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운다. 운다는 것은 울기도 하지만 떨리기도 한다. 우리 말에는 운다는 것이 두 가지 의미를 혼용하고 이에 떨려서 소리를 낼 때 운다고 한다. 물론 눈물 흘리며 울 때도 운다고 한다.
하기야 울지 못하는 것은 없겠지만 이 운다는 것에 격조와 운율과 심정을 빗대서 담아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울음을 넘어서 미학으로 발전하기 딱 좋다. 그래서 시인이 울 때는 시가 나오고 화가들이 울 때는 그림이 나오는 이치이다. 이것이 표현의 방식이다. 시를 이용한 울음의 방식. 이게 곧 시인들이 우는 방법론일 테니까. 그래서 울지 않는다는 것은 즉, 살아도 산거 아닌 듯이 사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는 모두 울어야 한다. 아니 울 수밖에 없다. 사는 일이 요람에서 시작해서 관짝에 들어갈 때까지 수없이 우는 이유이다. 사는 것은 우는 것. 그게 울림이든 울음이든 운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일까, 가끔 울음을 삼키며 울지 못할 때 살아 있는 것은 병에 걸리고 자연이 울지 못할 때 천재지변이 오는 것처럼 뒤틀리게 된다.
그래, 울고 싶은 자, 울 수 있어야 정상이다.
수능을 앞둔 딸아이가 뜬금없이 성동혁 시인의 시집을 사달라고 한다. 아, 딱 울림과 떨림을 느끼는 시기가 아닐까. 흔쾌히 주문해주겠다고 했다. 찾아보면 시집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했다. 찾아서 주문을 했다. 시험을 보는 긴장감도 역시 떨림으로 나온다. 울고 싶은 마음 울리고 싶은 느낌이 시험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 분명함으로, 그래서 그 울림과 떨림을 시집으로 기대고 싶은 생각이 기특했다. 떨리더라도 호들갑스럽지 않는 떨림이 의연함으로 나올 때 결과도 의연할 수 있을 것이다.
딸아이는 일요일 낮, 과외 샘과 마지막 수학 수업을 했다. 방 안에서 들리는 대화를 엿듣고 싶어서 엿들은 게 아니라 울음이 터져 나오기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제 수업의 마지막으로 헤어짐을 겪어야만 하는 슬픔이 곧 울음으로 나왔던 것은 아닐까 했다. 역시나 맞았다. 한 번의 만남은 또 반드시 한 번의 이별로 이어짐을 딸아이는 울음으로 표현했다.
그래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지. 울고 나서 시집을 보면 더 울 수 있을 거야.
다시 만날 수는 있어도 스승과 제자로써 만남은 이별일 테니 울림이 없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작별을 고해야 하는 일은 분명 끝의 울림이다. 만남의 서먹함. 헤어짐의 아쉬움. 이 처음과 끝에서 울림이 있고 울림은 떨림이 있고 떨림은 울게 만든다.
그래서 딸아이는 시험을 앞두고 시집을 사달라고 했던가.
음. 이러다 시인 나오게 생겼다. 울림이 정교해지고 운율을 더하고 멜로디를 붙이면 음악이고 가사를 붙이면 시가 될 것이니까.
하기야 울림에 긴장감은 필수이다. 살다 보면 죄를 지은 범죄자가 잡힐까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살면서 존재적인 울림이 있어야 한다. 내가 50대에 아직도 시험을 치르고 싶었던 이유가 떨림을 유지하지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시험을 치고 긴장을 하고 기뿜과 좌절의 교차점에서 내 인생의 발걸음이 운다. 이렇게 자발적이고 품격을 유지하고 자기 스스로 대견스러움의 떨림. 이는 곧 살아 있음의 울림이 아니겠는가.
시인의 시가 그래서 떨림이 울림으로 운다고 표현했듯이 우리 생에 저변으로 깔린 자기만의 방식으로 울어보자.
울지 못하는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아 있는 자의 권리이자 의무가 운다.
PS : 알라딘 이웃분의 책 선물로 시인의 울음을 잘 읽고 있습니다. 이자리를 빌어 [김**님]에게 무척 감사의 안사안부를 전합니다. 책이란 것이 이렇게 이 가을날 딱 울기 좋은 시기에 울음이란 선물을 주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울어야겠습니다.아참 그래서 또한 알라딘 이웃분 [서***님]에게 "빼*로"도 받아 고맙게 잘 먹었습니다. 모두 마음씨의 울림이 컷음을 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