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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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너무나 강력한 첫 문장이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작가의 삶은 나뉜다.
부끄럽고 복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 그 기억들을 영원히 박제함으로서 스스로 홀가분해지고 치유받으려 한다.
원초적 공간에 대한 기억.
내가 어렸던 시절, 계급의 언어는 훨씬 직설적이었다.
학기 초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의 유무, 자동차가 있는지, 피아노가 있는지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됐었다.
마지막까지 그리고 가장 손을 많이 든 아이들이 주로 반장이 되고 부반장이 되었다.
간혹 자기집이라고 손을 든 아이옆에서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야 너네 집 아니잖아.’
아이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자신의 거짓말을 까발리는 같은 동네 아이.
그 여자아이의 부끄러움을 보며 마음을 쓸어내린다.
그 부끄러움이 그 민망함이 내 것이 아니라서.

내 탓이 아니다. 내가 원인인 것도 아님에도 마치 내 탓인 듯 어쩔 줄 몰라하는 일들이 어린시절엔 많았다.
부모의 불화, 폭력, 주눅드는 말들, 우울하게 하는 언어들.
발가벗겨져 집 앞 대문에서 벌을 서던 우리 반 남자아이, 놀라서 외면했지만 슬펐다. 저 아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하필 종아리가 퍼렇게 멍든 날, 반바지 체육복을 입어야 해서 기어이 겨울 체육복 몰래 챙겨 입었던 기억.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무서운 말들,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가하는 폭력.
나이가 들어도 떠나지 않고 마음 한켠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말들.
그 말들을 적고 또 적어 떠나보낸다.
가슴 한켠의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적고 그렇게 떠나보낸다.
가장 부끄럽다 생각한 일들을 적어나가면서 이젠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내 탓이 아님을 어린 내가 어찌할 수 없었던 일임을 써내려간다.

“글쓰기는 분열된 세상과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며 계급 체계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 작은 파티 드레스 중에서

(떨리는 손으로 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 그 몇 초 동안 얼마나 마음 졸이고 떨었던가. 그 날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그런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을까. 이젠 받을 수 없는 전화에 어떤 마음이었을지 헤아릴 수도 없다. 지금의 20대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엄마, 재미있게 잘 놀다 올게..란 아이들을 또 지켜주지 못했다.
이럴땐 호밀밭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던 호올든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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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31 1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부터 말씀하신대로 강렬하네요. 계급의 문제, 지금은 더 심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끄럽지 않아도 될 일에 부끄러움을 장착한채로 내내 지냈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미니님 통화하시면서 얼마나 가슴졸이셨을까 싶어 저까지 긴장이... 4천건 이상의 실종신고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많은 가족과 친지들이 다같은 마음이었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아까운 청춘들이 이렇게 또 가네요ㅜㅜ

mini74 2022-10-31 11:19   좋아요 3 | URL
비슷한 나이또래 주변 엄마들 서로 안부를 묻고 눈시울을 붉히고. 그런 날들이네요. 아이들에게 참 미안합니다. ㅠㅠ

페넬로페 2022-10-31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이 정말 강렬하네요.
그리고 그 다음 미니님께서 올려주신 문장이 맘에 와 닿습니다.
어릴때 우리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고 지금의 나는 그 상처로 인한 치유가 되어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떨리는 손으로 전화할때의 미니님의 그 마음, 끝내 전화받지 못하는 그 마음들,
뭐라 표현할 수 없네요^^

mini74 2022-10-31 11:41   좋아요 3 | URL
작가님이 써나가는 어린시절이 참 마음 아팠습니다. 그런 글들을 통해 치유하고 당찬 작가님이 되신거겠지요. 그렇지요. 그 분들 마음이 어떠실지. 먹먹해집니다.

새파랑 2022-10-31 1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끄럽네요 ㅜㅜ 걸어다니는것도 위험한 세상인거 같습니다. 누구를 탓하기 보다는 위로와 공감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mini74 2022-10-31 12:19   좋아요 3 | URL
저도 그런 마음입니다 새파랑님. 점심 맛있게 드세요 ~

미미 2022-10-31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학교란, 가정이란 가장 따뜻하고 포용력 있어야하는 공간이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지던 시기가 있었죠. 지금도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공동체가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야하는데 각자도생해야하는 현실이 참 서글퍼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미니님(ㅠ.ㅠ)♡

mini74 2022-10-31 14:11   좋아요 2 | URL
안전망이 무너지는 느낌, 각자도생이란 말이 저도 참 서글퍼요 미미님. 북플님들은 안녕하신지 걱정도 되더라고요.

단발머리 2022-10-31 14: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무 힘이 없더라도... 어른이라면 이 세상에 대해, 세계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때와 같은 무력감을 또 느끼게 되네요. 전화할 때의 떨리는 미니님의 마음, 이해가 되고... 또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한 부모님들 생각에 더욱 마음 아픕니다 ㅠㅠㅠ

mini74 2022-10-31 14:16   좋아요 4 | URL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한 밤이었습니다. ㅠㅠ

2022-10-31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31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2-10-31 2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어제 마음 졸이셨군요.
어제 참...마음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한숨만 계속 나오고...

우리 어릴 때 학교에서 했던 조사들 지금 생각해보면 참...기가 막히죠.
엄마없는 사람 손들어, 아빠 없는 아이 손들어 등등...폭력도 많았죠.


mini74 2022-10-31 21:07   좋아요 2 | URL
맞아요. 그것도 참 직접적으로 물었죠. 이혼이 드물었던 시절, 엄마가 집을 나갔던 친구가 울었던 기억도 떠오르네요 ㅠㅠ 학교나 가정이 행하는 정서적 폭력도 엄청났던 시대였죠 ㅠㅠ

고양이라디오 2022-11-01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이군요! 궁금하네요ㅎ


mini74 2022-11-01 10:22   좋아요 2 | URL
어린 시절의 상처, 그 시절 느꼈던 억압과 수치에 대해 박제하듯 묘사한 책이라고 느꼈어요 라디오님 *^^*

그레이스 2022-11-02 18: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ㅠㅠ
학교행사때문에 늦게 오는 줄 알고도 12시에 들어오는 막내 마중나갔어요 ㅠ
아이 대학에서도 희생자가 한 명 있어서 분향소 마련됐다고 듣고 또 가슴 아팠습니다.

mini74 2022-11-02 21:22   좋아요 2 | URL
ㅠㅠ 대학에 분향소라니 ㅠㅠ 너무 슬픕니다. 다들 같은 마음이겠지요 ㅠㅠ

독서괭 2022-11-03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미니님 그 시간에 아이가 집에 없었던 분들은 다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요 ㅠㅠ 너무 마음 아픕니다.
<부끄러움>은 강렬한 책일 것 같아요. 저도 곧 만나보고 싶습니다.

mini74 2022-11-04 15:31   좋아요 2 | URL
뉴스 보다사 홧병 날거 같은 날들인데 또 그 평범한 날들이 그리울 이들 생각에 맘 아프고 그러네요. 에르노작가님의 삶에서 쓰기가 치유란 걸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