이 없을 리가 없다. 살아온 인생의 회한이야 비로소 문자를 읽고 쓰기 시작하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게 산문이든 시든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 글을 배우고 단어와 단어를 이어서 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단순한 생각의 구조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설익은 글쓰기에서 원초적인 응어리를 만나게 되는 시집이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의 호기심과 재미라는 배움이라는 즐거움이 할머니들에게도 분명 발생하는 이치와 닮았다. 글이란 묘한 것이,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삶의 앙금을 휘저어 내는 통절함이 뭍어 나온다는 것이다. 배설구가 막혔을 때 뚫어주는 무언가 그런 글이라는 점이다. 서툰 문장과 맞춤법에 상관없는 단어들의 조합에서 느껴지는 그 정서가 지긋하게 저려 온다는 것이다. 저림은 저미어 시려온다는 거다.

 

과연 나는 사진으로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 무엇으로 저며 낼 것이며 시려오게 만들 것인지 좋은 사진을 찍겠다는 본래의 의도는 맞춤법도 틀린 할머니들의 원초적인 그 맥락과 닿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자신이 없다. 이 시집을 보고 솔직히 부끄러웠다. 할머니보다 더 배웠다는 것이 결코 할머니들의 글을 처음 익히며 써나간 시에서 나오는 저미어 오며 시린 것에 반에 반도 못 따라가는 부족함은 이를 두고 하는 느낌을 말한다. 분명한 것은 할머니들의 세대에 쌓인 삶의 결핍들을 나는 뼈저리게 겪지 못한 차이쯤은 아닐까 한다. 절대적으로 빈한한 삶은 배움을 떠나 글조차도 익히지 못한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는 그것도 아니었지 않았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결국 시에 깔려 있는 정서의 감수성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는 프레임이다. 문장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원초적으로 발설되는 단어와 단어들에서 행간으로 뻣어 나오는 응어리보다 못한 것일테니까

 

할머니들이 시의 이론 따위를 알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요즘 아무리 인기 없는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에서 배우는 문학론이나 시학에 관한 지식과 기술들을 할머니들은 이제 겨우 한글을 뗀 수준에서 알리는 없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몸으로 체득한 삶의 운율이 저마다 다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오랜만에 시골에 온 손자 놈 등을 토닥이며 잠을 들게 할 때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운율은 노래가 되거나 한풀이가 되거나 사담이 되거나 심지어 자장가가 되는 원리가 시에 녹아 들어 있다. 그러니 글을 쓰게 될 때, 억지로 자수를 맞추며 운율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자신의 삶이 처연스럽게 닿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어느 시인이고 시를 배우고 시문으로 등단한 기성 시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할머니들만의 독특한 서정의 울림이 그래서 구별되는 이유는 아닐까 한다.

 

아무 멋모르고 사진 찍었을 때 사진을 가끔 본다. 어설픈 사진에서 사진에 대한 순수함은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재현해낼 수 없다. 사진을 찍는 기교는 늘었고 사진을 통해서 보는 시선은 더 정교해졌을지는 모르겠으나, 푸성귀처럼 담아낸 처음의 정서는 아미 잃어 버린지 오래이고 보니, 흡사 처음의 그 잔잔한 맛은 그립다. 좋은 사진은 무엇인지, 혹은 좋은 시는 무엇인지 사진을 봐도 시를 읽어도 여전히 오리 무중이다. 사진으로도 시로도 밥 먹고사는 사람이 아닌 비종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할머니들이 쓴 시에서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어쩔 수 없이 살아와서 경험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 후회와 고단함들. 어쩌지 못한 오늘의 자신의 처지의 처연성이 할머니 시에서 발견하게 될 때, 다시 나는 사진을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가진 현재의 조건과 환경들에서 할머니들이 쓴 시처럼 어쩌지 못하는 오늘의 이 순간을 그저 열심히 담는 순수함에 대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원효스님의 독송이 생각난다.

태어나지 마라,

죽는 게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게 괴롭다.

