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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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바보야!
하는 말에는 어리석다는 뜻도 있지만 약지 못하다는 뜻도 있다.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답답함, 순수함 그래서 항상 곤경에 처한다.

화가 났다가 답답했다가, 혼자 속으로 빨리 도망쳐 했다가, 돈 따위를 그런데 숨기면 안된다고 했다가 지쳐서 그저 펠리시아의 여정을 눈으로 따라갈 때 쯤, 펠리시아는 펠리시아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잃고 피를 흘리며 뛰쳐나가던 펠리시아.
그런 펠리시아의 여정.
내게는 양심의 여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순수하고 지금의 시대에선 답답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마음의 양심.
잘 속아 넘어가고 조롱당하기 일쑤인 양심이다. 주변인들은 그런 양심을 속이고 괴롭히고 피 흘리게 하며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양심은 살아남았고, 그런 살아남은 양심이 두려워, 평범한 척 숨어 지내던 악의 결정판, 역겹던 힐디치는 불안함과 두려움 속에서 목을 매단다.(어머니의 성적학대가 없었다면 힐디치도 괴물이 되지 않았을까 ) 그리고 광신도들은 사라져 버린 이 시대의 양심을 찾으며 기도를 시작한다.
살아남은 양심은 길거리를 헤멘다.
어쩌면 제도권 안, 부유한 집, 혹은 평범해 보이지만 순수함을 촌스러움과 무지로 여기며 비웃는 이들 사이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길거리로 나오면서 살아남은 양심은 자신과 닮은 이들을 만난다. 냄새나는 노숙자의 이를 치료해 주고 무료로 빵과 차를 나눠 주는 사람들, 자신의 잠자리와 소중한 박스들을 빌려주며 함께 비를 피하게 해 주는 이들.
펠리시아의 여정은 우리가 잠시 잊고 살았던 삶의 양심을 깨우치는 길이다.
내가 무시했던, 그리고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 양심. 펠리시아는 그 여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너무 달라진 자신과 이제 낯설어 보일 그 공간으로.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답답했다.
영화 <마더>의 대사가 생각나기도 했다.
“얘, 너는 엄마도 없니?” 아니, 엄마 비슷한 혹은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는 거야? 어떻게 그런 낯선 이에게 자신의 가장 큰 문제를 털어놓는거지? 실제로 엄마가 있었다면, 펠리시아의 무모한 여정을 말릴 수 있었을까.
답답함을 더해 순진함을 더해 어리석어 보이던 펠리시아, 그녀의 이름은 많은 것들과 치환된다.
내가 비웃은 것들,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여겼던 감정들, 그렇지만 실제론 소중한 것.
여전히 펠리시아는 떠돌겠지. 복잡하고 잔인한 도시의 어느 가게의 모퉁이, 햇빛 잘 드는 곳에서 혹은 늦은 밤, 누군가가 양보해준 혹은 곁을 내어준 박스 옆에서 평온을 느낄지도.

그리고 그 곳엔 어머니의 부재 속에 아버지의 강압적 시선아래 자란 사랑을 꿈꾸는 펠리시아와, 어머니의 성적 학대로 상처받던 힐티치와 살인마로 변해버린 힐티치가, 떠나는 아버지를 향해 얼굴을 긋던 어머니를 보며 울던 조니와 펠리시아와 아일랜드를 버린 조니도 함께 공존한다. 어쩌면 그 곳엔 펠리시아가 그리도 찾아 헤멨던 잔디깎기 공장이 있을지도 모르지, 이젠 필요 없어진 그 곳엔 잡초만 무성하겠지만.

기타등등 1.~아일랜드의 역사는 지독하다. 감자대기근과 독립투쟁의 역사, 그들이 증오하는 영국인들, 그리고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을 열등하다 생각하는 제국의 시대를 살아가는 영국인들의 모습을 책에서 혹은 사건 등에서 만나곤 한다. 아일랜드, 그리고 실업과 경제침체로 어두워진 영국의 이면.
그들이 대처수상이 죽던 날 파티를 했다는 기사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레이건과 짝짝꿍이 되어 신자유주의를 몰아붙이던 대처가 그들에겐 악몽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대처의 정책들로 잉글랜드의 금융업은 부흥하지만, 스코틀랜드의 각종 공장들과 석탄산업은 문을 닫게 된다. 결국 스코틀랜드인들은 버스를 타고 적은 임금을 받으며 잉글랜드 의 쓰레기를 치우러 혹은 가정부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는 자조적인 글이 기억난다. 아이들의 무료 우유급식을 수지타산을 이유로 철폐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실업자로 만들었던, 그 시절의 빌리 엘리어트와 떠나버린 다니엘 블레이크, 지금의 영국을 살고 있을 리키를 떠올리게 만든다. ~ 울면서 봤던 영화들이다, 빌리 엘리어트,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

