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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강훈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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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 없이 울리는 더블린의 음악회 - 어떤 어머니



데블린 양은 홧김에 커니 부인이 되었다. p181



 홧김에 이름을 바꾼 여자를 적어도 셋은 알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금새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대게 '적령기'에 지면서 결혼을 했다. 그녀들은 결혼하기 전 남자의 외모와 재력이 그리는 낭만을 셈하고, 그것에 가려진 성품은 흘리고 인생의 뷰를 그렸다. 커니 부인이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현명하게도 욕망이 가진 허물을 비교적 일찍 알았다. '결혼 생활 1년 후 커니 부인은 그런 남자가 오랫동안 함께 살기에는 낭만적인 남자보다 낫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p182 

여기서 '그런 남자'에 대한 부연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자면 너무 슬플테니까. 그녀는 자신이 가졌던 욕망을 건실한 그와 결혼하면서 꺼뜨렸다고 생각했지, 딸의 앞날과 바꿔 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읽어보면 너무나 흔한 이야기여서 비극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들어가기 전에 제목이 가린 제목을 읽어보자. 커니 부인이 대변하듯 어머니는 '그러한 욕망'을 가졌던 '여자'이다. 그리고 '어떤'이라는 말이 갖는 시치미, 그러나 모두 뒤꽁지에 달고 다니는 것을 시치미라 할 수 있을까? '어떤'은 '아는'으로 바꿀 수 있겠다. 제목으로 읽은 제목 '아는 여자'. '어떤 어머니'가 두루뭉술 말하는 진면목은 실은 우리가 익히 '아는 여자'일 것이다. 


4회로 이뤄진 음악회를 꾸리면서 벌어지는 곤경은 뻤대는 어머니가 딸을 앞세워 앞길을 망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젊은 여자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 '그놈의 으원회'와 일을 원만하게 처리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 흘러핸 씨가 함께 빗는 헤프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문예 부흥 운동이 유행했던 20세기 초 아일랜드,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 스럽고 험난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있다. 여성차별의 문제를 앞세워 자신의 정당함을 화난 얼굴로 대변하는 커니 부인의 표정, 그러나 혼동하면 안된다. 주인공은 누구보다 '돈'이라는 욕망이었다는 것을. 그의 지위 아래 연주된 음악회에 들어가 보자.

 

 문예를 부흥 시키자는 음악회를 위해 자신의 딸을 이용했으나 실은 자신의 돈을 부흥시키려는 커니 부인의 속내와 어리숙한 딸을 앞세워 빚어내는 촌극. 단순히 돈, 돈하는 커니 부인을 흘겨보기 전에 흘러핸 씨는 노여워 하지 말고 음악회의 취지를 적극적으로 이해시켜야 했으나 그는 절룩였다. '협회' 사람이었으나 문서를 흘리고 일정에 끌려다녔다. 앞장서 음악회의 일정을 꾸린 이가 다름 아닌 커니 부인이었으니, 어떤 이해를 누구에게 시키는 것을 바랄까만은. 음악회는 주중에 사람 드문해 실패하게 되고, 협회는 금요일 공연을 하지 않고서 토요일에 성대하게 꾸리고자 한다. 그러나 커니 부인은 그것이 성대하든지 말든지 금요일 공연을 하지 않더라도 처음에 4회로 계약한 딸의 반주 비용을 모두줄 것을 요구한다.

 

무대 뒤에 음악인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음악회가 무엇인지, 그런 곳에 돈은 왜 내야 하는 것인지, 무료 입장권을 겨우 겨우 구해 모여들었던 더블린 사람들이 있다. 초만원은 아니더라도 떠들썩 하게 모인 대규모 음악회. 반주자인 딸이 커니 부인과 반反하는 어떤 자긍과 문예인으로서의 소양을 갖고 있으리라는 기대는 과분하다. 커니 부인에게 나머지 돈은 들어 오지 않았고, 그녀는 딸의 외투를 집어 들어 나가고 만다. 딸 역시 외투처럼 나간다. 