- 원효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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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6-19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이론‘이라 불리우는 것들은 현실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인데, 지금은 이론이 현실을 제약하는 현실이 보다 일반적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론을 벗어난 파격이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yureka01 2018-06-19 15:38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처음이라는 신선한 파격에서 기성의 이론이 적용안되는 그런 거 ....^^..

cyrus 2018-06-19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이켜 보면, 독서가 제일 즐거웠을 때가 2010년, 2011년이었어요. 알라딘 블로그에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해가 2010년이고, 이듬해에 독서모임 활동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이때는 새벽까지 책 한 권 다 읽거나 술을 마실 수 있었어요.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겠어요. 이제 서른에 접어들기 시작했는데 제 몸이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어요.. ^^;;

yureka01 2018-06-19 16:00   좋아요 0 | URL
뭐든 처음 시작하고 기릿빨 오를 때가 제일 재미나죠...ㅎㅎㅎ 독서도 예외가 아닌거 같아요....

2018-06-20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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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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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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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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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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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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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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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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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8-06-20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쉬운 시가 좋은 시, 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진은 잘 모르겠네요 ㅎ
근데 꼭 좋은 사진을 찍어야만 하는 걸까요?
훌륭한 인생을 살아내야만 하는 걸까요?
자신에 대한 변명이나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생각은 걍 깜냥대로 살다 가자, 랍니다 ㅎㅎ

yureka01 2018-06-20 16:37   좋아요 1 | URL
네 책에서도 나오더군요..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사진이란 없다고 하더군요...

자기만의 좋은 사진이란거...만들라고 하던 조언이 생각나네요.,..

또한 자신의 좋은 사진을 강요할 것도 아니라고..ㅎㅎㅎㅎ

네 제 깜량대로 찍고 보자..이게 맞는듯합니다..^^..

2018-06-21 14: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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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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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17: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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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0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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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1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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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2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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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07: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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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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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을 뒷받침을 위해 잡학사전처럼 역사적인 사실을 열거하여

많이 인용되었지만 좀 지루했다.

마지막 3부의 책만 나와도 충분했을..과유불급의 두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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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5 09: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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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5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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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5 1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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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5 1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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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5 1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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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6-15 1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유행인 듯 합니다. 덕분에 시간적, 공간적, 재정적 압박은 늘어가네요.ㅜㅜ

yureka01 2018-06-15 11:57   좋아요 2 | URL
네..이책도 두껍지요..
총균쇠. 식량과 문명, 호모데우스.이 3종세트가 책장 한칸을 자지하더군요..ㅎㅎㅎㅎ책값도..ㄷㄷㄷㄷ

서니데이 2018-06-15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레카님, 기분좋은 금요일 보내세요.^^

yureka01 2018-06-15 11:57   좋아요 1 | URL
서니님도 금요일 선~파이어데이 되시길!~~^^..

2018-06-16 14: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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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1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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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8-06-19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하는 블친 한 분이
김태진의 ‘아트 인문학‘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던데
부제가 ‘보이지 않는 걸 보는 법‘이네요.
보이는대로 찍는 건 사진이 아니라나요....
애러븐 책이 넘 많아요 ㅠ.ㅠ

yureka01 2018-06-19 11:4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네 어려운 거 맞습니다.
어려우니 할만해지는 거니까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이걸 의미하겠지요..
아트 인문학..검색하고 읽어 보고 싶어지네요..
감사 감사~~
 

 

 

 

 

 

