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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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나가고 이야기를 건네받을까요제가 기억하는 유년에 책이 별로 없었습니다터울 많은 동네형으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형이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책이 좀 생기기 시작했어요고사성어 책이었습니다저학년때의 일일겁니다다행스럽게도 만화로 짜여진 고사성어 읽기로, 재밌었습니다. 비유하기에도 좀 낡은 말이지만 정말 너덜너덜거릴 때까지 읽었습니다흑백의 만화는 고사성어 수백개의 뜻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형과 나는 터울이 많아 나눈 말은 거의 없습니다만 앞집과 옆집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점촌에서유일하게 서로의 앞집이 되주었던 이웃이었습니다그 책에서 처음 배운 성어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수주대토守株待兎>. 멍청하다 했지요. 왜 하필 농부일까. 그런 생각도 좀 했습니다. 토끼가 어느 그루터기에 찧어서 죽었다는 겁니다밭을 갈던 농부는 아무힘 들이지 않고 토끼를 잡았고그 뒤로 그루터기에 토끼가 머리 찧기를 기다립니다그렇게 일년 농사를 망칩니다. '이런 바보가 있나!'라며 읽었었지요.

 

그런데 그런 바보가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작년에 어느 주말입니다헌책방에서 탑돌이를 하듯 인문 코너에서 소설코너로 다시 자연과학에서 심리학으로 아동책으로 걸었습니다예술도 지나칠 수 없었지요거의 모든 코너를 돌았다고 해야합니다그러기를 수차례예술 코너에 와서 아주 작은 책을 발견합니다. <글렌 굴드피아노 솔로글렌 굴드요음악을 들어 본 적 없습니다다만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시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FM방송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장파로 뉴스를 들을 경우 쇤베르크의 작품 제 23번의 어려운 피아노 악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피아노 솔로.' 민구

 

그러나 무슨 소리입니까이해할 수 없었습니다이해할 수 없는 구절로부터 '글렌 굴드'를 기억하게 되었고마침내 서점에서 그 이름을 발견한 것이지요홀린듯 빼낸 책에서 다음을 읽게됩니다내가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언어들그의 건반에 눌리는 그림자까지 받아적으려는 듯글렌 굴드의 신경에 투명한 레이어로 달라붙은 글줄이었습니다.

 

굴드가 바흐를 좋아한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바흐는 건반악기를 초월하고어떤 악기로도 연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음악은 악기를 부정해야 하고신을 섬기는 자가 신에게 초연하듯 이 악기에 무관심해햐 하는 것이다피크를 마찰시키고,망치를 두드리고바람을 불어넣어 음관이 열리는 데서 음이 생겨난다고 해도 음악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 125

 

형체가 없는 허망한음악을 들으려는 언어가 자신 너머에 있는 무엇을 연주하는 음악가 앞에서 간절합니다나는 그 크기에 압도당했습니다얼마나 사랑입니까얼마나 마음해야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인지 말이지요가늠도 되지 않아서다음장을 내달려 읽습니다그는 굴드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가 함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꼼꼼하게 가리고 있었습니다. 종이로 바른 창 같았습니다.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처럼언어의 사용에 있어 자신의 뜻에 맞춰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굴드 자체를 그릴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겹에 겹을 대었다는 것을 머잖아 알게 됩니다.

 

글렌 굴드의 죽음의 소식을 듣던 날나는 뉴욕에 있었다아주 화창한 날씨였다상처를 주지 않는그가 좋아했었을 그런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나는 30번가 모퉁이를 찾았다녹음 스튜디오는 헐리고 없었다대신 큰 구덩이가 패어 있는 것을 보았다.신문에서 그가 폐수종으로 죽었다는 기사를 읽었다그가 마침내 추위로 접어드는 데 성공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177

 