소설은 노래가 울리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그래서 20세기 초 더블린의 음산한 안개를 뚫고 울리거나, 울리지 않았어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남는다. 반주 없는 노래는 당시 힘겨웠던 문예 부흥 운동의 현주소인 것이다. 한번도 듣지 못한 이 노래, 오늘날에도 귓가가 익숙하게 울리고 있다는 사실에 당신은 놀랄 것인가? 욕망에 밀려서 절룩이는 가치들의 들리지 않는 협연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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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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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감. 이 명백함을 지울 수가 없다

 

 

빛을 다 흡수해 버린 듯 검은 사람이 보도블록을 걸어간다. 활달한 걸음과 한 손에 들린 책. 상반신은 보이지 않고 대신 뒤편으로 그림자가 완전하게 서있다. 그림자의 건장한 체격으로 말미암아 걷는 사람을 ‘그'라고 불러본다. 그는 왼편으로, 왼편 상단으로 곧 사라질 참이다. 이 프레임에서 너덧 발자국만 더 걷는다면 보이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림자. 한가운데서 사선으로 시선을 가르는 그것은 발뒤꿈치에 붙어 물끄러미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보도블록 위에는 그림자만 길게 남겨질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낮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가 걸어 나가고 그를 바라보는 그림자만 남는다. 당신과 나의 어제를 그만두어도 오래 남는 저릿함처럼. 불멸은 불노가 아니라 끈질긴 기억인 것처럼. 그러나 그림자와 기억은 실체는 아니다. 그들은 왜곡을 일삼아 부풀리는 것은 일도 아니며 조롱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표지의 인물처럼. '그'보다 훨씬 키가 큰 그림자를 보라. 이미 그가 아니다. 그런데 그림자가 자신을 만들어낸 사람을 바라본다. 김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기억’을 주인으로 놓는데 이르렀다. 그렇다면 나와 그림자는 같은가? 나는 기억과 같은 질량을 갖는가? 기억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가끔, 낯선 곳에서 섬뜩한 느낌에 뒤를 돌때 아무도 없었던 것은 그림자가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기선제압이다. 가까스로 기억의 주인이 되어 말해본다.

 

이 뒤돌아 섬을 반성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여간해서 하지 않는 것. 제대로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 나 대신 기억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기억에 머리 수그리고 있을까. 나에게서 파생된 온전치 못한 것으로부터 잠식되어가는 나'를 바라볼 때 참혹함. 어떤 단어가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뒤돌아서다 못해 뒤돌아서 걷는 사람. 그는 돌아버린 사람이다. 김병수는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 그렇다면 읽는 나 또한 불확실한 시간을 쳐내고 남는 말도 의심하기로 한다.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1년의 시차는 대수롭지 않다. 이보다 더 휘청일 시간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다. ‘하여튼’ 오래전에 살인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니다. 이것도 쳐내기로 한다.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말만 가져간다. 구름이 뜨면 반쯤 먹힌 그림자가 남기도 한다. 실체가 확실하더라도 그 뒤편의 그림자까지 확신할 순 없다. 아직 첫 페이지를 넘겼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아빠의 딸이에요?

