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 자네는 매우 영리하고, 빈틈없는 사람이고, 또 상당히 점잖은 사람이기도 하지. 그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주사위만큼 정확하지. 자네는 정말 괜찮은 친구야. 문제는 말일세, 자네에게는 중요한 세 가지가 빠져있어. 첫째 욕망, 둘째 기쁨, 셋째 연민. 요엘, 자네가 나에게 부탁한다면, 내가 세 가지를 한꺼번에 꾸러미로 엮어 주지. 자네가 두 번째 것이 없다면, 자네는 첫 번째 것도 세 번째 것도 없는 거라네. 자네가 처한 상태, 자네는 끔찍한 상태에 있어. 이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네. 이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게. 자네를 바라보고 있는. 난 자네를 볼 때마다 거의 울고 싶다네. p. 166

 

아모스 오즈, 여자를 안다는 것, 열린책들.


 



 

도착 할 때까지 로맹가리를 듣기로 했다. 새벽의 약속. 처연하게 가라앉는 글 아니라, 웃는 가운데 환부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드러났다가 숨는게 보기 좋았다. 환한 아픔 같은 것. 이런 것을 좋아하는 것은 그때마다 너 살아있음을 친절하게 가르치기 때문일까.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너 있음을 알아야 하는 일은 틀리기 쉬운 일기예보나 몇 개의 뉴스와 길 지나쳐 스치는 사람들로 잊기 쉬웠다. 딱딱하고 차가운 사물이 되어가는 심정*. 조금씩 내리는 비는 밤에 가서야 그친다고 했다. 서울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그칠 거라는 예보는 모두 빗나갔다. 어제라면 당연히 내려야 할 곳을 지나서 몇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 지나친 곳이 마침내 내릴 곳이 된다는 것이 어쩐지 웃음이 났다. 좀 전에는 어제 들었던 그걸 또 들었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김영하가 헤더, 하고 부르는 낮은 음색은 이제 로버트를 거의 다 만들었다. 헤더와 콜린이 지나친다면 거의 알아볼 지경이다. 가을에서부터 나는 그들의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아직은 팔이나 다리가 드러나기 좋은 바람이다.

 

'윤오'라는 이름을 두 번 썼다.

 

어제는 무척 오랜만에 입이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이 오랜만에 있었다고 해야겠지.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주 오랫만에 내가 읽어왔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고 그때마다 분명히 혼자였을 공간에, 햇빛이나 바람이 지던 풍경이 늘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던 일이라고 해야겠지, 그때 일고 지나갔을 통증을, 지금은 다 잊었을 그것을 다시 떠올려 위로하는 어제가 있었다고도 해야겠지, 지금 들리는 낯선 목소리가 그랬던 나의 예전에 들어왔던 일이라고도 해야겠지만 그런 건 말하지 않고 다만 '즐거웠다'고 간단히 전했다. 그러나 매일 내렸던 지하철을 지나고, 내려서 그곳에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한 세기만 어긋났더라도 불가하다는 일을 알고 있을런지. 비슷한 공간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비슷한 시간이 아니라 같은 시간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이렇게 말이다.

 

언젠가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죽었을 것이라던 여자를 1/10으로 그렸던 남자가 들려준 말을 전한다. 그는 그 관 속에 자신이 누워 있고 누워있는 여자가 자신을 그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했다. 다만 그날을 지나가는 시간이 자신과 그녀를 이렇게 세워두었기 때문이라고도. 삼단 같던 머리칼과 희고 둥근 손톱, 어긋난 뼈들은 수백년만의 바람을 맞으며 슬쩍슬쩍 흔들렸다고 했나. 들리지 않는 몇 마디를 건네고 듣지 못하는 말 몇 개를 간신히 주우며 여름 몇 주를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그를, 생각한다. 그런 만남을 비껴서 어제 우리는 ''을 나누었으니, '그날 같이 있음'에 대한 긴 말을 이렇게 쏟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이근화, 짐승이 되어가는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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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9-13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봄밤 님 문장 참 달달하고 쓸쓸하니 좋군요.

봄밤 2014-09-13 22:40   좋아요 0 | URL
아, 곰발님 가을이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9-14 00:42   좋아요 0 | URL
과하지 않은 감정, 담담한 어조, 쓸쓸한 서정'을 고루 섞을 줄 아는 문장력으로 보아 소설을 쓰시면 기존 작가보다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작가가 탄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끔 봄밤 님 문장 보고 반하고는합니다.