기타등등 2~갓 태어난 순수한 사과가 있다. 아직 때 묻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혜롭지는 않다. 그게 문제될 건 없다. 순수함과 단순함은 비난받아서는 안 될 미덕이다. 그렇지만 그런 순수한 사과는 누군가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한 입 베어 물어진 순수한 사과는 버려진다. 한 입 베어 물린 순수한 사과는 갈변이 되고 물러진다. 순수한 사과는 어찌할지를 모르고 길을 떠난다. 에덴동산을 찾을 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 곳엔 뱀도 있는 걸. 결국 뱀은 순수한 사과를 한 입에 넘기려 하지만, 또르르 굴러 순수한 사과는 피해버린다. 사과를 삼키려다 나무둥치에 둘둘 말린 뱀은 그렇게 꼬여버린 자신의 몸도 풀지 못한 체 죽어버린다.
순수한 사과는 에덴에서 뱀을 피하며, 자신과 닮은 이들을 만난다. 그들 대부분은 멍들었고, 여기 저기 베어 물린 자국 투성이다. 그렇지만 순수한 사과는 이제 안다. 따스한 햇볕 아래 그들과 함께 있다 보면, 작은 씨앗으로 남아 다시 한 번 싹을 틔우고 꽃이 피울 수 있으리라는 걸. 선한 나무 한 그루가 그들에게 겨울을 이길 낙엽을, 자애로운 흙들이 따스히 덮어 도와줄 것임에 그 해 죽은 뱀 또한 좋은 거름이 될 것임에 용서하고 감사한다. 순수한 사과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에덴동산에서 또 다른 순수한 싹 하나를 틔울 준비를 한다.

기타등등3~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찾아보니 1999년작 그 해 칸의 황금종려상 유렵후보였다고 한다. 아톰에고이안 각본, 감독작품이다. 주연은 밥 호스킨스(피노키오의 제페토아저씨!)와 엘레인 캐시디(핑거스미스에서 상속녀 모드역을 맡았던 분)

여자아이들은 엉망진창이 된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혹은 그냥 뭔가 다른 것을 원해서 길을 떠난다. 여정중인 그들을 본 이들은 알다가도 모를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도시나 여자를 사고파는 일이있을 만한 큰 동네에서는 랜드로버나 폭스바겐, 도요타의 차문이 열리며 아이들을 태운다.
콘스 씨 집에 그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들은 상점 입구에 머물러보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다 처음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며 노상의잠자리에 자리잡는다. 한동안은 실종으로 처리되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밑바닥 인생, 이제 그들은 그렇게 불린다

얼빠진 멍청이, 아무데나 떠도는 바보, 피로감 섞인 동정 한 조각이거리의 사람을 향해 던져지고, 눈길은 서둘러 다른 데로 옮겨간다. 다른 도시도 있을 테고, 다른 도시의 거리와 도로도 있을 것이다. 태퍼와조지, 리나, 케브, 다보, 멍청한 해나 들도 있을 것이다. 자선단체와 보호소가, 자비와 경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어디에나 산 사람과죽은 사람을 가르는 운명이 존재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같은 사람들이그녀의 머릿속을 떠돈다. 성자들과 빈민구호회 수녀님들, 엘시 커빙턴과 베스, 샤론, 게이, 재키, 보비, 단 하루도 나이를 더 먹지 않은 그녀의어머니까지. 그들은 정말 향기로운 꽃들 사이에서 모두 함께, 안전하게축복받고 있을까? 만일 그 일이 일어났더라면 그녀도 그들과 함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회의가 들어,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확실히 아는 것만을 선택하리라 생각한다. 그녀는 두 손을 뒤집어 다른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 한다.

혼자서, 더이상은 아이도 소녀도 아닌 것을 감사한 일이라 굳게 믿으며, 그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돌아다닌다. 두발을 싸매고서, 비가 와 옷에 스며들면 젖은 채로, 배수구 웅덩이에 얼음이 얼면 그녀의 몸도 얼어붙은 채로, 낮이면 구름이 종종걸음치며 흩어지거나, 꼼짝도 하지 않거나, 잿빛을 드리워 해를 가려버리거나, 아니면 단단히 뭉쳐 시커메진 모습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마치 하늘에 떠있는 험악한 괴물처럼. 구름이 다시, 바람을 타고 온 연기 꼬리들로, 오리털처럼 부드러운 커다랗고 하얀 솜뭉치로, 아침의 진홍빛 기다란 줄무늬들로 그곳에 나타난다. 때때로 하루종일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온통 푸를 때도 있는데, 뿌옇게 안개가 낄 때는 맑고 환할 때는 가느다란 겨울나무의 배경이 되어주고, 다시 한번 여름 녹음의 배경이 되어준다. 밤이면 도시에 잔광이 어린다. 새벽이면 그녀의 고독 속에 행복이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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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06 13:25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넌 엄마 없잖아.˝ 마누라가 저한테 구박하면서 만날 하는 얘깁니다.
맛난 거 아이들만 챙겨줘서 제가 심통나 있을 때 주로 씁니다. ㅠㅠ
이 책도 막 안타깝고 그런가요? 전 8월에 읽을 거라서 지금 들어도 그때 쯤엔 다 잊을 거 같아요. ㅋㅋㅋ

mini74 2021-06-06 13:29   좋아요 7 | URL
안타깝다가 마지막에 저는 좀 덤덤하니 정리되는 느낌. 저는 워낙 제맘대로 읽는 편이라 ㅠㅠ 한번씩 뒤에 책 해석 읽으면 그런가? 싶다가도 에라이 내가 아는만큼 느끼는거지 뭐 내 깜냥이니까 하고 맙니다. 재미있어요 ~~ 저는 마음 고쳐먹고 남편에게 잘 합니다. 주변 애들보니 연애시작하면 남이더군요. ㅎㅎㅎ

잠자냥 2021-06-06 19:47   좋아요 4 | URL
안타까움이라기보단 답답하고 뭔가 막 알려주고 싶은 심정!?!?