은희는 스물여덟이다. 김병수의 기억에 자신은 칠십 줄에 들어섰고, 기억이 망가지고 있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김병수는 25년 전, 26년 전 살인을 그만두었다. 은희가 두 살 이나 세 살 무렵의 일이다. 그래서 은희는 은희 어렸을 적부터의 기억이 나온다. 자신의 가정家庭에 대한 ‘가정假定’. 혈액형에 대해 물어볼 경우 이렇게 말해줘야지, 부모를 찾을 때는 입양했다고 해야지, 나는 동물을 치료하는 사람이니 은희는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는 가정과 바람이 만들어낸 김병수의 조촐한 가정. 그러므로 은희의 실재는 믿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가 어떻게 아빠의 딸이에요? 입양했다고 대답한 다음 장면에서 김병수는 두부를 굽는다. 매일 두부를 구워 먹는다. 조촐한 반성. 대숲에서 울리는 소리는 말이 없다. 불현듯 오금이 차다.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감정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유머에는 반응한다는 김병수의 기억답게 위트를 부려놓았다. 이것은 흡사 기시감이다. 기시감은 있었던 것 같았던 일을 마주하게 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김병수는 기시감이 아니라 기시감처럼 느끼고 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이야. 어쩐지 그의 상황이 익숙해 그는 사냥을 하고 있어.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박주태와 첫 대면 후 이어지는 부분이다. 박주태는 30대 초반의 남자, 지프를 사냥용으로 개조한, 뱀의 눈을 한 사내. 나는 확신한다. 그때 우리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짚고 가자. 나의 기억이 나를 알아보고 나 또한 기억이 나를 보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김병수의 독백에서 알아보았다는 층위는 얕다. ‘살인을 아는 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젊었을 때 나를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위트로 작동하는 것이다. 김병수의 기억은 ‘혹시’ 하고 있다. 분리된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은희와 박주태는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아이러니. 이 참상. 은희는 아이인 동시에 은희 엄마의 아우라를 지닌다. 은희가 컸더라면 닮았을 나이의 여자와 젊었을 적 자신이 마음 내었던 은희의 엄마를 덧씌운다. 게다가 자신의 젊었을 적 모습을 불러내 그들을 만나게 하고 질투한다. 일흔 살의 김병수는 자신이 실제로 죽이고 기억으로 살려냈던 은희와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 젊은 날의 나를 불러와 기억으로 죽이기 위해서 상체를 단련한다. 그러므로 말된다. 자신의 인생에 있을 마지막 살인을 준비한다는 의미심장함. 그러나 이 목표,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김병수는 알지 못한다.

 

자신을 연료로 태워 살아가는 사람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무라카미 하루키, 『어둠의 저편』

 

이곳에서 하루키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위트니 실소를 바란다. 언젠가 하루키는 기억에 대해 인상 깊은 말을 써 놓았다. 기억은 연료라는 말. 그래서 기억의 질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그것은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는 응원의 말이었다. 괴로운 일, 안 좋았던 옛날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마저 없는 이들은 어떻해야 할까 묻는다. 기억 자체가 사라져 태울 연료가 없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물어본다. 기억의 끝은 내가 '있다'는 감각이다. 하루키식을 따를 때 기억의 끝에 다다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나를 지각한다는 마지막 기억을 태우는 것이다. 자신을 연료로 만들어 나를 소진해 내일로 가려는 사람은 현실을 완전하게 부술 수밖에 없다. 김영하는 그 어떤 기억이라도 남지 않았을 때, 필연적으로 비틀거릴 수밖에 없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지는 사람에 대해 썼다. 그것을 살아가는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혹시 죽어가는 모습은 아닐까, 조용히 묻는 질문에 한마디를 더 얹는다. 살아가며 죽어가고 있다. 분해되지 않는 가치. 당신의 입술엔 어떤 표정이 걸릴까.

 

그가 사라지고 남은 보도블럭 위에 저 긴 그림자도 사라진다. 그것이 해가 어두워져서인지 그가 사라져서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라진다는 것만은 자명하다. 그림자가 사라진 거리는 그 위에 무엇이 있었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찰 것이다. 그러나 이 빈 풍경을 읽어야 한다며 소설을 써낸 사람이 있다. 먼지조차 그려지지 않는 거리라고 해서 기억의-자세한-혼동을 없었던 일이라고 할 것인가. 김병수는 박주태와 은희를 만났다. 우리는 김병수의 걸음을, 정처 없었으나 걸었던 것을 기억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실은 기억의 살인법을 말하는 것이었고 이 완벽한 살인에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이다. 어떤 침묵이 어울릴까 저마다 입매를 매만지는 저녁. 기억의 살인자- 되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차근히 되어가고 있다는 기. 시. 감. 에 피 도는 손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이 놀라운 명백함, 지울 수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둠의 저편』을 제외한 모든 이탤릭체 본문 인용. 




