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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친구들 - 세기의 걸작을 만든 은밀하고 매혹적인 만남
이소영 지음 / 어크로스 / 2021년 11월
평점 :
친구? 하면 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30년지기 친구, 물론 이 친구보다 더 오래 본 친구도 있다. 중학교때 만난 친구인데, 왠지는 모르지만 항상 내가 져줘야 하는 친구였다. 내게 무엇이든 “너때문이야”라고 말하는 친구, 성적이 떨어져도 “너때문이야”. 그럼에도 그 친구는 친구라곤 나밖에 없었고, 어느 순간 나도 그 친구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고등학교 배정이 서로 다른 곳임을 알고 우는 친구를 보며, 속으로 안도했던 기억도 난다. 소심했고 우울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교복을 맞추고, 준비물인 영어사전을 사러갔다. 아주 두꺼운 영어사전을 사오라는 것,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서점에 들러서 사전을 사려는데 단발의 여자아이 하나가 말을 걸었다 “어, 너도 땡땡 고등학교니?” 뻘쭘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반갑다. 우리 내일부터 학교 같이 가지 않을래? 어디 어디서 만나자.”
내가 확답도 하기 전에 그 아이는 내게 손을 열심히 흔들더니 먼저 가 버렸다.
그날밤, 전학을 가야하나, 혹은 그 아이를 무시해야 하나, 아님 돌아서갈까 온갖 고민을 했다. 학교는 집에서 걸어서 30분, 결국 그 아이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 아이는 내게 추파춥스를 하나 물렸다. 그리고 3년 동안 우리는 그 길을 걸어서 같이 학교를 오갔다. 수퍼집 딸이었던 그 친구는 매번 아침마다 신상제품이며 과자를 들고 왔고, 우리는 열심히 먹고 떠들며 그 길을 다녔다. 그리고 그 아이가 우리집에 온 날, 뼈밖에 없던 우리 오빠가 로드쇼 잡지위에 라면 냄비를 올려 놓고 먹는 모습을 본 후, 난 우리 오빠를 그 아이에게 주기로 했다. 사춘기소녀의 취향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정신차리고 다른 남정네에게 시집을 갔지만.
내게 먼저 용감하게 말을 걸어 준 친구, 그래서 그 친구는 내게 지금도 영원한 까방권을 획득한 상태다.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질투도 한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싸울때는 가장 깊숙이 찌를 수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친구란 그런거다. 내가 때려도 남이 때리는 꼴은 못 보는 것, 내가 구박해도 타인이 구박하는 건 못 참는 것. 그리고 어깨 한번 툭치며 발 맞춰 걸어주면 그걸로 된 것.
이 책에선 화가의 친구들 이야기가 담겨있다. 예술가의 이미지나 고정관념으로 봐선, 성격파탄자들이 아니 좋은 말로 감수성이 예민한 분들이 많으신데 그 친구들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평생을 존경과 우정으로, 혹은 같은 길을 가는 동지로, 또는 서로에게 상처로 남는 친구들의 이야기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가는 그림들이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먼저 프리다 칼로를 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어릴 적 엄마랑 드라마를 보다 보면, 꼭 나쁜 남자 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을 지고지순하게 짝사랑하는 조연남자가 나온다. 엄마는 그때마다 내게 남자주인공을 가리키며 “저런 놈 만나면 지 팔자 지가 꼬는기다.”라며 열변을 토하셨지만, 그 당시엔 그냥 엄마의 마이너한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저 멋진 남자주인공을 놔두고 왜?
프리다 칼로에게 디에고 리베라는 나쁜 남자 중 최고봉이었다. 그런 프리다 칼로를 평생 숭배하고 사랑했던 니콜라스머레이는 어땠을까. 결국 매번 리베라에게 돌아가는 프리다 칼로를 가슴에 품고 숭배했던 그에게 프리다 칼로 또한 나쁜 여자였을까.
“당신은 디에고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고, 우리 둘이 있을 때에도 셋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면서도 그의 눈은 항상 프리다를 향했고, 그녀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판 그림들의 되사서 그녀에게 돌려줬다.
바스키아의 우상이자 예술의 아버지였던 앤디 워홀, 두 사람의 협업이 혹평일색으로 끝나자 서서히 멀어졌지만, 두 사람이 그린 이 그림에선 유머와 서로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뒤러의 이탈리아 여행비를 선뜻 내주고,인문학적 소양을 쌓게 해 준 친구, 피르크 하이머
둘의 편지에는 뒤러의 아내에 대한 뒷담화 등이 담겨있다고 한다. 결혼 3개월만에 훌쩍 여행을 떠나고, 그런 여행에 돈을 대주는 친구라니 어느 아내가 좋아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에밀졸라와 세잔, 그러나 에밀 졸라의 <작품>속 실패한 화가의 모습이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절교한다.
그런 세잔이 “신처럼 너그럽다”고 한 카미유 피사로와의 우정. 세잔은 한 전시회에서 자신을 “폴 세잔, 카미유 피사로의 제자”로 소개한다. 가난하고 힘든 상황의 제자들을 힘껏 도와준 피사로는 인상화가들의 아버지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래는 세잔과 함께 야회에서 같이 그림이다.

클레와 칸딘스키는 음악과 조형예술의 결합에 둘 다 관심이 많았고, 바우 하우스 등에서 함께 교사로 지내며 친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처럼 돌에서 작품을 찾아내 깎아내고 싶어했던 조각 지망생 모딜리아니와 브랑쿠시의 만남, 그렇지만 폐 등이 안좋아 건강상의 이유로 조각을 포기했다는 설이 있다.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섰던, 그리고 많은 친구들을 거느린 마네, 그를 지지한 문인들로는 보들레르, 졸라, 말라르메 등이 있다. 말레르메의 시집인 <목신의 오후>의 삽화를 동판화로 제작해 준다.
아래의 그림은 둘 다 마네가 그린 것, 졸라가 싫어한 초상화이다. 그 옆엔 조르주 바타유가 “이 작품은 두 정신 사이의 우정을 환히 비추고 있다”고 한 말라르메의 초상화. 아무리 봐도 말라르메의 초상화에 진심이나 애정이 더 담겨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마네는 졸라의 <목로주점>을 읽고 등장인물 중 하나인 나나를 그렸다. 그러자 졸라가 화답하듯 3년 뒤 <나나>를 발표한다.
클림트는 추커칸들집안과 친했는데, 의사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클림트 그림에 생물학적 모습이 보인다는 설도 있다. 추커칸들 집안에서 현미경을 통해 난자와 정자 세포조직 등을 관찰하고 그림 속에 담은 것.
오딜롱 르동은 모로, 고갱, 보들레르, 말라르메, 위스망스와 친했다고 한다. 주로 상징주의 예술과 그룹 회원들과 친했으며, 아르망 클라보란 식물학자와 친분을 나누고 조수로 식물채집 등을 하면서 그의 그림들이 식물이나 씨앗 등의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뒤러에게 원근법을 가르쳐준 수학자 루카 라치올리, 그의 수학책에 삽화를 그려준 레오나르도 다빈치.
예술가들에게 친구는 지지자이며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서로의 우정이 빛을 발할때도, 빛이 바랠때도 예술가들은 작품에 마음들을 담았다.
서로 다른 별에서 태어나 지구란 곳에서 친구로 살기란 얼마나 엄청난 확률인가,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오늘 절교하고 내일 다시 시작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