나도 물론 달변가는 아니다. 한마디 말에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는 달변가라면 나쁘지는 않겠지만, 사실 말을 잘한다는 게 이 또한 천성이나 재능의 일부분이다. 타고난 말재주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비상하고도 탁월한 능력이다. 협상에서도 두말할 것도 없고 강의라든가, 교육이라든가 이런 분야에 달변이야말로 최고의 능력이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소위 유명한 대형 교회를 개척한 목사들의 설교를 보면 달변의 흡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재능인지 알수 있다. 어디 유능한 강사라는 것도 다 말의 달인급이다. 달변가에서 웅변가로 최고는 히틀러나 괴벨스일 것이다. 하나의 제국 건설에 그의 언변은 국민 전체를 감복시켜 버렸으니 그런 특별한 재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좋은 것에 쓰이는 것과 불행한 것에 쓰이는 용도에 따라 차이가 별개로 치더라도, 웅변가 혹은 달변가는 청중에게 이목을 집중 시키는 덕목일 것이다. 가끔 유튜브에서 만나게 되는 유명한 강사의 언변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되는 힘이 있다. 유명한 강사의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조리와 재미로 신나게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이란 생각의 전달하는 수단이고 말을 잘한다는 것은 생각의 전달을 효율적으로 주목하는 기술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학식과 학위가 고매한 교수도 말이 어눌하고 버벅대는 경우라면 그 강좌에 수강생이 잘 모이지도 않고, 반대로 시간강사로 소위 보따리 장사하는 교수도 달변에 강좌가 재미나면 수강신청이 치열한 경쟁률을 보이기 마련이다. 다 말의 기술이 특출하기 때문이다. 물론 말 잘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 지식이겠으나 말의 기술은 많이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여하튼 오늘날은 말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합실이나 공항이나 터미널을 가보면 금방 느낀다. 웅성웅성하는 말소리들의 울림이 얼마나 큰지, 이태원의 솔개라는 노랫말 가사 첫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그렇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어느 산사에 가서 대웅전에 들어갈라치면, 정확히 보이는 단어 팻말. 묵언. 이는 말하지 않는 것을 요구한다. 수행에 묵언이 필수라고도 한다. 말이 많으면 수행할 수 없다는 것으로 등치 시킬 수도 있다. 말을 하면 수행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묵언이긴 하지만 말로 대신하는 언어로 수행하라는 뜻도 된다. 말의 홍수 시대에 말로 사고 나기도 하고 뜻하지 않는 갈등을 낳기도 하고 말 한마디로 뼈에 비수를 꼽는 악랄함이 나오기도 한다. 싸움에는 먼저 말싸움부터 시작하기도 하고 말로써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말이 씨가 되는 경우도 있기도 하고, 하다못해 성경에는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도 했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 말 한마디에 내 가슴은 녹아들든 터져 버리든 말은 우리 삶에 주장과 표현과 마음의 심금을 터는 무지막지한 효과는 부인하기 어렵기도 하다. 평생토록 들어 보지 못한 말 한마디. 홍길동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했는데 아비에게 "아들아 사랑한다"라는 말 한마디, 못 듣는 사람이 가슴에 담긴 말 한마디의 무게는 무엇으로 개량될 수 있을까.  몇년 동안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던 여자친구에게 끝까지 사랑한단 말 한마디 못 듣고 헤어진 상사병의 총각은 그야말로 말 한마디에 생사를 건다. 시집와서 시댁일 종종 거리며 온갖 수고를 다하고도 시어머니에게 늘 핀잔 듣고 갈굼 당하고 인정 못 받다가 시어머니 숨지지 며칠 전에, "며느라,우리 집에 시집와서 고생 많았다.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에 며느리는 그간의 회한들이 얼어붙었던 가슴을 일순간에 녹여 버리고 눈물로 터져 나오는 상황들. 이게 다 말의 힘일 것이다. 이처럼 말 한마디에 천 냥도 걸 수 있고 인생을 걸 수도 있다.

 

그런데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감상하다 보면, 가끔 그런 말을 듣는다. 말이 필요 없네. 뭐 기막히도록 말문이 막히는,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 떠오르지 않는 감탄사나 혹은 비토어가 그런 경우일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도 한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번 보는 것으로 백 마디 말조차 필요 없는 시각의 힘이란 것. 말조차 아울러 버리는 이미지는 그래서 수백 마디 보다 강력하다. 빨간색의 사진을 보고 말로 빨간색이라고 할 때 언어가 다르면 빨간색이 어떠하다는 전달이 불가능하다. 빨간색을 보여주고 이게 레드라고 한다면 서로의 빨강은 공유되기 때문에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지점이 있다. 사진은 그래서 말을 뛰어넘기도 한다. 수백 줄의 설명서 보다 몇 장의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서 예시를 보여줄 때 말보다 이미지의 전달력은 더 크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사랑한다는데...라고 하면 긴 말을 추가하지 말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이 필요한 때가 다 있다. 꼭 말이 필요할 때는 그 말 한마디가 간절할 때일 것이고, 꼭 해야 할 말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듣고 싶은 말 한마디. 하고 싶은 말 한마디. 그래서 우리는 말의 힘을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가려야 한다. 말이라고 다 말같지는 않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사진을 찍으면서 말이 필요 없을 만한 사진을 그리 많이 찍어 보지를 못했다. 하기야 무슨 사진 지식이 출중하거나 사진 감각이 탁월해서, 내가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이야, 말이 필요 없네"라는 감탄문을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일까 사진에 자꾸 말을 붙였다. 사진에서 말이 필요한 사진을 찍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단 하나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이미지 한 장을 얻는 사진가의 궁극의 꿈을, 나는 품어 보지도 못했다. 사진에 말이란 사족을 덕지 덕지 붙이고 이게 사진인지 사진 글인지도 모를 글을 자꾸 사진에 덧대어 왔던 습관들이 있었다. 언제쯤 사진 한 장에 "우와 말이 필요 없네"라는 사진 제목을 붙여 볼 수 있을까.


