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 책은 읽어 보지 않았다. 물론 이 책은 내가 읽어 보려고 구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와이프에게 전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에 생일이기도 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은 내용이니 꼭 한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서이다. 책 소개 안내글에 보니 어떤 내용인지를 얼추 떠오른다. 와이프가 다 읽고 나면 나도 읽을 작정이다.
백화점(대형 마트, 일반 판매점 등은 통칭해서 백화점이라 하자.)에 종사하는 여성 판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한번 물어보자. 물건을 사는 고객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백화점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특히 밤늦은 시간에 보이는 얼굴들의 표정들. 그 표정에 써진 얼굴의 언어들. 아니면 늦은 시간 야간에 음식점에서 서빙하고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 표정에서 읽히는 것은 가짜의 도식화되고 훈련된 가면의 미소를 못 느끼겠는가? 그렇다. 그들의 하루는 피로함이다. 법규에는 50분 일하고 10분간 쉬는 걸로 의무가 되었지만 이것이 실체적으로 지켜질 것이라고는 전혀 본 적이 없다. 출근하자마자 퇴근시간까지 잠시라도 엉덩이를 의자에 몸을 의탁할 수가 없다. 감시자는 온통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고 고객의 클레임이 걸리면 판매직원들은 그 질타를 고스란히 다 받는다. 결국 반나절을 내내 서서 일할 때, 그 피로감은 상상 이상이다. 이걸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간 계속한다는 것은 정말,,,
나 또한 실제로 밤늦게 퇴근해서 집에 오는 와이프의 다리를 자주 주무른다. 다리의 혈액순환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서 어떻게 버틴 시간들인지. 가끔은 내가 쥐구멍을 찾는다. 당연하게도 혼자 벌어서 먹여 살릴 능력이 안되니 와이프를 고생길로 내몰았던 자책감은 늘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결국 나 만나서 부족한 능력을 메꿔주는 와이프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상당히 제한적이고 앞으로 어떻게 하며 이 미안함을 갚아 나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다. 이번 생일 선물에는 꼭 다리 마사지 기계를 하나 사줘야 할듯하다. 와이프는 현재 대형 매장의 의류 코너 매니저로 있다. 사회생활 시작을 백화점부터 했으니 서서 일한 지 벌써 20년도 넘었다. 경력이 그런 판매직이다 보니 늘 판매 직종으로 만 갈 수밖에 없었고 평생을 이런 일에 종사했다. 그 직종의 애환과 비련함. 그리고 별별 에피소트들. 슬픔과 분노가 치미는 이야기들은 수도 없이 들었다. 그들의 직업적인 생리와 현실, 그 속성 등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기도 하다.
나는 "고객이 왕이다"라는 소리를 상당히 듣기 싫어한다. 요즘 심심잖게 들리는 갑질 고객, 진상 고객, 블랙리스트가 들리는 이유들이다. 돈의 힘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사람을 굴종시키고 굴복시키고 감정의 노동을 황폐화시키는 것일까? 일전에 모 항공사의 땅콩 스캔들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대기업 따님의 고귀한 귀족적 자태에 누가 되었던 무지하고 막지한 비슷한 일들이 전국의 백화점에서는 거의 일상이다. 우리들은 가급적 주는 돈보다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매입자와 판매자가 돈이란 매게로 주종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돈 주는 사람이 왕이면 돈 받는 사람은 신하라고 되라는 소리인데 신하가 왠 말인가. 그들은 신하가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인이라는 엄혹한 판단을 하려 들지 않는다. 이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문제는 이렇게 갑질을 당하는 을의 여성들이 다시 자신이 돈을 주는 고객이 되었을 때도 똑같이 고객이 왕이라는 식의 비상식적인 갑질하는 사태는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참혹하게 만든다. 시어머니에게 지지리도 고생했던 며느리가 다시 시어머니가 되면 어떻게 똑같이 새로운 며느리에게 보상을 받으려는 짓이다. 이는 군대에서도 비슷하다. 꼴통 고참에게 이등병이 시달렸지만 이 시달린 이등병이 다시 고참이 되면 똑같아지는 원리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 왜 우리는 돈으로 사고팔아도 공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일까?
게다가 이제는 상식? 이 허물어졌다. 상식적으로도 판매한 상품은 일주일이나 이 주일까지 반품이 법적으로 가능하다지만 일부 고객은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도 반품을 가지고 온다. 더욱이 필요에 따라 실컷 입고 나서 온갖 사유를 붙여서 클레임을 걸어 반품하러 온다. 그런 반품은 법적으로도 안되더라도 백화점은 분란이 싫어서 다 받아 준다. 문제는 반품된 제품은 재판매가 불가능하다면 결국 이 반품의 금액을 판매사원이 잘못 판매한 결과로 인해서 떠안게 될 때이다. 상식과 교양과 합리는 이제 점점 사라지고 없어지려 한다. 어떻게 일 년이나 입다가 반품을 하겠다는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 예를 들어 여름철 한때 수박 한 통 사가지고 가서 반이나 파먹고 나서 맛없는 수박이라고 반 통을 들고 온다. 화장품도 반이나 사용하고 나서 트러블 일어난다고 들고 온다. 한두 번 바르고 나서 트러블 일어날 때 즉시 반품이 기본이지만, 이게 반이나 쓰고서 반품하려 드니, 아니라도 너무 아닌 경우가 많다. 이것도 너무나 악용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다는 점이다. 아 이 무슨 지랄 맞은 짓들일까.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여기에서 기업의 논리는 절대 손해 보려 들지 않을 것이고 고객은 고객대로 주장한다. 기업과 고객 이 사이에 판매직 사람이 있다. 사람이 과연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물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우리 사회가 이런 주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는 적군도 없고 아군도 없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적과 아군은 불분명하고 불확실하다. 가치에 따른 피아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익과 손해에 따라서 규정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명분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면 바보가 된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파는 사람이냐 사는 사람이냐라는 돈이라는 지폐 경제 자본이 그 역할의 중심 논리에 서서 놀아난다. 이런 시스템으로 사회가 구축됐고 돌아가는, 절대적인 구조화가 되어 버렸다. 이 강고한 구조 속에서 양심은 무엇이고 공정의 가치는 어떻게 유지되어 갈 수 있을 것인가? 조금 손해 보거나 자신의 이익에 위배되더라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는 이제 없다. 조금만 기분 상하면 바로 따귀를 날리는 무감각의 시대가 된 것은 아닐까?
자, 우리 또 고민을 해야만 한다. 다 함께 삶을 사는 이 가치의 기준에 따라 완고하고 강건하게 버티는 야만의 자본으로부터 인간성이 다시 제자리로 올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