봄밤 2014-09-14 01:32   좋아요 0 | URL
곰발님. 말씀 중 '가끔'이라는 단어가 참 좋습니다. 무언가 쓸 수 있다면, 곰발님을 잊을 수 없을거에요.

다락방 2014-09-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은 저의 패이버릿. 여기에서 만나는 것이 아주 반가우면서도 만날 곳에서 만났다는 생각도 들어요. 헤더의 삶은 결국 제가 추구하는 삶이에요. 봄밤님, 줌파 라히리의 [지옥-천국]은 읽어보셨나요?

봄밤 2014-09-13 23:2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팟캐스트가 닳는다면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벌써 사라져서 없을거에요. 헤더의 삶이 추구하는 삶이시라니, 쓸쓸해요. 그런 삶은 이렇게 멀리서 봐도 아픈건데. 아픈만큼 가까워서이기도 할까요. 읽어보겠습니다. 아직, 아직이에요.

rendevous 2014-09-1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가 되고 싶게 하는 글입니다 ^^

봄밤 2014-09-15 16:01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까, 기립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예감을 모른 척 하는 마음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침에 들어온 다네다. 오자마자 쓰러져 자는 다네다에게 메이코는 유성매직을 든다. 다네다의 얼굴에 가면 같은 그림을 그리고 깔깔, 재밌다. 스물네 살. 그들은 6년을 만났고, 동거 1년 차다. 메이코는 구질구질하기로는 세계 제일인 그냥 그런 회사에 다니고 있고 다네다는 신문사에서 그림을 그린다. 다네다는 생활을 일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급여를 받는데. 이들이 동거하는 이유는 둘이 떨어진 시간을 견딜 수 없는 '사랑'을 위해서라기보다 둘이 함께 있지 않으면 제대로 지속될 수 없는 '생활'을 위함이다. 물론,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미래...? 를 생각해 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식사 당번은 정할 수 있다. 카레와 생선구이 카레, 다시 생선구이와 카레로 묘하게 바뀌는 날들에 함께 앉을 수 있다. 평화로운가. 그러나 일상의 '평화'는 무엇이 일어날리 없다고 확신하는 상태다. 이들의 생활은 평화롭다는 포장아래 무엇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모른척한다. 다만 그 속에서 익숙한 기쁨을 느끼는 것을 주저하지는 않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라고나 할까_다네다

 

가면을 모르는 다네다, 가면을 보는 메이코

아침에 들어온 다네다는 점심 무렵에도 자고 있다. 조퇴를 하고 돌아온 메이코는 오늘이 얼마나 좆같았는지, 그런 건 말하지 않는다. 생각할 뿐이다. 이 회사의 어른들은 별 것도 아닌 일로 호통을 치며 체신을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희롱을 일삼는다. 함께 다니는 후배는 (이걸 패줄 수도 없고)엿을 먹인다. 도대체가 재미라는 것이 없다. 이러려고 어른이 되었나. 혼자 중얼거린다. 다행히 다네다는 자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본다. , 회사 그만 둘까...미안해서 푸념이라도 하지 못했을 말. 회사를 그만 두고 싶다는 말은, 생활이 되지 않아 함께 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다네다를 출구 없는 곳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러나 자고 있어야 할 다네다는 갑자기 일어나 우스꽝스러운, 가면이 그려진 얼굴로 대답한다. '그만 둬. 정말 네가 그만 두고 싶다면.' 메이코는 눈이 커지며 놀란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메이코는 다네다를 껴안는다. 다네다라고 생각하고 싶은 다네다를, 껴안는다. 그리고 다음 날 메이코는 회사를 그만 둔다.