종종 사진을 찍으면서 허탈하게 자신에게 자주 묻는다. "뭐 하러 자꾸 찍어. 쓸데도 없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말이 필요 없는 사진일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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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1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1 2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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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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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08: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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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0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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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0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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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8-06-12 08:56   좋아요 2 | URL
물론입니다..

기억속에만 있는 당시의 느낌을 사진이 꺼내주게 만들거든요..

사진의 좋은 효과입니다.ㅎㅎㅎㅎ

2018-06-12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2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2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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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0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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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6-12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말이 필요 없는 사진은 많은 경우 단순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작가의 생각의 많이 담길 수록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주로 마음의 세계를 담은 동양화에서 그림과 시가 어울어져 하나의 작품이 되듯, 설명이 담긴 작품은 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yureka01 2018-06-12 11:01   좋아요 3 | URL
기준이야 없으니 말이 필요하든 하지 않든 단순하냐 복잡하냐..그런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사진에 뭐라고 자꾸 글이 덧대지는 사진을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뭐 기막힐때 말이 필요없다는 감탄사가 나오는 것도..가끔은 있었으면 하죠..
또는 말이 필요한 것도 있어야할 때가 있기도 하고,,,
하기야 경우마다 다 같을 수야 없겠지요,,,그러니 어렵고 어려우니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요..ㅎㅎㅎ
좋은 하루 되시고!~

cyrus 2018-06-12 12: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사적으로 보면 언어가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언어 다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도구가 그림이에요. 그림의 시대가 조금 저물어 시작하면서 그림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사진이고요. 사람들은 그림을 보면서 그림에 대한 자신의 느낀 점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조용해져요.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사진을 ‘감상’한다는 행위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거죠. 이렇다 보니 “사진은 잘 찍으면 그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yureka01 2018-06-12 13:00   좋아요 2 | URL
사진의 속성이 회화의 한 부분를 닮았죠.물론 차이점도 많구요..
하기야 요즘에는 말의 권력보다 이미지의 권력이 더 강해졌죠..
구두계약보다 날인 계약이 우선하는 이유가 그래서 일겁니다.
혹은 무언가 사실을 증명할 때 사진이나 동영상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겠지요..

요즘 차에 블랙박스 하나씩 장착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겠지요..
사고났을때 시시비비를 가리는 중요한 증거이니 말이죠...

2018-06-12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3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옥 2018-06-13 0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 한 장이 많은 말을 하지요
글과 사진이 상호 보완작용을 할 때도 있구요
제 주변의 사진가들은 작품 제목 하나 달기도 어려워 하더군요
사진을 기술로만 찍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목도 잘 못 다는 사람들이 사진에 글까지 붙일 수 있겠어요?
말 없는 사진, 사진도 사진 나름이라는 생각이네요 ㅎㅎ

yureka01 2018-06-13 22:57   좋아요 1 | URL
아...사진 제목하나 달기 어려우면 왜찍었을까 묻지를 못했을지도 모르고 찍은 셈이겠네요..