그 길로 책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 꽤 오랫동안 수주대토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토끼를 잡은 농부의 마음이 되어 주말마다 나는 헌책방의 코너를 돌았습니다우연찮게내가 지나쳤던 어떤 한조각으로부터 만나게 될 책이 있기를그때 가져올 감동을 기다렸습니다우연하게 만나서 마음의 파고가 높아지기를의도했던 감동이 아니라 모르는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엇을 말입니다그러기를 몇 달 째수주대토라는 글자만 머리를 가득 채웠습니다농부가 땀을 흘리며 그루터기에 앉아있습니다. 그 손은 큰 귀를 움켜집었던 것으로 아직 그때의 온기와 무게를 기억고 있습니다. 마음 알 것 같습니다나는 너무 오래 돌아다녔지만 앞으로 이렇게 수십개월을 더 다닌다고 해도 이런 만남이 없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이런 책을 만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더 기억하는지조차 모르는 조각을 만나고 헤어져야 하나요. 수주대토를 처음 알았던 유년그 책을 물려 받은 저학년의 나에게서부터이해할 수 없는 시와 같은 파편에서 그의 이름을 의아하게 지나치고, 그것을 나 모르게 기억하고 있다가 이 책을 만나기까지. 십수년의 시간이 흘렀던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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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5-1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님, 봄,밤에 오셨네요. 기다렸어요.
수주대토의 나날...그것은 누군가가 아니라 언제나, 누구나가 아닐지...

봄밤 2015-05-11 23:47   좋아요 1 | URL
가운데, 아갈마님은 명민하게 기쁨 만드시기를.

AgalmA 2015-05-11 23:55   좋아요 0 | URL
봄밤님 평안도 늘이라곤 못해도 틈틈이 기원하고 있어요!

봄밤 2015-05-12 00:00   좋아요 1 | URL
아, 웃을수 밖에 없네요. 저는 그런 말이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발자국은 없어도 늘 보고 있습니다. 늘 보여주세요. : )

뷰리풀말미잘 2015-05-12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곱다. 고와.
 
세월호를 기록하다 - 침몰·구조·출항·선원,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 기록
오준호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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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물'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노란 리본'으로, 

얼마나 쉬운 이미지로 그날을 기억하고 있나. 혹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말하는 것만으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이미지와 말은 기억에 가벼운 포를 떠낸 것 뿐이다. 그 포에서는 잔인한 실상까지 떠지지 않는다. 무거우니까, 무거운 것을 견디며 말해야 하고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의 무게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가져가기 쉬운 지옥만을 진짜인 듯 간직하며 그 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사고 이후에는 죽은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한 번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지 못했습니다. (...)

처음으로 사우나에 가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학생들이 차가운 물에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해서

손발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 유가족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배 위치를 잘 알기 때문에

끝까지 그곳에 남아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면, 이 길로 나오라고 말만 하였다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 죽을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화물 기사 김동수]

(선원 재판 5, 증인 신문, 2014.7.23)

 



사람들은 차가운 물 속에 가라 앉았고, 삶 속으로, 뭍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나 나는 씻는 것이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씻는 것이 아프다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씻을 때 아이들이 생각난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손 발이 찢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다. 구체적인 고통을 읽는다. 실제로 직접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그 연원이 무엇일지 미루어 볼 수 있다는 것은.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사건이든 이야기는 점점 투박해지고 기억은 흐려진다. 이것 보아라. 배가 침몰했고, 구조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배라는 것, 증개축에서 30톤 정도 좌현이 무거워졌고 콘베이스가 없는 D데크, E데크에도 평소 컨테이너를 실었으며, 화물을 많이 싣기 위해 정상적인 고박을 하지 못하게 한 청해진 해운은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배에 탄 아이들. "저는 법을 잘 모르지만 그것은 (울먹이며) 정말 어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원고 신우혁 학생)의 목소리를 들었던가. 이러한 정황은 사정없이 시간이란 못을 내려친다. 기억에 붙들리고 박히고 만다


"더 구하지 못해서 죽을죄를 지었다"는 말을 다시 읽는다. 그 역시 침몰하는 배에 있었다. 먼저 탈출할 수 있었으나 배가 잠기기 직전까지 구조 활동을 하다가 탈출했다. 이어지는 다른 문단의 글을 보자. "문제없이 잘 되고, 규정을 잘 모르는 상황", "갑을 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관행", "책임은 상대방에게 있으며" 라는 말이 내내 이어지는 책 속이다.