 

가면이 지워진 풍경

다음 날 함께 밥을 먹으며 메이코가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말을 듣고 다네다는 화들짝 놀란다. 어떻게 하려고? 우리의 생활은, 돈은, 빗발치는 물음이 다네다를 조른다. 그러나 메이코는 즐겁다. 모아둔 돈도 있고, 무엇보다 다네다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다네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생각도 못했을 용기가 다네다 자신을 누르고 나왔던 것을 말이다. 그가 잠결에 일어나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면을 잘 쓰는 에스키모족에 대한 연구를 보면 가면을 쓰는 일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고, 가면이나 역할은 쓰는 사람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보는 관중의 집합적 힘의 확장을 뜻한다고 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다네다 자신이 원해서 쓴 가면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인 메이코에게 얼굴을 무방비하게 내줌으로써 그려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스물네 살, 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 꿈이나 현실은 모두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멀다. 생활을 위한 아르바이트는 답이 없고 그냥 다니는 회사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할 수도 없게 한다. 꿈이 없는 삶. 답답함에 몸에 독소가 쌓이고 시퍼런 뿔이 나온다. 감자의 먹지 못하는 싹 솔라닌. 메이코는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다네다의 얼굴에 '가면-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신'을 그린다. 자신이 원하는 말을 겨우 하고 그에 합당한 대답을 듣게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말을 발화한 이를 다네다 같은 인물이라고 '혼동'해 버린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세수를 하고 가면이 지워진 다네다는 '그랬다'는 설명에 경기 같은 반응을 보인다. 어느 인류학자의 논의를 참고해 보면 다네다는 '가면'으로 자기 자신을 벗어났으며(그러나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니며) 가면이 보여주는 ''은 가면을 쓰는 사람의 확장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메이코'의 힘이 확장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감자에 싹이 나서...이파리에 감자감자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장난스러운 일로 이날은 지나가지만 이들에게 변화를 꾀는 사건으로 중요하게 기록된다. 이렇게 다네다 자기가 자신을 벗어나고 그것을 종용한 메이코의 들뜸이 일상을 채워갈 때 한쪽 베란다에 쌓인 감자는 소라닌이라는 독을 가진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땅속의 감자는 과연 알맞게 익었지만 밭을 떠나자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모르며 혼잡한 도쿄, 빌딩과 빌딩, 길가와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다. 무엇이 되기 전에 빛을 받으면 먹을 수 없게 되어 쓸쓸하게 버려지는 이 작물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 자신을 뜻하면서, 만화의 첫 장 메이코의 고향집에서 한 박스 날라져 온 '실제' 생활에 곤란함, 고민거리에게도 작용한다. 박스를 보며 메이코는 턱을 괸다. 이걸 어쩌지. 이걸 어쩌지, 자신을 향해 발화된 말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을지 모르면서 말이다.




 길이 막혔잖아?


입을 다물게 만드는 말

대학시절 밴드를 했던 다네다는 곡 하나는 끝내주게 쓴다는 세간의 평가를 모른 척 하고 자신의 재능이나 욕망을 그저 '취미'로 포장해 숨긴다그래서 다네다의 꿈속에서 넥이 없는 기타바디만 남은 기타를 등에 지고 걷는 것은 웃음보다 안타까움이 출몰하는 것이다넥이 없는 기타를 지느라 손이 묶여 버렸다연주를 할 수 없는 미래를 들고서그의 손은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자신을 배고프고 가난하게 할 뿐이다그런 건 재능이라고 할 수도 없고꿈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어른스러움', 아직 어른이 아닌 이들이 느끼는 어른스러움을 보일 수밖에 없는 도쿄에서의 생활.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묻는 것이 때로 사치스러운 상황에 있는 이들의 마음이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때로는 폭력적인 마음들

메이코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아직 모르지만 다네다가 하고 싶은 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 다네다에게 음악을 다시 하라고 권유한다. 때로는 이러한 권유가 폭력적이라는 것을. 생활에 대해서도 자리를 빼앗긴 다네다는 이제 꿈이라는 약점, 꿈이라는 보기 좋은 이름을 흔드는 메이코, 흔들리는 다네다. '어떻게든 될 테니까' '젊으니까' 다시 할 수 있으니까. 요금이 밀려서 가스가 끊기고 찬 물이 나오고 에어컨이 고장 나는 여름을 넘기며, 다네다는 함께한 친구들과 녹음을 하기로 한다. 죽어라 해보고, 안되면 이번이 마지막이다. 씨디를 보내서 데뷔를 하자.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로 포기, 라는 다네다의 말. 6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 베이스와 가업으로 물려받은 약국을 하는 드러머, 모두 삶이 그와 같기는 마찬가지다.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다네다가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네가 움직인다면 어디든 가야지. 여름날, 이들은 치기와 열정이 섞인 노래를 부른다.

