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는다는 건>
문학작품은 그저 마음가는대로 느끼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동시대의 이야기나 조금은 익숙한 배경에선 가능하지만, 아주 예전 잘 알지 못하던 시대의 글들을 읽을 때는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작가의 삶과 배경, 시대의 흐름 등이 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고전문학이 그렇다. 혹시 내가 오독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잘못 이해하고 엉뚱한 소리나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물론 그런 오독과 그로 인한 감동이 다 쓸모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홍진호교수님이 네 편의 독일문학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즐길수 있도록 해석과 설명이 담긴 책이다.
그 첫 번째는 데미안.
중학교 시절, 헤세 책 들 중에서 한권을 골라 독후감을 쓰는 숙제가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데미안, 그렇지만 내가 독후감으로 써 낸 것은 수레바퀴 아래서 였다. 왜였을까. 어린 마음에 데미안을 아끼고 싶어서였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움직였던 글귀들과 내 감정들을 보여주기가 부끄럽기도 하고 숨기고 싶은 비밀일기장 같았다.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되고 더 이상 신에게서 모든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래서 방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세대의 사람들에게 데미안은 또 다른 답이었다. 답은 신이 아니라 내면, 바로 내가 가지고 있음을, 그런 내면의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데미안이다.
내가 누구인지 처음 자각하는 것이 보통 5세, 그래서 미운 5세라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 굉장히 잘난 줄 아는 사춘기, 대부분의 감정들은 어른만큼 자랐지만 통제와 절제만은 뒤늦게 크는 시기, 그래서 폭발하고 솔직하게 내뱉고 화내며 울분을 토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은 참아내며 굴욕하며 사는 어른들의 위선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데미안에 담겨 있다. 세상은 완전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모든 것이 공존하는 곳, 그 곳에서 무언가를 찾고 옳고 그름을 선택하는 건 신의 몫이 아닌 나의 몫. 그러니 방황하며 나를 찾아가는 길, 그 끝에 데미안이 있다. 작가님은 헤세의 삶과 그 시대배경을 통해, 전통적 가치관은 붕괴했으나 아직 다른 가치관을 찾기에는 혼돈인 시대, 이 시기를 시대의 사춘기라 칭한다.
예전 국어선생님이 헤세가 오히려 독일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인기라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설마했는데 실제 위대한 독일, 전쟁하는 독일을 반대했던 헤세는 독일의 아웃사이더로 스위스에서 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작가의 삶이 글에도 녹아 있는 걸까. 혹은 동양적 모습도 보인다. 끊임없이 사유하고 방화하고 구도하는 그래서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진짜 길을 찾는 이들의 모습.
<데미안을 읽는 동안 우리는 모두 이렇게, 비록 한순간일 뿐일지라도 우리 내면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가 유일무이한 소중한 존재이며, 동시에 세상의 중심임을 느낀다. 바로 그것이 데미안을 통해 헤세가 보여준, 진정으로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얼마나 오해를 했든 데미안이 우리에게 남겨준 감동과 위안은 언제나 옳다.> 71쪽
두 번째는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통>
베르테르는 일본식 발음, 슬픔은 미국판에 의해 오역, 실제로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 맞다고 하는데 영 입에 붙질 않는다.
로테(모 백화점 회장이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여자주인공 이름을 본 따서 백화점 이름을 지었다. 나 또한 좋아하는 여자주인공인데, 만약 로테가 살아 있다면 아주 치를 떨며 싫어하지 않았을까 한다. )
맹숭하고 맹꽁이같은 연애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 시대 배경에 대한 역사책을 읽고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공부나 일을 하지도 않는 귀족들이 차별을 하며 지배하는 세상, 계몽주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실질적 행정사무 등을 보는 신흥계급. 그러나 그런 신흥계급에겐 희망이 없어 보인다. 여전히 귀족들의 성은 견고한다. 그리고 새로운 여성상, 책을 읽고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는 지적인 여성의 대표인 로테. 결국 베르터의 죽음은 사랑과 의리를 지키는 순수함뿐만 아니라, 그 시절 그 계급의 한계에 의한 슬픔 또한 컸다고 한다. 그런 시대 배경을 알고 나면 아, 이들의 좌절이 참 컸겠다. 세상과의 괴리와 한계에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사랑마저 어찌할 수 없다. 괴테의 짝사랑과 실제로 자살한 친구의 이야기를 섞어 만든 이 책은, 글로 써냄으로서 괴테 또한 짝사랑의 고통에서 벗어났을 것이라 본다.