아울러 제가 제일 싫어 하는 제목이 무제...이거예요..ㅎㅎㅎ

2018-06-13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3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4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4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8-06-18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부 요리 같은 의미라 생각해요. 사진만 있는 작품이 담백한 두부라면,
글이 더해진 작품은 두부에 계란을 씌워 부친 요리,
배경음악은 그 요리를 찍어먹는 간장? ㅎㅎ
취향의 차이겠죠. 맛보는 사람 혹은 요리하는 사람의. 또 같은 사람이라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필꽂히는 메뉴가 다를 수 있구요.

사진만 있는 작품이 글과 곁들여진 작품보다 더 나은 것 같진 않아요. 둘 다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사진이 한 장면으로 표현된 짧은 시라면 사진 글은 수필같은 거랄까요.

너무 고민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의도는 분명 존재하겠지만, 작품에 대한 해석은 어차피 독자의 배경지식과 감성에 따라 달라지니. 그건 작가의 역량 밖의 문제이니 이런 고민이 오히려 사족이라 여겨집니다.^^;

마지막 단락이 자꾸 마음에 밟힙니다. 종종 서재에 글을 올리면서 저 역시 자문하던 생각이거든요. ˝뭐 하러 자꾸 써대. 쓸데도 없이. .˝하고^^;

yureka01 2018-06-18 08:58   좋아요 1 | URL
햐..비유가 찰지게 재미나네요.
두부요리라니..ㅎㅎㅎㅎ
좋은 의견이셨습니다..ㅎㅎㅎㅎ두부요리라서요..

네 저도 종종 물어 봅니다..왜 찍는지..왜 쓰는지에 대해서^^..
 


40 ~ 50대라는 게 이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꼰대스러운 짓의 대표주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네 칭찬할 것도 없지는 않습니다. 386세대로 20대 초반, 민주화에 마지막 세대. 그러나, 지금은 나이 들어가는 탓, 또는 핑계로 좀 비겁하기도 하고, 용기도 사라지고, 민주화의 정의를 얻고자 항거하던 깡다구가 어디에 갔다 버렸는지 술 먹고 오줌 갈기며 츠자들에게 껄떡대는, 그야말로 교양 1도 없는 개저씨가 된 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신념이나 가치관이 오로지 자본의 최고로 치부하고 허겁지겁 성깔만 더럽습니다. 아래 세대의 공감도 전혀 안되고 윗세대에 치여 허덕거리며 이제 엄마 아부지 하나하나 세상 하직하는, 그래서 결혼식보다 장례식장을 더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할 세대가 된 것입니다. 스마트폰은 들고 있는데 고작 카톡질, 폰으로 단순 퍼즐 게임, 그리고 문자와 통화가 전부인 줄로만 아는, 조금 더 배웠다 싶으면 인스타그램, 페북과 트위터입니다만, 이것도 다 모르긴 매한가지, 물론 트위치도 모를 것이고, 유튜브 계정에 동영상 한 번 올려 본 적도 없는 세대가 50대의 상징입니다. 영상과 이미지의 시대에 문맹스러움은 이내 책과 멀어졌거든요.


제가 이래 봐도 이 지역의 50대에서 독서률 상위 0.1%입니다. 이게 결코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이 정도로 0.1%라서 너무 민망하다고나 할까요. 전체적으로 진짜 보잘 것 없다는 것의 반증이거든요. 적어도 한 10%대는 되어야 그나마 좀 봐줄 만한데 아니라는 겁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대부분인 부모들이라서 그런지 제일 공부 많이 하라고 윽박형 부탁형 읍소형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공부 1도 안 합니다. 이유야 뭐 뻔하잖아요. 먹고살기 바쁘니즘. 바빠서 여전히 변화도 시도할 수 없는, 그래서 변화를 시도조차 해보려 하지 않는 바쁘니즘의 늪에 허우적대면서 그러니 자신의 공부는 1도 못하는, 엄두도 못 내지만 술은 제일 잘 마셔요. 50대의 성인병이 아마 제일 많을 것입니다. 통계 안봐도 비디오입니다. 만날 후배들에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몰라서 묻는 놈들이 바로 50대들이거든요. 복부에 지방은 가장 많이 쌓였죠. ( 씨바, 공부 좀 혀. 아, 진짜 너무 몰상식하고 무식하고 ....)