 

메이코와 다네다


소라닌, 자신에게 보내는 레퀴엠

그날 이후 메이코가 다네다의 기타를 치는 것은 이 둘을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은유로 이해된다. 무엇을 위해 태워야 할지 모르는 열망을 갖고서,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가면을 그려 나의 욕망을 대입하고, 생활로서의 끝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모자라서 마지막 남은 한 자락 꿈에게까지 다네다를 밀어붙이고 말았던 비극적인 결과다. 이 둘은 하나인데, 비유적으로 한 몸이라는 것이 아니다. 결코 두 번 살 수 없는 청춘의 두 얼굴을 연인이라는 두 사람에 화한 것이다. 애인의 죽음 이후, 자신이 꾸릴 수 있는 현실을 되살기를 거부하고 메이코는 애인의 꿈을 집어 든다. 한번도 쳐보지 않았을 기타를 부르트게 치면서 노래를 한다.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위해 던져진 이별의 노래나 다름없는 가사를 부르며 메이코는 마침내 무대에 서는 것을 목표 삼는다. 소라닌은 다네다가 메이코에게 보낸 미리 쓰여 진 이별 노래가 아니라, 자신과 메이코와, 베이스와, 드럼에게 보내는 청춘과의 이별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싹을 언제까지 틔우는지 자신을 다 소진해 버리고 마는 바보 같은 젊음이 돼버린 우리들, 헤어질 수 없는 끈질긴 날들, 퍼렇게 썩어버린 20대를 노래로 부르며 마음과, 몸을 버리고 가지 못하는 자신에게 떠나보내는 '레퀴엠'이다.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짙은 보라색의 날들에게

그래서 비로소 메이코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이 노래는 내가 서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불리고 있다. 스물세 살, 메이코와 같은 나이일 때 이 책을 처음 보았고 지독한 우울이 밀려왔었다. 일 년에 딱 한 번만 읽겠다는 약속을 두고 책등을 뒤로 꽂아 놓았고 매년 나이를 먹지 않고 똑같은 어리석음과 똑같은 죽음을 반복하는 이들을 봐왔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2권이 없다. 1권만 읽고 쓰는 리뷰가 미완성임에 분명할 청춘을 대변이라도 하듯 라임이 맞아든다. 비로소 이 책을 보고 무엇을 쓰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내가 그곳을 나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수차례 여름마다 읽었던 기억을 되살려서, 아픔이 점점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을 문득 '아프다'고 생각하면서, 무엇을 하지 못했던 나의 이십대를 연민하지 않고 나를 믿지 못해 내게서 물러나고 당신에게서 물러났던 나를 수치스럽게 여기면서, 기울고 멀어진 그림자에게 전한다. 소라닌. 징그럽게도 나를 다 뒤덮었던, 다른 감자를 키워낼 수 있을 것처럼 속이며 자랐으나 실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짙은 보라색의 날들에게 말이다.

 


*클라이브 갬블, 『기원과 혁명』, 사회평론. 142쪽 요약 발췌.

#소라닌1,2는 영화가 개봉된 후, 개정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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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언니, 이것 좀 들어요. 이거 비가림 포도에요. 


정사각형 락앤락통을 연다. 경쾌한 소리. 방울토마토, 포토, 오이, 매주 싸오는 과일이 싱그럽다. 점심이 지나고. 투명한 통 속에 세 알, 네 알 가지를 낸 포도가 서늘하고. 오물거리며 씨를 씹으며 맛있다는 탄성이 여기저기 울린다. 그속에 그녀는 비가림, 비가림. 중얼거리며

그런데


비가림이 무슨뜻이야?

_이거 비를 가려서 비가림이라고 해요. 왜 포도는 노지에서 자라잖아요. 시설로 그 위를 덮는거죠.


아. 


_달지요?


으응이라고 얼버무리며 그녀는

그럼, 여기 올 떄까지 비를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던거야?

_그렇지요.


그건, 좀 슬프네.


대화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


비를 한번도 맞아본 적 없는 포도는 단맛과 또 설명할 수 없는 몇 가지 맛을 갖고 있어서 

무심하게 포도를 입술로 깨무는 소리는 도로에 동글동글 맺히는 햇빛처럼 상해갔다. 


통통, 동생은 쾌활한 목소리를 낸다

_뭐야, 이런 소린 또 처음이야. 그냥 맛있게 먹어요. 비가림이라니까.