+사진 출처 : 알라딘

작성 : 2013/09/09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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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해가 바뀌는 날의 미덕이라면 매일 뜨는 해에 다시금 1번이라 동그라미 치고 손을 마주 모으는 일일 텐데, 나는 머리를 드밀며 태어나는 해를 눈 빨갛게 보고 싶지 않아 오래 자버렸다. 뒤뚱거리며 일어나 근처 산으로 향했다. 치마 레깅스가 짧아서 아래가 휑했지만 무작정 나온 걸음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나가는 시선이 아래춤에 꽂히기 전에 큰 보폭으로 버스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작년에도 올랐던 곳으로 일년이 지나 다시 찾게 되었다. 익숙하면서 낯선 곳이었다. 알듯 모를듯한 길을 걸으며 작년을 떠올렸다. 작년 1월 1일에는 눈이 왔었다. 눈을 맞으면서 산을 올랐는데 다른 것은 잘 기억나지 않고 그저 눈보라가 치면서 들렸던 굉음이 생각났다. 산이 떨면서 내는 소리였다. 산이란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 산을 멀리 손그늘 아래만 두었던 날들이 많았다. 내가 본 것은 산이라고 할 수 없겠구나. 


그때와 달리 오늘은 혼자다. 뒤를 돌아볼 일도, 앞을 쫒아갈 일도 없이 내 다리의 변덕에 맞춰서 올라가면 되었다. 원래 없던 것들이 없던 위치로 돌아가는 것 뿐인데 왜 혼자였을 때보다 더 마음이 휑했던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물을 가져오지 않은 것에 후회가 시작되었다. 입속이 낙엽처럼 위 아래가 말라갔다. 


산 속에 들어가면 나무와 나무사이를 지나야 한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나무 사이를 통과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무가 길을 내준 곳에 발을 디뎌 올라가는 것이다. 눈 앞에 가까운 나무는 돌처럼 단단히 서 있었다. 그것을 '나무다' 말하기보다 시간과 공간에서 우뚝하다고 해야한다. 나무 껍질 위에 올라간 껍질을 만져보고, 껍질과 껍질이 갈라져 골을 이루는 곳의 깊이를 가늠해 보았다. 깊어진다는 것은 아마 저것을 말하는 것이겠지. 가지와 가지 사이에 걸리는 건너편 산봉우리를 매만지며 쉬었다. 중간 중간 끊기는 산등성이를 눈썹으로 이으며 올랐다. 처음 이십분은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것을 지나니 숨 쉴만 해졌다. 


내려오는 길에 어제의 눈, 작년의 눈, 작년 겨울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눈을 만날 때마다 무엇을 쓰고 싶은 생각에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낙엽위에 구름처럼 내려앉은 눈은 시간을 가늠하지 않고 그늘과 햇빛의 적절한 보살핌으로 제 몸을 희게 할 수 있었다. 넓직하게 펼쳐진 눈을 만나자, 나는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 짚었을 큰 나무막대기를 주워서 등산코스를 넘어 갔다. 굵은 동앗줄을 넘어가 산의 몸판에 앉아 글자를 썼다. 당신의 이름과 내 이름. 나는 그 이름이 같이 누워 있는 것이 보기 좋아서 곁을 한참 있었다. 산 속으로 하늘은 잘 들어오지 않아서 나는 목 아프게 산 틈으로 들어오는 하늘을 오래 바라보았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내려오는 발자국에도 봄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감, 저 눈이 곧 녹으면, 눈 위를 지나간 나무막대기의 폭에 따라 허물어져 내릴 이름이, 이름이, 걱정되었다. 나는 다시 올라갔다. 다시 등산코스 밖으로 다시 넘어가 손으로 눈 위에 쓴 이름을 흐트려 놓았다. 희게 해 놓았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무엇이 있었다고 읽기는 어려운 것이 되었다. 나는 내 손으로 쓴 것을 내 손으로 덮고서 내려올 수 있었다. 구름은 무엇에 매인듯 그 자리였다.