그래서요. 자기 세대는 자기가 깔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세대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 성찰이 되고 앞으로의 삶에 뭐라도 보이는 것이니까요.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반성과 통절한 후회가 뒤따라야 합니다. 지금 40대, 50대가 제일 반성해야 할 것이 후배 세대 그러니까 지금 20대 30대 세대들에게 절망을 안겨 준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는데 자신들은 반에 반도 노력하지 않았는데 후배 세대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지금 스펙 쌓기는 무슨 결과입니까. 저 때만 해도 공무원은 하려 들지 않았거든요. 기업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해도 공무원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학 도서관 가보시면 십중팔구는 공무원이나 공사 취업 공부입니다. 대학이 무슨 공무원 취업 시장통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20대 젊은 세대가 도저히 공무원 밖에 길이 보이지 않게 만든 게 누굽니까.  50대, 40대들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윗세대들의 불합리는 극복하지 못하고 순응해서 체제를 그대로 자신들의 성벽으로 높이 만들어 공고화시켜 버린 탓입니다. 자본에 저항할 줄 모르고 오로지 윗세대들에게 물려받은 걸 지키려고 하니 당연히 아래 후배 세대들에게 돌아갈 것이 없습니다. 후배들이야 죽든 말든 내 알바는 아니라는 것이 제일 큰 문제거든요. 고위직 공무원이 아닌 담에야 동사무소나 구청 같은 일선 자치단체의 공무원들이 대학 공부가 사실 의미없거든요. 업무의 매뉴얼이 그리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시키는 대로 업무 교육받은 대로, 혹은 선배에게 배운 대로 하면 되는 답습의 일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창의성을 발휘해야 할 직종은 아니란 겁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창의성을 짓밟는 사회적 구성을 만드는데 협력하고 일조한 것인 바로 50대들이거든요.


이런 50대가 앞으로 70대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당장에 20대 30대 젊은 친구들이 아이를 낳지 안(아니 못 낳습니다.)습니다. 자신의 대를 끊으려 하는 자멸적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50대가 줘야 하는데 70대가 되면 과연 나아질 것인지 과연 모를 일입니다. 사실 70대라 해서 전쟁을 겪어 보지는 않았으나(계산해보면 아실 겁니다.) 전쟁의 후유증을 격하게 겪은 세대입니다. 고생이야 진탕했죠. 네 고생했는데 이 고생을 알아 달라고, 억울하다고 하는 보상심리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헌신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대가를 받아 내려하는데 돌아오는 게 없다고 버럭질하거든요. 그러나 고생하라고 후세대들이 억지로 강요한 적은 없습니다. 다 자신들 먹고 살기니즘에 빠졌던 것일 뿐이거든요. 이만큼 살게 해줬으니 보따리 내놔라 한다고 내줄 보따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저 자신들이 열심히 산 것일 따름입니다. 자기를 위해 열심히 산 것을 마치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산걸로 둔갑시켰을 때 오는 보상심리가 있거든요. 열심히 제 나름대로 산 결과가 꼬장 부릴 만큼 보상심리를 부려야 하는 게 과연 합리적인 열심인지 따져 본적이 있었느냐는 겁니다. 군대 있을 때 내무반에 선임들의 부류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자신들이 후임 때 겪은 피해를 지금의 후임에게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불합리한 것들 조차도 모두 그대로 요구를 하는 것과, 둘째는 이런 불합리를 극복하고 되물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70대가 딱 전자의 경우입니다. 네 억울하죠. 인생이 어디 억울하지 않는 게 있습니까. 제일 억울한 게 시간의 억울함 아닙니까. 나는 조빠지게 고생했는데 왜 니들은 편하게 보이냐. 똑같이 조빠져야 할 거 아니냐라는 심리. 그래서 억울한 겁니다. 억울해서 삐둘어져 버린 신념이 공고화되고 억지를 부립니다. 세상이 바뀌는데, 아니 그것도 급격히 변화하는 와중에 변모에 따라갈 재간이 없거든요. 먹고살기 바쁘다고 변화에 둔감하고 바뀜에 의식없고 인식하지 못했으니 이젠 새로운 인식을 저항하려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늙어갈수록 더 억울한데 보상은 박하니 버럭질은 늘어납니다. 그러니 젊은 세대들에게 노인네라고 외면받고 아예 이젠 상종 거부 대상이 되어 버렸거든요. 인생에 꽃은 다 필 수 있으나 꽃이라고 다 아름다울리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꽃은 그저 고생만 진탕했으니 보상의 꽃은 아닐 것입니다. 기품있게 늙어가는 것. 인격이 나이와 함께 비례로 무르익어가는 꼿꼿한 선비 같은 노인네는 왜 없을까요? 평생 살아온 삶이 머슴이니 늙은 머슴의 꼰대는 뭐겠습니까.