맛있다는 소리. 홀쭉해서 쌓이는 포도 껍질. 투명한 락앤락통 거무죽죽하게


대답을 주춤하는 손, 그녀는 눈빛 으스러트리며 동생과 맞춘다. 맛있죠? 그렇죠? 거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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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9-0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봄밤이라는 닉네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싱그런 글이네요. 글이, 읽는동안, 맛있었어요.

봄밤 2014-09-05 16:06   좋아요 0 | URL
맛있으셨나요, 다행이에요 다락방 님. 그냥 조금 이상한 대화였는데. 맛있게 봐주셨어요,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두 권은 읽기 힘듭니다. 그러나 두 권은, 두 권의 의미가 있겠지요. 

책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책소개를 조금 보니 알아야 할 것 같아요.


프랑스 북부의 한 탄광촌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과 그들의 저항, 

투쟁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연주의 문학의 걸작으로, 

노동자계급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소설이다.


자연주의 문학, 걸작, 그런것 다 빼고도 남겨진 단어들에서

책에 그려진 이야기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을 이 소개를. 지나칠 수 있겠어요.

 















천명관의 힘! 제목이 어쩐지 땡깁니다.

고래의 꿈틀대는 힘이 어떻게 화했을까요.
















미국 최초의 SF 소설이라고 해요. 인문서 같은 외양에,

한길사 그레이트 북스로 혼동할 것 같은 표지,

설명을 살짝 보니


자본주의가 사라지고, (...)

2000년의 사람들은 평등하게 교육받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45세가 되면 노동의 의무를 모두 마치고 온전히 삶을 누린다.


역시, SF소설이 맞는 것 같군요. 
















전작을 재밌게 봤어요. <골든 슬럼버>, <집오리 들오리의 코인로커> 영화로도 짠했어요.

근데 그건 그렇고, 표지가 왜 이렇게 매력있지요? 그냥 이유없이 보고싶어요.



그리고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

이것만으로 충분히 매력있는 제목과

기대하게 하는 '이름'들

이름들. 나도 그런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늘어나는 가명과, 분화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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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devous 2014-09-0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르난두 페소아 는 소설이 아니라서 선정되기 힘들지 않을까요? ㅜ 순수하게 추천하는 의미에서 올리신 거라면 상관 없지만 ^^ 페소아 애정하신다면 세계적으로 공인된 페소아'빠' 안토니오 타부키가 쓴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문학동네 여름호에 짧게나마 번역돼서 읽어봤는데 좋더라고요 ㅜ '오마주'란 거 참 좋은 것 같아요 ㅎㅎ

봄밤 2014-09-01 17:37   좋아요 0 | URL
아아, 그렇네요! 소설 신간 안에서 찾았었는데, 알지 못하고 골랐던것 같아요. 오일동안 변경을 가늠해봅니다. 윤스리 님 설명 들으니 환해지네요!

봄밤 2014-09-0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계간지 소식이라니, 고맙습니다 문학동네라니 얼른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ㅎㅁㅎ이름들, 기억할게요. 이렇게 말씀으로 들으니 훨씬 가깝게 기억됩니다.

2014-09-01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1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2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2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2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2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2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2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3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3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중한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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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의 행방-신중한 사람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설명할 수 없다그럴만한 능력이 없거나의지가 없거나간혹 둘 다거나그래서 다만 '어쩔 수 없이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때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가 모여서 결국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 볼 때가 있다. (천천히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씀해 보세요설명을 하려고 하면 막상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고그래서 풀게 되는 한 토막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기 쉬워서 맥이 풀린다. (그런 호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좀 더 객관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나 젠장자신에게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대체로 억울함은 여러 곳에서 도착한 불가피함이 모여 만들기 때문에 손 쓸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그는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가장 먼저 버리거나 포기해야 할 것을 끝내 간직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되는 일에 실패한다그것만은 늘 성공적이다.

