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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본질 바라보기 - 보는 것과 창조한다는 것 ㅣ AcornLoft
브루스 반바움 지음, 조윤철 옮김 / 에이콘출판 / 2017년 12월
평점 :
며칠 전 양 모양의 강압적인 상황에서 누드를 찍었다고 고백하는 걸 인터넷 뉴스에서 봤습니다. 또한 이에 반박하는 스튜디오 실장의 카톡 내용을 복구해서 강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 누드 사진 행사에서 사진을 유출 시키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쓴 누군가는 누드 사진을 오픈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진을 오래 찍다 보니 사진판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문과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이야기들을 간간이 들어왔습니다만 이렇게 사진판이 욕먹는 지탄이 되는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전혀 사진계 소식을 외면한 터라 소문조차 듣기도 싫어서 sns에 떠도는 소식은 전혀 찾아 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건 뉴스에까지 오르니 기분이 참 거시기 합니다.
리뷰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사진가들의 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강압적인 거냐 아니냐는 조사하면 다 밝혀질 것이고 이런 건 논외로 하겠습니다만, 그런 누드 사진에 참가한 사진 촬영자 중 누드 사진으로 인체의 미묘한 감성을 만들고자 했던 사람도 있는 반면에, 앞에서 언급한 겉 멋의 모양새로 욕망의 탐닉하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유출하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쓴 사람이 사진을 유출 시킨 것은 상당히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입니다. 각서는 약속이기에 이 약속을 어긴 셈이 되니까요. 분명 이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어떻게 누드 사진에 따른 사진의 본질 따위를 신경이나 썼겠는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확실한 것은 예술에서 어떤 분야이든지 간에 작가의 심성과 양심과 보편적인 윤리성, 그리고 추구하는 이상적 자기 가치관의 주관의 세계가 있어야 하나, 이런 것들이 결여되어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예술입네" 하면서 겉멋에 빠져 있는 가짜들도 있다는 것이겠지요. 꼭 이런 가짜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누군가의 인격에 손상을 가하는 몽니를 부리게 되거든요. 꼭 문제는 겉멋에 잔뜩 든 패거리들이 일으키거든요.
이런 보편적이면서 개성적인 창작의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데 기술보다 더 우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보편성에 기초를 확고한 상태에서 수립돼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건 기본 중에 기본이라서 딱히 더 이상 설명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기초적인 소양조차 없는 사람이 겉멋의 예술이란 솔직히 다 사기입니다. 얄팍한 예술과 기술의 경계에서 탐욕에 젖어 갈 때, 예술을 모독하고 상식을 비웃으며 졸속의 껍데기로 포장된 사기니까 말입니다. 이런 건 비단 사진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 예술이란 이름을 걸고 하는 모든 것이 다 해당될 것이니까요.
오늘 모처럼 토요일 휴무일이었습니다. 카메라를 매고 홀로 강가를 몇 시간이나 걸었습니다. 지나치는 모든 것들이 빛으로의 초대였습니다. 오로지 혼자였습니다. 떼거리로 몰려다니고 싶지 않았습니다. 떼거리가 패거리 되는 용기는 그저 객기일 뿐 예술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책에서 나오는 창작과 추상과 구상에 대해 강가에서 만나려 했습니다. 빛들의 소용돌이와 바람의 일렁거림은 현실에서의 비구상을 만나 현실의 너머에 있는 추상의 빛의 세계로 진입하는 노크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진에 돈이 얼키고 인간들 간의 관계에 매이고 온같 구질구질한 것들에 억메인 오늘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해방시키는 이 이상의 세계에 잠시라도 머물고 싶었던 이유였습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결코 본질에게로 안착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본질로 향하는 이상의 추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다가가려 해도 자꾸만 멀어지는 이 존재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렇다고 멀어지기에는 우리의 삶이 점점 하데스와 가까워지려 합니다. 그래서 예술이 본질로 인도하는 방향타가 되어 주고 방향키가 되어주는 목적이겠지요. 그래서 당장 돈 한 푼 생기지도 않는 예술을 위해 모네와 고흐는 그렇게 그림으로 자신의 이상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자신들이 그 본질에 가까워지려고 부단했던 것인지, 그런 위대한 작가들의 삶을 통해 오늘날에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예술이란 그런 것이구나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박함의 가림막 용도의 껍데기가 아니라 진정 위대한 작가를 닮으려는 본질에게로의 추구입니다. 이런 것도 없이 카메라 매고 똥폼만 잡는 놈은 조심해야 합니다. 사짜 냄새가 풀풀 나기 때문입니다. 시장 바닥에서 질퍽한 오물을 뒤집어쓰면서 멱살 드잡이하는 거야 자본이란 천박에서 노니 그런 갑구나 이해라도 하겠지만 예술이란 타이틀을 달고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은 분명 위장전술용으로 써먹는 예술이라면 분명 누군가 당하기 마련입니다.
늘 답보와 답습으로 점철되다 보니 삶이 답답스러워지거든요. 그래서요. 나가서 카메라로 사진의 본질을 따져 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삶의 답습에 끝없이 자기에게 질문을 던지고 빛을 찾아 갈구하는 이 끝없는 갈증의 세계. 바로 사진에서 나오고 몰입하고 빠져들며 스스로에게 채근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네 오늘 사진으로 짧은 리뷰 마무리하겠습니다.
* 나뭇가지에서도 빛을 잡더군요. 가지의 손 내밀기에 빛이 걸렸습니다.
포망된 빛의 세계입니다.
* 죽어 가지마저 꺽여 버린 나무에서 작은 싹이 또 튀어 나옵니다.
존재의 윤회란 무슨 욕망의 메커니즘이란 덫일까요.
정녕 이 존재의 질곡이 무섭기까지 합니다.
*가지는 바람에 일렁이고 물결은 바람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흐트러 놓습니다.
직선이 아니라 곡선의 기하학적인 선들.
그 옆에서 빛은 무념의 무상과 연결됩니다.
존재는 늘 불규칙적인 형이상학의 추상입니다.
구상이 곧 추상화되어가는 빛과 바람의 결이 만나는 세계.
* 사막에 바람이 불면 모래가 곡선을 만들듯이,
바람이 일렁이는 물결엔 모든 존재가 연동을 합니다.
규칙과 비규칙, 정형과 비정형.
이 세계의 대칭점에서 이루어 내야 하는 그 변곡점의 폐곡선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또 다른 이름이겠지요.
* 빈 가지에 잎사귀조차 하나 없이 맨몸으로 빛을 잡고 있습니다.
허허에는 늘 빛이 결렸습니다.
잡는 자와 잡지 못하는 자.
때로는 잡았다가 때로는 놓쳤다가,
어디에서 어떻게 무슨 모습으로
오늘의 빛들을 잡아 찾아갈 것인가.
* 빛으로의 초대.
우리는 이 세상에 초대되었는가.
초대장도 없이 온, 불청객은 아니었는가.
그래 분명 오늘 사진의 주인공은 너다.
초대된 빛과 초대된 주인공.
만약 이 두 가지의 피사체가 없었더라면,
사진은 그냥 쓰레기가 될 뻔했지.
초대장은 빛이었지.
* 빛에게로 향하는 기도.
빛으로 향하는 기도 주문.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주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