늙어가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을 닫으라는 말은, 곧 많이 들으라는 의미일 것이고 듣는 만큼 지갑을 열고 베풀라는 뜻입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오듯이 배포와 뽀대는 지갑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정작 늙은 세대는 자신의 노후조차 건사하지 못했습니다. 자식에게 빌붙어야 하는 신세는 처량하고 초라하고 외롭고 쓸쓸합니다. 미쳐 자신의 늙어감에 대해 일말의 고민이라도 해봤을까요. 시간의 흐름은 단순히 지나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변함과 자신의 노쇠된 변함을 순간순간 자의적인 인식이라야 가능합니다. 세상이 변했는데 내가 변하지 않으리란 착각의 자신감은 대체 무엇으로 인한 것일까요. 늙음은 그저 단순히 늙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온몸이 그야말로 고장투성이로 삐거덕거리고 지난날의 고착된 관념은 고정 관념이 되어 변화의 젊은 세대와 단절되어 버립니다. 소외는 소통 부재에서 시작되고 소통 부재는 공감의 결여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말은 많아지고 옹색하니 지갑은 닫기 바쁘게 됩니다. 완연한 익음보다 설익어 버린 채로 발효가 아니라 부패된 듯이 늙은이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닐까요. 냄새라도 꾸리하면 차라리 싸구려라 할지라도 프레시한 향기가 차라리 나은 건지도 모릅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못 쓴다"는 말, 이거 자체가 꼰대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요즘 젊은 것들에서 풍기는 관념은 자신에게 비할 바 되지 못한다는 것이겠지만 어느 시대이든 객관적인 비교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시대는 그 시대에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다 있기 마련입니다. 어느 세대가 더 힘들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힘든 만큼 우리 시대도 버거웠음을 서로가 인정할 노력이 뒤따를 때에만 소통이 가능하고 소통을 통해서 공감으로 연대할 수 있습니다. 세대와 세대가 싸움해봤자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질 것이고 이 갈등에서 판판이 깨지는 것은 결국 늙은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 말이 통하지 않음은 소통 부재가 되어 소외를 낳습니다. 아무리 늙어가더라도 요즘 뜨는 BTS 노래  한 곡 정도는 알고 지낸다면 소통은 열릴 수 있겠지만 여전히 철지난 노래의 뽕짝 스타일로 변하려 들지 않는데 어떻게 젊은 사람들에게 섭섭하다 해본들 들어줄 젊은이는 적습니다. 나이 든 어른이 먼저 솔선하는 지침이 있어야 합니다. 말로서가 아니라 꼰대의 행동을 버리고 하다못해 흰 머리카락도 노랗게 염색이라도 하는 파격에 가까운 이미지의 변신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찢어진 청바지가 아무리 꼴 뵈기 싫어도 그 싫어하는 것은 내가 먼저 한번 직접 실천해본다면 과연 젊은 친구들의 인식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입니다. 한복 도포자락에 찌든 담배 냄새나 풍기면 슬슬 피하기 십상일 텐데 말입니다.