새파랑 2021-06-06 13:5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고구마 백개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재미있는 고구마 같은 ㅎㅎ 저 이거 읽어야 하는데 ~~
요새 미니님 1일 1리뷰 신거 같아요~~ 대단하세요^^

mini74 2021-06-06 14:02   좋아요 5 | URL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요.~~ 새파랑님 보며 배웠지요. 하지만 제가 원래 초반 반짝형이라 ㅎㅎㅎㅎ

미미 2021-06-06 14:0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자매품 ‘너 착하구나‘ㅋㅋㅋ아 재밌겠네요! 장바구니 넣었었는데 얼른 읽어보고 싶어요~주요 사건 키워드가 솔깃솔깃ㅋ대처수상은 뭐 그냥 남자였다고 최근에 어디선가 읽었어요. (아! 정희진님 책)당시 국회에서 남자중의 남자였다고. 작품읽고 미니님 리뷰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mini74 2021-06-06 14:18   좋아요 6 | URL
대처 다큐 보고 좀 놀랬어요. 정말 싫어하더라고요. 그 당시 대영제국의 영광 어쩌고 했던 포클랜드전쟁도 완전 뻘짓으로 그 이면을 보여주더군요. 슈퍼집 딸의 성공스토리라고 생각했는데 ㅠㅠ 다른 대안은 없었을까란 생각도 들고요. 빌리 엘리어트보고 대처 관련 책을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

페넬로페 2021-06-06 14: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공교롭게도 어제 딸아이가 다큐보면서 대처는 어떤 사람인지 저한테 물었는데 ㅎㅎ~~
답답하다는 말씀에 이 책 읽으며 많이 안타까울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기타등등~~저는 신간의 흐름에 도저히 동참 할 수 없는 능력으로 계속 뒤따라가며 읽겠습니다. 노래가 히트하고 그 가수가 활동을 접었을 때 제가 그 노래 따라부르는 느낌 ㅋㅋ
그렇게 리뷰 올릴께요^^

mini74 2021-06-06 15:08   좋아요 5 | URL
아이들과 학부모가 대처를 우유도둑으로 부르더라고요. 다른 건 다 참아도 아이들 급식에 돈앖다고 우유를 빼다니. 특히 가난한 지역 아이들에겐 급식이 거의 유일한 균형잡힌 식단인데도 말이지요. 인터뷰에 긍정적인 면이 없어서 놀랐어요. 그 시절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있었고 독단적인 선택도 아니었을텐데 좀 안타깝기도 하고요
좋은 노래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좋은 노래지요 *^^*

scott 2021-06-06 15: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 어머니의 부재 속에 아버지의 강압적 시선아래 자란 사랑을 꿈꾸는 펠리시아와, 어머니의 성적 학대로 상처받던 힐티치와 살인마로 변해버린 힐티치]

*순수한 사과는 에덴에서 뱀을 피하며, 자신과 닮은 이들을 만난다. 그들 대부분은 멍들었고, 여기 저기 베어 물린 자국 투성..
미니님의 기타 등등 사유에 이책의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모습이 딱 떠오르네요
영화 ‘펠리시아의 여행‘ 명작! ost도 훌륭한데 원작은 일부러 찾아 읽지 않았습니다.
원작 마저 읽으면 심장에 구멍이ʘ̥_ʘ

mini74 2021-06-06 15:47   좋아요 5 | URL
스콧님 영화 보셨군요 *^^* ost도 훌륭하다니 *^^* 저도 그럼 심장에 구멍 날까봐 영화은 잠시 보류 ㅎㅎ ~ 고맙습니다 *^^*

레삭매냐 2021-06-06 18:0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새벽에 이 책 완독했습니다.

그야말로 쪼는 맛이 있는 그런 작품
이었습니다.

잠자냥 2021-06-07 00:36   좋아요 1 | URL
쪼고 쪼죠? 쬬쬬쬬쬬쬬쬬! 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6-07 00: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장에 담았습니다.
미니님은 바보~라고 하려다 너무 까부는 거 같아서 참았습니다. (무슨 의미의 바보일까요?ㅎㅎ)

mini74 2021-06-07 07:48   좋아요 2 | URL
까부셔도 됩니다 ㅎㅎ 툐툐님 좋은 아침 보내세요. 월요일이지만 ㅠㅠ 아자아자*^^*

행복한책읽기 2021-06-07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에 이어 미니님 글 보니 이 책을 정말 읽어보게 싶게 하네요. 여는 글 정말 좋아요. ^^ 이 바보야!! 네 지는 바보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