 

<세월호를 기록하다>150여일 동안 이어진 재판을 기록을 묶었다. 이것으로 법정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나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받게 되었다. 물과 배에 대해서 알지 못하더라도 다음장에서 알 수 있도록 상세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빼곡히 적혀 있고- 그것은 어떤 '이름'이 말한 사실이며 그것끼리 아귀가 잘 맞는다. 그런 일들이 세월호를 움직였다. 죄가 무수히 쪼개져 원래의 모습을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조각났다. 지난 시간은 조각을 맞추는 것은 고사하고 버리는데 가득했던 시간들이었다. 7시간의 행방과 1주기 되는 4월 16일- 그 먼나라로 떠나는 이유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읽고 이미지를 더 또렷이 가져갈 것, 구호를 더 말하기 어렵게 가져갈 것. 해서 떠올리는 것과 발화하는 것에서 아픔을 느끼게 될 것. 노란 리본은 '노란색'이 수식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수심이 차오르는 중 고통스러운 사람을 떠올리는 표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구호는 자본과 관행에 위협 받는 나의 판단, 나의 일에서 밀려나지 않고 ''가 있겠다는 다짐으로 읽고 싶다.

 

"책임을 져야 할 결과에 기여한 이들이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하여 정치적 책임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에서 일말의 책임도 없이 배상과 보상으로 마무리하려는 이들의 분투만 떠올려서는 안된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정치적 책임은 국회에만 있지 않다. 광화문을 가득 채우는 이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그것을 규명해야 하는 책임을 스스로 부여 받은 사람들이다. 선택 받은 것 아니며, 이러한 책임은 누군가가 내려 주는 것도 아니다. 나라가 시민을 구하지 않은 사건에서 -'시민'인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적인 책임'을 지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아이리스 영.

본문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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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좌판이, 검은 색 그늘막이 상시 걸리는 시장이 있다. 


부대끼는 것 아니고 폭신한 조끼와 얄팍한 등산 점퍼의 아주머니들을 살갑게 지나는 거다. 어느새 한적한 대로다. 큰 길에 나오면 건너편으로 끝 모르고 이어진 담장이 잘 보인다. 그 담장은 사적을 정비하며  세운 것으로. 예전 아이들이 '사방팔방'을 하기 위해 땅바닥에 선을 그리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여 기-우리가 약속한 세계를 보존하기 위한 금. 땅바닥에 공들여 선을 긋는 일과. 수천년 자신을 지켜온 저 사적에 담장을 두르는 일은  무엇이 다른가.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 아이들의 놀이라고 해도 금이 그어진 이상 누구도 어길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공들여 길게 자리한 담장을 보면 금이 흐릿해질 때마다 힘주어 눌러 그은 돌맹이의 감촉 같은게 가끔 떠올랐다.


대대로 이곳에 살아 지낸 이들에게 그런건 번잡하고 거충장스러운 치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외지에서 오는 이들에게는 벌써부터 고조, 긴장을 불러모으는 표시였다. 나는 아주 멀리에서부터 그런 담장을 기다려왔고. 그 주변을 오래 걸어 만나게 되는 석탑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석탑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생각치 않는 이곳, 주민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곳에 가면 오층으로 단정한 어깨가 있다. 석탑은 한층 한층 하늘에 닿는 높이가 달라 보여주는 풍경 또한 달랐으며. 나는 눈으로 처마 선을 따라 그리는 것을 인사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조금 비스듬한 고개가 되었고, 점잖고 단정한 이가 작은 탈선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석탑은 점심을 풍기며, 그것이 닭곰탕이나 청국장이라도 가리지 않고 만나주었고 굳이 그를 보러 가지 않아도 얼굴을 보여주었다. 움직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때 나는 석탑을 너무 자주 보지 말자 라는 이상한 마음을 먹었었는데. 그곳에 사는 이들 아무도 석탑을 부러,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미뤄두고 싶다. '그 앞에서 자연스러운 눈을 하고 싶다' 시간이 지나 석탑과 나 사이를 그럴듯 하게 터 놓을 수 있었다. 나를 그 옆에 바로 세워두지 않아도 '언제나' 눈가로 석탑의 처마가 떠오를 때. 그 선을 따라 도착한 저녁이 궁금할 때, 나는 최선을 다해 달려갈 수 있었으며, 언제라도 그곳에 석탑이 있다는 사실이 약속 같은 것으로 믿어질 무렵의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일하는 중에도 웃음이 잘 났으며, 