완벽할 수는 없어도 늙어감에 따라 노련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익어간다는 의미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익지 않고 제대로 익어야 익숙해진 것들을 이성과 지성으로 앞 세대의 등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요. 꼬장 부리기, 꼰대스럽기는 나이들수록 피해야 할 첫 번째 덕목이 아닐까요. 고정관념이 아니라 유연한 사유가 그래서 반드시 따라야 노련할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늙을수록 삶의 부채는 늘어가죠. 시간의 무게는 삶의 채무와 함께 합니다. 늙을수록 삶의 집착과 번뇌를 내려놔야 할 자기 면역력이 그래서 늙을수록 필요로 합니다. 마냥 서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의 늙음이 크지만 이 늙음이 아름다우려면 새로운 것들에 저항하는 보수가 아니라 받아들이며 능동화시키는 진보라야 하거든요. 그래서 시간은 늘 변하는 진보적인데 사람의 나이는 늙지 않으려 보수화되기 십상이거든요. 시간의 변화에 늙음이 내 인식과 발을 맞춰야 조화롭거든요. 엇박자의 소외는 그래서 더 억울합니다. 부단한 변화에 능동형은 그래서 늙어서도 항상 젊게 죽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더군요.


PS : 뭐 오늘도 동네 체육센터 운동장에 올라 가면서 옹벽 담벼락에 아저씨 안 놈이 쒸 싸더군요. 하여간 나이들어가니 부끄러움을 몰라서요. 아무대나 까고 ....참 지랄 맛게 늙어가나 봐요. 그러고서 살아온 인생이 억울하다해도 누가 봐줄 거 같지가 않아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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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6-10 07: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시대는 급변하는데, 기성 세대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문제를 바라보니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그렇지 않았다는 선입견을 가지기보다, 지금의 문제를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이 더 필요해지는 요즘이라 여겨지네요... 분명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만, 꾸준히 우리 모두 노력해야겠습니다.

yureka01 2018-06-10 21:00   좋아요 3 | URL
세상에 고정적인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변화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지지 않는 감수성..수용성이
삶을 능동적으로 만들죠..
노인들이 외로움을 특히 많이 타는 이유가 바로 그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오늘의 바람이 어제의 바람이 아니듯..오늘의 구름이 어제의 구름은 아닐 텐데 말이죠..
삶의 메너리즘은 시간을 따분하게 만들죠,..

2018-06-10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0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0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0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0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0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6-10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공감합니다. 저도 이 기사 읽었는데 왜 기사 끝부분에 무슨 교수 나와서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던데
극우에 대해서 왜 일반인이 이해를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 교수의 말 대로라면 우리는 나치 전범들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하여튼, 전문가라는 탈을 쓴 좆문가들은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yureka01 2018-06-10 21:04   좋아요 0 | URL
많이 살아 보고 경험 많은 사람이 더 이해해야지..왜 아래 사람들이 이해를 해야하는지 저도 이해가 안됩니다.
헛살아서 살아온 경험이 헛되는 걸 증명하는 셈이라서요..
나이들수록 이해력은 넓어지는 게 이치인데 말이죠...

강옥 2018-06-10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꼰대 되기 싫은데 꼰대로 분류될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러나 나름 현실 인식은 제대로 갖고 삽니다.
적어도 태극기는 아니니까요 ㅎㅎ

요즘 노인 범죄도 나날이 지능화되고 있대요. 젊은 사람들 뒤통수 칩니다.
교묘하고 영악하고 사악하기까지.

yureka01 2018-06-10 21:04   좋아요 1 | URL
부단히 꼰대스럽지 않도록..
개저씨가 안되도록 살펴야죠..
사진 찍으려다보니..살피는게 버릇이 되었어요..ㅎㅎㅎㅎ

2018-06-10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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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0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징가 2018-06-17 1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님같이 깨어있는 지성을 가진 기성세대들이 우리사회에 많이 있어야 하는데.. 님 말씀처럼 그렇지 못한것이 현실이네요. 저도 제자신을 성찰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사실 님이 그동안 쓰신 글 읽으면서 30대 인줄 알았습니다. 그만큼 진보적인 분 입니다..

yureka01 2018-06-18 00:08   좋아요 0 | URL
아 ..부끄럽죠..쓸데없이 나이만 먹어가는가 싶어서요....
그래서 오늘도 책을 읽고 인터넷에 글과 사진으로 자주 성찰하고자 시도하도 하는 것이니까요..
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하늘의 명은 커녕 하늘에 부는 바람의 말조차
못듣고 사니 말이죠..ㅎㅎㅎ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