 

<신중한 사람>은 그들의 삶이 "왜 그렇게 됐나"를 말한다논리학의 썰이라도 푸는 듯 그렇게 되었다를 '설명하는 중에 '그'의 큰 잘못이 그다지 없다는 점이 잘 드러나 고통스럽다. (결론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자연스러운 가운데 부자연스러운 ''가 있을 뿐이라는데그렇다면 이런 문제 제기는 어떤가그의 부자연스러움 가운데 자연스러운 바깥이 어째서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바깥이 자연스러움이 정당한 나머지 그에 반하는 이들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 버리고그것은 그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 소설의 역할은 무엇인가. (응원일까요지친삶에 대한?) 예상했다시피 그런 건 하나도 없다그렇다고 비꼬거나 조롱하는 것도 아니다다행이라고 해야 하나그저 보여줄 뿐이다더 잘 볼 수 있도록덕분에 독자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어디에도 없는>을 읽으며 금기의 질문을 하나 생각했는데비웃음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이 사람은 네이버도 안하나'였다. ‘는 비자 발급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비자 발급 얼마나 걸리나요"를 한 번 물어보지 않는다용감하다고 해야 하나언제 나올지나오기는 할지 모르는 비자를 순진하게 '21일 후에 나온다'는 직원의 말만 듣고 월세방을 정리한다그리고는 하루에 만원하는 여관방에 들어가서 3주를 기다리기로 한다이해할 수 가 없다그래서 당면한 문제는 당연히 '비자가 나올지 모른다'는 거다비행기표도 예약만 해놓고 발권을 하지 않은 상태여서 언제 돈을 넣을거냐취소해버린다 라는 독촉문자가 날아오고 어떻게 된 일인지 유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이국의 외삼촌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혼신을 다해 기다리는 일을 하고 있는유를 이상하다고 여기는 나의 시각이다바깥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역시 바깥에 길들여진 나의 시선이다그러나 의 사고는 흠 잡을 데가 없다비자를 신청했다비자는 21일 후면 나온다바로 떠나기 위해 집을 정리했다흡사 코끼리 냉장고에 넣는 것 같은 방법이지만 이것만 놓고 보자면 잘못을 딱히 꼬집을 수는 없다.

 

외삼촌이 우려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집을 정리했다는 말부터떠나기로 한 수단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거주를 내 손으로 치워버리는 것은 무슨 짓이냐는 거다미리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고 유의 신중하지 못함을 걱정하지만 그러나 코끼리 냉장고에 넣는 방법처럼 외국에 나가기 방법을 밝게 이야기 하는 그에게 (그리고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나 버린 후에별로 해줄 말이 없다굿럭이라고 빌어주는 수밖에그는 자신의 시계를 바깥과 맞출 줄 몰랐고읽을 줄 몰랐던 것 같다더불어 자신의 것을 읽을 수 있는지도 의심이 든다자신의 돈을 잘 챙겼으며 불안하나마 여관에서도 요식을 잘 해결하고 있다는 변호를 해보지만. ‘3주라는 일시적인 시간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닌지.

 

시계를 맞추지 못하는 유의 생태는 끊임없이 똑딱이며 나가는 세계와 불화한다다음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난 벌써부터 여기 없다고요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난 여기 없는 사람이라니까그런데 왜 이래있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이래." 비자센터의 직원은 끄떡하지 않았다누구라도 흔들릴 만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더 기다려보세요다른 방법이 없어요." p. 245

 

그의 몸은 벌서 외삼촌 집에 가 있다비행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곳에 말이다그러나 그가 가고 싶은 곳과 도착할 곳이 같겠는가그의 시계는 그에게만 통용된다그래서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일 없는 자연스러운 바깥과 대립하는 것이다유의 외삼촌이 부르는 초밥집과 그가 일해야 할 생각 속의 초밥집이 다를 것이 뻔하다후에 일어나는 일은 더 기가 막혀서 풀어갈 방법은 마땅치 않다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티켓을 흔들면서이미 날아가 버렸다는 것처럼 안타까운 그를 바라보면나의 시계를 생각하고더불어 바깥의 시계를 떠올리고차이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포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생각한다당신들은 '여기는 이런 곳입니다'라는 설명을 들어 본 일 없이 이곳에 왔다. 그렇게 맞춰서 돌아가기로 한 거대한 침묵 앞이다들어 본 적 없는 법칙에 나를 넣고 잘 갈려 세계에 잘 화되는 것이 훌륭한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좁은 입구에 줄을 선다바깥으로 튀는 콩을 잡아다 다시 입구에 집어넣는 늙은 손이 잽싸고.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아뿔사, 어처구니*가 없다. 돌아가길 멈춘 맷돌 위로 햇빛이 길다.

 

 

어처구니 맷돌의 손잡이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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