수천년 굳은 어깨를 아무도 없는 밤중에 으쓱거릴거라는 생각을 낳기도 했다. 그길은 조 금 걸을까요. 라는 말을 하기 좋았고 그건 누구의 물음 없이도- 스스로에게 건네도 좋았다. 석탑이라는 말에 고즈넉한 곳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낮의 정림사지는 실은 재재했다. 바로 옆에 부여 중학교가 있기 때문인데 '부여 중학교', 부여를 떼고 보면 그냥 '중학교'로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교실에 다금다금한 아이들의 소리가 석탑 가까이 있었다. 담장 밖에는 바스라져 뜻을 알 수 없는 음만 들렸는데. 석탑의 가까이 가면 복도의 발소리, 계단을 뛰내리는 소리, 아이들의 목소리가 잘 들릴 것이었다. 부여에 있은지 오래 되어 나는 사적지에 들어가 관광객처럼 석탑 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 밖 담장에 기대 한 점심 앉아 있다 오는 일이 석탑을 보는 거였다. 그 밑에서 나는 이달의 우표를 삼월, 사월, 오월을 한꺼번에 꺼내보았고. 편지의 대부분은 부치지 않았으며, 봉한 편지들 중 대부분도 서랍에 두는 것으로 계절을 보냈다.

 

석탑의 키와 나의 키를 더한 이만큼을 남겨두는게 좋았다. 등을 맞댄 거라고 생각했다. 편지가 잘 보였을 것이다.




+

제주도의 '돼지'처럼 아고리는 엄청 힘을 내고 있어요. 참기 힘든 괴로움 가운데서도 믿을 수 없을만큼 강령하게 욕구가 일어나 작품을 마구 그려내고 자신감이 넘쳐....넘쳐....터질 것만 같은 이 아고리, 성실하고 훌륭한 남덕 씨를, 나의 유일한 현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 같은 거라오. 

1954. 1. 7

<이중섭 편지>



+

편지는 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는 글로, 서로를 제외하고서는 읽을 수 없어서 서로에게 활짝 열린다. '그런 편지'가 출간되는 건 쓴 사람과 읽은 사람이 지나온 거리를 다른 이들이 서성이게 두는 것에 다름아니다. '우리'라고 하자. 편지에 적힌 '서로'를 제외하고 남은 '우리'들은 편지의 바깥에서 그것을 읽는다. 편지에는 사이가 있고, 사이에는 서로의 키를 더한만큼의 거리가 있고, 그 거리에는 이렇게 서로를 포개놓으려 움직였던 안타까운 시간이 있다. 우리가 자주 잊는 것은, 사랑으로 가득찬 편지일수록 그 밖에는 그렇게 쓰고도 전하지 못한 '자신'이 편지 바깥에 남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편지를 읽는 '우리'의 자세는 편지 속의 아름다운 '서로'가 되려는 걸 가까스로 달아나, "참기 힘든 괴로움 가운데" 남아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 아닐까.



편지와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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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4-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천년 굳은 어깨를 아무도 없는 밤중에 으쓱거릴 석탑˝ 이런 표현은 신춘문예 당선작 같은 데서 보는 멋진 표현인데!
아름답고 끝없이 적혀서 보내지는, 편지와 편지와 편지...였어요.

봄밤 2015-04-01 15:14   좋아요 0 | URL
...부분을 계속 읽습니다.
아갈마님. 정말 봄이네요. : ) 아갈마님 서재에 마음 호강합니다. 자주 들려요. 계속 써주시기를요!

