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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평점 :
전 세계 국가 중 자살 1위인 국가치고 아직도 우리에게 맞는 자살론에 관한 책이 변변하게 없었다. 이 책이 이제야 나온 것을 보면 그동안 실로 다양한 자살의 사례가 있었음에도 자살에 대한 공론화가 요원하였다는 반증이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자살론을 꺼내는 것조차도 터부시했다. 아직도 여전히 자살을 이야기하면 더 열심히 살아야지, 죽긴 왜 죽냐라는 가혹한 소리나 해댄다. 아니, 아예 꺼내는 것 조차 싫어한다. 따라서 이 책은 자살의 개론에서부터 조선시대와 근현대의 자살의 사례를 분석하고 개인적이며 사회구조적인 자살의 형태를 분석하여 집대성하였다. 작가의 자살에 대한 연구의 수고가 대단하다. 자살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근거로 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 출근하다가 라디오 뉴스에서 집배원이 자살로 벌써 몇 명이나 잃었다는 슬픈 소식도 들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자살은 이렇게 너무나도 일상적인데 우리들은 여전히 자살에 대한 말도 꺼내지도 못하고 있구나 싶었다. 실로 죽고 싶을 만큼 고독하고 힘든 삶이란 것에 내몰린 사람들이 그만큼 한계치를 넘었고 임계점에 다다른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여전히 아이를 낳고 가르치고 밥 먹고 일상을 별 무반응처럼 살아도 되긴 하는 걸까?
책에서도 밝혔다시피, 현대의 자살은 우울증으로 모든 것을 덮어 쉬우려고 논리를 개발하지만 과연 이 우울의 근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못한다. 우울의 원인들은 좀 더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인 삶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고 현실의 삶에 대한 구조적이고도 강고한 이 벽에 대한 논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살자 한 사람을 통해서 주변으로 파급되는 심리적인 충격은 평생을 따라다니게 한다. 죽어도 혼자 죽을지는 모르지만 죽고 나서 주변의 지인들, 혹은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 자살자의 여러 가지 구출 요청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후회감 등등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현재의 삶을 피폐화시키는 전파력은 끔찍하게 후유증으로 남는다. 그래서 건강한 사회일수록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며 자살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시키며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며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점에 있다는 거다.
나는 자살시도까지 포함해서 자살자를 벌써 3분이나 겪었다. 비록 죽고 난 이후에 알았지만 대부분은 경제적인 상황만 유추될 뿐, 딱히 경제적인 문제 이외에는 확실한 동기의 증거를 알지도 못했다. 마찬가지로 죽고 나서 직접적인 유서로 인해서 자신의 동기를 구체적으로 밝히면 그게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자살자는 유서를 쓰지 않았을 경우에는 무수한 추측만 해댈 뿐이다. 이유야 뭐가 되었던 지간에, 파급되는 충격은 전염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만큼 자살은 자학의 끝판왕인 셈이다.
이 책에서는 시대별로 자살에 대한 트렌드를 분석하고 시대의 구조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짚어나간다. 조선시대의 자살과 자살의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근세의 자살에 대한 분석을 논의했으며 현대의 자살을 따져 묻고 해석한다. 요즘에는 조선시대처럼 선비가 가지는 명분으로 자살이 없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죽어나간다고 봐야한다 낙오는 결국 자살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이처럼 자살도 사회의 골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어려운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본능적으로도 죽음을 회피하려는 진화의 속성에 극적으로 역행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역행적 상황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현대의 자살은 경제적인 무게 때문에 이 무게에 짓눌린 자살이 허다하다. 근대 사회에서처럼 염세나 낭만 따위의 그런 자살이나 중세 시대의 신념이나 가치관, 또는 자신의 이념을 위해 의사를 표현하는 자살은 분명 현대 사회와 차이가 확연하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까지 했던 것도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가치를 담은 속담일 뿐 차라리 똥밭을 싫어하는 경우에는 뭐라 설명할 방법은 없다. 매일 시달리느니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가 거두어 짐을 벗으려는 욕망은, 똥밭이 더 처절할수록 더욱 강렬하다. 어쩌면 신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가난한 자의 삶은 차라리 살기보다 죽는 편이 나은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 약간만 실수하게 되면 자신의 삶을 놓쳐버리게 만드는 우리 모두는 예비 자살자인 거나 다름없어 보이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억지로 사나라는 물음 앞에서 이 무엇의 요체를 정확하게 들여다보게 되면 그리 썩 긍정적이지만은 않게 보인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삶의 모순에 대한 절대적인 해결은 곧 죽음일 텐데,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질타는 딱히 하고 싶지도 않다. 무슨 선택이든 간에 "오죽했으면!~"이라는 공감과 이해를 먼저 선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그렇다면 죽을 사람도 살리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어간다. 시간과 겹쳐 놓은 공간에서 한 자루의 초와 같은 운명을 본질적으로도 타고났다. 태어나는 순간과 같이 한 자루의 초가 필라핀을 끓어 심지에 불을 붙이듯, 우리 삶도 육체를 통해서 삶을 태우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이 초가 에너지를 다할 때 꺼진다. 이는 무조건이다. 영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타는 와중에 스스로 타는 초의 심지를 꺾어버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하기야 먼저 가 나 뒤늦게 에너지가 엥꼬될 때까지 타다 가느냐라는 차이는 시간차일 뿐일텐데, 그래도 우리는 에너지가 모두 소모될 때까지 수명을 다하는 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오늘도 우리는 열심히 제 삶을 자살하고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곧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무얼 하며 살까와도 같은 질문이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뭐가 차이 있다고 지금을 살고 있는지, 자살론을 통해서 내 삶의 자살에 대해 스스로가 묻는 질문지이길 이 책을 통해서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항상 떠올린 문구 하나, 메멘토 모리 !~
PS : 1일 자살자수 : 40명. 1년이면 1만4천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