한참을 내려오자 폭이 좁은 계곡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내려오자, 호수 같은 것이 있었다. 호수 위에는 돌이 떠 있었는데 이곳은 산의 아래라도 산 그늘에 해가 잘 들지 않아 얼어있었던 까닭이다. 물은 돌을 받치고 있었고, 돌들은 새떼의 머리처럼 호수위에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돌과 조금씩 움직이는 돌의 그림자. 더 내려오니 콸콸콸 흐르는 물소리, 얼음 속까지 울리고 있었다.


산의 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산속에서 유난히 따뜻한 자락을 이은 길이다. 그래서 그 위를 지나는 눈이 제일 먼저 녹는다. 눈은 물이 되어 봄과 함께 이른 계곡을 이룬다. 듬성듬성 남은 어제의 눈도 언젠가 덥혀진 산몸뚱이를 견디지 못하고 맑은 것으로 내릴 것이다. 나는 당신과 나의 이름이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그것은 이름일 뿐이야 하면서도 자국을 덮으면서 걱정했었다. 그러나 눈은 자신과 함게 천천히 당신과 내 이름을 아래로 데리고 간다. 조금 더 높은 지대에 쓰여진 내 이름이 당신의 이름 위에 포개지기도 하면서, 어느새 당신과 내가 무엇을 뜻했는지 이름도 잊어버리면서 내려올 것이다. 한참을 내려오면 커다란 호수를 만나게 되는데, 밤이 깊으면 겨울내 호수 위에 있던 돌들이 바닥으로 서서히 낙하한다. 낙하하는 돌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천천히 호수에 내려갈 것이다. 물가 언저리에서 가운데로, 가운데에서 바닥으로 몸을 서서히 뒤집으면서. 아이가 돌을 던져서 호수가 삼키는 계절에는 우리 이름이 그 안에서 천천히 유영할 것이다. 어느날은 내리는 물 따라 산 아래로 더 내려가다가, 그늘이 깊은 낙옆 위에서 잠을 잘 지도 모르겠다. 구름이 우리 몸을 잠시 지우다가 지나갔다. 이름을 잊어버린 당신과 내가 산 속에 있다. 다음엔 우리 이름을 부르러 올라요. 당신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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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8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거해부도감 - 집짓기의 철학을 담고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주는 따뜻한 건축책 해부도감 시리즈
마스다 스스무 지음, 김준균 옮김 / 더숲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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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게 솟아난

집을 짓는다고 하면 먼저 숨을 크게 마십니다. 집은 크고, 비싸고, 이렇게나 많지만 정작 내 집은 없고. 그렇다면 마음으로 집을 짓는다라고 해볼까요? 무슨 동화 같은 생각이니, 하는 타박이 올 것 같아 역시 편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마음으로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만큼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돈입니다. 치솟는 월세, 전세 대란, 은행 대출, 부동산 등등. 자신이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온힘을 다해 돈을 모으는 소수의 어른과 나이가 어린 아이들 말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그림으로라도 집을 짓지만, 다 큰 성인은 대부분 그림도 그리지 않지요. 모양과 크기가 어떻든 대부분 집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집은 현실에서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게 솟아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으로 부르기가 어려워서 오히려 나를 집의 것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파트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나의 집은 동과 호수로 표시되는 숫자만 내 것 같습니다. 아파트를 올린 거대한 회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아파트 단면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더욱 들지요. 거대하다 못해 으리으리한 입구를 볼 때도 그렇구요. 내가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해도, 거대한 단지를 바라보면 내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 궁금해집니다. 내 집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집 앞에 감나무와 밤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으면 했거든요.

 

집은 말하자면 도시락 통 같은 거지

마스다 스스무가 지은 주거해부도감은 마음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줍니다. 집을 짓는 일이란 너무도 크고 어려운 일이라 꿈조차 꾸게 되지 않았던 제게 이 책은 소곤소곤 말합니다. ‘집은 별거 아니야. 이렇게 너의 성격과, 너의 움직임을 공간으로 옮기는 것뿐이야하며 말을 건넵니다. ‘말하자면 집은 도시락 통 같은 거지.’ 하며 책 첫 장에 도시락 통을 줄줄이 그려놓습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 중학생 때 썼던 바닥이 따뜻한 2단짜리 도시락 통이 생각났어요. 짱짱한 밴드를 채워 흔들림이 없었던 노란색 도시락 통, 주거를 해부한 그림책을 보고 떠올랐던 것이지요.