AgalmA 2015-04-0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내가 이곳에서 뭐하고 있나, 한심하게 느껴지는데, 꼭 그럴 때마다 봄밤님 같은 벗들의 마음의 편지가 당도해서 또 주저주저 하며... 저도 봄밤님의 기필코 시로 가려는 글 읽는 게 정말 좋습니다! 늘 기운 잃지 마시길 멀리서 기원합니다.

봄밤 2015-04-02 22:07   좋아요 1 | URL
몇 번을 썼다가 지웠는데요, 그 사이 그냥 있기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마도 아갈마님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이야기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해주고 계시지요. 읽을 수 있는 글은 많지만 읽어야 할 글은 찾기 어려운 가운데,
고맙습니다. : )
 

 

인테리어

 

 

강성은

 

 

 

아름다운 북유럽 가구들처럼

겨울에 더 빛나는 흰 자작나무처럼

 

낡은 아파트에서 담요를 두른 맨발의

가난한 음악가처럼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보는

겨울밤 복도에는 발 없는 유령들이 걸어 다니고

 

차갑게 식은 욕조 속에서 나는

타일 위에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그렸다

 

빛이 통과하는 물속처럼

겨울 공원 벤치처럼

 

어디에도 없는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지도위로 매일 눈은 내리고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지성사, 2013.

 

 



"예를 들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때.

속옷을 다른것으로 갈아입을 때 그 즉시는 촉각을 느끼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옷이 피부에 닿고 있다는 느낌이 없어지는 경험이 있다."

 

이것은 '역치''감각의 순응'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이 설명이 끝난 후 다시 역치와, 감각의 순응을 말하고 싶고, 마지막으로 다시 역치에 대해 말하고 싶다.

 

"지도위로 매일 눈이 내리고" 로 끝나는 마지막이다. 하지만 "눈이 내리고"는 그 다음 문장을 부른다. 그 다음에 올 나의 자세, 그 다음의 날씨, 그 다음의 장소 같은 것을 말이다. 그 다음에 올 어떤 것은 "눈이 내린다"를 어쩌지 못하지만, 눈이 내린다 역시 그 다음에 올 어떤 말을 건드릴 수 없다. 그러니까 "내리고"라는 말만으로도 시인이 부르지 못한 말은 대등하게 서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날씨에 맞서있는 모습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도 옷은 여전히 옷으로, 나의 살은 여전히 나의 것으로 있다. 옷은 살이 될 수 없으므로, 나의 감각은 순응하지 않고 외부를 느껴야만 한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느낌에서 온다. 살아 있음으로 외부를 느낄 수 있는 힘을 저항의 가장 작은 형태라고 말하고 싶다.

 

그곳에는 "겨울밤 복도에는 발 없는 유령들이 걸어"다니며 "차갑게 식은 욕조 속에서 나는"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그린다. 나는 "차갑게 식은 욕조 속에"있지만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타일에 그릴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곁에서 산다. 변하지 않은 채로, 정확하게 기억의 피부에 덮인 채로."


라 고 적었던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을 읽는다. 이 책은 "단지 조금"이지만 내가 있는 이곳이 끊임없이 "이상"하다고 여기는 '역치가 있어야 함을 알린다. 감각의 순응을 넘어서는 역치가 늘 필요한 이유는 나는 단지 나라는 이름의 개인인 것만 아니라 아니라. 인류라는 거대한 기억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역치로, 아픈 것으로, 살아 있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제목 인테리어는


내가 조금 더 잘-살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가꾸는 행위로 읽을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내일을 그리며 잠에 드는 희망 또한 인테리어 아니었을까. 발 없는 유령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는 빼앗기고 부서졌다. 그들이 있던 날은 활자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나아서도 그 곁에서 산다는 독백, 정확하게 기억의 피부에 덮인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독백에 나는. 그들이 머물러야 할 기억의 장소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있고 싶은  장소는 "어디에도 없는/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나같은 아무개의 머릿속, 인류라는 거대한 기억의 일부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가진 희망을 나와 다른 누군가가 함께 해줄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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