사랑이 전부인 때가 누구나 있었지. 그래서 젊은 베르터의 고통은 미래의 설렘이기도 하고 과거의 추억이기도 하고 현재의 슬픔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대를 담고 있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엔, 계몽주의의 도래와 시대와의 불화, 종교적 문제까지 그 시대 청춘들의 문제의식도 담겨 있다.
세 번째
자연을 배제한 유미주의는 결국 허상임을 말하는 우리에겐 조금 낯선 호프만스탈의 <672번째 밤의 동화> 다행히 짧아서 금방 읽었지만, 읽고 나니 뭔가? 하는 물음표가 잔뜩 생긴다. 이럴 때가 바로 이 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탐미주의적인 주인공, 그리고 그런 주인공의 유미주의적 삶을 위해 꼭 필요한 하녀들과 하인. 자연적인 삶에 가까운 하인들의 아름답지 못함을 참아내야 주인공의 유미적 삶이 완성된다. 이런 부조리 속에, 주인공은 가장 유미적이지 못한 장소에서 슬픈 눈의 군인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한다. 짧은 글 속에 복잡하고 한 두 번은 읽어봐야 할 듯한 문장들이 난무하다. 어렵다. 유미주의의 삶, 최상의 식물 같은 삶. 그렇지만 식물같은 고상한 삶엔 움직임이 최소화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유미적이지 못한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움직임없는 정지된 그의 유미적 삶을 지키는 데는 죽음만이 최선인 걸까.
네 번째는 카프가. 카프카의 변신과 시골의사다.
“카프카의 작품은 입구도 여러 개이고, 출구도 여러 개인 미로와 같다” 144쪽
해석도 다양하며 의견도 분분하다.
<변신>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더 이상 노동하지 못하고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인간들을 사회가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실존은 무엇인지, 인간 자체만으로 소중하지만 결국 인간마저 기능이 우선시되는 사회를 환상적이고도 멋진 시도로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시골의사>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솔직히 뭐지? 하는 생각이 가득했던 책이다. 작가는 <시골의사>를 프로이트와 연결시키고 있다.
<하녀가 내 곁에 서 있었다. “자기 집에 무슨 쓸 많나 물건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냈군요” 그리고 우리들은 웃었다.> 282쪽
“나는 자기 자신의 집의 주인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에세이 <정신분석학의 어려움>중에서 283쪽
그러면서 시골의사는 자아를 집은 정신을 그리고 마부와 말은 무의식 속 성적 욕망이며, 결국 인간의 벌거벗은 욕망에 끌려다니는 존재로 묘사한다고 말한다.
대머리여가수에 대머리 여가수가 안 나오듯이, 그저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인걸까 하며 머리를 쥐어뜯다가 에라 모르겠다 했던 소설을, 하나 하나 소년의 상처와 로자에 대한 해석까지 프로이트식으로 설명이 되어 있으니 뭔가 퍼즐이 맞는 듯하다.
고전을 읽거나 어렵고 해석이 어려운 글들엔 길잡이 책들이 아주 도움이 된다. 그러면 머리에 맴돌던 퍼즐조각들이 나름 맞춰진다고 할까. 하지만 그렇게 끼워 맞춘 퍼즐조각은 뭔가 심심하다. 오독이든 무엇이든 내가 배우고 느끼고 내 마음에 쌓은 그 때의 그 감정과 기분 또한 필요한 퍼즐 조각이 아닐까.
곧 있으면 책의 날이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책의 날에 어울리는 그림 하나와 글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