 

손에 넣을 수 있는 도시락은 오직 하나입니다. 다양한 종류가 있으면 아무래도 이것저것에 눈길이 가게 되지만, 도시락도 주택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만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택 설계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택의 완성을 목표로 합니다. 최고의 하나를 얻기(GET)위해서 그 외의 모든 것을 잘라내는(CUT)결단도 필요합니다. 19

 

그는 주택 설계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택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고 씁니다. 도시락통의 생김새가 다양하고, 그 안에 넣을 음식도 다양하니 나에게 알맞고 내가 원하는 것으로 골라야 한다면서요. 생각해보세요, 모든 걸 먹고 싶다고 중학생아이가 아침마다 5단짜리 찬합에 점심을 싸갈 수는 없잖아요! 이것은 맛과 영양에도 좋지 않지요. 제게는 2단짜리 도시락 통, 모서리가 둥글어서 밥의 가장자리가 둥글러 지던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이상한 가치로부터 집을 자유롭게, 나를 자유롭게

도시락 통을 고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주택해부도감은 포치와 현관부터 시작해서 집안을 세세하게 들여다봅니다. 현관을 설명하는 장에는 신발을 벗는 선이 곧 마음을 놓는 선이라고 하며 당신이 생각하는 현관은 어때요? 하며 물어옵니다. 현관은 신발을 벗는 것이지 마음을 놓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균일하고 규격화된 현관이 아니라, 나의 습관과 몸에 맞는 현관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누군가 집을 물으면 집이 있는 지역과 평수를 말하는 것으로 대답합니다. 그것이 집의 이력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텐데 언제부턴가 그런 대답이 집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으로 되었어요. 똑같은 평수의 집에서 똑같은 동선과 똑같은 삶의 방식을 강요받았다는 것은 모르고서요. 이 책은 그러한 이상한 가치로부터 집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내가 생각하는 삶과 내가 좋아하는 곳을 떠올리게 하지요. 물을 이용하는 곳으로 카드게임을 하자며 옵니다. 세탁실을 조커로 끼고서 말이에요. 이것을 어떻게 연결해야 좋을지 궁리하자는 말에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수납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물건은 살아 있고, 또 야행성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탄성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의 성격을 잘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현명하게 수납을 할 수 있는 거지요. 물건은 쓰는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지니까요. 결국은 나를 잘 아는 일이 정리를 잘 할 수도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다는 거대한 일이 이렇게 소소하고 즐거운 게임으로 치환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전문가의 시선도 놓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설계의 노하우도 함께 싣고 있기 때문이지요. 차양이 나온 정도에 따라 해가 남중할 때 태양 고도를 그림으로 싣고 있는 장이 있습니다. 차양의 크기가 300mm일 경우, 바로 밑에 위치한 창문을 커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요, 30cm밖에 되지 않는 차양이 밑에 있는 창문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그림으로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창문을 열지 않아도 실내에서 기류의 순환이 일어나는 동선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데요, 어떤 긴 설명보다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목적이라는 목적도 있다

주택 안에 있는 동안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시간보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훨씬 길다며 저자는 입을 뗍니다. 주택에 반드시 목적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 무목적성만 있으면 된다고 편하게 말하지요. ‘인정합시다.’ 우리 집에서 뭐 하려고 하진 않잖아요. 라며 집을 잘 이해해보자고 말이에요. 집은 우리가 쉬는 곳이지 무엇을 하는 곳은 아니니까요.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을 까를 생각하면 되니까요. 우리, 집에서조차 무엇을 위해 준비하고, 경쟁한다면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어요?

