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를 기록하다 - 침몰·구조·출항·선원,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 기록
오준호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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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물'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노란 리본'으로, 

얼마나 쉬운 이미지로 그날을 기억하고 있나. 혹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말하는 것만으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이미지와 말은 기억에 가벼운 포를 떠낸 것 뿐이다. 그 포에서는 잔인한 실상까지 떠지지 않는다. 무거우니까, 무거운 것을 견디며 말해야 하고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의 무게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가져가기 쉬운 지옥만을 진짜인 듯 간직하며 그 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사고 이후에는 죽은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한 번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지 못했습니다. (...)

처음으로 사우나에 가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학생들이 차가운 물에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해서

손발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 유가족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배 위치를 잘 알기 때문에

끝까지 그곳에 남아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면, 이 길로 나오라고 말만 하였다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 죽을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화물 기사 김동수]

(선원 재판 5, 증인 신문, 2014.7.23)

 



사람들은 차가운 물 속에 가라 앉았고, 삶 속으로, 뭍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나 나는 씻는 것이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씻는 것이 아프다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씻을 때 아이들이 생각난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손 발이 찢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다. 구체적인 고통을 읽는다. 실제로 직접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그 연원이 무엇일지 미루어 볼 수 있다는 것은.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사건이든 이야기는 점점 투박해지고 기억은 흐려진다. 이것 보아라. 배가 침몰했고, 구조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배라는 것, 증개축에서 30톤 정도 좌현이 무거워졌고 콘베이스가 없는 D데크, E데크에도 평소 컨테이너를 실었으며, 화물을 많이 싣기 위해 정상적인 고박을 하지 못하게 한 청해진 해운은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배에 탄 아이들. "저는 법을 잘 모르지만 그것은 (울먹이며) 정말 어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원고 신우혁 학생)의 목소리를 들었던가. 이러한 정황은 사정없이 시간이란 못을 내려친다. 기억에 붙들리고 박히고 만다


"더 구하지 못해서 죽을죄를 지었다"는 말을 다시 읽는다. 그 역시 침몰하는 배에 있었다. 먼저 탈출할 수 있었으나 배가 잠기기 직전까지 구조 활동을 하다가 탈출했다. 이어지는 다른 문단의 글을 보자. "문제없이 잘 되고, 규정을 잘 모르는 상황", "갑을 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관행", "책임은 상대방에게 있으며" 라는 말이 내내 이어지는 책 속이다.

 

<세월호를 기록하다>150여일 동안 이어진 재판을 기록을 묶었다. 이것으로 법정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나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받게 되었다. 물과 배에 대해서 알지 못하더라도 다음장에서 알 수 있도록 상세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빼곡히 적혀 있고- 그것은 어떤 '이름'이 말한 사실이며 그것끼리 아귀가 잘 맞는다. 그런 일들이 세월호를 움직였다. 죄가 무수히 쪼개져 원래의 모습을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조각났다. 지난 시간은 조각을 맞추는 것은 고사하고 버리는데 가득했던 시간들이었다. 7시간의 행방과 1주기 되는 4월 16일- 그 먼나라로 떠나는 이유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읽고 이미지를 더 또렷이 가져갈 것, 구호를 더 말하기 어렵게 가져갈 것. 해서 떠올리는 것과 발화하는 것에서 아픔을 느끼게 될 것. 노란 리본은 '노란색'이 수식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수심이 차오르는 중 고통스러운 사람을 떠올리는 표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구호는 자본과 관행에 위협 받는 나의 판단, 나의 일에서 밀려나지 않고 ''가 있겠다는 다짐으로 읽고 싶다.

 

"책임을 져야 할 결과에 기여한 이들이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하여 정치적 책임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에서 일말의 책임도 없이 배상과 보상으로 마무리하려는 이들의 분투만 떠올려서는 안된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정치적 책임은 국회에만 있지 않다. 광화문을 가득 채우는 이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그것을 규명해야 하는 책임을 스스로 부여 받은 사람들이다. 선택 받은 것 아니며, 이러한 책임은 누군가가 내려 주는 것도 아니다. 나라가 시민을 구하지 않은 사건에서 -'시민'인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적인 책임'을 지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아이리스 영.

본문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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