나는 도시락에 어떤 메뉴를 넣어야 좋을지 베게에 턱을 괴고 이것저것 그려봅니다. 내일 메뉴로는 멸치볶음이 먹고 싶어요. 여전히 2단정도의 도시락통이 딱 좋고요. 다만 계란말이를 넣었던 칸에는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마아아안큼. 그래서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마음의 집짓기를 보여주는<주거해부도감>같은 다양한 분야의 책도 넣을 수 있도록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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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시인선 28
박연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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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처제하고 불렀다』- 멍을 멍으로 두기.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는 상흔의 기록

 


 존재하는 순간부터 사람은 라는 이름과 부모가 부르는 자식으로서의 이름을 갖는다이름 두 개로 시작관계에서 비롯된 이름의 증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아버지는 나를 처제하고 불렀다에서 시인은 주로 세 개의 이름을 산다. 그 이름은 과 애인과 그리고 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약간의 변주만 가한다면 누구나 오래 지지고 있을 이름이기도 하다그래서 시인의 이야기에서-나의 이야기로 오는 길이 무척이나 가까워 보인다그러나 온전한 음악일리 없다는 예감무너진 호칭으로 시작되는 제목을 읽고 고개가 무겁다활인지 톱인지아니면 줄을 다 끊어버리고 스스로 악기가 되어 속을 파내 두드리는 공명일지톤 다운된 보랏빛아마 밝은 색은 아닐 것이라는 친절한 귀띔을 조심스럽게 펴 본다.

 

1. 기우는 관계밀어 올리며 가라앉는 딸

 

호칭은 사람 사이의 추와 같아서 가볍고 무거운 상황을 잡아 소통을 이룬다사람들은 그것으로 관계를 살아간다이러한 호칭이 빠지거나 대체되는 것은 관계의 소멸일 것이다그렇다면 온전한 관계에서 호칭이 엉뚱하게 튀어 오르는 것끝을 벗어나려는 발버둥이라고 한다면 가혹한 그림일까.

 

불현듯 나를 처제라고 부른 아버지에게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불렀다’ 발화의 이후 한쪽에서 무너져 버린 관계를 어떻게 추스릴 수 있을까「뱀이 된 아버지에서 그녀는 말없이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처제가 아닌 것을 들키지 않는다팥죽색 얼굴을 잊고 젊은 나이로 돌아간 아버지, 뱀이 된 말씀을 잠자코 듣는다. ‘눈을 감으렴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나이를 잊어버린 자신을 눈감아 달라는 말씀일까딸의 존재도 잊고 오래 전 비슷한 나이었을 처제를 부른다그렇게 병이 든 몸도 잊고 죽음마저 잊어버리고 싶다시간을 뒤섞어서라도 온전해 질 수 있는 곳을 찾는다아버지 행방이 요원해지는 곳에서 아버지가 아닌 당신으로라도 나아 질 수 있다면나를 알지 못하는 아버지라도 길게 기다리고 싶다.

 

나이를 깎아도 허공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아버지, 나는 그 반대편에서 관계의 시소를 밀어 올린다그러나 호칭이 붕괴된 관계는 내가 서 있는 바닥을 가라앉히는데좀처럼 아버지 내려오지 못하시고 바닥이 둥글게 패인다이 둘레를 기억하기 위하여 시인은 시 곳곳에 아버지를 적는다온몸을 다 흔들어 놓는 절망함이 아버지라는 이름이었다고 고백한다.

 

2. 그늘과 어둠과 애인

 

아버지와 나의 관계보다 나와 애인의 관계는 파괴력의 크기는 몰라도 자주요동할 것 같다서른이라는 나이에는 이 추측에 불과한 이야기를 믿게 하는 혐의가 있다.

어둠 속에서 그의 고환이 시계추처럼 흔들려요/그 흔들림에서 침묵의 율동을 보죠/살랑살랑나를 사랑해줄 것만 같아요’ 노골적이고 대담한 담화로 시작해 우리의 그림자에 상처가 나면싱싱하게 빛이 까져요다시는 아물지 않겠다고 빛이 벗겨져요’ 그러다 고인 빛-그림자으로 나가는 마지막은 그림자에 상처 나는 연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곳은 이미 끝난 미래’ 사랑을 나누는 어두운 장소에서 불이 켜지면서 그림자가 사라진다그림자는 어두운 곳에서 깜깜하게 실루엣만 드러나는 나와 애인의 실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밝아지면서 드러나는 몸은 어두운 모습을 뚫고 나와 색을 가진다안락하고 평화로웠던 어둔 세상을 찢고 실체로 행동해야 할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 갖는 연인과의 유리를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이러한 그림자-그늘의 이미지는 연애의 그늘」 에서도 볼 수 있다. ‘포옹이 오래 고이면몸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연애가 포옹을 하나의 덩어리로 불과하게 만드는가. ‘백 년을 씹어도 삼킬 수 없는 질길, /가죽 같은 시간이 있을 뿐열렬한 잠 속엔 환영이 없다’ 지나도 지나지 않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권태겠다연애의 지리멸렬이라면 더 무엇을 말할 수 있겠나 싶지만  깡마른 유령 둘이 사다리 위에 앉아/,/ 손톱을 깎고 있는 풍경에 입을 다문다죽어버린 관계, ‘어둠을 늙게 하는 연애의 그늘이 서늘타 못해 차다.

 

3. 무엇보다 그냥’ 

 

절망함 둘레를 퍼내다가 가라앉는 관계에서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는 연애의 일말을 내리다가 잠든 호리병바지를 벗다가등의 시에서 혼자 있는 시인을 발견한다요동치는 상황을 벗어나 시인만의 목소리를 듣는다그곳 참 맑아서 쓰여 있지 않은 것처럼 종이 있어도 투명하게 비치는 것처럼 들여다보인다.

당신과 내가 나란히 누워/곤히 잠든 시간들만 따로 모아목이 긴 호리병에 담아놓고 싶다따가운 볕 아래 펼쳐놓고증발할 때까지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맨송맨송한 민낯으로 바라보고 싶다’ 잠든 호리병」 부분

무엇이 더 필요할까그런 시간이 나도 있었다고그것을 다 모아놓고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고백한다행복한 시간을 모아 놓고 그것을 다 흘려보내는 모습 빨간 입술로순정했을까’ 자신에게 물으며 여전히 순정 아니라는 대답을 스스로 메운다그러나 웃다가 그늘을 잃어버린 여자목이 긴 호리병에 넣고 싶은 잠이 참 많아서 언제고 외롭다고 마음 놓고 토했으면 좋겠다당신의 애인은 순정의 색을 물을 닮은 촉촉함이었다고’ 촉감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괜찮지만나 이외의 것들은 괜찮을까걱정하는 밤’ 바지를 벗다가에서 홀로 있는 서른 살 그냥’ 여자를 바라본다누구나가 볼 수 있는 색이라면 순정이 아닐 것이다바지가 갖고 있는 흔적당신이 있었던 자리가 투명해서 순정한 것이다. 다시, 붉은 입술이 전했을 순정을 바라본다당신의 투명을 바라본다어깨가 안으로 다 기울도록 속을 비워내 빈 곳을 울리는 공명줄이 없어도 화음을 맞춘다. 어딘가 비뚤어졌으나 눈감고 듣고 싶은 노래를 덮는다휘청이고 싶은절룩이며 걷는 나의 리듬과 맞는다. 

 

세 개의 이름으로 '누구나'를 살기. 내게도 세 개의 이름이 있어 대체로 번갈아 하루를 산다. 노트 한 구석, 이름을 하나를 적고 기억 하나를 적는다. 무슨 색이냐 묻다가 보라색은 멍이 멍으로 남는 색이라고 다른 대답을 한다. 내 속에 깊게 들어가 피가 고인 것 아니고, 다 빠져서 무슨 자국인지 알아 볼수 있는 것 아니다. 온전하게 부딪힌 순간을 적었더니 온몸이 고른 색이다. 멍을 멍으로 둔다.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는 상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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